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
W.린비
<10> 혈통
쿵.
" 나는 그 자식이 싫어. 사람을 무슨 잡것 보듯이 한다니까? "
열매가 주먹을 내리치자 탁상 위의 것들이 가볍게 떴다가 내려앉았다.
녀석은 줄곧 위훈을 향해 이를 갈고 있었다.
경우가 녀석을 보도 않고 읊조렸다.
“ 잡것이잖아. 그 녀석한테는 모두가. ”
“ 세계의 과반수가 혼혈인데 그럼 그 사람들이 다 더럽다는 거야? 와학? 우월 의식이 참 근거도 없어. ”
건너 자리의 벤더가 대화에 몫을 얹었다.
“ 어쩌겠어? 순수 도련님한테는 그 생각이 중력인걸. ”
녀석은 동시에 ‘반성문’이란 글자를 종이 위로 큼지막히 써내렸다.
그건 학생 쉼터를 가꾸라는 은사의 지시를 어긴 대가였다. 소녀도 동일한 벌을 받은 참이었다.
- 가족이 위씨인데 그 피가 어디 가겠냐? 아주 위-대한 순수 혈족이신데.
- 정신적 체조가 필요한 놈들이지. 뇌가 흑백논리, 이분법 사고로 경직되어있는 놈들.
소녀는 녀석들의 쑥덕공론을 들으며 마을에서의 대면을 떠올렸다. 특히 대기가 멈춘 것만 같던 위훈의 눈을.
“ 와학, 순수 혈족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닌데 말야. 우리 아부지를 봐. 순수지만 대괴 피인 엄마랑 결혼했다구. ”
열매가 소녀에게 또 한 번 손을 둘러 팔걸이로 전락시켰다.
소녀는 ‘대괴는 지구의 다른 말’이라는 온조의 귀뜸을 듣고서야 열매가 하루 만에 제게 살가워진 이유를 깨달았다. 녀석의 어머니와 출신이 같았던 것이다.
벤더가 물었다.
“ 그래서 평생 가문이랑 연 끊고 사신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아는 거냐? ”
“ 그건 그래. 우리 아부지의 아부지, 그니까 할아버지는 내 존재도 모를걸? 아부지가 그랬는데 모르고 사는 게 낫다고 했어. ”
“ 어떻게 가족을 피로 나누냐. 그쯤 되면 무시와 차별이 종특이성이다 진짜. ”
“ 와학, 내 말이. 아부지가 같은 길을 안 간 게 자랑스러워. “
녀석들은 후로 다수의 순수 혈족이 속해있다는 흑 소속에 대한 뒷담도 펼쳤다.
흑 기숙사의 출입증은 블랙홀인데, 그 물체는 어디로든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며, 그래서 흑 학도들이 아무 곳이나 침범하는 일이 잦다며.
돌고 돌은 잡담은 결국 ‘위훈’의 얘기로 귀결되었다.
- 난 그 자식이 시종일관 바람을 불어대는 게 제일 싫어.
- 능력 과시 아니겠냐. 망할 은발을 365일 휘날리고 있잖아.
- 수업에서도 그러던데, X발.
- 엮이지마. 그런 놈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
험담의 기세가 최고조로 올랐을 무렵이었다. 멀뚱히 틈에 끼어있던 소녀의 뒤로 또 하나의 음성이 들렸다.
” 그 피한 자리가 왜 상관도 없는 내 서재지? ”
모두가 돌아보았다. 정갈한 모습의 사내가 서재로 들고 있었다.
그이의 하얀 명찰을 보았을 때 소녀는 이곳이 백의 기숙사라는 사실을 환기했다. 내부 장식들이 완벽한 대칭과 수열로 맞추어진.
<김준>. 황금 비율의 소속이라더니 관할자의 얼굴이 황금 비율이었다.
듣자 하니 준은 소속 회장과 학생회장 직을 겸하고 있다 하였다. 교장과 은사로부터 직접적인 통지를 받고 회장들에게 전달한다고.
열매의 낯이 환해졌다.
“ 이제 와요? 루안 오빠가 여긴 편할 때 와도 된댔어요. ”
“ 맘대로 사는 소속답군. ”
녀석들의 깜짝 방문은 흑 소속의 침범보다도 잦은 일인지 백의 관할자는 대수롭지 않게 서재 문을 닫았다.
