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
W.린비
<4> 뜻밖
“ 걔를 왜 안 찾아요? 대체 왜? 이거 완전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인 게임인데? ”
백 소속 지대를 벗어나는 길목에서 벤더의 울대뼈가 오르락내리락했다.
녀석은 회의 내내 결계 안에서 마임을 하더니 이젠 아예 목청을 질러댔다.
민은 바로 곁에서 생각이 많은 얼굴로 나아갔다. 벤더에게 당하는 귀청보다 전학생의 소식을 처리하는 사고회로가 더 시끄러웠다.
온조는 한 걸음 물러서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 그 애를 데려오는 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전혀 모르잖아. ”
“ 와, 누나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계산적이네요? 딴 형들은 그렇다 쳐도 누나까지 애를 방치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우리 소속 추구가 명색에 ‘정’인데? ”
우리 소속의 추구는 ‘상호작용’이지 정이나 오지랖이 아니야, 이 자식아.
민이 언짢음을 누르고 답했다.
“ 그 애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이름뿐이야. 그리고 반대 세계 출신이라는 거. 그걸로 우리가 나설 이유가 있어? ”
그 애가 옥인지 돌인지 가릴 단서라도 주던지, 회장들은 덜컥 가입증만 안긴 학교의 행태에 기가 막혔다.
관할자는 철저히 공익을 위해 움직였다. 이익의 판가름도 없이 상황에 뛰어드는 건 무모했다. 무모를 경계해서 도달한 의문은 이랬다.
우리가 왜 새로운 날것을 거두는 수고를 해야 하지? 이미 있는 아이들을 관리하기도 벅찬데 말이야.
결국 그들은 학교에 반대하는 쪽을 택했다. 은사들로부터 납득할 만한 말이 내려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기로.
벤더가 발을 동동 굴렀다.
“ 능력이요, 능력! 내가, 아니 우리가 봤는데 걔 진짜 보통이 아니었다니까요? ”
민이 멈춰 섰다. 벤더의 한 손이 맹세의 표시를 하고 있었다.
온조가 그를 잡아 내리는 대신 안경을 치키는 걸 보니 두 녀석이 무얼 더 알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김준이 가둬놓은 거였나. 준이 감금을 누설 방지 차원이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어떠한 능력의 소유자인지는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김준 이 자식, 저 혼자 알고 벌써 움직인 거 아니야?
어쩌면 백 소속이 중간에서 정보를 막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이 재촉하는 벤더를 돌아봤다.
“ 혹시 지금 나만 이러고 있는 건가. 김준이랑 가루안이 경쟁자 줄이려고 가입증에 불찬성하는 척 작당한 거면. ”
“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죠. ”
니기럴, 김준. 니기럴, 가루안.
민이 이를 부득, 갈았다.
“ 철책선은 넘지마. ”
담장은 벗어나지 말라는 소리였다. 아이가 교정 안에 있다는 귀뜸이기도 했고.
벤더가 곧장 환하게 입을 찢었다.
“ 당연하죠! 찾으면 기숙사로 데려가면 되죠? ”
답을 바란 물음이 아니었는지 벤더는 곧장 팔다리를 휘두르며 멀어졌다.
민은 온조에게 부탁의 눈길을 했다. 조심성이라곤 없는 기면발작증 환자를 홀로 추적에 나서게 할 수는 없었으니.
온조는 순순히 끄덕이곤 가려다 품에 있던 것을 민에게 안겼다.
“ 누나가 더 필요하실 것 같아서. ”
두꺼운 양장 책이었는데, <지구>라는 표제가 자리했다. 전학생의 고향이라는.
벤더가 환호를 지르며 가로수가 늘어진 길을 내달렸다. 마치 사낭감을 쫓는 개처럼, 급발진한 외륜선처럼.
그 뒤로 온조가 허위허위 숨을 몰아쉬며 쫓았다. 천식 환자를 저렇게 배려하지 않는 놈도 없을 것이었다.
