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
W.린비
<5> 불청객
2m의 여아는 용케 나동그라지지 않았으나 중심을 잡으려 땅을 발로 짚자 마치 나무의 뿌리가 뽑히는 듯한 진동이 일었다.
상대는 어느 사내로, 그의 등장에 아이들이 일동 기립하거나 숨을 죽이는 걸 보아 권위를 가진 인물인 것 같았다.
그는 여느 이들과 같은 복장을 했으나 목이 알 수 없는 문양으로 어지럽고 가슴엔 붉은 뱃지를 달고 있었다.
열매가 웃어재쳤다.
“ 와학, 오빠 왜 이렇게 타격감이 약해요? 근력에 벌써 노화 왔어요? ”
“ 열매 시끄럽고, 너도 와서 공평하게 차여 경우. ”
적의 회장 가루안이 가까이 오라는 듯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의 명령조에 꿈쩍 않을 것 같던 경우가 일어났다.
루안에게는 '감응력'이 있었다.
텔레파시란 이름으로 더 흔히 알려진 그 능력은 감각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조건에서도 타인을 감지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를 수신하는 능력이랄까.
해가 지도록 후배 녀석들(열매와 경우라고 한다)이 보이질 않아 자신의 내면과 그들을 연결시키던 중, 두 놈의 의식 속에서 반대 인류의 눈을 보았다.
분노의 질주를 했으나 한 발 늦어 이방인을 기숙사로 들이고 말았다.
회의서 아이를 안 데려올 거라고 그렇게 큰 소리를 쳤는데, 썅 것들이 관할자의 결정을 번복하게 만들어?
열매가 히죽, 웃었다.
“ 에이, 오빠. 그래도 화내는 자초지종은 알려줘야죠? ”
“ 자총지종? 내 눈에 니들이 샌드백으로 보여. 그게 자초지종이다. 장딴지 곱게 대. 대기권 밖으로 쏘아버릴 라니까. ”
“ 와학, 그 힘으로요? 사람을 날리긴커녕 굴리지도 못할 것 같던데? ”
낭랑 청춘 박열매는 거기서 그만 두었어야 했다.
“ 욕만 하지 말고 운동 좀 해요, 오빠. 옛날엔 그래도 저 넘어뜨리긴 했잖아요? 와학? ”
그러자 루안은 정색을 하는 대신 입가를 올렸다. 한쪽만, 비딱하게.
다른 학도들이 슬금슬금 휴게 공간을 벗어나는 가운데, 루안이 말했다.
“ 내가 이중 능력자(두 개의 능력을 가진 자)란 걸 잊었나 본데, 열매. ”
“ 헐, 맞다. 나 왜 맨날 잊지, 와학? 이단 옆차기가 더 능력 같아서 그런가? ”
그 순간 소녀는 사람이 눈으로 살기를 뻗는다는 말이 무언지를 깨달았다.
“ 그래, 잊은 김에 오늘 똑똑히 각인시켜줄게 열매. ”
루안이 한 손을 들어 움켰을 때, 열매와 경우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정확히는 발을 잡혀서.
녀석들은 몸이 거꾸러진 채 장장 30분을 이리저리로 날아다녔다. 밀도 높은 벽과 충돌할 위기를 몇 차례나 넘기며.
" 썅 것들이 회장을 물로 알아?! 학도 생활이 장난이야?! "
그러한 루안의 제 2의 초인력을 '염력'이라 불렀다.
피가 머리로 쏠려 날아다니는 중에도 열매는 '스릴 있어! 와학!' 따위의 말을 지르며 깔깔거렸다. 웃음을 관장하는 뇌에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 웃겨?! 내가 웃겨, 썅?! ”
소녀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 앞에 언어도단의 상태가 되었다. 이질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세계였다.
***
서쪽 산지의 흑 기숙사. 지붕이 천공을 찌를 듯이 매섭고 높았다.
검은 벽이 밤과 한 몸을 이루고, 내부는 거대한 힘에 눌려있기라도 한 듯 고요했다.
한 소년이 정체된 기류 속을 나아갔다.
피부가 실내의 흑빛과 대조되도록 희었고, 낯빛은 무감정하며, 눈은 마치 대기가 멎어있는 듯 했다.
날카로운 인상과 키가 기숙사의 형세를 닮아 마치 최초의 건축자가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만 같았다.
소년의 이름, 위훈.
훈은 맨 꼭대기 층의 서재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방문이 중력장의 구멍처럼 회오리치고 있었다.
블랙홀.
지금도 외계에서 광활한 우주의 국부를 집어삼키고 있다는 그 상징물은, '힘을 가진 자만이 다시 갖는다'는 흑 소속의 교훈을 충실하게 드러냈다.
모든 방의 입구가 블랙홀인 탓에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오직 그 주인만이 알 수 있었다.
그건 개개인을 철저히 분리하는 동시에 타인의 침범을 극히 경계하는 흑 소속만의 관행이었다.
