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어. 준호야"
교대를 마치고 다시 원래 있던 뒷정리 현장으로 가니 나와 같이 페어를 이뤄서 조끼를 정리하고 있던 신입생이 나를 반겼다.
자식 일손 반기는 거 봐라
"수고는 무슨 1분도 안 뛰고 왔는데"
"시간이 뭐가 중요하냐, 어떤 플레이를 했느냐가 중요한 거지"
"시간이 중요하지"
뭐라는 거야 이 멍청한 놈은
날 위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공공연히 프로를 지망한다는 이곳에서 이런 소리 한 게 걸리는 날에는 눈총 먹기 딱 좋은 얼빵한 말이다.
돈 받고 뛰는 프로 스포츠 중 시간이 중요하지 않은 곳이 어디에 있겠냐 이 화상아.
물론 이 녀석의 말처럼 필드에 나가 있는 시간에 어떤 활약을 하는지도 중요하긴 한데 냉정하게 말해서 활약이 없으면 아예 필드로 내보내지를 않는 게 프로 스포츠의 룰이다.
반대로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필드를 나가서 시간을 보내지 못하면 무능력자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거고.
솔직히 저기 코트 안에서 연습하고 있는 치수를 제외한 나사 빠진 놈들 덕에 내가 잠깐 활약을 했지만 만일 내가 정말로 능력이 있고 기회가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교체되어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사정하던 협박을 하건 어떻게든 몇 분이라도 더 뛰려고 했겠지
나만 그럴까?
아니, 이곳에 있는 모든 놈이 다 같은 생각일 거다.
저 놈팡이도 그걸 아니까 컨트롤이 쉽지 않은 2학년 후배들이 아닌 신입생들과 교체를 한 거고
원래 능력과 상관없이 자기 자리보전하고 싶은 욕구는 모든 인간에게 있는 자기방어 기제 같은 거 아니겠어?
"경기 끝나려나 보다"
한참 세탁이 끝난 조끼를 정리하고 있을 때 들린 동기의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매니저가 시계를 보면서 호루라기를 물고 있는 게 정말로 곧 경기가 끝나려나 보다.
스코어를 보니 적팀이 28 : 27로 앞서고 있었는데 공격권이 적팀에게 있으니 남은 시간을 고려하면 적팀이 이기는 경기였다.
잠깐이지만 내가 뛴 팀이었고 치수도 속해 있으니 적팀이 이기면 좋아야 하는데 내 기분은 끊임없이 하향곡선을 긋고 있었다.
'기껏 점수 차를 벌려놨더니 저걸 저렇게 말아 먹네?'
내가 교체되어 나올 때 스코어가 15 : 9로 점수 차가 꽤 나서 어렵지 않게 이길 줄 알았는데 나 대신 다시 복귀한 농땡이 자식이 내 활약을 지우려고 발악을 하는 통에 도리어 따라잡혀 버렸다.
'그러게 왜 성공하지도 못할 3점 슛을 난발해대서는'
복귀한 초반에 자기에게 패스하라고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을 보고 저 자식이 오바하는구나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껏 넘겨받은 공을 돌리지도 않고 본인이 꾸역꾸역 슛을 쏘는데 그게 막히면서 공격권이 넘어가자 자기 실수를 만회한답시고 점점 더 오버를 하더니 결국은 되지도 않는 3점을 난발해 버렸다
거기까지 보고 나니 그냥 고개를 젓고 하던 조끼 정리에나 집중했다.
'다 끓인 너구리에 계란 넣는 놈 같으니라고'
기껏 기분 좋게 이길 수 있게 상을 차려놨더니 지가 주목 못 받는다고 아예 엎어버리는 놈한테 더는 뭔 기대를 하냐
저것도 그나마 치수가 몸 안 사리고 리바운드와 블로킹을 성공시켜서 사수한 점수 차였지 치수 아니었으면 이번 연습 경기는 적팀의 폭망겜이 됐을 거다.
덕분에 오늘 치수의 방어 포인트와 공격 포인트가 아주 풍성해지겠네.
'에이 모자란 새끼. 뜨거운 비빔면도 아까운 놈 같으니라고'
삑!
"경기 끝! 적팀 승리"
저봐 저봐. 경기가 끝나고 벤치로 돌아가는 놈들 중에 경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기색을 띠는 건 치수 혼자뿐이고 나머지는 아주 놀자판이 따로 없다.
