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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상아탑 : 신의 인형
작가 : 린비
작품등록일 : 2020.8.28

현대 주술사가 변방 지대에 세운 초인력자 교육 기관 '상아탑'. 소속 간 경쟁이 치열한 상아탑에 초인류의 존재조차 모른 한 아이가 중도 입학을 하는데, 이 아이가 세계의 유일 능력자임이 밝혀지며 마주하는 세계의 비밀과 감춰진 역사, 그리고 그와 함께 등장하는 베일에 쌓인 도적. xlxl0103@naver.com 미계약작입니다.

 
반영
작성일 : 20-09-04 22:36     조회 : 308     추천 : 3     분량 : 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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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아탑』

 W. 린비

 

 

 

 

 

 

 

 <6> 반영

 

 

 

 

 

 

 

 

 

 

 

 눈을 떴을 때, 소녀는 그다지 큰 아픔이 없었다. 많은 눈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잠시간의 상황 판단이 필요했을 뿐.

 

 늘어진 손 옆으로 호롱 그릇이 깨져 있고, 그 사이로 기름이 흘러나와 퍼져 있었다.

 

 

 소녀는 전날 밤 믿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넘어간 자세 그대로였다.

 

 기상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학도들(눈꼽 낀 얼굴과 흐트러진 옷매무새, 까치집 머리, 침 고인 입가 등이 그 사실을 보였다)이 소녀가 정신을 차려가는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 자세 좀 봐. 어쩌다 저랬대.

 - 저건 큰 대 자도 아니거 개 견 자다.

 

 

 마치 요튼헤임의 거인에게 암바를 걸려 눕혀진 듯이, 혹은 하늘에서 내린 거대 손에 장풍을 맞기라도 한 듯이, 소녀의 주변 바닥은 움푹 꺼진 채였다.

 

 몇몇이 그를 보며 추측하였다.

 

 

 - 얘 대지 능력자인가? 우경우처럼?

 

 

 처음엔 서넛 뿐이었으나 차츰 더 많은 수가 웅성거림을 듣고 모여 들어, 소녀가 온전한 의식으로 돌아왔을 땐 기숙사 구성원의 거진 반이 주위를 둘러싸거나 바깥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낯들은 소녀가 수군거림을 듣든 말든, 손가락질에 움찔거리든 말든 상관이 없어보였다.

 

 

 그 중에서도 최강자로 보이는 이가 인파 사이를 비집고 나타났다.

 

 

 " 와학, 다 비켜! 기름 치울 거 들고 옴! "

 

 

 전날 소녀를 이곳 기숙사로 연행해 온 팔척장신이었다.

 

 박열매. 녀석이 젖은 수건을 곤봉마냥 휘둘렀다.

 

 

 열매가 사자 갈기처럼 뻗친 머리를 하고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소녀는 이만 일어나자는 심산이었다.

 

 

 조금만 빨리 기립했으면 될 걸, 열매가 고개를 숙인 찰나와 타이밍이 같았던 게 문제였다.

 

 바닥으로 내려오던 머리와 공중으로 일어서던 머리가 충돌했다.

 

 마찰이 느껴진 순간 소녀가 화들짝 몸을 도로 굽혔지만 늦어버린 후였다.

 

 

 열매는 닿아선 안 되는 결계를 건드린 이처럼, 자신이 돌진한 것과 같은 속력, 같은 방향으로 튕겨나갔다.

 

 낮고 짧은 포물선이었지만 사람이 날아가는 건 그 자체로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학도들이 금세 소란해졌다.

 

 

 - 헐, 박열매를 자빠뜨렸어. 저 등빨 장군을….

 - 루안 회장님도 쟤는 들기 힘들어 하는데.

 

 

 세면대 사이로 볼품 없이 퍼질러진 열매가 큰 눈을 껌뻑거렸다.

 

 

 " 와학? "

 

 

 소녀가 덜컥, 내려앉은 심정에 뒷걸음질을 쳤다.

 

 마음은 의도치 않게 자빠뜨린 이를 일으키라고 하는데, 얼굴은 불규칙한 호흡을 뱉으며 하얗게 질려 갔다.

 

 

 한 발, 두 발 물러나는 소녀가 망각한 한 가지.

 

 제 곁엔 깨진 호롱 그릇이 있고, 그 주변으로 기름이 흥건하다는 사실이었다.

