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 윤대협이란 놈이 그렇게 강하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태섭 선배. 웬만하면 인정하지 않을 텐데 이 천재께서 인정할 정도로 대단하긴 했어."
"천재는 무슨, 천재들이 다 얼어 죽었냐? 요새는 능력도 안 되는 것들이 너도 나도 다 천재래"
응, 태섭이.
그런 말 하면서 태웅이 보지마. 재는 진짜 천재니까
"아무튼 감독님 밀명을 받고 나랑 저 여우 새끼 같은 놈이랑 딱 막아섰는데! 아 물론 저 여우는 단순히 내 보조일 뿐이었어. 내가 윤대협을 막고 있을 동안 방해가 들어오면 안 되잖아? 나야 워낙 천재라서 그런 건 알아서 다 샤샥 피하면서 막을 수 있었지만 감독님이 그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나섰지."
아니야 백호.
어떤 감독이 선수에게 시합 중에 밀명을 내려?
지금 누구 암살 지시해?
"아무튼 딱 둘이 막아섰는데도 막 이렇게 움직이더니 막 슈슈슉 제치면서 가더라니까? 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움직임이었는데 저 여우 자식은 그거 하나 못 막아서 길을 열어주더라니까?"
응, 아니야 백호야
네가 성급히 움직이느라 마크에 구멍 난 거 커버치느라 태웅이가 그날 아주 눈썹 날리게 뛰어다녔어.
나중에야 급 성장해서 어느 정도 마크를 해냈다지만 태웅이 아니었으면 넌 아직도 코트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을걸?
봐봐, 태섭이도 전혀 믿는 표정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결론은 너희 둘이 막았는데도 그 녀석 하나를 막지 못했단 거지?"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태섭이 형? 나 혼자라면 충분히 막았다니까? 괜히 저 멍청한 녀석이 발목을 붙잡는 바람에 뚫린 거지"
퍽
"으악!"
누가 봐도 체육관에 있는 사람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수다를 떨고 있는 백호의 뒤통수에 사정없이 농구공이 처박혔다.
와우, 저건 좀 아플 것 같은데? 머리까지 빨간색이라 피가 나는지 알 수도 없고.
뭐, 백호 머리니까 괜찮겠지?
"누구야?"
역시 회복력이 빨라
그나저나 진짜 누구지? 공에 실린 힘을 보면 아무리 좋게 봐줘도 실수 같지는 않았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공이 날아온 방향에 이제 막 공을 던진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서태웅이 있는 거로 봐서 저 자식이었구나
'그래, 네가 가만히 있으면 서태웅이 아니지'
"뭐야? 여우 자식! 너냐? 지금 싸우자는 거지?"
"...아, 미끄러졌네"
"크악! 이 자식이 누구를 바보로 아나. 이게 어떻게 미끄러진거야? 이리와 오늘 아주 끝장을 내주마!"
"차, 참아 백호 이 녀석아, 지금 참지 않으면...."
"백호 너! 또 태웅이랑 싸우고 있는 거야?"
"소, 소연아!"
아 등장했다.
강백호의 목줄을 채울 수 있는 유이한 존재, 채소연.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원작처럼 소연이 말 한마디에 바로 바뀌는구나
"소연아 안녕?"
"아, 준호 오빠!"
"응 자주 보니 반갑네. 오늘도 구경 온 거야?"
"엉, 여기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이상하네
원래 소연이 성격이 이렇게 직설적이었던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농구부 찾아오는 것도 잘 안 하던 것 같은데
묘하게 태웅이를 대하는 모습도 원작과는 좀 다른 것도 같고
"그런데 아직 치수는 안 왔는데?"
"알고 있어요. 수업이 아직 안 끝났다면서요? 오빠한테는 오늘 구경 온다고 미리 말해놨어요"
"아 그래? 그러면 상관없겠지. 잘 알겠지만 연습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구경하는 거 잊지 말고"
"네에~"
소연이의 대답을 뒤로하고 다시 코트로 돌아왔다.
아무리 소연이가 치수의 동생이라고 하더라도 엄밀히 말하면 부 외인이라 이런 건 확실히 해 둬야 나중에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빨리 매니저를 하는 게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백호에게 너무 큰 자극이려나?'
[아시겠지만 상황을 억지로 바꾸시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알고 있어, 이제 겨우 시작점에 들어왔는데 나도 그런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소연이가 백호를 너무 잘 다루니까 그냥 해본 생각이야.'
쿠오오오!
뭐지?
네비와 답 없는 말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별안간 뒤에서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성은 바로 뒤를 돌아보라고 시키고 있는데 왠지 본능이 돌아보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데
"준~호~ 선~ 배~"
이성과 본능 사이에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들린 소리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바로 후회했다.
