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소의 특별 병동. 병실들이 소란을 모른 채 적막했다.
여인은 고요한 내부와 바깥의 소음을 나눠놓은 것이 안일함이라고 여겼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무시되듯, 사람들은 멀어지고 격리되면 안전하리라 믿었다.
허나 상황을 알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험이었다.
여인은 허튼 안도감을 이고 잠든 이들 틈에서 홀로 뜬눈으로 침대에 기대어있었다.
미세한 소리조차 채찍질로 다가와 태연할 수 없었다.
창가의 커튼이 흩날렸을 때, 여인에게 잔떨림이 일었다. 눈 깜짝할 새 그녀의 곁으로 검은 인영이 서 있었다.
여인이 그이의 등장을 예견했다는 듯이 낯을 들면 백 년간 조금도 변하지 않은 눈과 마주쳤다.
괴한은 반가움과 먼 기류로 여인에게 작은 병을 내밀었다.
색이 변한 뚜껑과 침상으로 기어오르는 뱀이 그곳에 독이 담긴 사실을 보였다.
여인이 잠자코 그것을 응시하다 입을 떼었다.
“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라 생각하는가. ”
청년의 고개가 가로 움직였다. 그에게서 먼 옛날의 언어가 흘렀다.
<사는 것보다 두려운 건 없지.>
그것이 삶을 증오한 여인의 목숨을 친히 끊어주겠다는 언사처럼 들렸다.
여인은 그이의 추측이 어긋났다는 듯이 말하였다.
“ 내가 정녕코 무서운 건, 잊힌 채 살아남았다는 것일세. 그대가 세계에 그토록 두려운 존재인 이유도 같겠지. ”
복면에 가리지 않은 건 오직 청년의 눈뿐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눈. 그 눈이 심기가 거슬린 듯 붉은 기를 퍼뜨렸다.
여인은 멈추지 않았다.
“ 그대는 무고한 생들을 잔인무도하게 난도질했어. 제 것도 아닌 죄에 속죄하던 이들을. ”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조상의 죄로 일평생 존재를 숙이고 조금의 안심도 누리지 못한 채 살았던 이가.
한 씨의 마지막 자손. 그에게는 갓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또한 여인 자신은 결코 될 수 없었던, 그의 근심을 함께 나누어진 연인도.
모두가 죽었다. 여인의 시야에서. 그들을 송두리째 사멸시킨 자가 말했다.
<조상의 죄는 곧 자손의 죄이지.>
“ 하여 그들은 일생을 바쳐 속죄하지 않았는가. 터무니없는 비난조차 피하지 않았네. ”
<뉘우침 따위는 과거를 바꾸지 못한다.>
“ 하여 모두가 죽어 마땅하다고 여기는가? 그 누가 과거를 바꿀 수 있겠나. 그대마저도 불가능하지 않았는가! ”
호통이 감정의 방아쇠를 당긴 듯, 청년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여인의 하반신이 점차 잿빛으로 뻣뻣해졌다. 동상으로 연명해온 지난 100년처럼.
청년은 위력 있는 저의 검조차 여인의 앞에 무용지물이란 것을 알았다.
한 씨를 지키기 위해 막아섰던 올디펜서는 베일에 쌓인 청년의 정체를 보았고, 그 훼방꾼은 발칙히도 전향방어자였다.
청년은 죽일 수 없는 생명을 저의 능력 속에 괴어있게 했다.
다른 피해자들은 오직 사태를 눈속임하기 위해 시간에 가두었을 뿐, 여인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유일한 목격자를 영원한 망각 속에 가라앉게 했으나, 어느 날 거짓 올디펜서가 나타나 모든 걸 수포로 돌리었다.
저의 검이 아니고선 결코 풀 수 없는 족쇄를, 한낱 대괴인이 풀었다.
믿지 못할 전개에는 악마의 속셈이 있었다.
여인은 청년이 저를 포박한 뒤 입안으로 독을 흘려보낼 것을 알았다.
허나 결코 피하지 않았다. 두려워해야 할 이는 피해입은 자신이 아니었다.
생의 끝에선 그 어떤 고통과 분노도 썰물처럼 빠져나간다고 했다.
