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학, 다 됐다! ”
한낮의 학생 쉼터.
열매가 소녀의 손등 위로 놀리던 원뿔형 도구를 떼었다. 수선스러운 손길이 머물다 간 자리에 검은 문신이 남겨졌다.
“ 루안 오빠는 해, 묘족은 달! 해가 없는 자리를 대신하니까! ”
열매는 소녀로부터 회장의 대리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기 무섭게 땅을 부실 듯 도구들을 챙겨왔더랬다.
학도들의 거부감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모방’이라며 관할자의 문신과 비슷한 것을 소녀에게 새겼다.
벤더가 투덜거렸다.
“ 안 지워지는 걸 함부로 하면 어떡함? 루안 형도 너 때문에 평생 달고 살잖아. ”
듣자하니 관할자의 것 역시 열매의 작품이었다.
열매가 긴 소매를 거두었을 때야 소녀는 녀석의 팔도 기하학적 문양으로 가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와학, 그건 타투고 이건 헤나거든. 타투는 진피층에 하지만 이건 표피에 해서 각질 떨어지면 지워진다고! ”
‘헤나의 염료는 자생 관목의 잎으로 만든다’는 온조의 설명 뒤로, 벤더가 공(가방)을 차며 투덜거렸다.
“ 돌머리와 적 소속의 인연도 딱 거기까지라는 뜻임. ”
“ 와학, 아주 그냥 대놓고 쳇쳇거리지 그래? ”
벤더는 잠시지만 소녀가 적에 속하게 된 것이 못마땅했다. 떠나지 않게 된 게 다행이라는 데는 동의했지만.
녀석이 언짢음을 드러내며 발을 휘두르다 그만 염료 병을 엎질렀다. 풀밭이 삽시에 적갈색 물질로 흥건해지자 열매가 삿대질했다.
“ 와학, 잔디! 또 공공 기물 훼손했어! 쏟기 전에 잡았어야지! ”
“ 내가 무슨 타르데오인 줄 앎? 엎어지는 병 속도를 이기게? ”
도적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인근 수레로 앉은 경우의 눈썹이 올라갔다.
녀석은 줄곧 제 필사 필첩을 들여보고 있었다. 묘연해진 문장의 행방을 찾아.
온조가 싸움의 조짐을 읽고 개입했다.
“ 아무도 너보고 위대한 도적이 되라고 안 했어, 벤더. 조심 좀 하라는 거지. ”
세 녀석이 다툼에 팔린 사이, 소녀가 말문을 떼었다.
“ 그 문장은 어디로 갔을까? ”
들은 것은 경우뿐이었다.
소녀는 애당초 경우에게 한 말이었다는 듯, 이름 없는 눈으로 녀석을 응시하였다.
무시될 줄 알았건만 꽤나 긴 답이 돌아왔다.
“ 피해자들한테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지. ”
밤새 『레비아단 전』을 정독했지만 문제의 문장은 간 데가 없었다.
경우는 ‘문장이 사라진 대신 돌아온 사람들’이 열쇠라고 보았다.
허나 물의를 빚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그놈의 도적을 쫓는 움직임을 보일 순 없었다.
그렇다고 문장의 존재를 증명해내지 않으면 자신들에 대한 의심만 키우는 격이었다.
이도 저도 못하는 판국이네, X발.
각자의 고뇌에 빠져있느라 소녀와 경우는 저희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온조만이 뒤늦게 먼발치로 사라지는 검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스밀로돈?
고대 언어로 된 문장이 사라졌을 때, 고대의 보호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
마을, 거짓의 탑.
매서운 형세의 지붕 아래로 웅대한 방들이 자리했다.
책과 기록을 품은 보관고가 대부분이었으나 방문자 간의 교류를 위한 대합실 또한 있었다.
그곳에서 좌담이 몇 시간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대화하는 이들은 대부분 주름살이 깊었으며 위엄 있는 붉은 눈을 가졌다.