농땡이 놈을 뭐라고 할 게 아니라 저기에 있는 누구도 주전의 자리에 걸맞은 노력이나 성과를 보이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경기를 개판을 쳐 놓고 좋다고 웃고 있을 거면 뭐하러 후배 견제를 하고 자빠졌냐. 그냥 열정이 남아있는 후배들에게 기회나 한 번 더 주지
하는 꼴을 보니 나태한 나귀 같은 놈들이 따로 없다.
길을 막고 누워서 갈길 바쁜 사람들을 방해해 자기들처럼 못쓰게 만들고 있다. 아주 온몸으로 다른 이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거다 저것들이.
으득
어이쿠 이 소름 끼치는 소리는 또 뭐야? 이 서너 개는 부러질 때 나는 소리 같은데?
고개를 돌려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벤치에 있던 2학년 선배들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아, 하긴 내가 이렇게 짜증이 나는데 저 애들은 오죽할까
선배랍시고 자기들을 제치고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저런 모습을 보이니 나 같아도 속에서 열불이 솟아나고 있을 거다
본인들이 안 될 것 같으면 선배의 아량이라도 보여서 자기들에게라도 기회를 주면 좋은데 또 그럴 생각은 보이지 않으니
그런 면에서 보면 2학년 애들은 우리 신입생보다 더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이겠네
이제 내년이면 저들이 3학년이 되고 그때가 되면 정말 뭐라도 결과를 보여야 이후에 희망이 있는데 지금과 같이 연습도 제대로 못 해서 실전 감각이 떨어지면 그것도 불가능할 테니까
대체 무슨 깡인지 이곳 북촌 중학교는 대외적으로 프로를 노리는 학교를 표방하고 있다.
몇몇 종목을 제외하면 중학생이 프로가 되는 건 불가능하니까 직접 프로로 나가겠다는 건 아니고 프로가 될 아이들을 만드는 학교라는 이야기다.
쉽게 말해 체육 전문 중학교 같은 건데 이게 또 완전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게 학교에 다니면서 프로 스카우트나 명문 체육 고등학교 코치들이 들락거리는 걸 꽤 많이 목격했거든
그러니까 학교 자체는 대외적인 선전에 맞게 꽤 미래 꿈나무들을 키워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농구부만 이래 농구부만?'
[저에게 물으시는 건가요? 저야 모르죠. 애초에 이런 설정인 걸 제게 따지셔도 저는 도와드릴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답니다?]
'오늘따라 깐죽력이 제법 높구나 네비.'
다른 운동부에 비해 농구부는 지원의 결실을 보지 못하는 거로 꽤 눈치를 받는 중이다.
이 큰 실내 체육관을 농구부가 단독으로 쓰고 있는 것만 봐도 학교 차원에서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해주는 건지 알 수 있지만 정작 그 농구부의 전국체전만 나가면 계속해서 예선탈락을 해대니 감독이나 학생들이나 학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돼버렸단다.
아니 그러면 더 노~~~오~~력을 하던가 아니면 뭔가 참신한 방법을 찾던가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몇 년째 팀 성적이 바닥을 기어 다니자 감독은 팀을 반 포기상태로 내팽개쳤고 그나마 열심히 하던 선배들이 졸업한 이후에는 그야말로 개판이 되어버렸단다.
말이 프로를 노리는 거지 농구를 지망하는 신입생들도 전멸하다시피 해서 지금의 농구부는 다른 운동부에서 실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들어오는 최종 유배지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생각할수록 총체적 난국인데 이런 곳에서 실력을 키우라는 말이지? 이거 원작자한테 따져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 아니냐 네비?'
[노노노, 천만에요. 여기는 그나마 시설도 좋고 매니저들도 많아서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지금 시기에 이만한 곳은 찾기 힘들죠. 여기 졸업해 보세요. 북산으로 들어가면 이런 시설, 꿈이라도 꿀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신 차리세요 여기가 전쟁터면 거기는 지옥이에요 지옥.]
아, 아파. 팩트가 급소 여기저기를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어
말투도 띠껍고 무시하는 꼬락서니도 마음에 안 드는데 반박을 할 수가 없네. 이곳을 졸업하고 입학하게 될 북산의 상황을 알고 있으니 뭐라고 변명도 못 하겠네 제길
"준호야 정리 끝났어? 나도 좀 도와줄까?"
네비의 팩폭에 입은 데미지를 회복하고 있을 때 연습 경기를 마치고 선배들과 파이팅을 끝낸 치수가 다가왔다.
