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뒤집혔다.
라벤더는 ‘이 행성이 생물이라면 지금쯤 물구나무를 섰을 것’이라며, 소녀의 전날 밤 행적을 ‘업적’이라 떠받들었다.
“ 돌머리 걔 이제 인간문화재야. 국보급 돌머리라고. ”
벤더가 기숙사 침대에서 라일락 봉오리를 똑똑, 꺾었다. 평소라면 벤더를 자중시킬 온조도 부정 않고 으쓱거렸다.
“ 이 정도면 루안 형도 수도국경에서 봤겠지. ”
온조는 변방의 유명 소식지들을 읽어내렸는데, 하나같이 일면에 소녀의 얼굴이 대문짝만했다.
“ 수도국경만이냐? 고산지대 사는 토인들 귀에까지 들어갔을 거임. ”
‘<죽음의 노래>를 듣고도 살아남은 아이’.
전 행성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소식지의 글들은 소녀를 그리 칭했다.
본 적 없는 이들이 저에 대해 가타부타한 기록을 보며 소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아이는 하루빨리 이곳에 섞여가길 바라지, 존재감이 변태적으로 커지는 걸 원치 않을 터였다.
허나 대중들의 태도는 마치 곡예 하는 원숭이를 관람하는 것 같았다.
“ 청과전 노인이 그랬어. 소식지 매출이 로리아 휴교 사태 때를 넘어섰다고. ”
온조는 ‘로리아 휴교는 당시 지독한 전염병에 의해서였으며 행성 차원의 위기였다’고 덧붙였다.
벤더가 낸들 알 바냐(그리고 나도 알거든, 시부럴)며 답했다.
“ 이사회가 좋아할 건 알겠다. 관심받아서. 그러면서 로리아 눈치도 겁나 보겠지. ”
“ 교장 은사님은 싫어하시잖아. 관심받아서. ”
교장의 심기를 보이듯 새벽부터 학교의 하늘로는 반투명한 막이 일렁였다.
그를 ‘이매망량의 결계’라 불렀는데, 반구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지름이 교정만하다는 점에서 외부의 헛소문과 간섭을 차단하겠다는 포부가 느껴졌다.
“ 무슨 놈의 경계 태세가 전쟁 때랑 맞먹어. ”
“ 도적이 다시 올 수도 있으니까, 벤더. ”
감시 정령의 수와 마을 보초대의 병력이 하루 새 크게 늘었다.
수도국경에서도 수색대를 보낼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변방은 다소 조마조마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 돌머리가 이걸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텐데. ”
벤더가 마지막 꽃줄기를 동강대며 말했다. 어쩐 일로 배려 깊은 언변을 하나 싶으면 녀석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 자꾸 민 누나 때 생각 나. 소속 선택을 우리 들어올 때까지 미뤘던 거. 난 그래서 우리가 번번이 펄에서 지나 싶은 생각도 하거든. ”
관할자 김민. 선택을 끌고 또 끌다 더는 미룰 수 없었을 때 황을 택한 자.
회장이 된 것도 온전히 자기 의지가 아닌, 마땅한 후보자가 없었던 탓이라고 학도들은 수군거리곤 했다.
벤더는 다른 이들처럼 민의 주체성을 의심하진 않으나, 그녀가 늘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 소속에 꼬리를 내린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온조가 벤더에게 당한 꽃 줄기를 소식지 사이로 꼽고 경청했다.
“ 돌머리가 자책하면 확신이 떨어질 거고, 그럼 또 선택을 미룰 거고, 민 누난 그걸 보고도 아무것도 안 할 거고, 결국 걔는 누나 때처럼 강하게 밀어붙이는 놈들 편이 되겠, 아, 말하다 보니 걔를 뺏기는 것처럼 되는데 나 우리랑 돌머리 느낌 괜찮았다고 생각하거든. ”
“ …… ”
“ 그 눈빛 뭐야. 나만의 착각이었냐? ”
온조는 대꾸를 않았지만 얼굴빛에서 확연히 부정이 느껴졌다.