입이 강압에 의해 벌려지는 순간도 한이 놓아지지 않는 걸 보면, 그 말은 거짓이었다.
“ 안 돼! ”
일순간 더 거짓처럼, 누군가 상황을 가르고 외치며 뛰어들었다.
돌연스러운 기척에 청년이 검을 뽑아 휘둘렀고, 여인은 뼈가 저리도록 저를 그러안는 품을 느꼈다.
소녀였다.
거세게 낙차를 그린 검이 소녀의 등에 메다 꽂혔지만, 그것은 살을 베는 대신 빛과 소음을 내며 먼발치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졌다. 지리멸렬한 파편들로.
그중 한 조각이 청년의 얼굴을 스치며 낯을 가린 헝겊을 떨궜다.
소녀는 겁에 질려 떨면서도 고뇌하는 여인을 저의 뒤로 숨겼다.
괴한의 얼굴을 바로 보자 그는 소녀 자신처럼 검은 눈이었다.
청년의 동공이 지진하였다.
결코 파멸될 수 없는 검이 부러졌다. 여인의 다리도 점차 제 색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저마다의 창백에 휩싸여 대치하던 중, 아래층에서 수색대의 추격 소리가 들렸다.
병동이 붉은 신호로 물들었고, 청년은 사지를 망토로 휘감은 채 창가로 올라섰다.
수색대가 무장한 인원과 사냥 령들을 끌고 들이닥쳤을 때, 청년은 보란 듯이 공중으로 몸을 던졌다.
이내 그는 하늘을 수놓은 꽃비 사이로 사라졌다.
수색대는 늦은 난입에 탄식하며 다시 괴한을 쫓아나섰다.
소녀가 부서진 검의 조각들을 떨며 보았다.
그곳에 새겨진 이름자를 모르지 않았다. 저를 둘러싼 모든 문서에 그 성명이 찍혀 있었기에.
베르제타의 인장이었다.
“ 집 나간 보배가 돌아왔네. ”
혼란이 발밑에 아귀를 벌릴 적에 기울어진 목소리가 들렸다. 은이 천장으로 거꾸러져 있었다.
은의 말이 기폭제가 된 듯 그 곁의 다른 영혼들이 검을 향해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수십의 목소리가 부서진 무기 주변으로 마치 이명처럼, 회오리처럼 나부꼈다.
가보가 돌아왔다, 가보가 돌아왔어.
허나 영혼들은 물질계를 벗어난 존재였다.
오씨의 선조들이 손을 뻗어도 파편들이 신기루처럼 관통되자, 은이 친히 걸음을 내렸다.
은이 공포로 굳어 선 두 올디펜서를 지나칠 쯤, 여인이 읊조렸다.
“ 네 것이 아니다. ”
경계 어린 말에도 은은 유유히 다가갔다.
“ 너희들의 가보가 아니란 말이다! ”
여인이 노하여 외쳤으나 은은 조각을 집어 들고 조소하듯 입가를 비틀었다. 마귀 같은 눈에 탐욕이 가득했다.
소녀는 그 눈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 아가. 힘이 있어야, 나약한 과거로부터 벗어난단다. ’
폭력의 구실을 찾던 수이의 간악한 시선을.
소녀가 달려들어 은의 손을 밟았다.
은이 신랄한 비명을 퍼뜨렸다. 서쪽 산지의 기숙사에서 자신의 사자를 기다리던, 흑의 관할자도.
소녀가 몸을 부들거리며 말했다.
“ 내버려 두세요···. ”
검도, 나도, 여인님도.
“ 당신 것이 아닌 모든 걸. ”
은이 소녀를 살해할 것처럼 노려보았다.
“ 나중에 그 말이 너의 가슴을 도려낼 거야, 에이. ”
오수이의 어린 영혼은 저주를 남기고 사라졌다.
***
세계에는 그런 말이 있었다.
‘ 쌍둥이 보름달이 뜨는 날엔 진료소가 북새통을 이룬다. ’
명월기에 힘을 얻는 루푸스란 존재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까닭이었다.
허나 금일 그곳을 북적이게 한 것은 외람되게도 어느 도적이었다.