자기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경기 뛰느라 이래저래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해서 온 걸 보면 역시 생긴 거랑 달리 착한 녀석이라니까
"아냐, 정리 끝났어. 우리도 이제 이것만 넣고 나가려고 했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그래? 그럼 나도 도와줄게. 몇 개 되지도 않으니까 같이 하면 금방 끝나겠다."
"도와주면 우리야 고맙지. 그럼 빨리빨리 끝내고 가자"
조금 전까지 나와 페어를 이루고 있던 녀석은 내가 치수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하고 있자 놀란 표정을 하고 있다.
하긴 얘가 마음은 참 착하다 얼굴이 흉기 상이라, 가까이하기에는 좀 부담이 있긴 하지
근데 나는 왜 얘가 하나도 안 부담스럽지? 만화를 많이 봐서 그런가?
채치수와 나는 캐릭터 설정이 친구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처음 입부식을 할 때부터 어렵지 않게 친해졌다.
처음에는 오히려 채치수가 나를 어려워했는데 내가 자기 얼굴에 놀랄까 봐 스스로 조심했단다. 정말 생긴 것답지 않은 세심함이 아닐 수 없다.
확실히 탈 인간급인 치수가 도와주니까 얼마 걸리지 않아 기구들을 원래 있던 자리에 모두 정리하고 부실을 나올 수 있었다.
나머지 1학년생들은 집의 방향이 다 달라서 헤어지고 오늘도 같은 방향인 치수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하교를 하고 있었다.
"준호 넌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뭐가?"
"나는 농구부에 들어와서 오늘 네가 했던 패스 같은걸 받아본 적이 없어 네가 처음이야."
"아, 노룩 패스 그거?"
별것도 아닌 일인데 흥분한 고릴라를 보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한국인이면 국회의원도 한다는 그 패스가 뭐가 그리 대단할까.
그냥 치수가 제대로 된 패스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을 뿐, 이 정도는 앞으로 나올 수많은 기술들과 퍼포먼스에 비하면 말을 꺼내는 것조차 창피한 기초 중의 기초다.
이런 일로 흥분하는 치수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동안 얼마나 무시당하면서 경기를 뛰었으면...
공을 잡으면 패스나 요구하고 자기들이 실패한 공이나 리바운드시키는 기계로 대우한 3학년들 때문에 이 녀석의 잠재력이 하나도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 네가 더 대단하다. 피지컬 하며 집중력 하며 아닌 척하면서 승부욕도 대단하고"
"아하하하"
칭찬에 유인원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음…. 머리에 이가 있나?
"그런데 치수야 다 좋은데 내가 멀리서 보니까 너 몸을 너무 막 쓰는 것 같던데 어디 아픈 데는 없냐?"
"나? 아니, 평소랑 똑같은데?"
"내가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성장기 때 많이 큰 애들은 뼈나 관절을 조심해야 한대. 그중에 특히 관절. 몸이 급격하게 크면서 영양분도 부족해지는데 부하도 커지니까 까딱 잘못하면 상처가 날 수도 있다고 하더라. 그나마 뼈는 회복이라도 되는데 관절은 한번 망가지면 회복도 잘 안 된다고 하니까 너도 조심하고. 스트레칭이랑 운동 끝나고 마무리 운동 꼭 빼먹지 말고"
다른 녀석들 같으면(예를 들어 제롬이라거나 제롬이라거나 제롬 자식이라거나) 잔소리로 생각하고 듣지도 않았을 말이지만 이 우직하고 착한 녀석은 내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집중하면서 듣는다.
그래, 잘 새겨들어라. 어렸을 때부터 무리한 덕분에 고 3이 되면 네 발목이 아주 너덜너덜해진단 말이지
슬랜 덩크를 몇 번이나 본 독자로서 생각하자면 채치수라는 캐릭터가 너무 약점이 안 보이는 완벽한 캐릭터라 발목 부상이라는 약점으로 다른 팀과 균형을 잡은 게 아닌가 싶지만 그건 내가 없을 때 얘기고
내가 벨런스 따위를 신경 쓸 리 없잖아? 그런 건 미엘한테나 던져주고 치수 넌 내 감독하에 원작의 고릴라 보다 더 강력한 킹콩이 되는 거다.
"오빠!"
그래 오빠 킹콩이... 어? 오빠?
다다다
뭔가가 달라오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자그마한 인영이 치수를 향해 달려가다가 폴짝 뛰어 품에 파고 들었다.