 

 발바닥이 잠길 정도로 고인 기름을 밟기 무섭게 소녀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전날처럼 넘어지면 좋았을 것을, 균형을 잡는답시고 팔을 드는 바람에 구경하던 인파에게 손을 휘두르고 말았다.

 

 그러면 학도들이 샌드백처럼 밀렸다. 손이 닿았을 뿐인데, 코뿔소의 뿔에 들이받힌 것처럼.

 

 

 모두가 날벼락을 피하듯 물러났지만 구경꾼들이 가득한 상태에서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열매는 낯선 능력에 당한 게 분하지도 않는지, 소녀가 학도 한 명을 칠때마다 표정이 더 재밌어졌다.

 

 

 그제까지만 해도 관중들은 소녀가 벽을 만났을 땐 멈추리라고 여겼다.

 

 허나 백년 된 건물 벽과 소녀의 손아귀 힘은 박빙이었던 모양이었다.

 

 

 - 헐, 저게 깨지는 벽이었어?

 

 

 소녀가 친 자리가 움푹 들어갔다. 학도들은 그제야 기절한 소녀 주변으로 꺼져있던 바닥이 이해가 되었다.

 

 

 위험한 현장을 보고도 도망가진 못할 망정 탄성을 흘리며 구경하는 학도들 뒤에서, 수려한 외모의 소년이 이를 닦고 있었다.

 

 뭐가 됐든 다수가 몰리는 상황은 신경 쓸 게 못 된다고 여기는, 우경우였다.

 

 

 녀석의 절친을 자부하는 열매는 여전히 옆 세면대에 넘어진 채로 다시 없을 연극을 보는 마냥 박수를 쳤다.

 

 그만한 광경을 선사하고도 소녀의 발을 적신 기름은 닦이질 않아서, 방향이 다시 인파를 향하게 했다(벽에 부딪힌 탓이었다).

 

 

 - 어어?

 - 어어어어?

 

 

 정신이 번쩍 든 학도들이 그제야 필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피하였다.

 

 군중 층이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한겹씩 비켜 나고 나니, 애초부터 광경을 등지고 있던 한 소년 학도가 드러났다.

 

 

 세면대 앞에 선 동그란 뒤통수.

 

 그 주인인 경우는 제 뒤로 돌진해오는 위험을 모르고 입안의 칫솔을 움직이고 있었다.

 

 

 " 저,저…! "

 

 

 소녀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안간힘을 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신이 그만 아찔해지는 때 인파 사이로 붉은 뱃지를 단 이가 나타났다.

 

 루안은 쏜살같은 반응 속도로 소녀를 잡아세웠다. '염력'이라 부르는 그 자신의 초인력으로.

 

 

 덕분에 소녀는 한 뼘 높이의 공중으로 들린 채 질주를 멈추었다.

 

 그러나 제 3의 힘의 개입을 못 버틴 팔이 끝내 동그란 뒤통수를 휘갈겨버리고 말았다.

 

 

 퍽.

 

 

 경우의 고개가 고꾸라졌고, 녀석의 입에서 떨어진 치약물이 녀석의 구두코로 주르륵, 쏟아졌다.

 

 한 학도의 나지막한 '헐' 소리 뒤로, 공간에 정적이 흘렀다.

 

 

 경우가 살벌한 시선을 뒤로 돌렸을 때, 녀석은 구두 뿐 아닌 입가와 목덜미가 치약물로 엉망이 된 채였다.

 

 

 " 와하학하학학학! "

 

 

 열매가 목청껏 웃어젖혔다.

 

 

 " 전학생이 우경 구두 버려놨다! 우경한테 패션이 얼마나 중요한데! 와학학학! 버려놨어! "

 

 

 소녀를 놓아준 루안은 어이가 가출한 얼굴로 난장 판이 된 내부를 응시했다.

 

 

 " 아침부터 인간 볼링 쳤어? "

 

 

 관할자의 발언에 학도 우경우는 하루 종일 '인간 볼링'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지고 말았다. 소녀 또한, '인간 볼링볼'로.

 

 

 

 

 ***

 

 

 

 

 타다다다다다다다다.

 

 

 이른 아침부터 교정의 남쪽 길에 흙 먼지가 피어났다.

 

 원인은 라벤더로, 녀석은 기상과 동시에 기상천외한 소식을 듣고 적 소속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두 바퀴짜리 은륜을 힘껏 밟으며, 벤더가 질주의 이유를 질러대었다.

