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들이 저마다 휴식을 누리는 학생 쉼터. 중앙의 거목 아래로 사람과 비슷한 수의 짐승이 뛰놀았다.
소녀는 볼 만한 그 광경을 뒷전으로 두고 온조와 ‘예언의 패’를 들여다 보았다.
숫자 외의 단서를 찾아 패를 사방으로 돌려볼 적이었다.
“ 다 미신이야. ”
수레로 앉은 경우가 말했다.
전날 바위의 움직임을 함께 목격한 모습은 어디를 가고 녀석은 줄곧 전설의 효력을 부정하고 있었다.
“ 신이 어딨는데. 눈에 보이냐. ”
“ 나도 무교지만 종교는 건드리지 말자, 경우. ”
온조가 인근에서 공(처럼 만 가방)을 차며 노는 벤더를 눈짓했다.
라벤더의 집안은 모두 독실한 신앙인으로 특히 아버지는 종교 관련 종사자였다.
경우가 입을 고집스럽게 다물고 수중의 필첩을 끄적였다.
볼 때마다 무얼 그리 적는가 했더니 경우는 한 책을 3년 내리 필사하고 있다 하였다.『레비아단 전』이라는 위인전을.
“ 레비아단도 신앙인이었어. ”
온조의 말에 경우가 인상을 구겼다. 모욕을 들은 듯한 반응을 보건데 그 인물은 녀석의 우상쯤 되는 모양이었다.
레비아단은 본디 ‘뱀’이란 뜻으로 외관은 악어에 가깝고 태양을 삼켜버리는 힘이 있다는 전설 동물이었다.
온몸이 광나는 비늘로 덮여 있는데 그 두께가 매우 두꺼워 어떤 것으로도 뚫을 수 없다 했다.
상아탑의 학도 가방이 레비아단 가죽으로 만들어졌다고들 했으나 사실인지는 누구도 몰랐다.
논란의 물건을 신명 나게도 차던 벤더가 그를 옆구리로 받고는 말했다.
“ 줄여서 ‘레비’라 하지. 그치만 『레비아단 전』은 뱀에 대한 얘기가 아님. ”
그는 어느 도적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3대 도적의.
벤더에 따르면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레비아단’, ‘위리놈’,
“ 그리고 ‘타오’. ”
“ 타르데오 말하는 거지? ”
“ 응, 줄임말이야. ”
경우가 또 한 번 미간에 협곡을 만들며 ‘별 걸 다 줄이네.’라 읊조렸다.
“ 그 말을 또 줄여서 ‘별다줄’이라고 함, 우경. 요새 대괴에서는 그게 유행이래. 그지, 돌머리? ”
소녀는 대답을 않았다. 못했다는 게 맞았다.
정원을 벗어나 살아본 적 없는 자는 세상의 흐름을 알지 못했다.
지구는 소녀의 출신지일 뿐 이 행성인들이 그곳을 더 잘 인지하고 있을지 몰랐다.
“ 무튼 우경은 그 중에서 레비아단을 가장 사랑해. 책 훔치던 도적. ”
벤더는 학도 우경우를 꽤나 바삭히 꿰고 있었다.
레비아단은 과거 귀족에게만 소유되던 ‘책’을 민간에 배포시켜 지식을 독점이 아닌 발전 되도록 만든 이였다.
그 자신도 귀족이었다는 사실이 최근 한 역사학자에 의해 밝혀진 바 있었다.
경우가 필첩을 소리 나게 덮으며 정정했다.
“ 사랑하는 거 아니다. 궁금한 거다. ”
“ 그게 그거 아니야? 레비아단 편만 심이 마르고 닳도록 쓰잖아? ”
“ 나머지 둘은 살인자일 뿐이니까. ”
“ 그래도 나쁜 놈들만 죽였잖아. 그걸 정의라 보는 이들도 있어. ”
도적 위리놈과 타르데오는 한패가 아닐까 싶게 수법이 유사했다고 했다.