응, 벤더. 착각이야. 그리고 그 아이가 이쪽으로 오더라도 우리를 고르는 게 아냐. 황이라는 삶의 가치를 고르는 거지.
온조는 이 난리 중에(저마저)도 소녀의 선택에 신경이 쏠리는 걸 보면 인간의 기대심이란 참으로 간사하다고 생각했다.
벤더의 낯이 시무룩하다는 표현에 어울려졌다.
“ 그래, 4년 연패 소속에 제 발로 올 리가 없지. 아무리 돌머리라도. ”
백발의 곱슬머리가 그를 문밖에서 듣고 있었다.
제 관할의 녀석이 또 한 번 화단을 뒤집어놓았다는 보고를 듣고 왔으나, 어쩐지 자신은 훈계할 입장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지기만 하는 사람 밑에 들어올 리가 없지….
오늘은 대망의 날. 유일무이한 편입자가 마침내 하나의 소속에 소속이 되는 날이나, 누군가에겐 일말의 기대조차 사치스러운 날이었다.
***
“ 복숭아나무이네. 예로부터 귀신을 쫓는 과수로 여겨지지. ”
마을 진료소의 독실. 고뇌하는 여인이 조각 난 검의 검병(손잡이)을 매만지며 일렀다.
소녀는 그녀의 서설을 들으며 검의 맵시를 신기하게 보았다.
전체적인 형상이 반달처럼 휘었고, 예스러운 문양이 수놓아진 채였다.
소녀가 그곳에 인각된 이름자를 응시하다 중얼였다.
“ …정말 그 가문 사람일까요. ”
“ 확신할 순 없네만 그자의 눈이 검붉은 흑색이었잖나. 전해지는 베르제타들처럼. ”
아이는 이른 아침부터 문병을 와 여인과 칼에 대한 대책을 논의 중이었다.
검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지 않았으니 남몰래 간수 하여야만 했고, 기왕이면 은과 은의 주인이 찾지 못할 곳이 되어야 했다.
결국 가장 안전한 곳이 각자의 품이라고 여겨 그들은 망가진 조각들을 절반씩 나누어 가졌다.
도적이 검을 온전히 돌려받고 싶거든 두 올디펜서를 다시 찾아야 할 것이었다.
여인이 천에 싼 파편을 학도복 안춤에 넣으며 말하였다.
“ 시간이 밝혀주겠지. 그것이 모든 걸 해결할 걸세. 어떤 방식으로든. ”
그녀는 조만간 학교로 복귀하겠다고 밝혔다.
못다 한 학업을 끝낼 것이냐는 물음에 여인은 ‘올디펜서의 학업은 다른 이가 끝내줄 것‘이라며 소녀를 빤히 보았다.
그 시선을 믿음이라 부를 수 있을 듯 했다.
다만 문지기로서 역할을 이어갈 것이라는 여인에게 소녀는 존중의 뜻을 비췄다.
“ 이만 가봐야지 않나. 첫 수행에 늦겠네.”
여인이 환기하자 소녀는 순순히 짐을 챙겨 나서다 말고 다른 용건이 있는 것처럼 멈췄다.
“ 이름을 여쭤도 될까요, 부인. ”
“ …… ”
물음이 판도라의 궤를 건들 듯 조심스러웠고 들은 이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름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한 말이라고 했다.
그를 묻는 행위가 언젠가부터 위협이 되었다는 건 그 순간 부로 사람을 삶에 들이지 않았다는 것과 같았다.
허나 당신을 침해하고자 하는 게 아닌 특별히 여긴다는 의미인 걸 알아주면 좋겠다고, 소녀는 정적 속에서 생각했다.
“ ‘진리’라고 하네. ”
답을 받은 소녀가 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위를 향한 인사’이자, 감사였다.
여인은 이후 재게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소녀가 오늘 역시 꽃병에 꽂아두고 간 등나무 화를 바라보았다.