 

 

 " 전학새애애애애애앵! "

 

 

 온조는 그런 벤더에게 등을 대고 은륜의 뒷자석에 앉아있었다. 고운 손으로는 책이, 콧대로는 안경이 자리했다.

 

 

 벤더가 까치 둥지가 된 머리로 깔깔거렸다.

 

 

 " 야, 전학생 진심 마이너스의 손이다. 바닥 깨고, 벽 깨고, 우경 뚝배기 깨고. "

 

 

 화사한 풍경이 색바람에 휩쓸리며 멀어졌지만 온조는 빼곡한 문장에만 눈길을 두었다.

 

 벤더가 친구의 집중 따위는 상관치 않고 재잘거렸다.

 

 

 " 소식 듣고 너무 웃겨서 복도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었다 진짜. 갖고 싶다, 전학생. 격렬하게 갖고 싶어. "

 

 " 전학생 목숨은 무사하대? "

 

 " 우경이 애 때리려하는데 루안 형이 막았대나봐. "

 

 " 경우랑 형 둘이 싸우면 누구편을 들어야 할까? "

 

 " 말려야지 등신아! "

 

 

 타박이 진심은 아니었던지 벤더가 낄낄거렸다.

 

 

 벤더가 도중 멈춰 서지만 않았다면 목적지에 당도할 때까지 온조의 자세는 동결이었을 터였다.

 

 허나 소속 지대를 벗어나는 언덕을 내릴 쯤에 은륜이 덜컹대며 멎기에 온조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기쁜 빛을 남발하던 벤더가 어느 쪽을 심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초리를 따라가자 인근 들판으로 널따란 자줏빛 향연이 보였다.

 

 

 이런….

 

 

 온조는 굳이 살피지 않아도 사악하게 올라가는 벤더의 입꼬리를 알 것만 같았다.

 

 라일락 밭. 라벤더에게 그보다 강력한 장애물은 없었다.

 

 

 ***

 

 

 그 시각, 적 소속의 박 열매도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표면적으론 '문'이나 실질적으론 '전학생의 묵묵부답'이라는 과제 앞에서, 열매는 연신 방문을 두드렸다.

 

 

 " 와학, 이 정도면 무시인데? "

 

 

 줄곧 답이 없었다.

 

 이목이 부담스러운가 싶어 복도로 두런대는 학도들을 쫓아도 소녀의 침묵은 그대로였다.

 

 

 멀지 않은 벽으론 경우가 언짢은 심정을 표출하듯 양팔을 꼰 채 기대 있었다.

 

 왠종일 낙천병 거인에게 끌려 다니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딱 보기에도 대인 기피증인 소녀가 저를 갈겨놓고는 피해자마냥 거인을 반 시간이나 문전박대하는 꼴을 보는 것은 더더욱.

 

 

 밀도 높은 짜증이 차츰 허기짐과 함께 몰려오자 경우는 도움 패를 꺼내 들었다.

 

 발을 굴러 열매를 부른 경우가 무언가를 목에서 끊어 던졌다. 수수한 모양의 열쇠였다.

 

 

 “ 와학, 맞다. 여기 우경 옛방이었지? ”

 

 

 학도 우경우는 지나친 관계 결벽으로 타인과 한 공간에 부대끼는 것조차 거부하던 시기가 있었다.

 

 걸핏하면 방 짝을 죽사발로 만드는 탓에 관할자는 죄수를 격리시키듯 녀석에게 독실을 주었었다.

 

 

 지금이야 말씨를 험악히 쓴다뿐 남들과 그럭저럭 어울려 지내는 지라 독방 신세를 졸업했지만, 공교롭게도 그 방에 새로운 관계 거부자가 들어 시위를 하는 중이었다.

 

 

 열매가 켈켈대며 문고리 구멍으로 열쇠를 쑤셔 넣었다. 그 광경을 먼발치의 루안이 귀를 후비며 관망했다.

 

 

 “ 와학 안녕하세요, 오빠? 한 쑤시기 하실래요? ”

 

 

 개인 공간 침범은 엄연한 범죄이건만 덩치 큰 박열매는 그런 자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벙글대는 입하며, 박자를 맞추는 콧구멍하며, 방의 새주인을 대면하지 않고는 결코 안 멈출 듯 했다.

 

 

 루안이 코웃음을 치며 등을 돌렸다.

