- 아삭!
그 청량한 소리가 한식이 머무른 공간에 큰 파동을 그리며 멀리멀리 흩어가는 것 같았다.
다은이 벌어진 입술을 차마 다물지 못 하고 멍하니 돌처럼 굳었는데, 별안간 한식의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더라.
이 고요한 적막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정상덕이 난입하는데.
- 띠띠띠띠띠. 뽀로롱.
“어, 오늘 밖에 날씨 좋데. 지끔 시험 연습 중이가?”
외투를 벗으며 상덕이 부엌으로 다가섰으나 다은과 한식, 그 누구도 상덕과 눈을 맞추지 않으니.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은 상덕이 재차 되물었다.
“몬들었나? 느덜 지끔 모하느냐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상덕을 바라보는 백한식과 정다은.
“모고? 둘다 얼굴은 씨뻘게가가 모하노?”
그 걸걸한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두 사람이 동시에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짜, 짜장면!”
“아버님 오셨습니까.”
“크흠. 그랴. 짜장면 내도 하나 말아도.”
상덕이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지켜보며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허허. 예기치 못한 스킨쉽을 겪은 남녀가 어찌하야 자연스러울 수 있겠는가. 허나 지켜보는 눈빛이 여자의 아버지일 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법.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왜 자꾸 시선은 서로의 입술로 향하는가.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엉켜 허공을 허우적대는가 싶더니, 한식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괜히 본인의 윗입술과 아랫입술만 맞닿아도 그 감촉에 마음이 찌릿찌릿했으니.
두 사람의 달아오른 얼굴은 쉬이 돌아오지 못 하고, 묵묵히 자신의 시선을 상대의 입술에서 거둘 뿐이었다.
한식이 유려한 손놀림으로 반죽을 마무리 하고, 일정한 두께로 밀어내는 시범을 보였다.
대화도 없는 부엌에서 면발을 썰어내는 한식의 칼소리 만이 공백은 메웠는데.
“꼬봉, 타이머 해줄테니까 면은 이걸로 사용하도록.”
“네.”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다시 수툴로 가서 앉는 한식의 모습이 상덕의 눈엔 믿음직한 요리선생 같기만 하구나.
‘이야. 말로만 요리수업이라캄서 시시닥 대고 노는줄 알았더마, 헐때는 지대로 하는갑네.’
상덕이 집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둘의 입술이 닿았다는 상상은 꿈에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시작!”
한식의 구령에 맞춰 다은이 허둥지둥 짜장면 만들기에 돌입했다.
입술 사건 때문에 머릿속이 새하얗기만 한데, 이대로 괜찮을까?
어허라. 다져내야할 생강을 편으로 썰질 않나. 고명채로 내어야 할 오이를 깍뚝썰기 하질 않나. 미처 일하지 못하는 못난 뇌 때문에 그 조막만한 손이 열일을 해보이고 있었다.
머리가 안 돌아가면 손이 고생한다던가?
이를 지켜보던 한식이 결국 한소리 뱉고 말았다.
“불량!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깜짝 놀란 다은의 눈동자가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 맑아졌다.
“꼬봉, 시간 지나간다. 서둘러.”
아아, 실기시험을 목전에 두고 이렇게 넋 놓을 새가 없다!
다은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더니, 식탁에 앉은 아빠를 떠올렸다.
그토록 반대했던 딸의 요리를 응원해주고 있는 아빠, 오래도록 품어왔던 자신의 열망이 진심이었단 것을 꼭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 제대로 실력을 선보여야 한다.
연습한 대로, 배웠던 그대로, 먹는 사람이 행복해질 요리를 만들겠다는 그 다짐.
도마를 두드리는 다은의 칼질이 다시 정상궤도에 올랐다. 리드미컬한 박자에 맞추어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정다은.
한식은 다시 집중하기 시작한 다은을 보고 아무도 몰래 숨을 뱉었다. 그리고 타이머를 흘끗 보더니 미소 짓는데.
넉넉한 기름에 춘장을 볶는 일은 언제나 다은에게 있어 어려운 숙제와도 같았다.
적당한 때란 언제일까. 적당한 온도는 어떤 때일까. 혼란스러워 하는 다은의 눈동자를 한식이 안심시키는데.
“꼬봉, 잘 하고 있어. 자신감 갖고 해.”
“네!”
그래. 자신의 요리에 확신이 없으면 소용없다.
정다은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기름이 잘 먹은 춘장을 건져냈고, 그 고소한 향이 모두에게 확신을 던진다.
‘이 짜장면은 맛있을 것이다.’
용기와 확신이 있는 요리사의 손놀림을 본 적이 있는가?
정다은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할 일을 정확하게 꿰고 있는 것 같았다.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가루를 털어내며 생면을 삶아내는 모든 과정들이 거침없었고 매끄러웠으니.
아아, 실제 시험 때도 이와 같다면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리라.
잘 달궈진 팬에 기름이 둘러지면 준비된 재료들이 하나둘 다이빙을 시작한다.