유일한 잿빛 눈을 한 학도 위훈이 그들의 대담을 주시하였다.
- 언제부터 이사회의 결정이 취소될 수 있었는지요.
- 적 회장의 소행이더군요. 그에게 적지 않은 권한이 있다 해도, 학교가 한낱 학도에게 동조하는 태도로 나오다니.
- 그 한량 같은 가씨 자제 말이군. 교장과의 부자 관계가 개입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세기의 수배자와 관련된 일을 이리 안일하게 넘기다니, 학교장의 교육자 자격이 의심됩니다.
노여움의 표현이 오가기도 했으나 전체적인 기류는 비밀스러운 종교의식처럼 점잖았다.
이사장이 심기 거슬린 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언뜻 평온해 보이나 그들과 같은 심경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속내를 보이는 건 사리에 어두운 자들이 하는 짓이었으니.
의논이 잦아들길 기다리던 이사장이 말문을 떼었다.
“ 교장의 독주에 마냥 태연할 순 없지만, 학교의 으뜸 직위자를 존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된 이상 아이의 송치에 관한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대신 바꿀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해야지요. ”
수이가 무리의 가운데서 미소를 지었다.
동의하는 바였다. 전세가 뒤지고 있는 마당에 감정 따위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패자가 되는 지름길이었다.
어느 인사가 반발했다.
“ 100년 만에 발견된 타르데오의 흔적입니다. 수도국경으로의 송치를 단념함은, 도적이 훔친 가보를 되찾을 기회를 포기하자는 말씀입니까. ”
수이가 가문의 복장을 갖춘 몸을 일으켰다.
“ 그 아이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돌아온 피해자들이 있지요.”
한낱 학도의 개입에 시선이 쏠렸다.
무리의 과반수가 오씨 가문으로 수이의 손윗사람이었다.
그들은 본래 서로 다른 일가였으나, 전쟁이 끝난 뒤 오씨 가문이 가세가 기운 나머지 가문을 인수함으로써 한 집안이 되었다.
이 심오한 공동체의 후예는 순혈 특유의 붉은 눈을 빛내며 강단으로 나아가 섰다.
“ 사건이 있기 전날, ‘죽은 자들’의 심령과 만났습니다. ”
수이가 말하자 청중이 웅성거렸다.
“ 그중 한 심령에게는 거꾸러진 십자가 새겨있더군요. ”
그에 사람들은 무얼 잘못 먹은 이들처럼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 ‘거꾸러진 십자’라면….
- 한씨 가문의 표식 아닙니까?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씨들. 일가 모두가 날개를 달고 태어나는 까닭에 ‘신의 대리자’라 불리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시간에 대적하는 공간 이동력을 가졌었다.
18세기 전쟁 당시, 그들은 오씨와 손을 잡고 베르제타 가를 몰살하였으나 돌연 자신들의 짓을 세계에 사죄하였다.
평화를 위해 불가피했던 순수 혈족들의 전쟁을 ‘악행’이라 칭하며.
수이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 맞습니다. 엄한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집안을 돌보지 못하고, 결국 사멸해버리고 만 그 일가. ”
입가는 마치 야유하듯이 비스듬했다.
한씨들은 멸망 직전까지 남은 힘을 고립된 능력자들을 구출하는 데 쏟았다. 그 멍청한 행보를 가루안의 가문이 이어가고 있었다.
이사장이 독촉했다.
“ 께어난 동상들 중 한 씨가 있다는 말이냐. ”
“ 제가 본 ‘죽은 자들’이 정녕 피해자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요. 다만 상아탑에 한 씨의 영혼이 떠도는 것은 분명합니다. ”
한씨 일가가 어떻게 끝을 맞았는지를 아는 청중은, 어찌 그 영혼이 타르데오의 실마리가 되냐는 물음을 하지 않았다.
한씨 가문은 전설의 도적에게 무참히 도살당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젖먹이까지.