관할자의 서재는 특히 더 그랬으나 훈은 허락을 구하는 낭비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부로 들자 몇 개의 초만이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훈이 지체 없이 난로 가를 바라보았다. 고아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가 안락 의자에 앉아 차를 따랐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미모의 소유자는 훈의 기척에도 돌아보지 않고 잔의 향을 음미했다.
흑 소속의 관할자, 오수이. 그녀가 입술을 호선으로 휘며 말했다.
" 오자마자 유명인사가 되었어, 그 아이. "
훈은 대꾸를 하는 대신 천장을 거꾸로 거니는 어느 혼령을 노려보았다.
낯이 죽은 자처럼 창백하고 머리칼이 바닥에 쓸릴 정도로 긴 여아. 품에는 인형을 안은 그 영혼을 모두가 '은'이라 불렀다.
관할자의 곁에 상시하며 심부름꾼 역할을 하였는데, 훈은 은을 '보게 되면 운수가 나빠지는 급살' 정도로 여겼다.
수이가 말을 이었다.
" 은사들조차 그 아이 얘길 하는 거 알아? "
교양 없게.
수이의 입가가 순식간에 낙차를 그리며 떨어졌다.
" 준이 보내온 서류를 봤어. "
가입증이라던가. 그 말도 안 되는 종이 쪼가리.
무표정해진 낯이 차 속 일렁임을 서늘하게도 응시했다.
은이 돌연 천장을 배회하다 말고 내려 수이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었다.
마치 구원을 바라듯, 두 발을 꿇고 그녀에게 종속된 마냥 안긴 모습이 기묘했다.
수이가 미소를 되찾았다.
그래, 난 화를 내지 않아. 그건 자제력 없는 이들의 불균형이니까.
훈은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역정이 났다.
은의 정체에 대한 추측이 학도들 사이에 떠도는 걸 관할자가 아는지 몰랐다.
수이가 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훈에게 종잇장 하나를 들어 보였다. 백 소속에게 전해 받았다는 문서가 분명했다.
<가입증>
수이가 그것을 매섭게 구겨 난로 속으로 던져 넣었으나, 조금 뒤 문서는 환한 빛을 내며 불길로부터 튕겨 나왔다.
나아가 그것이 이전의 말끔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 훈은 전과 다른 낯이 되었다.
그 불가사의한 마법은 모두 종이에 찍힌 인감 때문이었다.
수이가 읊조렸다.
" 베르제타의 인장. ”
“ …… ”
“ 그 아이가 얼마나 대단한 위인이면, 문서에 이 귀한 걸 찍어 파쇄도 못하게 만들었을까. "
“ …… ”
" 훈도 알지? 그 유명한 베르제타 말이야. "
강력한 우리의 조상들이 파멸시킨, 더욱 강력했던 가문.
훈이 모를 리 없었다. 18세기를 주름 잡았던 순수 가문을.
여러 분야의 초능력자가 고루 있는 타 가문과 달리 순수 가문은 대대로 한 분야의 능력자만이 태어났다.
소수만이 누리는 능력인 만큼 그 수준이 매우 강력했기에, 그들 대부분이 '힘'의 권능을 믿는 흑 소속에 속하곤 했다.
그 중 베르제타는 '시간'의 순수 가문으로, 시간을 관장하는 능력을 가졌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만든 계약용 인장은 그것을 찍은 문서의 시간을 묶어 협약이 영속하도록 만들었다. 불멸의 계약을 상징했던 것이다.
비록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베르제타의 인장은 오늘 날까지 수많은 공문서와 서류에 이용되었다.
허나 학도 생활 4년 차에 들어선 수이조차 그 실체를 처음 보았다.
" 학교에선 이미 회장들의 싸인을 가입증에 새겨두었더라고. ”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전학생의 싸인을 받는 일뿐, 모든 관할자가 전학생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었다.
수이는 은사들이 그런 불공평한 관계를 성립시킬 만큼 네 관할자를 머저리로 알고 있진 않을 것이라 여겼다.
고로 전학생을 소속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 소속원에게 이익을 얻는다는 건 말이야, 훈. 그이의 능력이 매우 쓸모 있다는 말과 같아. ”
“ …… ”
“ 그 애의 능력은 차원이 다른 것일 수도 있어. 그래서 은사들이 균등한 기회를 준 건지도 모르지. 희소성 있는 능력을 쟁취할 기회. "
적막 속에서 훈은 은의 입가가 미세히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수이가 깔깔거렸다.
“ 그 아이 말이야. 유일 능력자인 것 같아. "
“ …… ”
" 그래서 얼른 보고 싶어졌지 뭐야. 우리 쪽으로 온다면 매우 예뻐해줄 거야. 물론 나만의 방식으로. ”
그녀의 신랄한 웃음을 따라 은의 머리칼이 한 가닥씩 떠오르더니 이내 천장을 뒤덮었다.
훈은 기괴한 장면을 물러섬 없이 응시하였다.
수이의 뜻을 읽은 은은 곧 소문의 소녀를 향해 움직일 것이었다. 어쩌면 훈 자신도. 그는 근본 모를 존재와 엮이기를 원치 않음에도 말이었다.
