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과 선배들의 연습 경기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행히 내 응급조치가 효과가 있었는지 치수는 2주간 물리치료를 동반한 가벼운 치료를 받은 후 농구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치수와 부딪치고 무릎을 다쳤던 정대만의 경우 원래 이야기대로 농구부를 탈퇴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내 응급처치 덕에 원래 이야기처럼 심하게 다치지 않아서 한두 달만 집중 치료를 받고 재활을 하면 됐을 텐데 녀석이 그걸 거부하고 퇴부해 버리자 나도 약간 빈정이 상해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치료해줬잖아? 무릎 만질 때마다 아주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들으면서 응급치료 해놨더니만 고마운 줄 모르고 에잉'
[꼰대다~! 꼰대가 나타났다!!]
'시끄러 초 치는 도우미 놈아'
[어머? 이래 봬도 설정상 여성형이거든요!? 이거 성희롱이에요!]
'목소리만 여자면 여성형인 거냐? 참 편해서 좋겠네. 남자 목소리로 바꾸고 군대나 가버려'
[어머, 여자에게 점점 못 하는 소리가 없으시네요. 군대는 여자도 갈 수 있거든요?]
'그래, 그러니까 가버리라고. 가능하면 장교 말고 일반 사병으로 가서 GOP에서나 근무했으면 좋겠다. 선임들한테 빡새게 구르고 오면 좀 나아질 텐데'
어쨌든 기세 좋게 들어왔던 중학 MVP가 어이없게 나가버리자 같이 무석중에서 올라왔던 애들도 얼마 버티지 않고 전부 퇴부를 해서 결국 신입 중에 남은 건 나와 치수를 비롯한 몇몇뿐이었다.
신입생 들어왔다고 들떴던 처음을 생각하면 어이없게도 초라한 결과지만 경기를 지켜봤던 모두 정대만의 무리한 플레이가 원인이라는 걸 알아서 아무도 치수를 탓하지 않았다.
사실 그거 아니라도 누가 저 면상에 대고 잘못을 지적할 수 있을까마는
선배 중에는 아직도 정대만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원래 내용에서도 저렇게 나가서 2년 뒤에나 돌아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글쎄? 괜한 기대라고 말하고 싶다.
'아, 중간에 한 번 나오긴 하나?'
[네? 누구 말씀이세요?]
'아니 정대만 말이야. 설정상 2학년 때 한 번 더 농구부에 등장하지 않아?]
[송태섭과 엮인 사건 말씀이시군요? 그건 농구부에 나온다기보다는 송태섭과 개인적인 사건이라 아마 안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래? 농구부에 오면 그때라도 어떻게 꼬셔볼까 했는데 그것도 무리인가?'
[생각 있으시면 지금이라도 찾아가 보시죠? 같은 학교잖아요. 굳이 그때까지 기다리실 필요 있나요?]
'지금 가서 말하면 들을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야. 가뜩이나 피 끓는 나이잖아. 자기가 뱉어 놓은 말이 있는데 내가 간다고 마음 돌리겠냐? 그랬으면 선배들이 찾아갔을 때 돌아왔겠지'
정대만이 다친 날 입원한 병원에 선배들과 매니저들이 찾아갔는데 면회를 거절당했다고 했던가?
그 이후로도 몇 번 병원을 찾아가도 마찬가지고 퇴원 후 학교로 돌아왔을 때도 찾아온 선배들을 무시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냥 이쪽이랑은 담쌓겠다는 건데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이게 그 정도 일인 건가?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지가 잘못해서 다쳐놓고 왜 이쪽에다 원망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3. 4살 정도 된 애들이라면 논리가 안 통하니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건 뭐 고딩이 이러고 있으니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이걸로 올해도 다 끝났고'
아무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장시간 가만히 앉아 있느라 굳어있던 몸을 풀며 보니 이미 스코어는 우리가 따라잡을 수 있는 점수 차가 아니었다.
이걸로 고등부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참가했던 겨울 농구 대회는 예선 탈락이 확정된 것이다.
전국 체전은 이미 오래전인 여름에 예선탈락을 해 버렸고
고개를 돌려보니 학년 초에 나랑 치수에게 최고 성적이 예선 탈락이냐고 난리 치던 턱주가리 선배의 표정이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대충 뭉쳐다 던져 놓은 찰흙같이 구겨진 얼굴은 툭 치기만 해도 곧 울음을 쏟을 듯한 기세였다.
그렇겠지. 잘난 듯이 말해봤자 저 인간도 3년 내내 예선을 통과해본 적이 없는 인간이었으니 이번 경기가 끝나면 그냥 이대로 졸업인 거다.