 

 

 “ 너나 해. 마음껏. ”

 

 

 그리곤 휘적대며 층계를 내리는 것이 전학생의 존재는 안중 밖에 둔 것 같았다.

 

 열매가 한층 더 호탕한 웃음을 보냈다.

 

 

 “ 와학, 진짜 반타 블랙 안 궁금해요? 모든 빛을 빨아들일 것 같은 눈이라니까? ”

 

 

 비록 소녀는 열매에게 귀중품을 훔친 소매치기이나 어딘가 계속 건드리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것이 그이의 눈 때문인지는 계속 대면해보면 알 터.

 

 

 ‘짤깍’하고 걸쇠가 풀리는 음이 들리고 열매가 호기롭게 문을 열어 젖혔다. 허나 주인은 없고 휑한 공간 뿐이었다.

 

 

 “ 어라? ”

 

 

 이불 밑과 옷장 안 따위를 살펴도 식은 공기만 가득했다.

 

 

 “ 어라라? ”

 

 

 소녀는 나오지 않는 게 아니라, 벌써 나간 것이었다.

 

 

 

 

 ***

 

 

 

 색색의 옷이 나부끼며 소녀의 시야를 수놓았다. 여러 개의 평행 막대가 높은 나무에 걸쳐 빨래감을 어지럽게 널고 있었다.

 

 그곳은 적 기숙사와 인접한 숲의 개울가로, 적 학도들의 빨래터로도 쓰이는 장소였다.

 

 

 거친 땅을 경계로 폭포수와 개울물이 나뉘어 하나는 벼랑을 거슬러, 하나는 숲을 거슬러 흘렀다.

 

 그 가운데 소녀는 오늘부로 낯선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고뇌에 잠겨 있었다.

 

 

 품에는 적은 짐뿐이나 그것이 자꾸만 마음을 눌렀다. 고통의 원인은 짐 속에 구겨진 사진 한 장이었다.

 

 정원에서 웃고 있는 네 얼굴. 소녀는 사진의 배경이 된 그 마당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었다.

 

 

 한 여인의 죽음은 가족을 와해시켰고, 살아남은 가족들은 소녀를 먼 곳으로 보내었다.

 

 풍랑에 쓸린 배처럼 떠나왔지만 이곳에서도 자신은 이방인이었다.

 

 

 그쯤 물에 뜬 청동 오리 두 마리가 소녀 쪽으로 주둥이를 길게 빼곤 '쟤야? 쟤야?' 따위의 소리를 뱉고 갔다.

 

 다르다는 느낌은 무서웠다. 그것은 가족들로 하여금 소녀를 숨기다 못해 등지게 만들었다

 

 

 갈 곳을 모르나 돌아갈 수 없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리움이 제게는 죄악이라는 것도.

 

 소녀는 사진 속 자신을 도려내 물 위로 던졌다. 기억은 던질 도리가 없었다.

 

 

 남은 부분을 도로 접어 짐에 넣었을 때, 개울 건너로 숯처럼 검은 짐승이 나타났다.

 

 발로 물을 콕콕, 찍어 얼굴을 닦는 그 작은 존재를 소녀는 전날도 본 적이 있었다.

 

 

 겉모습이 영락 없는 고양이나 물에 비친 모습은 전혀 다른 짐승이었다. 어금니가 코끼리의 상아처럼 길고, 검붉은 무늬를 가진 호랑이.

 

 

 소녀는 모순된 두 형상을 번갈아 응시하였다. 정체 모를 짐승의 시선이 들린 것도 그쯤이었다.

 

 

 “ 뭘 봐. ”

 

 

 고양이는 퉁명스런 언변 뒤에 바위로 뛰어올라 기지개를 폈다. 물에 비친 맹수가 고양이의 동선과 함께 움직였다.

 

 소녀가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 …넌 고양이야? ”

 

 “ 그럼 뭐겠냐. ”

 

 

 고양이가 투덜대며 턱을 뒷발로 긁었다. 별 걸 다 묻는다는 말투였다.

 

 

 “ 근데 인간 너 왜 반말이냐. 내가 너보다 몇 백년은 더 살았어. 이곳의 설립자가 태어나는 것부터 죽어 환생하는 것까지 본 몸이라고. ”

 

 “ …… ”

 

 “ 하기사 지구인들이 그렇지. 손톱만한 세계관에,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란 걸 죽어서야 아는 족속들. ”

 

 

 소녀는 고양이가 '지구인'이란 대목에서 혐오감을 비추었다고 생각했다.

