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호는 많이 차가워진 바람을 느꼈다. 그렇게 더웠던 여름이 가고, 서서히 서늘해지다가 오늘은 유난히 차가웠다. 은호는 차가운 공기에 감각들이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그 감각들은 은호에게 좋은 기분을 살짝 갖게 해주었다. 아직은 괜찮은 차가움이었다.
은호는 빨간 나뭇잎들로 가득한 나무 사이를 걷고 있다. 자그마한 잎에 다양한 빛깔의 붉은색이 신기했다. 매년 보는 단풍이었지만 은호는 새로웠고, 반가웠다. 눈앞에 붉은 단풍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은호는 손을 내밀어 그 단풍잎을 잡았다.
“아싸”
은호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몰랐다. 그냥 단풍잎이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게 신기했다. 은호는 너무도 예쁘게 물들어 있는 단풍잎을 돌려가며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두 손바닥으로 꼭 눌렀다. 손안에 들어가는 작은 단풍잎이었다. 가방을 열어 책 사이에 단풍잎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은호는 갑자기 느껴진 냄새에 순간 당황했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들이 바닥에서 냄새를 풍겨내고 있었다. 은호는 발끝으로 걷기 시작했다. 곳곳에 떨어져서 눌려진 은행나무 열매를 피해야 했다. 그 냄새가 많이 지독해서 양손으로 코를 막았다. 그리고 재빨리 걸어서 그 근처를 벗어났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들어왔다. 역시나 아무 소리 없고, 그래서 더 어둡게 느껴졌다. 은호는 가지런하게 이미 정리 되어 있는 신발을 또 정리했다. 그래야만 은호의 마음이 편해졌다.
은호는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앉았다.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아까 넣어둔 단풍잎이 잘 눌려져 있었다. 은호는 티슈로 단풍잎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책으로 단풍잎을 눌려 놓았다.
서랍장에서 가위와 코팅지를 가져왔다. 예전에 썼던 코팅지가 다행히 아직 남아 있었다. 단풍잎을 코팅지 사이에 넣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단풍잎 모양대로 잘라냈다. 마음에 들었다.
은호는 갑자기 무언가 기억난 듯 순간 멈췄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가 조그마한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그곳에는 몇 년 전부터 은호가 만들어놓은 단단한 단풍잎들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은호는 그 단풍잎들을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코팅 된 단풍잎들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은호가 그렇게 해 놓은 것들이었다. 아빠와 함께 그렇게 해 놓은 것들이었다.
은호는 잊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기억에 당황했다. 이제껏 아파서 하지 않은 행동들이었다. 찾지 않은 기억들이었다. 그러다가 은호는 오늘 자신이 한 행동에, 그래서 떠오른 기억들에 괜히 미안해졌다. 아빠와의 기억이 옅어졌을까봐 순간 두려워졌다.
은호는 단풍잎이 들어 있던 상자 속에서 사진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도 단풍잎들 사이에 은호가 넣어둔 것이었다. 그곳에 넣어두면 은호 눈에 띄지 않을 것이었고, 그러면 사진 속 그때의 기억에 힘들어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었다.
사진 속에는 은호가 웃고 있었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는 아빠와 그 뒤쪽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장난기 가득한 은호가 있었다. 은호는 붉은 단풍잎을 들고, 아빠는 노란 단풍잎을 들고 그렇게 평화로운 배경에서 반짝이며 찍혀 있었다.
은호는 그날이 기억났다. 그날 은호는 그곳이 천국이라고 한 아빠와 함께 행복했다. 은호는 쉴 새 없이 떠오른 기억에 무너지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은호의 얼굴에 흘렀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그런 울음이었다. 너무 아파서, 너무 미안해서, 너무 행복했던 기억에 은호는 주저앉고 말았다.
은호는 소파에 누웠다. 눈물이 얼굴 양쪽 옆으로 흘러내렸다. 너무 뜨거워서 그 느낌에 은호는 더 울었다. 아무 소리 없이 은호는 쿠션을 방패삼아 그렇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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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야, 오늘 우리 여기 가자.”
은호는 선우가 보여준 휴대폰 사진을 바라보았다.
“거기가 어디야?”
“집에서 한 두 시간 가야 되는 곳인데, 얼마 전에 잡지책에서 보고 찍어놨지.”
선우는 늘 그랬다. 맛있는 곳, 멋있는 곳, 재미난 곳을 알게 되면 최대한 시간을 내어서 은호와 함께 갔다. 늘 바빴지만, 은호가 더 크기 전에 선우는 은호에게 좋은 기억들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은호가 내년에는 중학생이 되니까 더 시간이 어려울 거라는 주위의 말들에 선우는 올해 은호를 위해 어떻게든 시간을 내야 했다.
