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의 비밀 문서실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 1913년, 학생들과 두 교직원이 검은 두건을 쓴 괴한에게 공격을 당하였다. 학교는 이와 같은 사실을 은폐하려 교내 어딘가에 피해자들을 숨기었다. ]
어디에도 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이 없으나 피해자들은 영겁의 세월 속에서 ‘죽은 자’들로 와전되었다.
백 년 후 발견된 그들은 오직 정신만 늙은 상태였다.
육신이 마치 시간이 빗겨 간 듯 앳되었으며, 시대 관념은 옛적에 머물렀다.
그들은 스스로가 피해자란 사실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마치 무언의 힘에 묶인 것처럼.
그들은 한 세기를 돌 속에 묶여 죽기보다 괴로운 시간을 견디었다.
그러도록 만든 이에게 원한이 쌓일 만하나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며 ‘그 자를 결코 바로 보아선 안 된다’ 당부할 뿐이었다.
외에는 무엇도 말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정신을 치료하기 위해 마을의 보건소에 안치되었다.
이 모든 사단이 하룻밤 사이에 벌어졌으며 소문이 수도국경에 미치기까진 1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교내에는 학도들의 쑥덕공론이, 교문 밖에는 각지로부터 온 기자들이 판을 쳤다.
너도나도 말을 실어나르며 상황으로의 난입을 시도했으나, 사건에 진정으로 관련된 건 어느 올디펜서였다.
올디펜서 소녀는 발견 당시 여섯 학도와 함께였는데, 그 중 넷만이 상황에 대한 책임이 함께 있었다.
학도 박열매와 우경우, 백온조, 그리고 라벤더.
녀석들은 회장과 은사들은 물론 교장과 후원 재단의 주요 인사들까지 소집된 「긴급 위원 회의」에 불려가고도,
- 이거 뭐 유명 인사라도 된 것 같네요.
- 와학, 내 존엄성이 위협받는 기분?
위축될 줄을 몰랐다.
사건의 중대함을 모르는 건 아니나 어안이 벙벙했기 때문이었다.
단서를 따르면 또 다른 단서를 찾을 줄 알았지 일대의 숙제를 풀어버릴 줄이야.
일개 학도들이 학교의 오랜 염원을 해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들은 금밭을 발견한 졸부들 마냥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 중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건 상아탑의 이사회였다.
그 우두머리인 이사장은 동공이 핏빛처럼 붉었는데, 그가 추궁성 발언으로 회의의 포문을 열었다.
“ 자네들의 개인적인 행동에는 어떠한 저의가 있었는가. ”
“ 와학, 저의라뇨. 그저 탐정 놀이였을 뿐인데요? ”
“ 지금 사건의 원인이 호기심뿐이었다고 말하는겐가. ”
- 옙, 박장군 인생의 나침반은 그것뿐이라서요.
- 뭐래. 니들도 나 못지않게 궁금해했잖아. 안 그래 백온, 우경?
소녀는 모든 것이 예언의 바위에서 시작되었다고 털어놓았다.
“ 예언의 패가 가리킨 것은 한정적인데 어찌하여 도적의 피해자들을 추적할 수 있었지? ”
이사장의 반박에 경우가 답했다.
“ 예언의 구절이 레비아단 전에 나왔습니다. ”
“ 레비아단 전이라면, 아무 방향으로 읽어도 되는 그 책을 말하는 게인가. ”
경우가 수긍의 고갯짓을 했다.
또한 주장을 증명하려 서적을 펼친 순간,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혔다. 해당 문구가 책으로부터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 땅속으로 들어가 잘못을 바로잡으면 숨겨진 돌을 찾게 되리라. ]
당황한 나머지가 함께 뛰어들어 찾아도 문장은 간 데가 없었다.
이게 대체….
경우는 레비아단 전을 수년간 필사한지라 아무 문장이나 대어도 그것이 적힌 쪽수를 정확히 댈 수 있다 자부했다.
허나 이사회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 원래 기억은 제멋대로이지. ”
교장이 중재에 나선 것은 그 쯤이었다.