이사장은 고민했다. 손녀가 접촉한 ‘죽은 자’의 정체를 좁히기 위해선, 우선 피해자들의 신분을 확인해야 했다.
“ 피해자들은 어떤 증언도 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신분조차도. 그들의 입을 열게 할 수 있느냐. ”
귀하께서도 이제 많이 연로하신 모양입니다. 손아래에게 묘수를 기대하시니.
수이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 그들은 이제 고립된 능력자입니다, 어르신. 혈혈단신이란 말이지요. 안전과 보장을 안겨준다면, 우리에게 충성할 겁니다. ”
수이의 말이 공간을 묵직하게 울렸다. 건물만큼이나 높고 굳건한 포부가 청중들에게 뻗어 나갔다.
오수이의 손윗사람들. 만족스러워진 그들은 사지가 점차 투명해졌다.
그리고 마치 허깨비처럼, 수십의 아지랑이가 되어 지붕으로 구불구불 기어가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사장을 제외하곤 이미 죽은 선조들인 탓이었다. 조상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수이로 하여금 존재의 이유를 느끼도록 했다.
“ 훈도 열심히 도울 겁니다, 조부님. 안 그래? ”
뒷짐을 진 훈이 묵묵히 바람을 불었다.
관할자를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요한 일에 관여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되어선 안 되기에.
‘ 가치 있는 것은 오직 ‘살아있음’이며, 그를 지탱하는 것은 가문의 이름이다. 아들아, 힘은 곧 생명줄이니라. ’
파멸되지 않기 위해선 복종해야 했다. 훗날 통솔자가 될 이에게.
굴복적이라도 상관없었다. 나약보다 나았으니.
위 가문에게는 삼대독자인 자신뿐이었다.
***
험준한 산골, 버려진 성터에는 고요가 내려앉았다.
옛 가문의 번영으로 한때 명성 높았던 그곳은 한 씨들의 궁궐이었다.
이제는 터에 부딪혀 나는 바람 소리뿐, 적막한 그곳을 쌍둥이 달조차 조심스레 비췄다.
유일한 사람의 흔적이 그곳의 지하 전당에 자리했다.
칠흑 같은 방 한편, 한 필의 검이 가지런히 놓인 채였다.
창살로 든 달빛이 그를 비춰 무한한 공간에 검만이 존재하고 있는 듯 했다.
빛이 곧 구름에 밀려 방 안에 앉은 어느 이를 비추었다.
그는 미동이 없어 마치 죽은 자 같았으나, 흘러가는 그림자를 응시하는 두 눈에 생기가 없지 않았다.
머지않아 뱀의 형상이 발치로 피어났을 때, 어둠에 잠식됐던 그의 얼굴도 드러났다.
공간을 짓누르던 기류와 상반되게도 그는 앳된 청년이었다. 뱀이 몸을 타고 올라도 청년의 무정한 낯엔 두려움이 담기지 않았다.
그가 입을 떼었다.
“ 소문이 들려. 전설의 도적이 죽었다는. 너무 잠자코 있었던 걸까. ”
멀쩡히 살아있는 내가 그들의 입소문을 타고 죽은 자가 되어버리다니.
“ 센. ”
불린 이름에 그의 목을 휘감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청년이 자신과 닮은 뱀의 눈을 응시하며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시 또 때가 왔어.
집어 든 칼자루에 새겨진 이름자. 그를 본 청년의 눈매가 피처럼 붉게 빛났다.
청년의 고갯짓이 신호탄이 되듯, 뱀이 잿빛 연기를 피우고 사라졌다.
청년은 다시 검어진 눈으로 창살 밖의 깊은 천공을 올려봤다.
어리석은 그들에게 일러주어야 했다. 그들이 시작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또한 보여주어야만 했다. 타르데오는 결코 죽지 않았으며, 심경을 거슬리는 소문을 들었음을.
귀환의 순간이 마침내 도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