"어이쿠! 소연아 다치면 어쩌려고, 조심해야지"
"에헤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달려온 인영을 품에 조심스럽게 안았던 치수는 다치지 않게 다시 조심스럽게 인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뭐지 이 상황은? 킹콩이 자기 부하를 소환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땅에 내려선 이를 바라보는데 뭔가 더 혼란스러워졌다.
치수의 허리 정도 오는 키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단발머리를 한 미소녀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치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생긴 아이가 치수의 품에서 나오는 거지? 이거 뭐 개꿀잼 몰카 같은 건가? 수호천사가 내려왔다는 콘셉트인 거야?
"어 준호야 처음 보지? 인사해. 여기는 내 귀여운 동생 채소연이야."
"오빠 친구야? 안녕하세요 채소연이라고 해요. 북촌 초등학교 5학년이에요"
말과 함께 허리까지 꾸벅 숙이는 미소녀의 모습을 보고서야 난 이게 몰카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몰카가 아닌 건 알겠는데 정말 동생이라고? 정말? 치수는 고릴라인데 왜 동생은 미소녀인데?
치수야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부모님의 안 좋은 유전자는 다 빨아들인 거냐? 뭐 저주 인형 그런 거야?
"어, 안녕? 첫 만남이 꽤 강렬하네"
"앗, 죄송해요. 놀라셨어요?"
앗 이런, 아직 당황이 가라앉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필터링 없이 말이 나와버렸네
괜히 내 말에 기적의 아이가 미안해하고 있잖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동생이 있다는 소리를 못 들어서"
말과 함께 치수를 지긋이 노려보자 웬일로 녀석이 눈을 피한다.
"어쩌다 보니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얼굴을" >놓쳐서...."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하는 고릴라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지금 봤다
뭐냐 이 어울리지 않는 행동은?
"저, 오빠 친구 처음 봐요! 집에서는 항상 농구부 얘기만 하면서 친구는 한 번도 초대 안 한다니까요?"
어? 뭐 그거야 그럴 수 있지 않나?
친구들 있다고 무조건 집에 다 초대하는 건 아니니까
아 혹시 일본은 친구가 있으면 집에 초대하고 그러나? 민폐 싫어하는 나라 아니었어?
"아, 늦게까지 연습하느라 다들 피곤해서 그럴 거야. 나 빼고는 집이 다들 반대 방향이기도 하고"
"어? 아니에요. 오빠는 초등학생 때도 친구들 초대 안 했어요. 만날 밖에서만 만나고"
아니 나도 초딩때는 그랬는데...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로 봐서는 일본은 친구를 초대하는 게 꽤 자연스러운 문화가 맞는 건가? 아니면 이곳에서만 그런 건가?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돌려보니 고릴라는 여전히 얼굴을 붉힌 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야 그거 하지 마. 그냥 딱히 네가 뭐 하는 건 아니더라도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혈압이 덩크를 할 것 같으니까
대체 치수 이놈은 아까부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야 답지 않게
잠깐 봐도 인형 같은 미모를 지닌 동생이 부끄러울 리는 없을 테고 혹시 나냐? 내가 그렇게 구역질이 날 것 같은 행동을 할 정도로 부끄러운 거야?
"오빠, 오늘 이 오빠 초대하는 거야?"
"아, 아니. 준호는 집에 가서 쉬어야 해. 공부도 해야 하고."
거참, 고~~맙다. 말도 안 꺼냈는데 언제부터 내 일정을 그렇게 잘 알고 있었니? 치수야?
그래서 딱히 가고 싶지도 않았는데 누추한 너희 집에 오기 전에 미리 차단하는 거니? 장래 희망이 권준호 비서야 뭐야?
내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걸 본 채치수가 눈을 피하더니 동생을 슬쩍 자기 뒤로 숨긴다.
이번엔 뭔데?
이상한 아저씨 취급인 거야? 어느 쪽인데? 유괴범? 아니면 로리콘? 말만 해 내가 아주 글자 수대로 농구공으로 찍어버리려니까
"오빠 왜?"
"아, 아니. 날도 어두워진 것 같고. 이제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서"
"벌써? 아직 이렇게나 밝은데?"