 

 

 “ 멍청하게 보이는 현상만 믿진 말라고. 그게 지구인들 고질병이지만. 넌 이제 이곳에 왔잖아? 인간 나이 그 정도면 자기 앞가림 할 때도 됐지.”

 

 

 고양이는 소녀에게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을 읽어내는 듯 했다. 오래 전부터 소녀를 알고 있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고양이가 돌연 소녀의 무릎에 뛰어들고는 코앞으로 낯을 들이밀었다.

 

 

 “ 근데 왜 여기서 죽상을 하고 있냐. 관심에 둘러싸여있어도 모자를 판에. ”

 

 

 눈빛 한 척만으로 상대의 내면을 뚫는다면, 고양이는 소녀가 그 많은 관심을 견딜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것도 알 터였다.

 

 고로 그건 물음보다는 훈계였다.

 

 숨는다는 건 약한 자의 익숙한 본능이었다.

 

 학도들의 시선만으로 자신이 환영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소녀는 외진 곳에 스스로를 쪼그라트렸다.

 

 

 “ 어차피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순 없어. 그러니 어느 쪽의 사랑을 받을지 택해야지. 자기 연민에 빠진 것보다 추해 보이는 건 없다. 그러니 다음에도 혼자 이런 표정따위를 하고 있으면 뺨을 갈길테다. ”

 

 

 이쯤되니 고양이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선 모두가 꺼리기 바쁜 아이를 이틀씩이나 우연히 찾을리 만무했다.

 

 고양이는 이내 발돋움을 하더니 사뿐히 바위 너머로 사라졌다. 아무런 목적 의식도 없이 흐르는 바람처럼.

 

 결국 오늘의 만남이 계산된 것인지는 의문으로 남았다.

 

 

 소녀가 저의 옷자락을 살폈다. 고양이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비대한 발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 범상치 않은 흔적을 쓸던 중이었다.

 

 

 “ 진짜 완전 검정은 아니네. ”

 

 

 낯선 음성에 화들짝 돌아 보면 루안이 주변 물가로 굽혀 앉아 있었다.

 

 소녀는 그가 들여보고 있는 것이 사진의 한 조각이라는 걸 눈치채었다.

 

 

 루안이 그것을 공중에 띄워 물기를 털고는 다른 한 손으로 빨래 집게를 불러왔다. 소녀의 웃는 얼굴은 곧 흩날리는 옷감 사이로 널렸다.

 

 

 “ 미안한데 여긴 자연 외에 투척 금지야. ”

 

 “ …… ”

 

 “ 정 버리고 싶거든 흑 소속에 해. 거긴 블랙홀이란 게 있거든. 전 우주적 쓰레기 통. ”

 

 

 소녀의 동공 색을 논하던 루안의 홍채는 옅은 보라색이었다. 역사적으로 고귀한 피 또는 미치광이를 상징하곤 하는 빛깔.

 

 전날의 법석을 본 소녀로써는 루안이 미치광이에 더 가깝게 느껴졌지만, 뭐가 됐든 쉽게 잊히기 힘든 눈이었다.

 

 

 루안의 시선도 소녀에게 닿아 머무는 것이 동공을 빤히 보는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를 신기해하며 흘린 정적을 깨고, 루안이 말했다.

 

 

 “ 근데 그 꼴로 가면 안 받아준다에 내 손모가지를 건다. 아침부터 괴수랑 전투했나봐? ”

 

 

 그가 소녀의 옷을 턱짓했지만 소녀는 해명보다는 침묵을 택했다.

 

 루안도 굳이 답을 들을 의사가 없는지 손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소녀를 적 지대에 들인 것만으로 그가 길길이 날 뛰는 걸 본 터라 그저 갈 줄 알았건만, 루안은 그러는 대신 소녀를 향해 익숙한 가방을 흔들거렸다.

 

 그것이 조금 전까지 제 품에 있던 짐이라는 것을, 소녀는 늦지 않게 깨달았다.

 

 

 루안이 말했다.

 

 

 “ 가자. 학도생 되러. "

 

 

 불같은 성미인 줄 알았는데, 제법 미소를 지을 줄도 알았다.

 

 

 
작가의 말
 

 린비의 글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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