준은 무리가 둘러앉은 중앙 탁상으로 다가와 품의 것들을 내리고 물었다.
“ 못 보던 얼굴인데. ”
“ 와학, 얘 몰라요? 전학생인데. ”
“ 그건 알지. 경우 말한 거야. 꽃 단 모습은 처음 보는데. ”
그 순간 학도 우경우의 얼굴에 잠시 잊었던 분노가 떠올랐다.
사실 소녀는 만담이 오가는 동안 경우의 머리 위에서 춤추는 능화초를 멀거니 보고 있었다.
열매가 소녀를 가리켰다.
“ 와학, 얘가 심었어요 능화초. 잘생긴 우경 관심 끌려고 그랬나? ”
열매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을 고의적인 실례로 둔갑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 아무튼 그래서 보건소 갔는데 오늘 휴진이지 뭐에요.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오빠한테 용린 가루 얻으러 왔어요. ”
용린 가루. 그는 아홀로틀이란 생물의 비늘로 만든 가루로 웬만한 상처를 재생시키는 효능이 있었다.
“ 저온 늪지대에 사는 도롱뇽과 생물이야. ”
그런 존재가 실재한다는 걸 처음 안 소녀로서는 온조의 설명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 우파루파라고도 부르는데, 잃어버린 신체를 재생하는 능력이 있어. 자기들끼리 장기이식도 가능해. ”
온조는 그 생물로부터 추출한 성분이 독성을 중화킨다며 경우를 눈짓했다.
지금으로써 독을 중화시킬 대상은 능화초였다.
관할자 김준의 가문은 잘 나가는 상인 집안으로 전국을 왕래하며 품목을 수집하는지라 집에 없는 것이 없다 하였다.
오죽하면 그의 고조부는 전설로만 알았던 용의 뼈를 발견해 소유하였고, 증조모는 아홀로틀이란 희귀 생물을 발견하여 자손 대대로 그 비늘의 효능을 누리며 살게 했다.
준은 녀석들이 저에 대한 언급을 하는 중에도 서류철을 정리하기만 했다. 평소에도 그런 말들이 면전 앞에서 비일비재하게 오간다는 냥.
“ 네가 학도복 맞추러 간 <상단>도 준 형네 가문 사업이야. ”
온조의 설명 도중 벤더가 농을 던졌다.
“ 어마어마한 갑부인 거지. 그니까 잘 보여둬. 혹시 알아? 언젠가 콩고물이 떨어질지도. ”
그 순간 묵묵하던 준이 입을 떼었다.
“ 난 갑부가 아니야. 아버지가 갑부인 거지. ”
- 와학, 어쩜 루안 오빠랑 토시 하나 안 틀리고 같은 말을 해요? 금수저의 종특이성인가?
- 겁나 단호하네요, 형. 근데 겸손도 심하면 병이에요.
놀림과 훈수에도 준은 흔들림 없이 할 일을 했다. 소녀 곁의 서류를 집어갈 때 양해를 구하는 눈빛이 예의 있기도 했다.
저를 본 관할자들 중 가장 침착하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침착의 다른 이름은 냉정이었다.
정돈을 마친 준이 서재의 안쪽 공간으로 사라지기에 각자의 길을 가자는 줄 알았건만, 그는 곧 기하학적인 문양을 지닌 작은 병을 들고 나타났다.
화장품의 분처럼 곱고 흰 입자가 그곳에 담겨있었다.
“ 와학, 용린 가루! ”
열매가 그를 채가려는 때, 준이 병을 잡지 못하게 던져 올리고는 반대 손으로 받아 소녀에게 내밀었다.
“ 상황을 유발한 사람이 뿌려야 수습돼. ”
“ 그치만 우경은 저 아니면 아무도 손 못 대게 하는데요? ”
준의 기색이 단호하여 소녀는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시선 속에서 병을 받아들고 해결해야 할 문제를 향해 쭈볏대며 다가섰다.
경우는 소녀를 여전히 적대적으로 바라보았는데, 소녀의 동공 빛이 보일만큼이 되자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름 없는 색을 보기 싫은 듯이.
“ 와학, 좀만 참아 우경. 화초 때면 머리 만져줄게. 그럼 내가 손댄 게 되는 거잖아? ”
지랄 하지마, X발. 너도 아니야. 경우는 턱 끝까지 차오른 부정을 눌렀다.
