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일 없었니?”
생각도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신의 입 밖으로 내뱉은 대답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우스웠다.
“모르겠어요.”
수연이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지는 보지 않아도 빤했다. ‘얘는 자아도 없더니 여전히 생각도 없네.’ 보나마나 한심하게 보고 있을 것이다. 그 시선을 확인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별 일이라 말하려면 모든 것이 별 일이었다. 사라졌던 능력이 다시 돌아온 일, 아버지의 유골이 사라진 일, 성혁에게 대놓고 시비를 걸었다가 면박 받은 일, 나름 한다고 했던 반항들이 빛도 못 본 일 등등... 그 모든 것이 유진에게는 너무나 큰 별일이었다.
하지만 이 중 하나라도 수연이 보기에 별 일이 될 수 있는 게 있을까? 그저 어린애의 징징거림 이상으로 여겨질 일이 있을까?
“대신, 뭐 물어봐도 돼요?”
긴 정적이 다락방을 삼켰다. 아직 침입자들이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는지, 1층에서는 계속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다. 질문을 던지기엔 적절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조차 확실할 수 없지만, 질문만이라도 던져둬야 할 것 같았다. 그 답은 나중에 듣는 한이 있더라도.
“뭔데?”
마침내 허락처럼 수연의 말이 떨어졌다.
“그때... 왜 저한테 오셨던 거예요?”
“......”
“절 보육원에 데려가고... 매일 같이 찾아오고...”
“......”
“저한테 뭘 하려고 하셨던 거예요?”
“그게 다야?”
“아유~ 언니. 그럼 뭐가 더 있겠수?”
“말하려면 여기서 다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미순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다~ 말했수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디 웬수가 한둘이우?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몇 명 처리해줬더니, 그게 지 마음에 쏘옥 들었던지 또 부탁하는 걸 나더러 어쩌란 거요?”
“유진이 들먹이면서?”
경자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역시 아무리 늙었어도 왕년의 그 눈빛은 어디 가지 않는다.
“아니, 다 들어놓고 뭘 말하라고 닦달이우?”
미순은 괜히 뜨끔해하며 궁시렁거렸다.
“거, 아무리 내가 팔아넘긴 아이라고 해도, 언니 좀 너무하단 생각 안 들어요? 걔한테 뭐 시키는 것 같지도 않고 나 협박할 때나 쓰는 거 같던데, 그럴 거면 그냥 나한테 넘기쇼. 내 호적에 올릴 테니.”
“호적에 남편 이름도 없는 주제에 무슨...”
“에이, 그러지 말고 넘겨요. 아, 혹시 유진이 들먹거리지 않으면 내가 말 안 들을까봐 그러우? 걱정을 하덜덜 말아요. 내 언니 말 잘 들을게. 응?”
이왕 걸린 거 당당하다는 듯 배 째고 나갈 심산이었다. 저 여우 앞에서는 괜히 아닌 척 하다가 칼 맞느니, 솔직하게 질러버리는 게 더 안전했다.
“어림없는 소리. 내 돈 들여 입히고 내 정 줘서 키운 애를 너한테 왜 넘겨?”
“엥? 언니,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우?”
유진을 키우는 데 경자의 돈이 들어간 거야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지만, 정 줬다는 표현은 영 낯설었다. 제 자식 키우는데도 정 들인 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내가 언니가 사람한테 돈 쓰는 건 봤어도 정 쓰는 건 본 적이 없수다. 정 주긴 개뿔.”
“정을 왜 안 써? 사시사철 밥은 잘 먹는지, 아픈 덴 없는지, 표정이 나쁘면 별 일은 없는지 내내 살피고 안부 물으며 크는 거 지켜본 게 나야, 이 사람아. 걔도 그런 할미 맘을 알고 할미 표정이 좋지 않으면 어리광도 부리고, 몸 편치는 않은지 살펴주고 얼마나 이 할미를 살뜰히 챙기는데. 응?”
미순이 입을 삐죽거렸다. 정 줘서 애를 키운 게 아니라 자상한 할머니에 취해 인형놀이나 한 거겠지. 어릴 적 유진이 있다는 보육원 정보를 넘긴 이래 한 번도 유진을 들여다 본 적도 없는 미순이었지만, 안 봐도 빤했다.