그것이 수이였다. 만인의 행동권을 소유한 관할자.
유일 능력자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능력을 가진 자. 초능력을 하나의 가문이 아닌 한 개인이 소유한다는 점에서 차이와 희소가치가 있다. 유일 능력자는 백 년에 한 번 태어나는 것으로 전해진다.
****
콰앙.
두 차체가 시야에서 충돌함과 동시에 소녀는 눈을 떴다.
끔찍한 광경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날의 도로가 아닌 낯선 공간에 누워 있었다.
지낸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는 5평 짜리 방.
중앙에는 널따란 침대가 자리했지만, 소녀는 장소를 낯 가리듯 바닥에 웅크려 잠이 들었다.
새우잠 속에서마저 되짚고 싶지 않은 순간을 만나 고요한 밤이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등 뒤로 기억이 뒤죽박죽 기어다녔고, 손과 발이 추위에 떨리는 것처럼 흔들렸다.
무릎을 부둥켜 안은 채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니 소녀는 세수가 간절하였다. 얼굴에 식은 땀과 눈물이 범벅이었다.
자신을 달갑지 않아 하던 이곳의 회장(가루안이던가)이란 이에게 방을 안내 받으며 공용 욕실의 위치를 들은 것도 같은데, 맞는 지 확신은 없었다.
소녀가 탁상에서 고요히 반들거리는 호롱불을 들고 방을 나섰다.
끼이이익.
신음하는 목재 문 너머로 긴 복도와, 똑같이 생긴 문들이 수없이 늘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큰 탈 없이 꿈속을 배회하는 것처럼 바깥은 한적했다.
벽이 물처럼 일렁이는 길을 걸어 방을 수십 개쯤 지나고 나니 푯말이 달린 입구가 자리했다.
푯말 위로 알 수 없는 언어가 도형처럼 쓰인 채였다.
소녀는 이 세계의 언어로 추정되는 것을 읽는 대신 컴컴한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곳에서 잠긴 수도꼭지의 물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내부의 어둠으로 호롱불을 내밀며 들어섰다.
다행히도 고대한 욕실이 맞았다.
여러 대의 세면대가 일정한 간견으로 서있었고, 반대 벽엔 용변을 보는 곳으로 추정되는 칸막이가 위치했다.
세면대 하나가 물방울을 규칙적으로 떨궈내고 있어 소녀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꼭지를 두 어 번 돌리자, 서늘한 공기와 달리 따듯한 물이 흘러나왔다.
호롱불을 옆 세면대에 내린 소녀가 손과 얼굴을 씻었다.
수온이 주는 안도를 목덜미 곳곳에 끼얹으며 꿈이 준 공포도 함께 씻어내릴 즈음이었다.
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곁을 보자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호롱의 불씨가 요동치고 있었다.
소녀가 그 이상한 광경을 눈치채길 바랐다는 듯, 뒤편에서 기척이 났다.
숨을 작게 마시며 돌아본 곳에는 들어올 적에 보았던 어둠뿐이었다.
소녀는 놀랐다기엔 다소 빤한 시선을 하며, 수도꼭지를 잠그고 호롱불로 손을 뻗었다.
이제는 떠나온 행성에서, 함께 살던 이는 말하곤 했다.
' 어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무얼 볼까봐 무서운 거야 언니. '
호롱의 무게가 조금 전보다 덜 한 걸 보니 불씨를 지피는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소녀는 그것을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쓰는 대신 기척이 들린 곳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활짝 열린 칸막이를 마주했다. 그 안엔 사용된 세월을 보이는 변기만 덩그러니였다.
" …… "
소녀는 잘못 들었나보다 생각하면서도, 한참 그곳을 응시하였다.
혹여 또 차체의 경적 소리와 굉음이 들려올까봐. 이것이 꿈 속의 꿈 같은 것일까봐.
허나 상당한 시간이 가도록 손에서 타는 심지 소리만 흘렀다.
소녀는 턱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닦으며 입구가 있을 곳으로 돌아섰다.
동시에 코앞으로 거대한 형체가 보이지만 않았다면, 소녀는 이 순간을 그저 기시감처럼 여기고 끝냈을 터였다.
허나 한쪽 벽을 다 덮을 만큼 큰 짐승이 소녀 앞에 아귀를 벌리고 있었다.
그것의 입김에 호롱불이 훅, 하고 꺼졌을 때 소녀는 숨을 멈춘 상태였다.
호랑이….
대상의 정체를 자각했을 때, 소녀는 어둠 속에서 혼란이 뒤섞였다.
있어선 안 될 곳에 있는 게 호랑이인지 자신인지. 이 부조화가 꿈인지 현실인지.
호흡이 뒤집어지고, 소녀는 의식을 놓았다.
기절한 소녀의 몸이 바닥에 둔탁히 부딪혔다.
조각나 흩어진 호롱 그릇 앞에서, 거대한 호랑이는 사람의 말을 중얼거렸다.
" 하품이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