“ 다섯 학도 모두가 한 치의 틀림 없이 같은 문장을 말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기억의 착오라 볼 순 없는 문제입니다. ”
“ 그럼 이 상황이 오컬트라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학도들이 무언가에 홀렸던 것이라고? ”
“ 초자연적인 요소에 기대는 게 아닙니다. 다른 원인의 개입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
“ 초자연의 세계에 사는 이가 할 말은 아니군요. ‘그 도적’은 이 세계의 문제입니다. 단순히 학도들의 일탈로 넘길 사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회장들은 언쟁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각자의 소속원들을 믿는다 발언했다.
특히 민은 온조가 ‘타골라 증후군(모든 걸 기억하는 기억 증진 증세)’을 앓고 있다며, 거짓을 고할 리 없다 하였다.
상아탑에서 회장들의 견해는 은사나 교장, 이사회의 힘에 뒤지지 않았다.
이사장은 다섯 학도를 차례로 둘러보고는 말했다.
“ 회장들의 주장에 포함되지 않는 아이가 하나 있군요. 저 아이에겐 누구의 믿음이 있습니까? ”
소녀를 가리킨 것이었다. 누구도 선뜻 답하지 못하는 긴장 속에서, 이사장이 언변을 이었다.
“ 상아탑이 피해자들을 찾아 헤맨 세월은 무려 백 년입니다. 어젯밤이 이전의 백년과 달랐던 점은 학교에 유일 능력자가 있었던 점뿐이지요. 그것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바, 아이를 수도국경으로 송치하겠습니다. ”
이사장은 소녀가 어느 소속에도 속하지 않은 점을 내세워 자신과 동행할 것을 명했다. 전문 조사기관이 있는 수도국경으로.
교장은 아이가 소속을 정하는 날이 다가온다며 방어했으나 이사회는 그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의 어떤 절충안도.
“ 수도에 늦지 않게 보고하려면 사흘 안에 떠나야 합니다. 그 안에 아이를 준비시키십시오. ”
이사장이 출두 날을 통보하였다. 소녀는 멎을 기미 없는 상황의 두려움에 턱을 떨었다.
***
“ 이 와중에 간다고? ”
민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루안은 잠자코 제 서재 한 편에서 짐을 챙겼다.
뒷짐을 진 준은 잘 다녀오라 웃을 뿐이었다.
“ 가라는데 어쩌냐. 안 그럼 영감이 호적에서 팔 거라는데. ”
“ 어떻게 가족 모임이 이 사단보다 중요할 수가 있냐고? ”
“ 우리 가문이 언제 이해되는 거 봤어? 경우라는 게 없는 족속들이야. 그러니 전범 가문이 됐지. ”
루안의 자학적 언변에 준이 실소를 터뜨렸지만 민의 낯은 더욱 심각해졌다.
교정이 난리로 들끓는 중에 관할자라는 놈이 어떻게 가족 행사에 참여하려 자리를 비우는지.
“ 그 애는 어쩌냐고. 이대로 수도국경에 보내버리는 거야? 영영? ”
“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민? ”
민은 저와 똑같은 낯빛으로 묻는 루안에 어이가 달아났다.
상황에 대한 책임이 없으니 수습할 의무도 없으시겠다? 네 놈이 그러고도 회장이야?
민이 꾹, 참은 말을 루안이 감응력으로 감지했다.
“ 회장은 자기 소속원을 관할 하는 사람이지 만능 문제 해결사가 아니야. 내 의무는 열매와 경우를 보호한 거로 된 거 아냐? ”
준이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끄덕거렸다. 민이 껑충, 뛰었다.
김준, 넌 학생회장이잖아! 책임감을 네 소속한테만 한정해서 가지면 안 되는 지위라고!
녀석이라고 저와 같은 고뇌가 없겠냐만은 침착한 모습이 민은 야속했다. 타박이 향한 곳은 준이었으나 루안이 그를 받아쳤다.
“ 듣자 하니 민 언행 되게 가식적인 거 알아? ”
“ 뭐 임마? ”
“ 해결책이 없는 건 서로 피차일반인데, 입으로만 걱정하는 게 애를 책임져주는 건 줄 알잖아. ”
민은 말문이 막혔다.