민은 어느 새 저만치 간 제 휘하의 둘을 보며 도리질했다.
여하간 이제 마중할 이들을 보내고 말았으니 남은 건 아이가 돌보단 옥이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
상아탑에는 ‘월교’라는 거대한 다리가 있었다.
수업 지대와 학생 쉼터를 잇는 월교는 언뜻 보기에 평평한 땅 같았는데, 그 밑은 인적이 드물고 잡초가 울창한 풀밭이었다.
소녀는 그곳의 어둔 응달에 숨어 든 것이라곤 옷 몇 벌 뿐인 짐을 그러안았다.
시선과 수근거림을 피하다 보니 이곳이었다. 또래들의 이목이 하나하나의 묵직한 구슬이 되어 기도를 막는 듯 했다.
은사들은 잠시간의 환영을 베푼 후 사라졌고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월교 위의 탑이 일곱 번의 모종을 울렸을 때서야 소녀는 깨달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고, 오지 않을 것이란 걸.
모든 것이 낯선데 제겐 불안정한 자신뿐이었고, 주위로는 이름 모를 세계가 둘러져 있었다.
이곳에 온 건 최선의 수단이라고 했다. ‘너를 위한 최선’ ‘다 너를 위해서’ ‘네가 힘들지 않도록’.
최선이든 차악이든 결론을 내기에만 급급했던 그들에게 소녀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가족. 더없이 소중했지만 닥친 현실 앞에 나를 버린 사람들. 절망에 쓸린 나를 놓은 방관자.
그러나 상실을 탓할 곳이 없어 그들을 잃어버린 사실만이 가슴에 사무쳤다.
소녀가 무릎으로 고개를 묻었다.
캄캄한 침전 속에서 얼마간의 시간이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사라지고 싶다는 심정이 사고를 좀먹어갈 즈음, 어떠한 기척이 들렸다.
소녀가 화들짝 고개를 들자 검은 두 발이 떨어지는 눈물을 피해 물러났다. 그건 사람의 발이 아니었다.
시선을 빨아들일 듯 검은 고양이가 소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갸르릉대던 그것이 곧 입에 문 것을 퉤, 뱉고는
“ 신이시여. 참으로 전무후무한 해결책이네. ”
완벽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였다.
“ 오갈 데 없는 꼴 하곤. 이런 걸 방책이라고. ”
마치 소녀를 아는 것처럼, 고양이가 뜻 모를 언변을 늘이며 노란 홍채를 넓혔다 줄이길 반복했다. 시선은 소녀를 보나 또한 저 너머를 보는 듯 했다.
고양이가 소녀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 뭘 그렇게 쳐다봐. 말하는 고양이 처음 봐? ”
소녀는 놀랄 힘도 없어 잠자코 흥건한 볼을 닦았다. 고양이는 싱겁다는 낯으로 조금 전 뱉어둔 것을 무성의하게 밀었다.
“ 갖고 있어. 어디든 가게 될 거다. ”
붉은 줄의 목걸이였다. 평행한 두 개의 작은 거울이 그곳에 걸려 마법처럼 돌고 있었다.
소녀가 선뜻 집지 않자 고양이는 그것을 손수 수중에 쥐어주기까지 했다. 그리곤 차마 붙들기도 전에 부드러운 발돋움을 하여 우거진 푸새 사이로 사라졌다.
소녀가 입을 뻐끔거렸다. 머지않아 고양이가 사라진 반대편 수풀로부터 누군가가 넝쿨을 마구 헤치며 등장했다.
“ 와학, 이 놈의 고양이 발재간 한 번 빠르네. 어디로 갔지? ”
긴 장발의 여아였는데 키가 족히 2m는 되어 보였다. 허우대만큼 큰 눈을 가진 팔척장신은 바람에 부대껴진 듯한 머리로 인근을 휘휘 둘러보다 소녀를 발견했다.