“ 그 자는 분명 광장에서 보초대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각에 병동에도 있었다는 건, 타르데오가 조직이라는 반증입니다. ”
수색 대원 중 하나가 우두머리에게 보고하는 곁에서 소녀는 잠자코 그가 덮어준 담요를 그러쥐었다.
그들은 조사를 빌미로 소녀에게 상당한 물음을 하였고, 아이는 순순히 실토한 후였다. 단, 도적의 인상착의와, 품에 숨긴 검만 빼고.
도적에게 당한 다수의 대원들이 도처에서 앓는 소리를 내며 치료를 받았고, 소녀 역시 한밤에 받은 정신적 타격을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
그저 모든 것이 지나가길 바라던 때, 응급실의 문이 열리고 익숙하고도 큰 허우대가 나타났다.
학도 박열매가 바람에 나부낀 듯한 머리로 달려와 소녀를 살폈다.
녀석은 처음 만난 날처럼 소녀의 팔다리를 샅샅이 들어 훑고는 소리쳤다.
“ 대체 어쩌려고 그랬어! 이 무모한 묘족아! ”
아이에게 아무 상흔이 없자 열매가 소녀를 와락, 안았다.
녀석의 어깨로 턱이 걸치자 그 너머로 함께 온 동행자가 보였다. 경우가 멀찍이 서 있었다.
“ 와학, 안녕하세요 부인. 제가 친구를 너무 걱정했어서 실례지만 이러고 인사할게요. ”
열매가 곁 침대로 목례했다. 고뇌하는 여인이 그곳에 앉아 약을 투여받고 있었다.
그녀는 사건 직후 점상 출혈을 보였는데, 그는 독약을 먹었을 때의 증상이었다.
소녀가 건넨 용린 가루가 아니었다면, 여인은 벌써 쓸쓸한 주검이 되었을 터였다.
여인이 열매에게 인형처럼 안긴 소녀를 보며 말했다.
“ 편이 생겼구만. ”
“ 와학, 다 부인 덕분이죠. 부인이 얘를 신나게 까댄 덕이랄까? 근데 부인도 올디펜서라는 게 진짜에요? 밖에 수색대 아저씨가 그러던데! ”
소녀가 놀란 얼굴을 했다.
여인이 스스로 숨기던 신분까지 진술했을 줄은 몰랐다. 그녀의 병실로 한가득하던 어갑초에 더더욱.
물은 것은 열매이나 여인의 시선은 소녀를 향했다.
“ 기억되는 것은 무겁지. 난 그 무게를 지고 싶지 않았네. ”
“ ······ ”
“ 허나 그자와 대면하며 깨달았네. 잊히길 택해선 안 된다는 걸. ”
잊으려 하면 고통은 줄었다. 그러나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 나는 영겁을 기다려냈고, 그대는 나를 헛되게 하지 않았네. ”
희망을 단념했을 때, 삶이 서로 만나 간섭했다. 그를 구원이라 부를 수 있을 듯 했다.
여인에게서 편견이 지워지자 소녀의 눈에 잔잔한 물이 고였다. 세계로 와 처음 받는 인정이었다.
소녀가 말했다.
“ 여인님은 특별해요. 그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살아남았으니까요. ”
그를 함께 들은 열매 역시 어딘가 오묘한 얼굴이었다.
두 학도(아니, 경우까지 셋인가)는 그 날 여인의 미소를 처음 보았다. 상아탑 역사상 최초로.
“ 내일이 소속 선택의 날이던가. ”
여인이 묻자 소녀가 끄덕였다.
“ 한 가지만 생각하게. 자네가 소속에 듦으로써 바라는 보상이 뭔지. 그 물음이 답을 쉽게 만들 걸세. ”
“ 와학, 나요 나! 자신감!!! 자신감!!!!!! ”
“ 자네한테 안 물었네. ”
떠들썩한 병동을 환한 달빛이 비추었다. 두 개의 달이 화해한 두 올디펜서마냥 천공에 나란했다.
신음과 쑥덕거림이 곳곳에 나부꼈지만 생명에 위협을 느낀 이는 없었다.
‘죽음의 노래’라는 이름자가 다녀갔으나, 누구도 죽지 않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