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는 버스에 올랐다. 바쁜 시간이 지나서인지 버스 안은 한산했다.
버스 기사님이 켜 놓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예전에 유행하던 음악이 그 시간을 더 여유롭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은 햇살에 반짝이며 자신들만의 선명한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분명히 얼마 전까지 바라본 풍경은 차가운 공기에 갇혀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스쳐지나가는 바람 속에 향기가 가득할 것 같았다.
태양이는 넋을 놓고 그렇게 한참을 바라봤다. 설명할 수 없었는데, 마음이 자꾸만 저려왔다.
버스에서 내려 걷는 길의 느낌도 달라져 있었다.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의 옷차림도, 그들이 터트리는 웃음소리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모두들 봄의 날씨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첫날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차가웠던 그날의 공기와 처음이라 유난히 어색했던 이 길. 그리고 떠올랐다. 앞서 걸어가던 이봄이 같이 있었다는 걸. 그렇게 이봄이 또 떠올랐다.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은 인사라도 건넬 수 있기를, 자연스럽게 웃으며 그럴 수 있기를. 햇살에 눈이 부셔 살짝 손으로 눈 위를 가렸다.
“유태양”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태양이는 뒤를 돌아봤다. 진호랑 현경이가 태양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할아버지는 어떠셔?”
“어, 다행히 괜찮아 지셨어.”
태양이는 알게 된지 얼마되진 않았지만, 게다가 함께 한 시간도 많지 않았지만, 안부를 물어오는 진호의 얼굴에 나타난 진심에 감동을 했다.
“곧 중간고사도 온다는데, 날씨가 왜 이리 좋냐?”
진호의 투덜거림인지, 감탄인지 알수 없는 말에 현경이는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찰나의 망설임이 지나가고 있었다.
“너희들은 소개팅 안해?”
그냥 날씨 때문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서인지 현경이는 둘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남자 애들은 지금 소개팅 잡을려고 난리던데.”
“너는? 여자애들은?”
진호는 자신과 상관없는 질문인 듯 대답 대신 현경이에게 물었다.
“나야.. 뭐 아직.. 내가 눈이 높다구.”
현경이는 살짝 얼굴이 굳어지는 스스로를 느꼈고 어색해질까봐 크게 웃었다. 아무도 눈치 못채기를 바라며,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며 그렇게 별일 아닌듯 말했다.
“태양아, 여자 애들이 고백 안했냐?
“아니..왜?”
태양이는 진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아는 것을 태양이는 자신만 모르는 게 분명했다.
현경이는 자신이 묻지 못했던 걸 진호가 대신 물어봐줘서 고마웠다. 자신의 성격상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자연스럽게 지낼수 있었는데, 유독 태양이는 쉽지 않았다. 행동이 어색해지고 시선 둘곳을 찾지 못해 매끄럽게 대화가 계속 되지 못했다. 이겨내고 싶은데,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딱히 전할 대답이 없던 태양이는 그냥 살짝 미소만 짓고 있었다.
태양이는 예전부터 소개팅 같은 건 불편할 것 같아서 당연히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왔었다. 호감은 많은 과정 중에 생긴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관계라면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그럴 수 있을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그럴수 있을까.. 스스로 확신이 줄어들며 의문이 들기 시작했지만, 그래서 조금씩 마음이 어지러워졌음에도 그쪽으로는 무뎠기에, 태양이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아직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태양아, 성현이한테 조별 발표 과제 들었지?”
현경이는 태양이에게 어색하지 않게 말하기 위해 짧은 순간 혼잣말로 몇번을 시도해보다가, 드디어 기억에서 찾아낸 공통요소를 건넸다.
현경이는 태양이랑 같은 조가 되었다는 사실에,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살짝 떨렸다. 그리고 아주 많이 기뻤다. 진심으로 좋았다.
“어, 들었어. 오늘부터 열심히 준비하고 도울게.”
태양이는 웃으며 현경이에게 말했다. 현경이는 다시 이어지지 못하는 대화에 머뭇거렸고 결국 고개만 끄덕였다.
“야, 우리조는 수경이 누나랑 봄이 누나가 있으니까 완전 속전속결. 윤재랑 나랑 편하게 한다.”
진호는 자신의 팀을 자랑스럽게 전하고 있었다.
“태양이 너 이번에 있었으면, 우리 조였을 건데. 부럽지?”
태양이는 그냥 웃고만 말았다. 무엇을 부러워 해야 되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봄 이름이 들리는 순간 부럽다는 의미가 뭔지 확 느껴졌다.
“너랑 윤재는 무임승차 아냐?”
현경이가 진호에게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거든, 우리 누나들이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엄청 친해졌나봐.”
현경이는 진호의 너스레에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그럼, 내가 우리 누나들의 듬직한 동생이잖냐”
태양이는 순간 진호의 자연스럽고, 뻔뻔하기까지한 저 성격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진호의 성격이 ‘하나쯤 장만할 수 있는 품목’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진호를 바라보며 웃자, 진호가 태양이에게 물었다.
“태양아, 누나 필요해?”
진호의 말에 태양이는 누나 있다고 걱정말라고 말하며 웃었다.
“수경이 누나.”
진호는 건물에서 나오는 수경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크게 불렀다. 그 뒤로 성현이가 나왔다.