“ 어라? ”
팔척장신이 푸른 눈을 반짝였다. 그러다 소녀가 쥔 것을 보고 또 ‘어라라라?’ 하였다.
그이의 고개가 헤쳐진 풀들처럼 비스듬해지는 사이, 또 다른 이가 그 곁으로 나타났다.
키는 팔척장신과 대조되도록 평범하나 얼굴의 곡률이 마치 빚어진 것처럼 날렵하고 동글한 남아였다. 시선이 성가신 듯 비딱한 동시에 그윽해서 어딘가 오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팔척장신이 그이를 팔꿈치로 치며 말했다.
“ 야, 우경.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나? ”
‘우경’이라 불린 이가 건들린 곳을 털며 답했다.
“ 묘족이라면. ”
그러면서 흙 묻은 발을 풀에 흠씬 비비는 것이 오기 싫었다는 표현을 노골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 와학, 그러니까 저게 고양이의 의인화일 수 있다는 거지? ”
팔척장신이 소녀를 가리켰다. 그제야 ‘우경’이란 이의 시선이 소녀에게 넘어갔다.
“ 저건 그냥 사람 같은데. ”
“ 그치만 내 목걸이를 들고 있지. 고양이는 아니래도 고양이랑 한 패 정도는 된다는 거지. ”
팔척장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소녀는 어떤 반향을 보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했다. 주눅이 든 것이었건만 상대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우드득, 소리를 내며 목을 돌렸다.
“ 쟤 내 말 무시하는 것 같은데 싸울까, 우경? ”
“ 체급은 맞춰라. ”
“ 와학, 농담이지. 근데 왠지 오기 생긴다. 말 더 걸고 싶어. 일단 연행을 좀 해갈까? ”
순식간이었다. 팔척장신이 두 보폭만에 다가와 표준을 초월한 괴력으로 소녀를 들쳐 업었다. 기겁한 소녀로부터 떨어진 짐을 ‘우경’이란 소년이 받아 들었다.
“ 살살해라. ”
“ 와학, 얼마나 신사적이야! 좀도둑 대하는 것치곤. ”
하늘이 햇살을 차츰 지평 너머로 거두었다. 한낮의 그림자에 숨었던 소녀는 지는 해를 따라 이름 모를 이들에게 거두어졌다.
‘ 갖고 있어. 어디든 가게 될 거다. ’
그 고양이는 대관절 무슨 상황을 넘기고 간 걸까. 오도가도 못하던 미아에게 전무후무한 곤란과 만남을 안기고 사라졌다.
***
낯선 상대들이 가파른 벼랑으로 소녀를 운반했다.
땅이 거대하고 무딘 날에 썰린 것처럼 두 쪽으로 거칠게 갈라져 있고 그 틈으론 폭포수가 흐르는 지대였다.
소녀는 팔척장신의 어깨에 널려 강한 물줄기가 중력을 잊은 마냥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광경을 목도했다.
상대들이 물가로 다가서기에 저를 던져 절멸시킬 작정인가 했으나, 그들은 그러는 대신 뭍과 가까운 허공에 소녀에게서 되찾은 목걸이를 찔러 넣었다.
그러자 강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리며 비밀의 보고처럼 숨겨진 입구가 드러났다.
적 소속의 기숙사였다. 건물이 행성의 핵과 가까워지길 갈망하듯 땅 밑에 자리했다.
붉은 원석으로 장식된 입구를 지나 내부로 들면 평행한 복도가 이어졌다.
통로의 양 벽은 송두리째 거울로 물과 같이 일렁였는데, '네가 거울을 보면, 거울도 너를 본다'는 글귀가 잠겨있었다.
적 소속 이들은 매일 아침 방을 나와 가장 먼저 벽에 비친 자신을 마주쳤다. 다만 표면의 형상이 아닌 정신 상태의 모습으로.