식물의 꽃말은 환영. 여인은 저를 맞아준 아이에게 복사나무의 가호가 함께 하길 빌었다.
***
“ 정말 없어요…. ”
소녀가 난처히 답해도 마주 본 얼굴은 단호했다.
- 소속을 대지 않는 자에게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수행 수업실은 무난한 건물이었다. 약도에 표시된 지점과 정확히 맞물리는 곳에 짝문 형의 입구가 자리했다.
그 곁으로 자주색 천이 늘어진 채였는데, 용도가 궁금한 찰나 천의 중앙으로 얼굴의 윤곽이 솟아나더랬다.
누군가 천 뒤에서 낯을 찍어누른 것 같이 생긴 그것은 자신을 문지기라고 일컬었다.
이어 소속과 성명을 요구하였는데, 무소속자에 대한 인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 소속을 대십시오.
입실 거부가 계속되자 소녀의 마음엔 조급함이 피어났다. 도움이 절실하건만 애석히도 휑한 복도에 홀로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한 인영이 돌연 인근 벽으로 용솟음쳤다.
꽤나 젊은 사내였는데, 상반신만 벽을 뚫고 나온 것이 관통 능력자처럼 보였다.
“ 뭐하냐, 안 들어오고. 급우들이 널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
사내는 초면에 인사치레도 없었다.
그에게 들린 출석 장부가 아니었다면 은사인 줄을 몰랐을 터. 그는 평상복 차림이었고, 꽤나 휘황찬란한 모발의 소유자였다.
소녀가 지각의 이유를 설명하듯 문지기를 곁눈질했으나 사내는 못 알아들었는지(혹은 상대하고 싶지 않았는지) 저 할 말만을 했다.
“ 안 들리나? 인원 확인 끝났고, 너만 들어오면 수업 진행이다. ”
사내의 말투는 무성의했지만 출석을 기재하는 손만큼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이후 그가 소리 나게 접은 출석부를 벽 너머로 투척하는 걸 보며, 소녀는 제가 출석부만큼도 자유자재로 들락거릴 수 없는 존재라 생각했다.
“ 소속이 없어요, 은사님. ”
은사가 처음으로 소녀를 바로 보았다.
아이에게 서린 혼잡과 검은 홍채 등의 생김새를 살피고는 그러는 것이었다.
“ 뱃지는 장식인가? 보호해준 놈이 슬퍼하겠군. ”
그가 대리자의 상징을 가리켰을 때 소녀는 깨달았다. 임시 거처도 소속이라는 걸.
“ 새 곳 갈 생각에 들떠 대리 소속은 눈에 안 차나 보지만, 넌 지금 적의 대리자다. ”
은사로선 서둘러 인증을 마치고 수업에 합류하라는 의미였으나 소녀에겐 미안함이 번져갔다.
한순간에 관할자의 의리를 저버린 이가 되었다.
“ 이번만 도와주겠다. ”
은사가 별수 없다는 듯 말했을 때, 소녀는 순식간에 옷깃을 잡혀 관문 너머로 끌려갔다.
분명 벽면을 통과해 들었으나 그곳은 야외였다.
입구는 온데간데없고 넓은 황무지에 거칠게 자란 야생초들이 무성했다.
수십의 의자가 행과 열을 맞춰 있고 한 자리씩 차지한 학도들이 일제히 신규 출입자를 응시했다.
그들의 곁에는 령이자 개인 자원으로 추측되는 짐승들이 함께였다.
그 사이사이에 아는 얼굴이 있는 건 크나큰 안도였다.
- 와학, 드디어 왔어 묘족! 기다리다 자라목 되는 줄 알았어!
- 길을 만들어서 왔냐, 돌머리? 아님 또 문 머리채 잡고 싸운 거?
나란한 두 녀석 곁엔 늘 한 쌍처럼 다니는 소년들도 자리했다.
온조가 품에 안은 토끼의 앞발을 들어 인사를 보내었다.
외에는 모두 낯선 이들이었다.
