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해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까는 그렇지 않더니 지금은 좀 이상하구나."
"내 이름은 메이, 저기 뛰어다니는 아이의 이름은 구리구리라고 한단다."
“…….”
"우리는 보다시피 큰 귀를 가지고 있는 큰 귀 부족의 일원으로 달 안쪽에 있는 라비루나에서 왔단다."
허허허허
이것은 인간의 언어인가 외계의 언어인가?
이곳이 달이니까 외계의 언어가 맞나?
아,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들리는 언어가 이해가 안 되는 건가?
"그래, 이해한단다. 달의 표면이 아닌 안쪽에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하니 놀랍기도 하고 믿기지도 않겠지."
아니 이해 못하고 있는거 같은데요 할머니, 저는 지금 그거 말고 더 본질적인게 안믿겨서…
"하지만 믿어야 한 단다 민호. 우리는 절대로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고 지금은 그저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일 뿐이란다."
아니 이상한데요.
심히, 매우, 절대로, 이상한데요
너무 많이 이상해서 어디부터 짚어야 할지 모를 지경인데요?
도움? 필요하죠.
누가 나 좀 도와서 정신 좀 붙들어 줬음 좋겠는데 아니면 이 상황 좀 설명을 해주던가
다 필요 없고 나를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다 주면 제일 좋고
내 생에 히스테리 워커 홀릭 부장이 보고 싶은 날이 있을 줄 몰랐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어.
"하아.. 네, 뭐 우선 이 물건 좀"
지금의 내 멘탈로는 무슨 소리를 해도 사실 잘 들어오지 않는다.
우선 집 나간 정신머리를 찾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해
우선 손에 들어있는 뭔지 모를 물건부터 처분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갖자.
그런데 할머니 왜 고개를 가로 저으시나요?
저번 점원도 그렇고 이 할머니도 그렇고 요즘은 말도 안하고 고개를 젖는게 유행인가
"그건 네 물건이란다 민호야."
"민호.. 하아.. 이게 제 물건이라구요?"
순간 민호가 누구냐고 물으려다가 이쯤 되면 의미가 없겠다 싶어 넘어갔다.
그런데 내꺼라고?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니 왼손에는 이상하게 튜닝된 스케이드 보드가 오른손에는 대체 뭘 쏘는지도 모를 넓적한 총구를 지닌 붉은 총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이거 뭔가 낮이 익은데? 내가 이런걸 어디서 본거지?
손에 들린 총을 보고 있자니 메이 할머니가 총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 아까 써서 알겠지만 이 물건은 마법총이라고 마동력으로 작동하는 물건이란다"
…..익스큐즈미? 왓?
"땅과 불의 마동력을 지닌 마동 전사 중에서도 선택받은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란다"
…아 이제는 그쪽 영역인건가? 난 또 로봇도 나오고 해서 SF장르인줄 알았지 뭐야?
그런데 알고 보니 판타지였어?
그래 좋아, 그럼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왜 제 손에 있는건데요?
저는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필요 없는 볼품없는 사람입니다만?
그래 분위기를 보아하니 대충 이 총 비스무리 한거는 저 할머니가 나에게 맡기려는 분위기이고 이 왼손에 들린 스케이트 보드는 원래 내 물건인 듯 한데.
이것도 어디서 본듯한데 말야
양손에 들린 물건들을 번갈아 살펴보는데 볼수록 여전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물건들이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머리에 한탄하며 고개를 들었더니 이건 또 뭔가 묘하게 평소에 보던 하늘이 아니라 이상한 게 보인다
평소에 보이는 파란 하늘과 구름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까만 우주와 별 그리고 지구?
.........저것도 뭔가 되게 격하게 지적하고 싶은데 저것부터 테클을 걸면 과부하가 너무 심할 것 같으니 우선 킵 해놓고.
시야를 내려 정면을 바라본다.
큰 귀를 움직이며 나를 주시하는 할머니 한 분과 쉴새 없이 뛰어다니는 마찬가지로 큰 귀를 가진 소녀 한명.
하아... 이제 생각났다.
정확히는 기억해 냈다가 맞는 말인데 그게 곧 이해했다는 말은 아니다.
"이거... 꿈인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는데 그게 잘못이었다.
쿵
"악!"
머리에 밀어닥친 충격에 급 쭈구려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 잠깐만. 뼈, 머리뼈 맞았어!
정말 과장 하나 없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큰 충격에 놀라 앞을 보니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메이 할머니.
그 손에는 언제 꺼냈는지 조그마한 별이 달린 짧은 봉이 쥐어져 있었다.
뭐지 마법봉인가? 설마 저걸로 내 머리라도 때린건가?
"어머, 미안하구나. 꿈이라고 착각 하는거 같아서 일깨워 준다는 게 그만 조금 큰 걸 소환해 버렸구나"
땅에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봤는데 어이씨 뭐야.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내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보다 큰 돌맹이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금 내 옆에 떨어진 걸로 봐서는 저게 내 머리를 때린 거 같은데 누가? 어떻게?