그리고 윤재와 이봄이 함께 나오는 게 보였다. 윤재와 이봄은 자료를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태양이는 자신의 시선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자꾸만 그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포장하기가 쉽진 않았다. 다행히 들키진 않았다.
살짝 본 그쪽의 이봄은 심각한 듯 윤재를 향해 말하고 있었고, 윤재가 뭐라고 말하니까 윤재를 향해 이봄이 활짝 웃기까지 했다.
“유태양, 드디어 왔냐?”
태양이의 시선 앞으로 자연스럽게 성현이가 왔고, 진호를 향해 수경이가 다가왔다.
“어, 성현아, 덕분에 고마웠다.”
성현이는 태양이의 어깨를 두드렸고, 진호는 태양이와 성현이를 향해 자랑을 했다.
“우리 누님이시다.”
진호의 넉살에 현경이와 성현이는 웃었고 태양이도 같이 웃으며 수경이를 향해 살짝 눈인사를 했다.
“진호 너 준비 잘 하고 있지?”
“당연하죠, 제가 누굽니까.”
진호의 말에 웃던 수경이는 태양이와 성현이 그리고 현경이에게 수업 잘 들으라고 말하며 윤재와 이봄한테로 갔다.
태양이는 이상한 공허함에 좀전의 설레었던 기분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강의실로 향했다.
봄은 강의실로 들어갔다. 수경이와 윤재가 이미 와서 앉아 있었다. 아마 과제 때문에 윤재가 도움을 받기 위함인 것 같았다.
말도 표정도 많지 않은 윤재는 적극적이고 밝은 수경이를 살짝 어려워하는 게 보였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수경이 옆에 앉아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하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봄은 손을 흔들며 수경이와 윤재에게 인사를 한후, 수경이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곧 성현이가 들어와 봄과 수경, 윤재에게 인사하며 윤재 옆에 앉았다.
같은 과에서 유일하게 4명만 듣는 수업이어서 약속처럼 뭉쳐서 앉고 있었다.
“윤재와 누나들 조는 준비 잘 되고 있어요?”
성현이는 자신만 다른 조임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물었다.
“나하고 진호는 누나들 도움 받고 하고 있지.”
특유의 저음으로 윤재는 성현이가 부러워 할 말을 전하고 있었다.
“좋겠다. 우리는 오늘부터 제대로 시작해야 되는데. 이제 태양이도 오니까 잘 되겠지.”
“태양이 오늘부터 오는거야?”
“어, 다행히 할아버지가 괜찮아지셨다 하더라구.”
윤재와 성현이의 말에 수경이가 물었다.
“태양이가 드디어 오나봐. 여자 애들이 다들 궁금해 하는 것 같던데.”
윤재는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고, 성현이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과에서 태양이와 윤재가 사라지면 여자 애들이 저를 엄청 괴롭힐걸요. 어디 있냐고?”
수경이와 봄은 성현이와 함께 웃었다. 윤재는 혼자 민망해했다.
수업을 마치고 건물을 나섰다. 걸음이 빠른 수경이가 먼저 나갔다. 성현이는 다음 수업이 바로 있어서 서둘러 나갔다.
윤재는 수경이를 놓치고 자신보다 늦게 움직이는 봄에게 자신이 준비하는 내용을 확인하며 물었다. 봄은 윤재가 물어보는 내용을 들으며 밖으로 나갔고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었다.
“수경이 누나한테 아침에 물었는데, 다시 물어보면 저 바보라고 생각할 거예요.”
윤재의 진지한 얼굴과 낮은 목소리에서 나온 그 말이 서로 매치가 되지 않아 봄은 크게 웃어버렸다. 봄의 웃음에 윤재는 자신의 말이 왜 그런 반응을 갖게 했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들린 진호의 목소리. 수경이는 어느새 진호쪽으로 가 있었고, 오랜만에 보게 된 유태양과 그 옆에 서 있는 현경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웃었다.
수업이 있는 성현이도 그쪽으로 이미 합류해 있었다. 진호가 무슨 재미있는 말을 하는지 다들 즐겁게 웃고 있었고, 다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자신과 다른 공간인 것 같았고, 자신은 결코 저들과 함께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봄의 머릿속을 파고 들었다. 봄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말 없이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윤재가 봄의 한숨에 봄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저기가서 인사 안해?”
“굳이..뭐..”
“좋겠다. 나는 못하는 거고, 너는 안하는 거고.”
“누나가 왜 못해요?”
“수경언니는 쉽게 하는데, 나는 왜 안 되는지 몰라.”
너무 솔직했다. 그래서 농담처럼 웃었다, 아무 일 아닌 것 처럼.
굳이 신경 안쓰는 윤재가 좀 부러웠다. 신기했다. 모두의 관심을 받는 윤재가 수경이와 자신과 자주 다니는게 궁금하기도 했다. 조별 발표 준비가 부담스럽다면 이 모든 게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윤재의 표정없는 얼굴이 돌아오는 수경이의 모습에 달라지고 있었다. 봄은 거기까지 보진 못했다.
봄은 수경이와 윤재랑 함께 방향을 돌렸다. 유태양의 웃는 모습이 이상하게 잔상으로 남아 봄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아무렇지도 않을 일인데, 그냥 마음이 이상해졌다. 분명 날씨 때문이었다. 날씨가 마음을 종잡을 수 없이 흔드는, 오늘은 너무도 화창한 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