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석에 탄 도윤은 준이가 준 담요를 덮은 채 따뜻한 차 안의 공기에 나른해져 꾸벅꾸벅 잠에 취하다 이내 잠이 들었다.
몇 날 며칠을 잠들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잠이 들어서인지 얀이와 준이가 차 문을 열고 타는 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졌다.
"도윤 선생님은?"
"주무셔."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단 걸 아는 준이가 도윤이 잠에 깨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리곤 뒤척이다 흘러내린 담요를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사랑이구나."
"어?"
"아, 아냐."
"내 집으로 갈게. 그리고 당분간 아버지에겐 비밀로 하자.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놀라실 거야."
"그래."
집으로 가는 길, 창 밖을 바라보았다.
건물들, 지나치는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옛날의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여길 왜 오게 된 걸까…?
이 곳에 왜 오게 된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저 두 사람이 내가 여기로 오게 된 이유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 또한, 그저 내 느낌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 새 목적지에 도착해있었다. 눈 앞에는 영화에서만 보던 넓은 정원과 분수대가 있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집이었다.
자동차 시동이 꺼짐과 동시에 집에서 몇몇 사람들이 나왔다.
"저분들은 집안일을 해주시는 분들이야. 쌍둥이인 얀이 네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본적이 없으니까 사촌누이라고 소개시킬게."
"응."
차에서 내리니 그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얀아. 먼저 가 있어. 나 선생님 잠에서 깨면 들어갈게. 요새 통 주무시지 못하셨는데 지금 푹 주무시고 계시니까.….."
사람들을 따라 집으로 홀로 들어가다 뒤를 돌아 보았다.
흘러내린 담요를 조심스레 올려주는 준이가 보인다.
준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려왔다.
왜일까?
집으로 들어가는 얀이를 확인 후에 차 서랍에 넣어둔 선생님의 책 한 권을 조용히 꺼냈다.
벌써 수십 번 정독해 손때가 많이 묻은 책이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한 명이 자기와 닮아있다고 느껴 수십 번을 읽고 또 읽게 된다.
선생님이 어떤 생각으로 이 글을 쓰신 건지 묻고 싶지만 물을 수 없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도 아직은 들을 용기가 없다.
「너와 같은 마음을 가졌는데, 나는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 걸까…….」
"너와 같은 마음을 가졌는데, 나는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 걸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따라 읽어본다.
"흐음…"
깊은 잠에 빠졌던 도윤이 이제야 깼다. 도윤의 인기척에 놀란 준이가 잡고 있던 책을 놓쳐 바닥에 떨어졌다.
"녀석도 참. 뭘 읽고 있었길래 그리 놀라 책까지 떨어트리는 거니."
화들짝 놀란 준이가 귀엽다는 듯 도윤이 웃으며 떨어트린 책을 주웠다.
몇 번을 읽은 건지 책이 닳고 닳아있었다.
"자, 여기."
"아, 네."
"얼마나 읽은 거니? 많이 닳아있구나."
"아, 아뇨. 아니에요. 어…그러니까, 그게. 선생님의 책은 나오면 여러 번 읽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허허 녀석도 참. 그 책은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텐데 그만큼 닳을 정도면 많이도 읽었겠구나."
"선생님의 작품은 책으로 출간하면 수십 번을 읽게 만드는걸요. 아, 물론 선생님의 팬으로서요. 일 때문이 아니라."
"그거 참 듣기 좋은 말이네."
"좀 더 주무시지 벌써 깨셨네요 선생님. 제가 미리 목욕물을 받아놨으니 오늘도 저희 집에 가셔서 주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나 때문에 여기서 기다린 거니?"
"선생님 요새 통 못 주무셨잖아요."
"고맙다. 한 숨 푹 잤더니 정신이 맑아진 기분이야. 오늘은 글을 쓸 수 있을 거 같구나"
"아니요. 오늘은 금지에요. 목욕물에 몸 담그면 다시 잠이 오실 거에요. 그러니까 오늘은 글 생각은 말고 푹 주무 세요. 며칠 잠 못 이룬 밤들로 선생님 건강이 많이 상하셨어요."
"그건 팬으로서 하는 말 인 거니?"
걱정된다는 듯 팔자 눈썹을 하며 재잘재잘 말하는 준이가 귀여웠는지 도윤이 준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는다.
그의 손길이 닿자 조금은 긴장된 준이 였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붉어지는 얼굴을 감춘 채 대답했다.
"팬… 팬으로서이기도 하지만 편집장으로서 이기도 해요"
"하하, 알겠다."
웅크리고 자 뻐근해진 몸을 도윤이가 기지개를 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꿈 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던 얀이의 모습.
"저, 윤아"
"네?"
"아, 아니다. 들어가자꾸나"
"뭐에요 선생님?"
"물어보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다"
"저에게 말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신 거에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네가 슬퍼할 거 같아서."
"설마 목욕물까지 다 받아놨는데 집으로 가시려고요?"
풀 죽은 준이가 꼭 살랑거리며 즐거워 하는 강아지가 금방 풀이 죽어 꼬리가 축 쳐져 있는 모습과 닮아 도윤은 또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그게 아니고, 꿈 얘기란다."
"네?"
"꿈을 꾼 거 같은데 그게 너무 생생했단다. 얀이…… 그래, 얀이가 꿈에 나왔는데 다시 살아 돌아왔지 뭐니. 참 이상한 꿈이지?"
도윤의 씁쓸한 미소에 준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얀이와의 만남을 꿈이었다고 생각하는 선생님께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선뜻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질 않았다. 아니, 그 말을 준이 자신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 꽉 붙잡고 있는지 모른다.
"준아. 표정이 좋지 않구나. 괜한 얘길 꺼냈나 보다."
미안해하는 도윤의 표정을 보니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준이 결국은 입을 열었다.
"아뇨, 아니에요. 선생님이 꿈이라고 생각하는 그거. 현실에요. 선생님이, 바다에서 나오실 때 봤던 얀이."
도윤의 눈이 점점 커져간다.
그의 죽어있던 심장이 다시 살아났다는 걸 준이는 느끼고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지만, 얀이는 아마 먼 미래나 아니면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온 거 같아요. 여기에서의 기억이 없데요. 기억은 없지만 느낌이나 분위기 이런 것들로 알 수 있다고 해요."
"꿈이… 꿈이 아니었구나.!"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도윤이의 눈이 촉촉해져 있었다.
"선생님. 일단… 일단은. 오늘은 얀이에게 적응 할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요."
"아, 그래. 그래야겠지…"
"그리고 선생님도요. 말했죠? 오늘은 글도 쓰지 않고 푹 주무시기로?"
"얀이가 살아있는 거만으로도 오늘 잠은 다 잔 거 같구나"
그 꿈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윤은 눈물이 쏟아져 내릴 정도로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니 느껴졌다.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그 운명을 아무리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려 해도 결국은 가야 할 곳으로 가버린다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