“아무튼, 유진이까지 들먹거렸지만 그게 다입니다요. 뭔가 본격적인 거 말하려는 찰나에 언니가 산통 깨고 나타나지 않았수? 그러니 난 뭐 들은 것도 없다고요.”
“실 없는 말 길게 늘어놓지 말고.”
미순은 긴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아유,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언니 눈을 어떻게 속여.”
하지만 미순의 너스레에도 경자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지은 죄가 없어도 사람을 위축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그러고보면 저 눈빛을 잘 받아낸 스스로도 이 정도면 보통은 아닌 거다.
“인병철.”
뜬금없는 이름에 경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인병철 죽인 놈이 따로 있었수.”
“뭐?”
“그런데 그 놈이 언니가 개판 낸 안평기업 아들이우.”
폭탄고백과도 같은 말을 내뱉은 미순이 경자의 표정을 살폈다. 큰 변화는 없었지만, 여태까지 자신이 본 표정 중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이 정도면 성공인 듯 했다.
“인 의원이 그 놈 아작 내려고 몇 번 시도를 했는데, 실패했수. 아, 글쎄, 불을 질렀는데도 살아 남았더라니까?”
“불을 질렀는데도 살아남았다고?”
“그렇다니까요. 그 어디냐, 저기 큰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던데.”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경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그 사람이 사는 데가 저기 동네에 큰 주택이야?”
“거기까진 모르겠는데, 아마 맞을 걸요?”
“그럼 그 팸플렛이...”
“네? 뭐요?”
경자가 고개를 저으며 미순의 질문을 끊었다.
“아니야. 그래서... 그 놈을 처리하겠다는 게야?”
“아무렴요.”
미순이 괜히 경자의 눈치를 보며 흘낏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뗐다.
“근데 언니도 좀 초조하긴 하겠수?”
“응? 내가 왜 초조해?”
“언니 지금 사업이 이렇게 큰 게 안평기업 거 다 받아서 이리된 거 아니우. 그 안평기업 아들인 도현이란 놈이 이를 갈면서 Bz 무너뜨리려고 하나본데, 여차하다간 지금까지 쌓아온 언니 회사까지도 다 뺏길 지 몰라요, 응?”
“저한테 뭘 하려고 하셨던 거예요?”
이와 비슷한 질문을 누군가에게 했던 것 같은데... 맞다. 도현에게 했었다. 왜 자신을 데려왔냐고. 그 때 도현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예 생각을 하지 않았다던가?
미순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거 같다. 그 답도 생각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왜 찾아갔더라?
처음엔 풀리지 않는 분노를 누군가에게라도 풀기 위해 찾았던 거였다. 그리고는 감옥에서 썩어갈 그 인간에게 더 큰 좌절을 안겨주기 위해 다가간 것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고의적이었고, 그 누구보다도 악의적이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 아빠한테 복수하려고 하셨던 거죠?”
“......”
“그게... 어떤 거였어요?”
무려 1년이나 되는 시간동안 유진을 보러 갔던 건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저 아이에게 어떤 짓을 해야 강경식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복수가 될지.
... 정말 그랬던 걸까?
“널 보러갔던 모든 순간이 복수였던 건 아냐.”
그때였다. 1층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우당탕거리며 넘어지고,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수연과 유진은 쥐죽은 듯 조용히 그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집안을 맴돌던 인기척이 모두 사라졌다.
“넌 여기 있어.”
수연은 유진을 다락에 남겨둔 채 1층으로 향했다.
연기가 아직 다 빠지지 않았는지, 시야는 선명하지 않았다. 뿌연 안개 속에 가구들의 실루엣이 조금씩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창 밖에서 달빛이 비추면서 1층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스탠드며 화분이 모두 넘어져 박살나 있었다.
1층의 장애물들을 헤치고 나가던 수연의 발걸음이 멈췄다.
달빛이 비추는 거실 한가운데. 도현이 쓰러진 채 가만히 있었다.
바닥을 절벅하게 적시는 붉은 피 위에는 어떠한 숨소리도, 실낱같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의 삶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