자글자글 침샘을 자극 하는 그 소리와 코끝을 찔러오는 기름향이 주린 배를 때려올 때, 춘장의 검은 빛깔이 팬 위에서 헤엄치는 재료들을 감싸 안는다.
아아, 짜장은 귀와 코 뿐 아니라 눈까지 즐겁게 하는 향연이 아니겠는가. 다은은 저도 모르게 애봉반점의 오픈 주방화를 상상해 보았다.
이제 춘장 옷을 둘러 입은 검은 재료들 틈으로, 물과 전분의 공격이 가해졌으니 바글바글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걱정 마시길.
싸움 끝에 남는 것은 요리사의 승리 뿐일테니.
적당한 농도와 고소한 향기.
완성된 유니짜장 소스가 따뜻한 면 위로 스르륵 미끄러지며 파고들었다.
윤기나는 면 위에 기름진 소스, 그 위에 올려진 오이채.
오이채.
오이.
오이….
잊고 있던 아삭! 소리가 떠오른 다은이 양볼을 붉혔고, 때를 맞추어 백한식이 타이머를 들고 외쳤다.
“세이프! 합격이다.”
다은이 열이 오른 얼굴을 손부채질 했다.
한식이이 갓 만든 짜장면을 식탁 위에 올리자, 상덕이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좋은 비주얼의 짜장면이었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은 기분에 다은이 만족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덕의 젓가락이 면과 소스를 적절히 섞어 각자의 그릇에 나눠 담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취해보는 다은의 짜장은 그런대로 훌륭했다.
정다은이 아빠 몰래 만들었던 흉측한 배달 짜장은 이제 그만 잊어야겠다. 백한식이 내심 뿌듯한 표정으로 다은을 바라보았는데.
딸의 짜장면을 처음 맛본 상덕이 엄지를 치켜 올렸다.
“왐 마, 정다은이 쫌 하네!”
“실전에서도 방금처럼만 하면 합격할 테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고, 다짐육 한 번 더 다져내면 도마 청결 잊지 말고, 그리고 양파 썰 때 손 조심하고….”
“마, 길게 말 할거 없이, 잘했다 한마디면 되는기라.”
한식이 쏟아내는 별별찮은 조언 사항을 잘라버리는 상덕.
천상 딸 바보가 아니던가.
한식은 다은을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
다은은 쑥스러운지 홍조를 띈 볼을 살풋 숙이며 고개를 가만 끄덕일 뿐이었다.
***
방송국 로비에 백한식이 서 있었다.
시각을 확인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람을 설레게 하는지, 로비를 지나는 직원들마다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는데.
오늘 스케줄이 있는건가, 아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인가.
저 완벽한 남자는 등장만으로도 이토록 분위기를 술렁이게 만들지니.
아! 멀리서 한식을 향해 뛰어오는 이가 보인다.
“여어!”
“아직 시간 괜찮습니다, 형님. 안 뛰어 오셔도 됩니다.”
이현복 이었다.
“어우, 녹화 쪼금 늘어져서 늦을까봐 긴장했잖어. 한식아, 우리가 미리 가서 기다려야지!”
“네. 형님, 그거 직접 포장하신 겁니까?”
“우리 와이프가. 이쁘지?”
현복의 손에는 화려한 꽃 리본 장식을 단 선물 상자가 온몸으로 고귀함을 뽐내고 있었으니, 무얼까?
두 사람이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새, 나피디가 이를 알아보고 재빨리 다가왔다.
“오! 마침 두 분 잘 만났네용!”
“안녕하십니까.”
“아, 나피디님 오랜만입니다.”
한식이 고개를 숙이자 현복이 인사를 건넸고, 마음이 급한 듯 나피디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 이번에 신작 하는 거 얘기 들으셨나요?”
“아니오.”
“처음 듣는 소린데?”
“아, 두 분 다 우리 프로 고정 해주시면 좋겠어서! 내가 쩌어기서 보고 막 뛰어 왔잖아요.”
“나피디님 이니까 역시 예능?”
현복이 가볍게 묻자 열정적인 눈빛으로 나피디가 답했다.
“푸드 서바이벌 프로그램! 이번에 [중식대첩] 이라고 다음 달에 새로 시작하거든요? 두 분이 심사 봐주시면 딱 인데!”
“오, 중식! 좋네요.”
긍정적인 현복과 달리 한식은 고개를 저었다.
“아, 저는 다음 기회에….”
“또 꽝이야? 다음 기회? 아잉. 한식씨, 나 작품 들어갈 때 출연해주기로 분명히 말했잖앙.”
나피디가 앙탈을 부려보았자, 한식의 미각이 되살아나기 전엔 시식도 심사도 절대 안 된다!
“죄송합니다. 나피디님하곤 다음번에 꼭 같이 작업 하겠습니다. 이번엔 조금 곤란해서….”
현복이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나피디를 달랬다.
“한식이가 지금 연애하느라 푹 빠져서 바빠요. 이거 봐요. 이거 선물도 한식이 애인 거라고. 지금도 만나러 가는 길이거든.”