각각 200년과 100년 전 기승을 부린 도적으로 그들은 기득권 세력만을 살해했으며 다녀간 자리에 자신만의 징표를 남겼다.
그 중 타르데오는 매우 악명 높았다. 그는 순수 가문을 적어도 한 사람씩은 해한 것으로 전해졌다.
허나 희생자들이 모두 범죄 전력을 가진 탓에 타르데오는 ‘살인마인가, 죽음을 불사한 정의 구현자인가’로 의견이 갈렸다.
경우는 벤더의 옹호가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 그 자가 한씨 가문 씨를 말렸어. ”
경우가 그리도 열의 있게 달려드는 것을 처음 본 터라 소녀는 잠자코 일전에 들은 내용을 떠올렸다.
한씨. 300년 전 전쟁에 참여한 순수 가문으로 현재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이들이었다.
“ 씨에 되게 민감하가 봄, 우경? 씨 뱉는 능화초에 맞아서 그런가? ”
벤더는 그럴 의도가 아닌 듯 보이나 특유의 말투가 상대를 약 올렸다. 경우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 그에게 당한 상아탑 이들도 있어. ”
“ 야, 우경 그건 소문이지. ”
대립하는 두 소년 틈에서 온조가 소녀에게 귀뜸 했다.
“ 타르데오의 활동 시기가 상아탑이 설립될쯤이었어. 그 때 몇몇 학도와 은사가 공격을 당했대. 까닭 모를. ”
소문에 의하면 범인은 타르데오로, 학교는 피해자들을 교정 어딘가에 묻었다고 하였다.
희생자들을 기린다는 구실이었으나 범인의 정체를 숨기고자 그랬다는 추측이 있었다.
“ 학교가 그들의 묘지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
그리하여 상아탑의 학도들은 교정 땅을 밟을 때마다 죽은 자들을 떠올린다고 했다.
무덤처럼 봉긋한 언덕에 앉아 듣기엔 으스스한 이야기였다.
온조가 안경을 치켰다.
“ 묘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화제를 다시 죽음의 패로 돌리는 게 어떨까.”
예언의 패에는 예언의 제목(‘번영’, ‘이동’ 등)이 적혀 있기 마련이었다.
허나 소녀의 패에는 ‘13’이란 수치만 자리했다. 이곳에서 13은 자주 죽음과 직결되곤 하였다.
온조가 소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 죽음을 무조건 부정적인 것과 연결 짓는 데 그 반대일 수도 있어. 모든 집착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잖아. ”
“ 그래서 이 패가 속박으로부터의 탈피를 13이라는 숫자로 줄여 말한다는 거임? 줄임말 쓰는 돌이라니. 대상이 대괴인이라고 그런 건가? 그렇담 유머가 세계 정벌 급이네.”
소녀는 경우가 조용히 ‘지랄하네’라 중얼거린 것을 들었다.
한동안 패로 골똘해 있던 온조가 안경을 벗었다. 녀석은 돌연 한 몸과도 같은 안경의 한 알을 빼내었다.
벤더가 무슨 급작스러운 짓거리냐 타박하기도 전에 온조는 그것을 패의 표면에 대고 돋보기처럼 숫자를 확대했다.
놀랍게도 ‘13’이란 숫자가 그보다 더 작은 글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 헐, 대박. 뭐임? ”
벤더가 냉큼 온조와 머리를 맞댔다. 뜻밖의 발견은 경우의 궁시렁마저 다물리게 했다.
그들이 함께 살핀 글씨의 정체는 이랬다. V, I. T, R, I. O, L.
“ Vitriol? 그게 뭐임. ”
“ 황산. ”
온조가 답했다. 녀석은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찾아냈으나 더욱 깊은 미궁에 빠진 얼굴이었다.
황산이 대체 죽음과 무슨 관련일까.
벤더가 한 순간 무릎을 탁, 쳤다.
“ 야, 이거도 줄임말 아님? 그러니까 뭐라고 하더라 그걸. 약자? ”
동시에 벤더의 품에 끼인 공이 탁, 하고 풀어져 가방이 되었다.