거울 속 자아는 오직 그 주인에게만 보였으며 모습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온종일 주인을 따라다녔다.
소속원들 사이에선 그 벽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 속에 빨려 들면 자신의 가장 깊은 심연을 마주한다고 했으니.
아주 무겁고 깊으며 누구에게도 열어 보일 수 없는 자아를 말이었다.
물론 그 반사체를 끝내 당당하게 마주해내는 것이 적 소속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바였다.
팔척장신과 그의 친구는 소속 공동의 공간처럼 보이는 곳에 소녀를 내렸다.
붉은 융단이 두텁게 깔린 곳에서 아이들은 방석을 깔거나 벤 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팔척장신이 사람을 지고 나타나는 게 익숙한 일인지 놀랍게도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 와학, 이제 말해보실까 좀도둑? 어디 소속이야? 신입생? 딱 봐도 우리 쪽은 아니고, 황? 백? 흑? ”
거구의 여아가 봐도 봐도 놀라운 허우대를 숙이며 소녀를 위압적으로 내려다 봤다.
소녀는 낯을 수그려 희번득한 상대의 눈 대신 그이의 명찰을 마주했다. 꽤나 앙증맞은 이름자가 그곳에 적혀 있었다.
<박열매>
'우경'이란 이는 협박을 도울 의사가 없는 냥 멀찌막히 소녀의 짐을 베고 누웠다.
팔척장신과 '한 패인 듯 아닌 듯'한 위치를 고집하는 그이의 본명은 <우경우>였다.
지독한 개인주의자로, 불행히도 극성스러운 휴머니즘 거인에게 3년째 붙들려 다니는 중이었다.
오늘 경우는 고양이를 추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열매가 제 신발 한 짝을 벗겨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욕지거리(이런 시X!)를 하며 쫓았을 뿐.
그 끝에 얻은 건 더러워진 두 발과 범인으로 추정되는 소녀였다.
열매가 소녀를 파악하려는 듯 소녀의 팔다리를 여기저기로 올렸다 내렸다. 그 모습이 꼭 어린 아이가 새로 산 구체 관절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 상아탑 학도는 맞는 건가? 너 묘족이냐? 아님 고양이랑은 무슨 사이야? 내 기숙사 출입증은 왜 훔친 거냐? 네 명의로 등록 안 된 거라 쓸 수도 없는데 왜지? ”
“ …… ”
“ 요즘 변방에 학도생 물건을 사들이는 놈들이 있다던데, 거기다 팔려고 했던 거야? 거짓말로 협잡질할 생각일랑 마. 내가 이래 봬도 수색대 아부지 딸이거든? 와학? ”
그 사이 경우는 베고 있던 소녀의 짐을 목 뒤로부터 뺐다. 든 것이 없어 불편하였다.
보통 도둑의 짐이 가벼운 이유는 두 가지였다. 초짜거나, 훔친 걸 이미 팔아넘겼거나.
열매가 어느 쪽인지 모를 소녀를 살피다 별안간 경탄을 흘렸다.
“ 야, 근데 너 눈 진짜 신기하다. 반타 블랙인가? 꼭 홍채 염색한 것 같아, 와학. 우경, 이거 좀 봐봐. 묘족들 눈이 이런가? ”
경우가 성가신 낯으로 돌아보았다.
녀석은 눈매가 날 선 것은 아니나 어딘가 말문을 틀어막는 힘이 있었다. 눈 밑이 거뭇하고 시선은 올곧으며 동공의 색이 신비로웠다.
소녀는 문득 이 세계의 이들이 모두 눈에 빛깔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 이런 검정이랑 얽히면 만사가 복잡해진다던데. 근데 난 복잡한 거 좋아해. 단순한 거보다 스릴 있잖아! 와학! ”
그 순간이었다.
“ 그럼 스릴 있게 차여봐라, 썅. ”
돌연 제 3의 목소리가 들리고는 열매의 옆구리에 발길질이 매다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