"아니, 그…. 왜 이전에도 이러다가 금세 어두워졌으니까"
"그건 겨울일 때 얘기잖아. 지금은 여름이라 해가 길다고. 오빠는 중학생이나 됐으면서 그것도 몰라? 바보 같아"
"아, 그…. 그런가? 맞다 지금은 여름이지? 하하하"
아주 용을 쓴다. 용을 써
평소에는 말도 많이 없던 놈이 왜 저러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저놈 완전 시스콤이잖아?
내가 봐도 아동복 모델을 해도 될 정도로 이쁘긴 한데 과보호가 너무 심하네
저놈 설마 그래서 이제까지 친구들을 집에 초대 안 한 건가?
"오빠가 조금 전까지 연습 경기를 뛰고 와서 그래. 선배들에게 인정받아서 조금 무리해서 그런 거니까 동생이 이해하고 너무 구박하지 말아줘"
다 큰 고릴라 같은 놈이 동생을 끔찍이도 위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긴 개뿔, 보기에도 쪽팔려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데 앞으로도 계속 붙어 다녀야 해서 내가 이번만 도와준다.
"어? 정말요? 우리 오빠 농구 잘해요?"
바보짓을 해도 자기 오빠라고 내가 치수를 칭찬하자 뒤에서 쪼르르 튀어나와 내 앞으로 달려온다.
뭔가 옛날에 봤던 보노보노에 나오는 뽀로리를 보는 것 같은 귀여움인데?
저러다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 '떄릴거야?' 이러면 싱크로율 100%겠어
"그럼 1학년 중에 유일하게 감독님 눈에 띄어서 후보로 들어가게 됐는걸?"
눈높이가 안 맞아서 한참 고개를 드는 소녀를 위해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춰주고 말했다.
여동생이라는 생물을 가져 본 적은 없어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상적인 오빠의 모습은 많이 봤단 말씀.
조금 오글거리기는 해도 어차피 지금 내가 하는 것도 캐릭터 안에 들어와서 하는 역할극인데 이 정도 응용쯤이야 뭐
"우와 우와! 우리 오빠 진짜 대단했구나. 맨날 아직 부족하다고만 하고 자세한 얘기도 안 해줬는데"
양팔을 파닥파닥하며 얘기하는 게 퍽 귀여운데? 거기서 좀만 더 RPM을 올리면 하늘도 날 수 있겠어
'과연 강백호의 인생을 송두리째 농구부로 귀속시킨 마성의 꼬맹이다'
[그러게요. 이 세계는 여자 캐릭터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아서 이 정도의 귀여움이라면 사기적인 영향을 발휘할 수도 있겠어요]
'정작 만화 자체에서는 약간 흔녀처럼 나오기는 했는데 역시 실물화가 되면 또 다르구나.'
귀여움에 나도 모르게 머리에 손을 올렸더니 자명종 버튼을 누른 알람 시계처럼 갑자기 움직임이 뚝 멈췄다
"주, 준호야!"
"어? 아. 미안"
내가 한 행동을 깨닫고 급하게 사과와 함께 손을 뗐다.
아 실수했네. 원래 노소를 따지지 않고 여자라면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데 눈앞의 소녀가 너무 귀여워서 강아지 다루듯 해버렸네
아무리 그래도 현실이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약간 반 빙의(?) 상태라 방심했나 보다. 반성하자
"미안해 치수 동생. 미안하다 치수야"
저 과보호 시스콤이 가슴을 두드리면서 포효하기 전에 사과를 한 번 더 하고 그래도 혹여나 경계심을 풀지 않을까 봐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자 이렇게 물러났으니까 진정하고 흥분 가라앉혀! 어허! 기다려!
"치수야 동생 이름이 뭐라고 했지?"
시스콤 고릴라의 이상한 눈초리가 시작되기 전에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
"채... 소연이에요"
질문은 치수한테 했는데 대답이 엉뚱한 데서 들려왔다.
고개를 내리자 나를 채소연이 자기가 말을 하고도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그래. 소연아, 괜찮니? 많이 놀랐어?"
"네? 아. 아니에요"
"소연아, 이리 와. 이제 집에 가자"
"응, 알았어! 오빠"
뭔가 뻘쭘해진 분위기에 치수가 서둘러 소연이를 챙기자 이번에는 소연이도 별다른 말 없이 치수의 말대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저, 오빠!"
"응?"
이제 가는 줄 알았던 소연이가 몸을 돌려 나를 향해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우리 오빠, 잘 부탁드려요. 가끔가다 이상해지는 오빠지만 착하고 보기보다 똑똑하다고 엄마가 그랬어요!"