'쯧, 그러니까 욕심은 왜 부려서'
그래도 북산고가 북촌중보다는 나은 게 항상 예선을 한 끗 차이로 탈락했다는 건데 이번 겨울 농구 대회도 이 경기만 이겼으면 본선에 올라갈 전적이었다
그래서 감독이 이번 경기에서 이기기 위한 필승 팀 구성을 발표했는데 저 망할 인간과 몇몇 선배들이 그걸 반대하고 나섰다.
출전 명단에 치수가 주전 후보에 내가 적혀 있었거든
그 이후로는 중학교 때의 전철을 밟는 일일 뿐이었다.
아직 경험도 부족하고 부상 이력도 있는 치수와 나를 이런 중요한 경기에 넣을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자 그런 그들을 잠시 보던 안 감독이 별말 없이 명단을 수정, 기존과 다를 바 없는 선수 명단으로 이번 경기에 임한 것이다.
그리고 나온 결과는 가볍게 예선 탈락
거의 압살 당하다시피 벌어진 스코어에 초반에 잠깐 열정적으로 응원하던 우리 벤치도 지금은 그냥 침묵으로 관전 중이다.
'저 인간 덕분에 아까운 교체 카드를 1쿼터에 사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지고 아주 개그가 따로 없네'
저 턱주가리 선배도 초반부터 되지도 않는 플레이를 계속해서 도저히 안 되겠던지 안 감독의 지시로 교체되어 자리에 앉아 있는 중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일으킨 본인이 자기 잘못을 모르고 도리어 답답해하고 있다는 거지만
'뭐 어때, 어차피 다신 안 볼 사이인데'
원래 이번 겨울 대회는 학교 차원에서 참가하지 않기로 했던거였는데 그것도 저 선배 놈들이 학교에 강력하게 건의해서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게 된 거다.
나나 다른 후보들은 아직 실력이 부족한 걸 알아서 그냥 연습이나 하고 싶어했는데 저것들 때문에 연습 스케줄도 다 꼬이고 해서 개인적으로 난 지금 이 상황이 아주 마음에 안 든다
'그렇게 억지를 써서 참가했으면 정말 죽을 각오로 뛰기라도 하던가. 이도 저도 아니고 저게 뭐야'
여름 전국 체전 때 보다 좀 열심히 뛰는 것 같다만 그래 봐야 도찐개찐이다.
올해까지 4년 내내 토할것 같은 체력 훈련을 해온 사람으로서 보자면 저것들은 아직도 설렁설렁 하는 중이다.
'네비, 현재 준호 몸 상태 좀 보여줘 봐'
[네, 알겠습니다]
삑
캐릭터 권준호 신체 능력
힘 : 37(16) (▲ 5)
민첩 : 38(14) (▲ 4)
지구력 :39(13) (▲ 9)
지력 : 41(18) (▲ 6)
지혜 : 43(19) (▼ 5)
화면에 나타나는 신체 능력을 보니 참 감회가 새롭네
처음에 여기 들어왔을 때는 20을 넘어가는 능력치가 없었는데 말이야
아. 두뇌 쪽은 넘었던가?
신체 능력이 상향 평준화되어있는 이쪽 기준으로 보면 평범한 성인의 평균 신체 능력은 30전 후
내 모든 신체는 이미 평범한 성인의 기준은 훨씬 뛰어넘어 있었지만 이런 나도 치수와 일대일로 승부를 벌이면 코트 바닥에 매다 꽂히기 일쑤다.
뭐 실제로 우리 고릴라가 날 들고 매친 다는 건 아니고 몸싸움만 하면 내가 튕겨 나간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무식하게 힘만 센 것도 아니라 나보다 지구력도 뛰어난 것 같고 내 공격 루트를 미리 알고 차단하는 거나 공격할 때 머리 쓰는 걸 보면 머리도 뛰어난 녀석이다
그나마 내가 비빌만한 게 속도 정도인데 그것도 막 뛰어난 것도 아니라 미리 공격 루트의 길목을 막고 있으면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 우리 릴라도 경기에 들어가면 정말 죽을 것 같이 헐떡이며 뛰어다니면서 열심히 하는데 저놈들은?
글쎄? 땀은 좀 나는 것 같다만 아무리 좋게 봐도 죽을 것 같이 뛰는 놈은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이래서 망하는 집은 다 이유가 있는 거라니까'
이제 2분 언저리로 남은 잔여 시간을 보며 고개를 가로 젓고 있는데 문득 감독 석에 있는 안 감독이 보였다.
경기가 시작한 이후로 팔짱을 낀 체 허리를 편 그 자세 그대로 변함없이 앉아있는 게 저 풍만한 몸매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꼿꼿함이다.