아 본능 말을 들을걸
내 뒤에는 자기가 메두사라도 되는 양 빨강 머리를 사방에 뻗치고 있는 멍청이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중이었다.
저 모습을 보자니 없던 협심증도 도져서 병원에 실려 갈 판이다.
인간아 네가 진짜 메두사냐 아주 눈빛으로 나를 돌로 만들 기세구나
"왜?"
"준호 선배 언제부터 우리 소연이랑 그렇게 친하게 지낸 거에요?"
....아 그거였냐? 그게 문제였어?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알고 지넀으니까 대략 6년쯤 된거 같은데 왜?"
"6년... 이나요?
내 말에 급작스럽게 백호의 머리가 가라앉는다.
단순한 놈, 6년이란 시간이 꽤 부담이 됐나 보네
"그렇지 소연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봤으니까"
"초, 초등학생?"
"어, 맞으니까 초등학생이라고 말하면서 흥분하지마, 되게 이상한 오해를 할 것 같으니까"
예를 들면 아동 성애자라거나 쇼타콘이라거나 찢어죽일 놈 같은거
"네?"
"아니야, 그래서 난 왜 부른건데?"
머리를 비우자,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소연이랑 무슨 사이인건데요 안경 선배?"
이 자식을 나랑 소연이가 대화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에 대체 어디까지 시나리오를 쓴거야?
"무슨 질문이 그래? 치수 동생이잖아?"
"...그래도 남녀 사이 아닙니까?"
"백호야, 너 같으면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생이고 제일 친한 친구 동생한테 무슨 생각을 하겠냐? 그러고 보니 호열이한테도 여동생이 있다고 했던가? 듣기로는 꽤 미인인것 같던데 넌 어떤데?"
호열이는 통칭 백호군단으로 칭해지는 패거리 중 백호 다음 가는 서열의 캐릭터를 말한다.
잘생기고 생각도 깊은데다가 의리도 있어서 슬랜 덩크 팬들 사이에서도 꽤 호평이 많았던 캐릭터였지.
"미쳤어요 선배? 개는 그냥 애에요, 완전 꼬꼬마 때부터 봤던 애한테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만족스런 대답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린다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네. 자, 대답이 됐을까?"
"....정말이죠?"
"지금 나를 의심한다는건 제가 호열이 여동생에게 마음이 있다고 자백하는 거지?"
"우왁! 우왁!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에요? 알겠어요, 완전히 믿으니까 그런 말은 입밖에도 꺼내지 말아요 선배. 호열이 자식이 듣기라도 하면 날 아주 잡아 먹으려고 들 거라구요"
음, 역시 여동생에 관련된 문제에는 서열같은 건 무시되는 구만
하긴 평소에 나를 그렇게 아끼던 치수놈도 농담으로라도 소연이 말만 나오면 아주 날 집어 던질 기세였으니까
쾅!
"응?"
"무슨 소리지?"
"출입구에서 난 소리 같은데요?"
쾅! 쾅!
백호의 말에 체육관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바라보자 정말 소리에 맞춰서 문이 흔들거리는게 누가 문을 두드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소리나 흔들리는 정도로 봐서는 두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부수려는 건가?
"누가 가서 문 좀 열어봐"
"네"
내 지시에 문 가까이 있던 1학년 생이 출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무슨 영화의 클리셰처럼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고 그 안으로 한 인형이 튕겨져 들어왔다,
어? 저 문 잠겨있던거 아니었나?
아 아니구나 생각해보니까 잠겨있으면 이상하지. 각자 수업이 끝나는 데로 들어와서 연습을 해야 하는데 어떤 미친놈이 체육관 문을 잠가놓겠어
그럼 방금 그건 뭐야? 잠겨 있지도 않은 문을 부술 듯이 때려댄거야?
어떤 미친놈들이 그럤는지 보려고 했지만 역광 때문에 문 너머에 있는 놈들의 면상을 확인 하는 건 실패 했다.
"크윽"
마침 들린 신음 소리에 문 밖에 서 있는 놈들 대신에 튕겨져 들어온 놈의 얼굴이나 확인하려고 다가갔는데 그 얼굴을 보고 나서 순간 멍해졌다.
여기에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놈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정....대..만?"
아니 왜 이놈이 여기서 쓰러져 있는거지? 저기 문 뒤에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처음에 소란이 일어났을 때 살짝 놀라긴 했어도 대충 돌아가는 상황이 예상되긴 했었다.
원래 원작 스토리에도 송태섭과 강백호를 손봐주기 위해 정대만이 이맘 때즘에 자기 패거리들을 전부 몰고 오는 내용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저기에서 패거리를 이끌어야 하는 놈이 왜 여기에서 자빠져 있는 거지?