아니야 소연아. 오빠를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자랑하듯이 말하는 거 아니야
"어, 어. 그래. 내가 더 잘 부탁해야지"
"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한번 집에 놀러 오세요. 제가 초대할게요"
네가 왜? 난 네 오빠 친구지 네 친구가 아닌데? 언제부터 우리가 베프가 된거니?
"어, 치수랑 얘기해서 시간 되면 놀러 갈게"
"꼭 이에요! 약속했어요!"
약속 아니야. 이건 그냥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인사말 같은 거야
이런 말이 다 약속이면 난 죽을 때까지 삼시 세끼 약속이 다 잡힌 상태란다
"그럼 내일 보자 치수야"
"그래, 내일 보자 준호야"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서둘러 치수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사실 평소라면 조금 더 같이 길을 갔겠지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찢어지는 게 나을 것 같아 인사를 했더니 치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덥석 인사를 받는다.
그렇게 손을 흔들 때도 소연이가 격렬하게 손을 흔드는 통에 결국 치수가 말리고서야 우리는 헤어질 수 있었다.
'휴…. 정신없다. 역시 여자란 생물은 노소를 떠나서 대하기 힘들어'
[그래도 제법 잘 상대하시는 것 같던데요? 누가 봐도 익숙해 보였어요]
'이게 다 미디어로 학습된 메뉴얼대로 대응한 거지 원래의 내 성격대로 했으면 죽어도 그렇게 대응 못 해'
[확실히 애교가 과하면 그것도 부담으로 다가온다는 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저러니까 강백호가 홀랑 넘어왔지. 자세하게는 안 나왔어도 아마 강백호가 들어올 때 같이 들어왔던 몇몇 신입생들도 소연이 때문에 왔을 걸?'
[그건 너무 억측 아닐까요?]
'아니, 지극히 합당한 추론인데? 안 그러면 주전이 다 갖춰져서 출전할 가망도 없는 농구부에 왜 남아있겠어? 그것도 유명하지도 않은 취미 수준의 농구부를 말이야.'
나중에 채치수가 주장을 맡는 북산고 농구부는 전국대회의 예선을 통과해본 적도 없는 3류 농구팀이다.
지금처럼 스포츠 특화 학교도 아닌 단순한 공립고교일 뿐이고 시설이나 스텝 어느 하나도 제대로 갖춰진 게 없는 그런 팀이다.
그나마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던 안한수 감독이 부임하면서 잠깐 이슈가 돌긴 했지만 그것뿐.
안 감독도 딱히 제자를 키우거나 전국대회를 목표로 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그마저도 시들해지는 곳인데 그런 곳에 신입생이 뭐 하러 남아있겠는가?
초반에야 워낙 엔트리가 빈약해서 한번 경기라도 뛸까 해서 남아있다고 해도 나중에 정대만을 끝으로 주전이 다 갖춰지면 강백호가 파울로 퇴장당하거나 다른 주전들이 다쳐서 잠깐 잠깐씩 교체되는 때 말고는 교체 기회도 찾아오지 않는 팀이다.
그럼 교체될 때를 노린다? 아쉽게도 그 북산에는 나름 확고한 식스맨이 존재한다.
권준호, 이 내가 들어와 있는 북산고의 부주장이 확실한 식스맨으로서 공백이 생긴 주전 자리를 항상 백업하는 게 북산고의 레귤러 구성이다.
다른 5명에 비해 딱히 특출난 건 없어도 반대로 딱히 모자란 것도 없는 식스맨으로 인해 교체에 대한 희망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 애들이라고 경기에 앉아서 소리만 지르고 손뼉만 치는 게 재밌겠냐? 다 나름대로 계획이 있고 목표가 있으니까 그러고 있는 거지'
[그게 저 채소연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저렇게 어린아이를 노리고?]
'뭘 또 모른 척이야. 지금이야 초등학생이라도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간에는 강백호랑 같은 고 1이라고. 고교 미소녀를 가까이에서 볼 수반 있다면 지금 당장 박수랑 응원 셔틀만 하더라도 만족하는 게 남고딩이라고'
[....무시무시하네요. 남자 고등학생이라는 건.]
'아니지, 혈기왕성한 청춘들을 그렇게 맹목적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미모가 무시무시한 거지. 가히 마성의 매력 아니냐?'
[그렇네요. 정말 무서울 정도예요]
'탈무드에도 나오잖아, 어떤 남자라도 여자의 아름다움에는 저항할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