설마 저 할머니가?
"이래 보여도 나도 마동력을 사용할 수 있는 고위 마법사란다"
....네 거참 대단하시네요...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니 허리에 한 손을 얹으며 마법 지팡이로 보이는 막대기를 빙글 빙글 돌리는 메이 할머니
복장은 검은색 펑퍼짐한 마녀 로브에 귀가 빠져나올 구멍만 뚫어 놓은 큰 메지션 모자를 쓰고 계신 중이다.
음... 다시보니 저 할머니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굉장히 마법사처럼 보이는구나
그걸 이제 알았다는 게 내 인지 능력의 모자람을 뜻하는 것이겠지.
"뭐 덕분에 정신이 들었네요"
여러 모로 정신이 들었다.
너무 정신이 들어서 고위 마법사가 과연 실수로 저 큰 돌로 나를 내리쳤을까라는 현실적인 의문이 들 정도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 넘어가자.
방금 충격으로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고 확신한 이 세계의 정체는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다.
내가 굳이 장소를 세계라고 지칭한 이유는 이곳이 내가 평소에 있던 곳과는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슈퍼 그X죠
이곳은 내가 잠들기 전에 만화점에서 보고 있던 그 만화 속 세계다.
* * *
"이대리"
익숙한 호칭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더니 눈 앞에는 언제 왔는지 한 손에는 파일 첩을 든 부장이 내 앞에 있었다.
아, 부장의 표정이 찌푸려져있는 것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좋은 기분은 아닌 것 같은데 도망가면 안되나?
"네 부장님"
안 되겠지.
"이 파일 이대리가 올렸지? 여기 입출고 대장내역 제대로 된 거 맞아?"
거의 던지다시피 건내 준 파일첩을 받아 열어본다,
다짜고짜 하는 행동에 기분이야 나쁘지만 먹이사슬 최하위인 내가 불평을 할 입장은 아니니까 그냥 빨리 일처리나 하는게 더 이득이다.
열장 남짓 한 파일들 중 입출고 내역이 정리된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파일을 본 내 입에서는 어쩐일인지 즉답이 튀어나왔다.
"저, 부장님. 이 문서는 제가 올린 내용이 아닙니다"
"뭐?"
꽤 톤이 큰 부장의 반문을 무시한 체 나는 문서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입출고 대장 내역이라고 큼지막하게 써져 있는 상단 바로 아래 부분으로 가장 최근의 기록이 적혀 있는 부분이었다.
"이곳을 보시면 가장 최근 변경내역이 8일전 출고 내역입니다."
부장이 내 손을 따라 적혀있는 곳을 보더니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인트라넷에 수정하여 올린 자재 관리 문서상의 입출고 대장내역의 가장 최근 변경내역은 2일전입니다."
이건 2일전에 엄청 쿠사리 먹고 이직 전 마지막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집중하고 한 일이라 잘 기억하고 있다.
"그 이전에도 매일 업데이트가 됐었구요. 8일전 이 기록은 내부 발주건으로 급하게 처리되었으나 중간에 일정이 변경되어 취소된 항목인데, 반영이 안된걸로 보아 제가 수정하기 이전 자료를 첨부하여 작성한 문서 같습니다"
"어....? 그런가? 그럼 이 문서 누가 작성한거야?"
내게 건내 받은 파일을 들고 사무실 직원들에게 언성을 높이는 부장을 일별하고 잠시 화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내 잘못도 아니라고 결정 난 일에 굳이 불편한 공기를 맡으면서 있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변기 커버를 덮고 앉아 핸드폰으로 인터넷 창을 활성화 시키니 그곳에는 내가 이전에 살펴보던 웹페이지들이 나타났다.
90년대 만화 리스트
과거의 메카닉 만화
추억의 만화 100선
위키트리 - 슈퍼 그란죠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다 억지로 손을 움직여 한 페이지를 메인으로 불렀다.
위키트리 - 슈퍼 그란죠
일본 선라이즈 제작의 판타지 로봇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한국에는 《번개전사 그란죠》《번개전사 슈퍼 그란죠》《하이퍼 그란죠》라는 제목으로 비디오로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었으며 SBS가 개국하면서 《슈퍼 그란죠》라는 제목으로 1991년 12월 9일 방영한 이후 더욱 큰 인기를 끌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비디오가 재생 산되기까지 한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하였으며, 완구판매조차 이렇다 할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하자 처음 기획했던 45화에서 4화를 줄여 41화로 조기 종영되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자료 조사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게 자꾸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도 이 어처구니 없는 검색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간밤의 기억이 너무도 또렷하기 때문이다.
아니 간밤에 있었던 일이 맞긴 한 건가?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금요일에 퇴근을 하면서 이상한 가게에 들렸고 그 뒤에 집에 귀가 한 뒤에 기절하듯 잠든 것 뿐이다.
그리고 만화 같은 꿈?을 꾼 것이었다.
문제는 그 꿈이었지만.