오늘 따라 가라앉아 보이는 루안이 허를 찌른 탓이었다. ‘아이의 관할을 맡을 용기가 선뜻 들지 않는다’는 심연의 연약한 주장을.
자극을 받은 건 비단 민만이 아니었다. 준의 유들했던 웃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입을 다문 민이 낯을 세차게 돌려버렸다.
오수이는 ‘죽은 자들’에 대해 입질을 던질 땐 언제고 왜 종일 모습이 안 보여?
수이는 이런 사단이 날 지를 미리 알았을까. 이사장의 손녀였으니.
제 집안이 전설의 도적과 얽힌 이를 수도까지 책임지게 된 것에 신이 나있을지도 몰랐다.
분명한 건 수이를 제외한 회장들 중 누구도 소녀가 연행되는 꼴을 보기 싫다는 것이었다.
고요해진 방 안에서, 관할자들은 각자의 고심에 빠졌다.
***
또 하나의 고요한 방. 소녀는 며칠 끝에 익숙해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에게는 내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본능이 있었다. 자신은 쉬이 후자로 분류되곤 했다.
이곳에서 역시 유별난 시선을 받았어도 찬찬히 섞여가고 있다 여겼다.
그러나 잘못된 믿음이었다는 걸 그들의 침묵에 의해 알게 되었다.
함께 사건에 휘말린 네 녀석은 어떠한 말도 함부로 건네지 못한 채, 유감스러운 낯을 가득 짓다 돌아갔다. 그 말 많던 박열매까지도.
사흘 뒤면 익숙해진 이름 하나 없는 지역으로 가야 했다.
이곳이 뭐라고 떠나는 것에 두려움이 들었다. 정착지로 느낀 적도 없으면서.
생각이 자꾸 의식의 줄을 당겨 소녀는 결국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불을 다시 내린 소녀가 몸을 일으키기 전에, 좁게 열린 문틈 사이로 자그마한 것이 날아 들어왔다.
적 소속 출입증이 그리 비행하는 모습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부유한 물체가 유유히 다가와 수중에 놓였을 때, 소녀는 출입증에 걸린 또 다른 것을 발견했다.
회장 뱃지였다. 적 소속 문양이 선명히도 박힌.
그를 자각하기 무섭게 문 너머로 음성이 들렸다.
- 회장의 대리자는 교정을 절대 비울 수 없어. 회장이 돌아올 때까지.
남들이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을 누설하듯, 설명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 내 부재는 사흘이 썩 넘을 거다. 그렇다고 열매한테 전해.
그가 힘주어 말한 ‘사흘’은 이사회진이 변방에 머물 수 있는 최대 기한이었다.
그 시한 내에 적의 관할자가 돌아오지 않으면, 소녀는 그들과 함께 교문을 나설 수 없었다.
상대가 돌연히 던진 돌파구에 소녀는 심정이 벙벙해졌다.
……왜 저를 도와주세요?
수습을 주도하지 않기에 저란 존재를 회피하는 줄로 알았다.
문밖의 루안이 팔짱을 풀었다.
- 유일 능력자가 수도국경에 입성하는 이상 로리아로 갈 건 뻔해. 그건 우리 입장에서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거든. 큰 손실이라 이 말이야.
그가 발치에 두었던 짐을 집어 들었다.
- 그러니 너 돕는 거 아냐. 상아탑을 돕는 거지.
말을 마친 루안이 돌아서다 말고 덧붙였다.
- 아 참고로, 이 아이디어는 회장단한테서 나온 거야. 오수이 제외.
소녀는 멀어지는 걸음을 들으며 그에 속한 이름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들 덕에 출두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루안이 기숙사의 입구로 오르며 궁시렁거렸다.
이사회랑은 되도록 전면전을 피하고 싶었는데, 썅.
조금 전의 간섭은 세 회장 모두의 의견이나 자신의 뱃지를 맡김으로써 그는 얼굴마담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가문 싸움이라고. 망할 가씨 대 망할 오씨.
이렇게 된 이상, 페어플레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