***
구도서관은 근래 들어 가장 많은 손님을 받았다.
열매까지 합세한 무리가 책을 찾아 거닐 때마다 낡은 목재 바닥이 신음을 흘렸으나, 끝내 부서지지 않는 것이 방문자를 포용할 의지를 내비추는 듯 했다.
다섯 학도는 건물의 안간힘에 화답하듯 사전이란 사전은 모두 꺼내 그 속살을 열렬히 뒤졌다.
“ 와학, 찾았다! ”
유독 책을 산처럼 쌓고 보던 열매가 돌연 제 키의 반절 높이를 뛰어올랐다.
녀석이 들여보던 것은 『주술사 사전』. 열매가 ‘어디 봐봐’라며 달려든 벤더를 고까운 듯 밀쳐냈다.
쿵.
열매가 꽃 이름의 사내를 한 떨기의 잎처럼 나가 떨어뜨리고 외쳤다.
“ 와학, 내가 읽을 거야. 내가 찾았어! ”
그리곤 발견한 구절로 코를 박은 열매는 조금 뒤,
“ 와학, 못 읽겠네. 외계어 할 줄 아는 사람? ”
“ 장난하냐?! ”
혹이 생긴 라벤더의 분노를 샀다.
이내 무리는 책을 펼쳐 함께 들여다보았다(경우는 제외다).
생략 전의 원문이 묘사된 줄에는 예상보다도 더 긴 문구가 자리했다.
[ Vista Interiora Tearrae Rectificandoque Invenies Occultum Lapidem. ]
사전에 따르면 그는 주술사들의 표어였다. 벤더는 흥분한 목울대를 가만두지 못했다.
“ 그냥 던져본 말인데 진짜 약자일 줄 몰랐음. 보통 이런 걸 천재라고 하지 않냐? ”
“ 와학, 천재는 아무나 하냐? ”
“ 천하의 백온조도 모른 걸 내가 맞쳤잖아. ”
“ 와학, 천재 진짜 아무나 하네? ”
“ 근데 이 글귀 뭐라고 해석해? ”
온조가 문장을 가만히 보았다. 역사학자가 꿈이라 고대 언어에는 제법 능통하다 자부했건만, 뜻이 떠오르지 않았다.
온조는 돋보기로 사용한 탓에 외알이 된 안경을 쓰고, 집중을 다 했다.
허나 대답은 다른 이로부터 왔다.
“ ‘땅속으로 들어가서 잘못을 바로 잡으면, 숨겨진 돌을 찾게 되리라.’ ”
경우였다. 모두의 시선을 고삐처럼 붙든 것을 아는지 녀석은 홀로 멀찍한 곳에 기대 제 필첩을 들여보고 있었다.
“ 레비아단 전에 나온다. ”
“ …… ”
“ 타르데오 편에. ”
수십 번은 필사한 터라 그곳에서 읽은 문장쯤 눈을 감고도 욀 수 있었다. 그를 실제로 보거나 듣게 될 줄을 몰랐을 뿐.
“ 와학, 예언이 타르데오랑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
온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주술사의 언어는 고대 어이기 때문에 어느 서적에든 나올 수 있어. 역사적으로도 인용구로 자주 사용됐으니까. ”
“ 그리고 예언의 바위는 상아탑 내부의 일에 대해서만 예언하잖슴. 도적과 연관된 학교 사정이란 게 있기나 해? ”
[ 땅속으로 들어가서 잘못을 바로 잡으면, 숨겨진 돌을 찾게 되리라. ]
변방의 상아탑에서 예언의 문장과 13이란 죽음, 그리고 설마 싶은 도적이 모두 관련해 일어날 일은 없다고, 황 소속의 소년들은 여겼다.
경우가 딛고 선 자리를 잠자코 응시했다. 상아탑의 학도들은 교정 땅을 밟을 때마다 죽은 자들을 떠올렸다.
“ 학교 땅에, 그 자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묻혀있다고 했어. ”
신을 믿지 않으나, 소문은 믿는 자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