"크, 크윽. 쿨럭!"
이런. 기침을 하는데 피가 섞여 나오고 있었다.
"호식아, 너는 가서 당장 구급상자 챙겨오고 재훈이 너는 이리와서 이녀석 부축 좀 도와줘"
"네?"
아 제길, 또냐?
재작년 대만이 때도 그러더니 이 농구부 놈들은 급한 상황이 올 때마다 돌아가면서 이렇게 멍을 때리는 거냐?
이거 뭐 농구부 종특인거야?
"멍 때릴 시간 없으니까 빨리 빨리 움직여!"
"네!"
그나마 다행인건 이전에 비해 내 지시에 두 번 반문 하지 않고 곧바로 따른다는 거구만
이건 1학년이 내리는 지시와 3학년이 내리는 지시의 무게 차이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애들이 나를 신뢰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해서 이건 좀 기분이 좋았다.
"쿨럭 쿨럭!"
황급히 달려온 재훈과 내 부축으로 움직이는 와중에도 대만의 기침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침 사이 사이에 피가 섞여 나오는게 최악의 경우 내장 출혈이 의심될 수도 있어서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여기에 눕혀"
"네, 선배님"
푹신한 매트에 대만을 눕히자 때마침 호식이가 구급 상자를 들고 다가와 있었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저런 구급상자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보기로 했다.
"대만아, 나다 지금부터 응급치료 시작할거니까 어디 아픈데 있으면 신호를 보내줘"
"어이! 농구부! 뭐 재미있는거라도 하는가봐? 이렇게 문도 꽉꽉 닫아 놓고 말이야"
"우리도 마침 심심헀는데 같이 좀 놀아주지 그래?"
출입구 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바라보니 문 밖에 있던 그림자들이 문을 지나 체육관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자, 잠깐!"
"신발을 신고 들어왔어!"
"뭐하는 짓이야?"
거기까지 듣고 고개를 돌려 정대만의 상태를 살폈다.
정대만이 이곳에 있는건 의외였지만 이 이후의 상황은 어떻게 흘러갈지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기에 끼어서 상황을 억제하기보다 당장 피를 토하고 있는 대만이의 상태가 더 중요했다.
'송태섭, 강백호, 서태웅. 신뢰는 안 간다만 어쩔 수 없이 지금은 너희에게 상황을 맡긴다. 제발 더 꼬이게만 하지 말고 있어라"
"쿨럭, 쿨럭"
"서, 선배!"
"진정해. 나한테 시간 날 때마다 응급처치 배웠었잖아.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선 지혈부터 시작한다."
".....네!"
=================
"말귀를 못 알아들어? 당장 신발 벗으라니까!"
"뭐 하는 자식들이야?"
어쩌다 보니 출입구와 가까이 있던 태섭과 백호는 무단으로 체육관을 들어오는 이들의 모습에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딱 봐도 껄렁해 보이는 외관은 둘째 치고 구두를 신고 체육관에 들어오는거 하며 담배를 물며 다가오는 꼴이 말초 신경 끝에 있는 분노까지 끌어당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지나온 자리에는 구두 자국과 떨어진 담배재들이 뚜렷하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 꼴을 보자니 매일 아침마다 동기들과 같이 코트 바닥을 닦던 강백호와 서태웅은 정말로 저들을 담벼락 밖으로 걷어차 주고 싶었다.
"네가 그 강백호라는 놈이냐?"
"엉? 넌 뭐야?"
농구 부원들 제일 앞에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 강백호 앞으로 한 사내가 나섰다.
강백호나 서태웅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체구를 지니고 있던 그는 강백호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자기 소개를 먼저 했어야 했나? 철이라고 한다, 박철. 자 이제 내 질문에 대답 좀 해줄 수 있겠지? 네가 그 빨간머리 강백호, 맞나?"
"멍청한 자식, 네 입으로 말해 놓고 보고도 몰라? 지금 여기에 빨간 머리가 나 말고 또 있냐? 그딴 소리 할 시간 있으면 당장 신발부터 벗으라고 이 자식아"
"그렇군, 네가 그 강백호 맞다는 거지?"
"몇 번을 말해야..."
퍽
거듭된 사내의 물음에 막 짜증을 내려고 하던 강백호의 말을 끊고 남자의 발차기가 정확하게 백호의 배를 파고들었다.
쿠당탕!
"백호야!"
"강백호!"
사내의 공격을 맞고 백호가 뒤로 날아가자 그 모습에 지켜보고 있던 농구부원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크크크, 얘들아 맞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