선물상자를 들어 올리는 현복의 모습에 나피디가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연애만 하는 거 아냐? 한식씨, 나 쫌 섭섭할라 그래.”
“죄송합니다. 언제든 제가 변동사항 생기면 전화 드리겠습니다.”
아쉬워하는 나피디를 뒤로 하고 현복과 한식이 다은에게로 향했는데.
***
제법 차가워진 날씨에 다은이 발을 동동대며 실기 시험장으로 걸어갔다.
“꼬봉! 여기!”
마스크로 중무장한 한식이 멀리서 손을 흔들었는데.
아아, 그 옆에 선 사람은?
설마!
“이현복 셰프님?”
다은의 눈망울이 일렁일렁 댔고, 자신이 보는 환희에 찬 절경을 믿을 수 없었는지 가슴을 부여잡은 모습이었다.
“다은씨, 내가 선물 주고 싶어서. 아, 물론 한식이가 부탁해서 준비한 거야. 백한식이 주는 선물이지만 내가 꼭 전달 해주고 싶더라고.”
저 포근한 미소, 다정한 목소리.
절대 꿈이 아니리라.
다은은 제 볼을 꼬집다 말고 감격에 겨워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선…물이요?”
‘이현복 셰프님, 셰프님의 존재 자체가 저에겐 선물이랍니다.’
미처 내뱉지 못한 지독한 팬심이 다은의 가슴을 쿵쾅대게 했는데.
이현복이 건넨 꽤 커다란 선물 상자엔 리본이 예쁘게도 장식되어 있었다.
아아, 셰프님이 주신 선물을 어찌해야 예쁘게 뜯을 수 있을까.
나의 스타가 내게 선물을 준다? 선물 포장지마저 간직해야 할 팬의 숙명 같은 것이 존재할지니.
다은이 가만가만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시험시간에 늦을까 답답한 마음에 백한식이 도와주려 나서는데.
“잘 안 뜯어져? 줘 봐.”
“아니! 안 되욧! 포장지도 다 보관해야 된단 말예욧!”
한식의 손을 찰싹! 야무지게 밀쳐낸 다은이 조심조심 포장지를 뜯어냈다.
“아하하. 다은씨, 은근 엉뚱하다니까.”
연신 도와주려는 한식의 손을 밀쳐내며 다은이 끝까지 포장지를 풀어냈다.
그래, 포장지에 묻은 이현복의 지문마저 보관할 기세지 않은가.
근사한 나무 상자가 위엄을 드러냈고,
평생에 길이 남을 이현복님께서 하사하신 선물, 정다은이 이 아름다운 자태를 눈에 꼭꼭 담아두었다.
마침내 결심을 한 다은이 심호흡을 하며 상자를 열었는데.
“이건…, 요리사의 생명!”
참으로 대단한 중식도였다.
칼끝에서 손잡이의 마무리까지, 유려한 광채가 맴도는 엄청난 아우라가 있었다.
이현복의 특별 주문으로 제작된 중식도, 중식도계에서 최강이라는 다마스쿠스강으로 빚은 굉장한 중식도가 아니던가!
중식의 거장, 다은의 최애,
이현복이 주는 요리사의 생명이라니!
다은은 평생코 이 순간을 잊지 못 할 것이다.
다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감동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칼도 칼이지만 상자 안에 현복이 써둔 카드가 그녀를 울린 것인데.
[ 다은씨, 요리인생의 시작을 축하합니다.
우리 이제 같은 중식 요리사 되는거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망설이지 말고 연락줘.
항상 응원해줘서 너무 고맙고, 다은씨가 그렇듯이 나도 다은씨 1호 팬되서 응원할테니까. 파이팅!
- 이현복 ]
1호 팬!
다은의 올망올망한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는데.
아아, 살아있길 잘 했지 싶다. 정다은 28년 인생에 이런 날이 오다니.
최애가 나의 존재를 알고 응원해주는 날이 내 삶에 존재했다니!
방울방울 다은의 볼 위를 흐르는 눈물을 보자, 한식과 현복이 당황했다.
“아니, 울지 마.”
“꼬봉! 정신차려! 이제 시험 치러 들어가야 하는데 기운 빼면 안 돼!”
“어흑. 너무… 너무 좋아서요. 허엉.”
아아, 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울다간 시험을 망치고 말 것이 뻔하다.
백한식이 다은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귀엣말로 속삭였다.
“얼른 가서 자격증을 따오시죠. 현복바라기님.”
백한식이 자신의 아이디를 알고 있단 생각에 다은이 깜짝 놀라 눈물을 멈췄고, 한식은 눈썹을 까딱이며 협박하듯 어깨에 힘을 보탰다.
조금 떨어져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다운 법.
이현복의 눈엔 그저 다정한 커플로 보이는 모습이었으니.
감동의 눈물을 수습하는 다은에게 현복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용기를 주는데.
“다은씨, 그 칼로 아주 멋지게 성공하고 와!”
“넵!”
이현복의 칼을 얻은 정다은의 걸음걸이가 그 어느 때보다 강건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