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상태가 며칠 좋지 않았다. 연말이라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어 그 며칠을 선생님의 상태를 지켜보며 지냈다.
얀이의 기일이 다가 올수록 선생님의 상태는 눈을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런 선생님을 혼자 둘 수는 없어 집에 데려와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른 아침에 눈을 뜨니 집에 선생님이 안 계셨다.
온 집을 샅샅이 찾아봐도, 선생님의 집도, 출판사에도, 작가선생님들의 집에도, 그 어디에도 선생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내 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절망과 슬픔에 침식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혹시나 싶었다.
혹시, 얀이를 마지막으로 보냈던 그 장소에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선생님이 더 이상은 감당하지 못한 슬픔에 제어 하실 수 없는 건 아닐까, 온갖 추측과 상상으로 머리 속이 터질 거 같았다.
무슨 정신으로 그 곳까지 운전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나 선생님은 그 곳에 계셨고 감당 할 수 없는 슬픔에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조차 깨닫지 모르고 깊은 바닷속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고 계셨다.
필사적으로 선생님을 붙잡았다.
찢어질 듯 한 차가운 바닷물이 주는 고통보다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그 슬픔이 더 찢어지게 아파왔다. 내가 그의 슬픔을 잊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과 위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리고 나는 그에게 있어 바라왔던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깊숙이 찔러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다가 얀이가 나타났다. 그녀의 존재로 선생님의 깊은 절망과 슬픔의 그림자는 어느새 사라졌다. 그토록 노력했었는데…….
결국은 얀이, 그녀의 존재, 그 이유만으로 텅 비어있었던 선생님의 눈이 다시금 빛났다.
얀이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이유는, 어쩌면 내가 마음에 품어서도 안 되는 존재를 품게 되어 나로 인해 어긋나버린 운명을 다시 돌려놓기 위해 우리의 시계바늘이 되돌아간 게 아닐까?
그 동안 밀렸던 일들을 하느라 밤을 꼬박 세우고 일찍이 출판사에 나와 나머지 업무들을 하나 둘 처리하기 시작했고 겨우겨우, 그 끝이 보였다.
창문에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의자에 기대 기지개를 쭉 폈다. 그제서야 온 몸의 근육들이 긴장감에서 해방되어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 정적을 깨는 전화소리.
“여보세요?”
“애비다.”
이완되었던 근육들이 그 목소리에 다시 움츠러들며 긴장상태가 되었다.
“네.”
“지금 당장 집으로 건너오거라.”
“점심에 약속이 있어서 오후에 들릴게요.”
“중요한 약속이니?”
“네.”
“언제부터 도윤선생 그 작자와의 약속이 나보다 중요한 게 된 게냐?”
“…….”
“요 며칠 네 일도 내팽개치고 출판사에도 오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선생 때문이라는 거 안다. 내 뒤를 이을 놈이 그렇게 남에게 휘둘려서야 되겠느냐.”
“아니, 아니에요.”
“네가 정 그 선생에게 취소하겠다는 말을 못하겠다면 애비가 직접하마.”
“아버지!”
“집에 오겠다는 뜻으로 알겠다.”
“……. 네.”
전화를 끊고서야 바짝 긴장한 근육들이 다시 이완되었고 깊은 한숨이 뒤이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와의 통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났고 난 단 한번도 그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거절 할 수 없었다.
거절했다면 아버지는 선생님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고 분명 좋지 않은 말들을 하셨을 거다.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하…”
또 다시 한숨.
항상 곁에 있어, 잊고 지내온 내 발목에 채워진 족쇄의 존재가 느껴졌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 이 모든 풍족한 생활을 계속 하는 한 난 그 족쇄를 끊을 수 없고 설상 끊는다고 해도 그 대가는 내가 아닌 선생님에게 향할 것이 분명하다.
준이는 서둘러 어질러져 있는 책상 위를 정리하고 급히 옷을 걸쳐 입고 방 밖으로 나갔다.
“어디 나가세요?”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던 준이의 비서가 준이를 발견하고 물었다.
“아, 네. 급히 가야 할 곳 이 있어서요. 끝마치는 데로 다시 들어올게요.”
“도윤 선생님과 점심약속 가시는 거에요?”
“아니요.”
“도윤 선생님이 오시면 제가 뭐라고 전해드려야 할까요?”
“급한 일이 생겨서 점심 같이 못할 거 같다고 전해주시고 제 기사님 차 타시면 목적지까지 안내해 주실 거라고 얘기해주세요. 그리고 저 대신해서 기사님께 선생님이랑 그 일행 잘 모셔서 가달라고 해주세요. 여기… 영화 표도 같이 전달해 주세요.”
“네, 조심이 잘 다녀오세요.”