선우는 혼자 이것저것 준비해서 은호와 함께 차를 타고 사진에 적힌 주소로 향했다. 주위의 산들은 알록달록한 단풍들로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붐비는 고속도로를 겨우 지나 도착한 그 사진 속 장소는 생각보다 한적했다. 강물이 흘렀고, 그 강물은 햇빛을 받아 끊임없이 반짝였다. 하늘에 그림 그려 놓은 듯 흩어져 있는 구름에 감탄했고, 땅 위의 모든 것을 눈부시게 만드는 햇살에 감동했다. 얼굴 위에 스치는 바람은 살짝 차가워서 모든 감각들이 이 모든 것을 또렷하게 느끼도록 해주었다.
선우는 반짝이는 강물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반짝이는 강물을 위해 최고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은호야, 여기는 천국 같아. 너무 예쁘다.”
은호는 반짝이는 강물에 마음을 빼긴 선우의 옆에 섰다. 선우가 이렇게도 좋아하는 모습을 은호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은호도 강물의 반짝임이 좋았다.
선우는 한없이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혹시 누군가가 이런 곳에서 살게 해준다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간절한 다짐이 선우의 마음에 가득했다. 선우는 이 장면들을 기억 속에 넣어두었다. 힘들 때 꺼낼 볼 수 있는 사진처럼 기억 속에 새겼다.
“아빠, 우리 사진 찍자.”
은호가 휴대폰 사진을 찍으려했다. 은호는 선우를 돌려 세웠다. 반짝이는 강물이 은호와 선우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햇빛이 선우와 은호의 얼굴을 안보이게 만들었다. 몇 번을 찍어도 사진은 계속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은호야, 그럼 아빠가 뒤로 찍을게. 그럼 은호는 아빠 뒤에 서서 찍어. 대신 잘 찍어야 된다.”
그리고 선우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빨갛고 노란 단풍잎을 하나씩 주웠다.
“너 어떤 것 들고 찍을래?”
선우의 말에 은호는 당연한 듯 빨간 단풍잎을 잡았다.
“노란 은행잎은 냄새 날 것 같아.”
은호의 말에 선우는 일부러 은호 얼굴 앞으로 은행잎을 가져다 댔다.
“이 은행잎도 얼마나 예쁜데. 이런 모양이 쉽게 나오는 게 아냐. 둥글둥글하고 노란 잎이 아빠가 보기엔 너무 예쁜데.”
그래도 은호는 괜히 코를 가리고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집에 가면 이것도 단단하게 만들어 놓자. 기념으로.”
선우는 매년 해오던 행사를 하자고 했다.
“그 뭐지? 하여간 그 단단한 비닐로.”
“단단한 비닐이 아니라, 코팅지.”
은호는 선우의 말에 놀리듯 말했다. 선우는 괜히 서둘렀다.
“자, 단풍잎도 잘 나오게 잘 찍어봐.”
은호는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는 선우의 뒤에 섰다. 선우는 한쪽 손에 노란 은행잎을 들고 은호의 가림막이 되어주었다.
“하나, 둘, 셋”
은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선우 덕분에 사진은 잘 나왔다.
“아빠, 잘 찍었지?”
선우는 은호가 보여준 사진을 바라보고 웃었다. 은호의 얼굴과 반짝이는 강물이 잘 나온 사진이었다.
“아빠 얼굴 나오게 다시 한 장 찍을까?”
은호는 선우의 얼굴이 안 나온 게 내심 신경이 쓰였다.
“아니, 아빠는 이 사진 좋은데. 그리고 뒤 모습만 봐도 누군지 알잖아.”
선우는 사진 속 은호의 얼굴에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아빠인 거 아니까. 다음에 우리 잘 찍어봐.”
은호는 그렇게 별 생각 없이, 별 의미 없이 사진 한 장에 만족했다.
“아빠, 다음에 우리 이런 곳에서 살까?”
은호는 선우의 손을 잡고 걸으며 말했다.
“그래, 다음에 아빠가 이런 곳에 멋진 집을 하나 마련해 놓을 테니까. 나중에 놀러와.”
“왜 나랑 안 살 거야?”
은호의 뾰로통한 표정에 선우는 크게 웃어버렸다.
“너 어른 될 때까지만, 그 뒤로는 너도 멋있게 살아야지. 대학도 가고, 직장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너 덕분에 나도 멋있는 할아버지 해보자.”
은호는 선우의 말에 섭섭했다.
“아빠는 나랑 살기 싫은 거야?”
선우는 그런 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나는 우리 은호랑 평생 같이 살 거야.”
선우의 말에 그제서야 은호의 표정이 풀어졌다.
선우는 간절히 바랐다. 은호가 진심으로 행복하면 좋겠다고. 이제껏 누구한테 하는지도 모르고 계속 바랐던 그 바람을 지금 이 순간 선우는 또 바라고 있었다.
‘은호가 행복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