[계승자의 적응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전 세계로 복귀 조건을 총족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그곳이 어떤 만화의 세계라는 것을 인지했을 때 머릿속에 출력 되듯 나타난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알람 소리에 눈을 떠서 확인한 날짜는 월요일이었다.
이게 뭔가 싶긴 했지만 우선 이제껏 살면서 몸에 익혔던 관성에 따라 튕기듯 일어나 부랴부랴 준비해서 출근을 하고 보니 평소보다 1시간이나 이른 시간에 출근을 해 있었다,
'1차 경고 알람에 일어나 출근하다니'
평소에 자도 자도 부족한 잠 때문에 일어나는 게 힘들어 내 핸드폰에는 기상 시간 이전에 몇 개의 예비 알람이 설정이 되어 있었다.
그 중 1차 경고 알람이라 저장한 알람 시간은 적정 기상 시간 보다 30분 이른 시간.
그 뒤로 2차 경고, 3차 경고, 정시, 마지노선, 사망 등의 다른 알람 시간들도 있었지만...
보통 내가 일어나는 알람은 정시나 마지노선이었지 1차 경고에 일어나 출근을 해본 적은 첫 출근 날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금요일 저녁에 잠들어 월요일 아침에 일어난 셈이니 일찍 일어난 게 당연한 건가?'
[딸깍]
"야, 야. 괜찮냐?"
"아 몰라 젠장... 아침부터 기분 뭣 같네 정말"
아 나도 모르게 또 의식의 흐름대로 멍 때리고 있었네
까딱 잘못했으면 또 몇 십 분이 훌쩍 흘러갔을텐데 누가 화장실에 들어오는 기척에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여기 비어있는 사무실 복도에 있는 화장실이라 잘 안 찾아올텐데 다른 화장실이 다 찼나?
"그러게 좀 잘 확인해보고 올리지 그랬냐? 아니면 물어라도 보던가"
"아 씨. 약올리냐? 그때 불금이라 달리자고 재촉하던 게 누군데? 중요 확인 건으로 전체 메일로 온 거라 확정이라고만 생각했지 변경건이라고 생각 못했지. 아오. 내가 병신이지"
"크크크 야 그래도 내가 그때 재촉해서 그때 개네들 헌팅할 수 있었던 거 아냐? 10분만 늦게 갔어도 다른 새끼들이 달라붙어서 작업하려고 했을 거 내가 봐서 바로 낚았잖아. 너도 홈런 쳤다고 고마워 할 때는 언제고"
"아 미친, 그건 그거고. 부장이 이거 인사고과에 반영한다고 하는데 아 놔 미치겠네"
"에휴, 어쩌겠냐. 그래도 이제껏 해 놓은 게 있으니까 대충 넘어가겠지. 그것보다 아까 보니까 이대리님 의외던데? 부장이 뚜껑 열린 상태로 달려드는데도 의외로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할 말 다 하더라?"
"아호, 그러니까 더 문제라고 이 자식아. 평소 같으면 부장이 불도저처럼 달려들면 벙 쪄서 어버버 거리다가 어그로 혼자 다 먹고 전사했을텐데 오늘은 어디서 그런 스킬이 생기셨는지 바로 회피해 버리시잖아. 덕분에 부장이 더 뻘쭘해져서 분노 게이지만 더 올라간거 아냐"
"그러게. 이전에 알게 모르게 너희 부서에서 실수 한일이 이대리님 책임으로 넘어갔던거에 비하면 오늘은 처세가 확실하시던데. 책임 소재는 분명히 넘어가시고 대신 기분은 안 상하시게 하는게 보통 스킬이 아니야. 어디서 생존기라도 익히고 오셨나?"
"야야, 생존기는 무슨. 그냥 어쩌다 한번 운 좋게 넘어 간 거야. 이대리님 사람은 좋으시지만 네 말처럼 그런 스킬이 있으셨으면 이제껏 그런 취급 받았겠냐? 우리 부서 사람들도 실수한 거 은근슬쩍 이대리님 실수인 척 모른척할 때가 분기별로 한 두개씩은 될 텐데?"
"아 하긴 그런가? 이대리님 항상 보면 어깨가 축 쳐저 계시고 힘들어 보이시긴 하더라. 상사들이 뭔가 신뢰가 안가 보이긴 해"
"야 됐고, 오늘 쿠사리는 네 몫도 있으니까 오늘 저녁 술 사라, 금요일에 헌팅한 애들 보기로 했으니까"
"이야, 이 새끼 이걸 이런 식으로 쓰네. 뭐 좋다. 어차피 월욜이라 달리지도 못 할테니 그 정도는 내가 위로주 겸 쏘지. 가자 더 늦으면 부장한태 또 한 소리 들을라"
"에휴, 그래 가자"
물 내리는 소리를 끝으로 낮 익은 두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흐음...."
적막한 화장실 속 나는 계속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화면에 나타난 슈퍼 그란죠의 위키 내용을 읽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