서둘러 준이가 아버지의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출판사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금방 집 앞까지 도착 할 수 있었지만, 따로 독립해서 나가 살게 된 이후로는 거의 방문을 하지 않았던 곳이라 대문 앞에 서자 긴장이 되어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대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뵈러 왔어요.”
어릴 때부터 보던 도우미분들이 오랜만에 본가에 방문한 준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한적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곳이 다시 활기를 되찾은 듯 사람들의 인사소리로 가득했고 준이의 얼굴에는 어느새 긴장감이 사라지고 미소만이 자리 잡았다.
마당과 현관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니 정겨운 집안의 냄새가 났다. 그 특유의 집 냄새가 준이를 더욱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준이가 들어오자 무심한 듯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 없이 빈 찻잔에 미리 우려두었던 홍차를 따랐다.
“저 왔어요.”
무뚝뚝하게 말을 하고 준이가 맞은 편에 앉았다.
침묵. 그리고 향긋한 홍차 냄새만이 집 안을 가득 채워졌다.
준이가 찻잔에서 홍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아버지가 먼저 침묵을 깼다.
“도윤 선생에게는 점심약속이 취소되었다고 말을 했나 보구나,”
“네.”
“너도 여기 오래 있어하고 싶지 않은 거 같으니 본론부터 말하마. 네 나이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이 들지만은 너는 앞으로 내 뒤를 이을 텐데 하루 빨리 안정되어 있는 게 너에게 도움이 될 거 같아 좋은 자리 하나를 마련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너랑 어울릴만한 집안에 외동딸이라고 하더구나. 너랑 나이도 같고 그리고 그쪽도 딸을 빨리 시집 보내고 싶어하길래 이보다 더 좋은 짝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네?”
“오늘 한시 반이다. 이미 그쪽도 그렇게 알고 준비하고 있을 테니 거절 할 생각은 않는 게 좋겠지.”
“아버지!”
“기사에게 말을 해뒀으니 약속 장소에 데려다 줄 테다.”
“죄송하지만 결혼 생각이 없어요.”
“결혼으로 안정이 되면 좀 더 내 뒤를 수월하게 이을 수 있을 거니 너에게 좋은 게 아니냐?”
“아버지. 예전에 아버지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고 하셨죠.”
“그래.”
“그래서 제가 출판사를 얻고 그 조건으로 제 꿈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다른 일들도 같이 이어받기로 했고요.”
“그래, 그랬지.”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여기서 더 잃어야 할 필요는 없죠.”
“그래서 오늘 가지 않겠다는 게냐?”
“아버지 체면도 있으시니 이번 한번, 얼굴만 비칠 거에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자리 만드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아버지 체면 챙겨드리는 일은 없을 거니까요.”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나 보구나.”
그 말을 하는 아버지의 눈빛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준이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 날카로웠고 그런 아버지의 눈빛과 마주친 준이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
“말 하지 못 하는 거 보니 너도 네가 잘못된 마음이라는걸 아는 모양이구나.”
준이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자기가 품고 있는 이 마음, 도대체 무어라 말 할 수 있을까. 아니, 입 밖으로 꺼내도 되는 그런 마음인 것일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집에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차 뒷문을 열어 준이를 태웠고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준이는 그저 말 없이 창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 금방이라도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릴 거 같았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존재에게 들켜버렸다. 마치 사냥감이 사냥꾼의 그 흔들림 없이 꿰뚫어보고 있는 그 눈빛에 압도되어 꼼짝도 할 수 없듯이 속마음을 들켜버린 준이도 사냥감마냥 얼어붙어버렸다. 겨우, 정신을 바짝 잡고 가보겠다는 말로 그 상황을 벗어났지만 이미 들켜버렸다. 거기다, 부정까지 당했다. 그리고 그 부정당한 것에 대해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이번 아버지와의 주도권싸움에서 보기 좋게 또 지고 만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던 준이의 시선이 도착했다는 기사의 목소리에 깨어났다.
“여긴가요?”
“네. 도련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있다고 하셨으니 올라가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금방 내려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네? 저야 상관없지만, 괜찮으실까요? 주인어른께서…….”
“네. 걱정 마세요. 저 갔다 올게요.”
가기 싫은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찻집 안으로 준이가 들어갔고, 안내를 받아 자리로 이동하는데 상대는 벌써 와 있었다. 준이가 테이블에 도착하자 상대가 준이를 보며 눈인사를 먼저 했다.
“안녕하세요.”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구불구불한 웨이브가 인상적인 여자가 자리에 앉은 준이를 보며 인사했다. 짙은 눈썹과 짙은 속눈썹이 한 껏 그녀를 귀티가 흘러보이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준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각자 자신들의 앞에 놓인 차만 홀짝홀짝 마셨다. 침묵을 먼저 깬 건 여자였다.
“저희 시간낭비는 하지 말죠.”
“네?”
“본론으로 들어가요. 저랑 결혼 하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