대충 훑어봐도 100kg은 가뿐히 넘어갈 것 같은 KFC 할아버지 닮은 우리 안 감독님은 지금 이 경기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지금이야 허허로운 모습일지라도 예전에는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서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했던 캐릭터인데 그런 그가 보기에 이 경기를 뛰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오합지졸처럼 보일까
'어쩌면 내가 도와줘야 하는 캐릭터가 정대만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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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어제 그 여고 애들 잘 빠지지 않았냐?"
"누구? 어제 그 애들? 이새끼 미친 거 아니야?"
"왜?"
"미친놈아 하나는 뻐드렁니에 하나는 얼굴에 분화구가 피었는데 잘빠지긴 어디가 잘 빠져?"
"그러니까, 이 자식은 가끔가다 눈이 제대로 달려 있는지 궁금하단 말야?"
칙칙
"아, 왜 또 불은 이렇게 안 붙는 거야?"
"그러니까 라이터 하나 새로 사라니까. 일회용 라이터 얼마나 한다고 그걸 아껴?"
칙칙
"아놔, 더럽게 안 붙네. 뭐래? 원래 라이터는 내 돈 주고 사면 더럽게 아까운 거 몰라? 그 돈 모아서 차라리 담배를 하나 더 사고 말지!"
"오 간만에 합리적인 소리 했어."
"미친놈 크크. 원래 합리적이었거든? 아, 됐다. 쓰읍, 후~"
"야 이 또라이 자식아 뿜을 거면 저쪽으로 뿜으라고. 이 미친놈은 꼭 사람 얼굴에다가 이 지랄을 하더라. 우웩, 아우 담배도 더럽게 맛없는 거 피우는 새끼가 아우 토쏠려"
"뭐래, 니가 피는 것보다는 낫거든? 생긴 게 그게 뭐냐? 얄쌍하게 생겨서 입에 무는 맛도 없고"
"야, 그래도 이게 얼마나 깔끔한데"
"깔끔한 거 찾으시려면 편의점 가서 솔의눈이나 드시고요"
"이 새끼가 선 넘네. 마음에 안 드는데 확 그냥 민초나 먹여버릴까 보다"
"반사다 이 자식아. 야, 대만아 너도 담배 하나 줄까?"
"... 됐다. 없는 살림에 그걸 뺏어 피겠냐."
"오~ 역시 내 생각해 주는 건 우리 대만이 밖에 없다니까?"
"쓸데없는 말은 됐고, 그래서 이번에 붙는 놈들은 누구라고?"
"옆에 상양고 새끼들. 중학교 때 좀 놀았던 모양인데 요새 자꾸 이쪽으로 기어들어 오네"
"몇 명인데?"
"보통은 5명 정도가 몰려다니는데 날마다 다르데, 더러 10명 정도가 모여 다닐 때도 있고"
"그 정도면 적당하겠네"
"이 정도면 완전 여유만만이지. 우리만 합해도 6명인 데다가 대만이 너도 있는데"
"그래, 심심했는데 마침 잘됐네. 오늘은 좀 재미있게 해주려나"
"그렇게 심심하면 다른 걸 해보는 건 어때? 그렇게 쑤시고 다녀도 재미 없는 거면 그쪽이 너랑 적성이 안 맞는 것 같은데 말이야
"뭐?"
"너 누구야?"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안 하면 엑스트라가 아니지
앉아 있던 공원 벤치에서 일어나 추위 때문에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넌?"
"안녕? 꽤 곰팡내 나는 등장 신이지? 나도 가능하면 이렇게 나오고 싶지는 않았는데 너희 티키타카가 너무 좋아서 끼어들 틈이 없더라고."
말을 하며 일행 중 가장 합이 좋았던 둘을 가리켰다.
"너희 둘은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만담을 한번 나가봐. 지금 이 합이면 못해도 입상은 할 수 있을 것 같던데"
"뭐 임마?"
"너 뭐야?"
"상양고 놈이냐?"
"저 눈치 없는 놈은 탈락! 이 마이 안보이냐? 너희랑 같은 북산고 교복이잖아."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야, 저 새끼부터 조지고 가자"
"잠깐"
막 질풍노도를 겪고 있는 놈들이 발광을 시작하려고 할 때 일행의 제일 앞에 있던 정대만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오~ 겁나 카리스마 있어
"무슨 일이냐?"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 보는 거야? 섭섭하네. 그래도 나는 우리가 꽤 가까운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굳이 말하자면 은인에 가깝기도 하고"
"...까는 소리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농구부 때문이냐?"
"아니, 뭐. 그것도 없잖아 있기는 한데, 그것보다는 다른 쪽에 더 볼 일이 있어서"
"다른 쪽?"
"어, 다른 쪽. 정대만 너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으니까 잠깐 시간 좀 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