그들이 쑥덕거림과 관심을 키워가는 동안 소녀는 ‘위훈’이라는 달갑지 않은 이 또한 발견했다.
훈의 잿빛 삼백 안이 소녀와 무리를 응시하며 은발을 그윽하게 날렸다.
그 눈은 목청을 높이는 열매에게 유독 멸시를 보내었는데, 열매도 그 눈과 마주칠 때만 이마를 일그러뜨린다는 점에서 적대 관계가 참으로 확연하였다.
은사가 소녀를 청중을 향해 돌려세웠다.
“ 오늘부로 함께 하게 된 동료다. 아직 모르는 것이 대부분일 테니 도와주고, 쓸데없는 텃세는 부리지 않도록 한다. ”
- 와학, 텃세! 은사님이 우리 신입생 때 부렸던 것 말이죠?
- 그때 진짜 학교생활 망한 줄. 은사님이 나만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 싫어하는 거였어.
“ 자식들이 은사 말씀 끊는 싸가지 봐라. 시끄럽다. ”
은사가 면박을 뱉곤 주머니를 뒤적였다.
“ 이 아이의 소속 공표와 동시에 이번 수행은 시작된다. 호명된 소속은 알아서 아이를 찾길 바란다. ”
은사는 곧 꺼내든 무언가를 가까운 바닥으로 던졌다.
화약을 채운 물체라도 되듯 그 스스로는 흠씻, 물러나면서 소녀를 그곳에 밀어 넣는 것이었다.
소녀는 삽시에 복잡하게 얽힌 미지의 문양을 딛고 섰다.
“ 마법진이다. 소속과 능력 명을 대는 동시에 수행 장소로 이동될 거다. 이동 뒤에 네 소속 녀석들을 찾아. ”
그것은 네 소속의 빛을 내며 돌았다. 지시가 이어져 소녀는 당혹할 틈도 없었다.
“ 사실 꼭 찾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은, 토템. 네가 찾는 토템은 네 소속 몫으로 돌아갈 것이고, 찾는 동시에 수행은 끝이 난다. 이번 수행의 토템은 하나다. ”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렸다.
- 고작 하나요?
- 너무해요, 은사님.
그러나 보채는 목소리들과 다르게 모두가 웃는 낯이었다.
몸을 푸는 모습들이 여유로워 사냥에 앞서 먹잇감을 그리는 맹수들 같았다.
“ 그럼 행운을 빈다. 준비됐을 때 소속과 능력 명을 대라. ”
은사가 큼직한 손을 젖히기 무섭게 소녀의 주변이 온통 암흑으로 잠식되었다.
떠들썩한 학도들조차 사라진 공간에 소녀만이 존재했다.
발치로 도는 마법진을 보며 아이는 긴장으로 고인 침을 삼켰다. 그 산란한 형태를 무의식에 새기다 손으로 힘을 실었다.
‘ 자네가 바라는 보상이 뭔가? 소속에 듦으로써. ’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기로 앞에서 소녀는 입 밖으로 답을 내었다.
“ 황 소속, 올디펜서. ”
***
황 소속 “ 세계는 상호작용의 결과다. ”
소속 상징 : 원자
소속 위치 : 남쪽
소속 원석 : 스핀(우주의 의사소통)
추구 : 협동과 평화
적 소속 “ 심연을 마주하라, 창과 방패가 될 것이다. ”
소속 상징 : 평행 거울
소속 위치 : 동쪽
소속 원석 : 셀레나이트(자기 의식)
추구 : 자아와 근원
백 소속 “ 아름다운 균형이 널 이상으로 인도한다. ”
소속 상징 : 황금 비율
소속 위치 : 북쪽
소속 원석 : 투어멀린(대칭과 조화)
추구 : 시험과 장애물
흑 소속 “ 힘을 가진 자만이 다시 갖는다. ”
소속 상징 : 블랙홀
소속 위치 : 서쪽
소속 원석 : 오닉스(성취)
추구 : 자본과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