소녀는 가루를 뿌리라는 온조의 시늉을 따라 병을 뒤집어 능화초 위로 흔들었다.
조금 뒤 율동적으로 움직이던 식물이 맥없이 늘어져 경우의 둥근 두상으로부터 뿌리를 거두었다.
- 제법이네.
- 보았냐. 저게 바로 병 주고 약 주기란 거다.
경우는 소녀의 눈을 매섭게 응시하다가 피했다. 결코 화해하지 않으리란 의지가 느껴졌다.
상황에 대한 원망만이 아닌, 본질적인 미움이 뻗쳐왔달 까.
소녀를 도둑으로 여길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구인이란 정체를 알고는 거진 원수를 보는 얼굴이 됐다.
“ 와학! 이리 와, 우경! ”
열매가 두 팔을 펼쳐 달려들고 경우가 녀석을 걷어찰 쯤, 소녀는 준에게 병을 돌려주려 내밀었다.
허나 준은 손을 물리게 하는 것이었다.
“ 가지고 있다 유사시에 쓰도록. ”
곧바로 관중의 야유가 이어졌다.
- 오빠 지금 전학생한테 어필하는 거에요? 백 소속 데려가려고 밑밥 까는 거?
- 그런 식으로 민 누나도 꼬신 건가요? 인간의 물욕을 건드려서?
준이 반박하였다.
“ 그러기엔 애를 너무 모르지. ”
그리곤 소녀를 길게 응시하다 물었다.
“ 능력이 뭐지? ”
“ 와학, 뭐야. 회장들도 몰라요? ”
그 순간 벤더와 온조는 눈빛을 교환하며 뇌리에 세게 박힌 첫 대면을 떠올렸다.
그럼 그 능력을 본 건, 우리뿐인 건가?
애석하게도 유일한 목격자들조차 능력의 명칭을 몰랐다.
의아의 대상에게 눈길이 집중되었다. 당황한 소녀의 눈이 소리가 날 것처럼 굴러다녔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나 대답이 쉽지 않았다. 누군가의 앞에 능력을 고의로 보인 적 없었다.
준이 뒷짐을 졌다. 그것은 준이 절충안을 꺼내들 때마다 나오는 몸짓이란 걸 소녀가 알 리 없었다.
“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나? 그럼 제안을 하나 하지. ”
마주친 동공이 푸르렀다. 청량하지만 한편으론 우울을 떠올리게 하는 빛이었다. 눈이 꼭 주인처럼 활기와 위엄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 우리 것을 먼저 보여줄게. 그럼 너도 알려주는 거야, 능력이 뭔지. ”
그에 많은 말이 따라붙었다.
- 무슨 수로 보여요. 이 시간에.
- 맞아요, 곧 통금 시간인데?
- 여기서 발현하면 큰일 나요. 물에, 불에, 번개도 있잖아요.
제지는 해도 막상 아쉬운 얼굴들이었다.
모두가 아닌 듯 실망의 기색을 비출 때, 준만은 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가 돌연 주머니에서 검은 출입증을 꺼내 올렸다.
흑 소속의 소유라는 중력장의 구멍이었다. 투명한 유리 공 안에 검푸른 소용돌이가 회오리쳤다.
열매가 욕짓거리(X발, 놔라)하는 경우를 옆구리에 쪼다 말고 물었다.
“ 그건 어디서 났어요? 오빠도 출입증 훔쳐요? 혹시 검은 고양이 주인? ”
“ 학생회장은 전 소속 출입증을 소지한다. 유사시에 대비해 말이야. ”
“ 와학? ”
“ 이해 못 하는 것 같으니 간단한 단어로 쪼게 설명하지. ”
소녀는 그 순간 준의 눈이 반짝였다고 생각했다.
“ 통금은, 깨라고 있는 거고, ”
“ …… ”
“ 블랙홀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
말을 마친 준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멍하니 듣던 얼굴들이 연쇄작용처럼 환해졌다. 언제 낙담했냐는 듯, 하나같이 소녀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들불처럼 번져온 시선을 받은 채 눈을 껌뻑거렸다.
단정한 차림새로 보아 늘 정해진 규칙 안에서 놀 것 같았건만, 백의 관할자는 뜻밖에도 융통성이 좋았다. 과연 상인의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