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12년 전에 네가 알던 옆집 오빠 김혁이 아니야. 지금의 나에게서 그때의 김혁을 찾지 마."
짓고 있던 옅은 미소는 사라지고 선을 긋고 딱 잘라 말하는 김혁이다.
그 말에 서러웠는지 눈에는 눈망울들이 맺혔고 그 눈망울들은 바닥으로 한 방울씩 떨어졌다.
한윤의 눈물로 일시적으로 동요를 하고 있었지만 이내 다시 마스크를 끼곤 발걸음을 옮긴다.
점점 멀어져 가는 김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윤이다.
들려오는 소리에 멈추려는 발걸음을 억지로 끌고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 건물 뒤쪽으로 향한다.
"하......"
건물 뒤편 벽에 기대어 땅이 꺼질 듯 크게 한숨을 내쉬곤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는다.
이 상황이 괴로운 듯.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지금 이 모든 감정을 참아야 했다.
그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한참을 벽에 기대어 있었고 결국 중요한 할 말을 하지 못한 체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 때는 이미 집에 갔는지 보이지 않는 한윤이었다.
터덜터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고 검은색 스포츠카에 올라타려는 그를 붙잡는 한 남자, 현준이다.
모든 상황을 지켜본 후 계속 지하 주차장에서 김혁을 기다린 듯하다.
재밌다는 표정과 함께 피식 한번 비웃어 보이고는 팔짱을 끼며 말한다.
"역시 재밌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 확인하면 현준이 팔짱을 끼며 차에 기대어 서 있다.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며 현준을 응시하고 있는 김혁.
"어떻게 내 옆에 들어온 인턴 작가가 너네랑 친하대? 이것도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
인턴 작가라는 말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주먹은 현준을 향해 달려갔고 빠르게 피하는 현준이다.
이번엔 반대로 현준의 주먹은 김혁에게 향했고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나 뒹굴었다.
입술은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말이야. 앞으로 그 인턴 작가랑 친하게 지낼 건데 어떻게 생각해?"
"뭐...?"
김혁의 눈동자는 하염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이 재미있는지 소름 끼치게 웃어버리는 현준이다.
"그럼 나중에 보자?"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차를 타고 주차장을 나가는 현준이다.
그 모습에 분했는지 주먹으로 주차장 벽을 내려치는 김혁이었고 지금 모든 상황이 혼자서 감당을 하기에는 벅찼다.
"지켜주고 싶어도... 지켜줄 수가 없잖아."
-
청담동의 고급 아파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비밀번호를 몰라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다온이였다.
"형..! 왜 이제ㅇ..."
다온은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는 김혁의 입과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던 것을 발견한다.
어디서 구른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싸워서 생긴 상처였다.
"형! 얼굴이랑 손이.. 왜 그래?"
다온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김혁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차가운 눈빛으로 다온의 말을 곱씹고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간다.
문이 닫히려고 할 때 좁은 틈을 비좁고 들어오는 다온이다.
피곤했는지 옷도 갈아입기 전에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리는 김혁.
"형! 있잖아. 나 오늘 작가님 봤다?"
"......."
"작가님 진짜 작가 됐더라? 그래서 오늘 방송국도 내가 데려다 주ㄱ..."
"그놈에 작가 작가 작가..!!!!"
갑자기 화를 내는 김혁의 소스라치게 놀라는 다온이다.
요즘 계속해서 변해가는 김혁의 모습에 겁을 먹은 듯싶다.
"형.. 왜 그래?"
"나가."
"어...?"
"나가라고!!!"
김혁의 외침에 방문을 열고는 우사인 볼트 마냥 재빠르게 집을 나가는 다온이다.
"왜 저래...?"
김혁의 말에 이상하다며 입을 삐쭉 내밀고는 그대로 건물을 빠져나가는 다온.
활동도 끝나서 할 일이 없었던 다온은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더니
결국,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은 태온이 입원 중인 레인병원이었다.
레인병원 VIP 병실 1006호로 향했고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땐 무언가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났다.
다온은 깜짝 놀라 병실 문 좁은 사이 틈으로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다.
".... 대표님?"
무언가 때려 부쉈던 장본인은 다름 아닌 호재였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다온이다.
"태온아. 우리 편하게 살자, 어?"
"......."
"그냥 위약금 딱주면 끝나는 건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대표님..."
"그러게 처음부터 내 말 잘 들었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거 아니야!"
"대표님!!!"
"이 새끼가 어디서...!"
호재의 오른족 손은 태온의 왼쪽 뺨을 향해 날아갔다.
그대로 짝 소리가 나고 태온의 얼굴은 반쯤 돌아가 있었다.
다온은 이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다 손으로 입을 가려 보았다.
"허헙..."
하지만 새어 나오는 소리로 병실 문 쪽을 응시하는 호재다.
호재는 몰래 지켜보던 다온을 발견하고는 버럭 화를 낸다.
"이 새끼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다온은 호재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주저앉아 있는 태온의 상태를 보곤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호재에게 맞선다.
"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나랑 태온이 일이니까 넌 집으로 돌아가라."
"대표님 진짜 무서운 사람이었네."
"뭐야?"
"여기까지 회사 키워준 게 태온이형 이잖아요..."
하하하하하하하하
호재는 다온의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크게 호탕하게 웃어 보인다.
"뭐? 지금 다온이 네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네."
"......."
"너희를 키워서 회사를 이렇게 만든 게 나라는 걸 모르는 거냐?"
지금까지 막내였기에 항상 형들 사이에서 애교도 부리고 귀여움을 담당했다.
팬들 사이에서도 귀여운 막내로 인기가 많았다.
지금은 그런 다온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항상 하이톤이던 목소리마저 중저음으로 바뀌었다.
그리곤 호재를 응시하곤 한번 피식 웃어 보인다.
그 모습에 소름 끼치는 건 호재와 태온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다온의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일해도... 결국은 대표님도 우리를 버리는구나."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인 다온이였다.
아픈 태온을 앞에 두고 못 할 말이 없었던 호재를 보면 괘씸했다.
지금까지 돈 벌어다 줄 거 다 벌어다 주고 잠도 못 자면서 스케줄까지 했는데... 너무해도 이건 진짜 너무했다.
다온은 계속해서 호재에게 맞섰고 10여 분이 지나고 그런 다온을 누군가 말리기 시작한다.
한참을 병실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다 들어온 매니저 민호였다.
민호의 모습을 본 호재는 호탕하게 웃어 보인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
"이제 너를 도와줄 든든한 아군이 없는 데 나를 이길 수 있겠어?"
"형....."
태온의 말에 그저 시선을 회피하고 마는 민호다.
"..... 형, 아니지?"
다온은 민호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는지 사실 확인을 위해 되묻는다.
하지만 민호는 오히려 활르 버럭 내고 그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만 할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태온이다.
호재는 그 사이에서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 호탕하게 웃을 뿐이었다.
"형이 어떻게..."
"......."
"형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너도 인제 그만 정신 차려!!!"
"뭐...?"
"ㅌ... 태온이는 이제 가루비 아니야."
가루비가 아니라는 민호의 말에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태온이다.
이제 가루비가 아니라는 건 사실이었지만 갑자기 변해버린 민호가 낯설다.
함께 싸워주겠다던 민호는 결국 호재의 편에 서 있었다.
믿었던 민호에게 배신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꽂혀있던 수많은 바늘을 빼고는 병실을 나가는 태온.
멀어져 가는 태온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이내 회피해버리는 민호다.
그런 민호의 눈동자는 미세한 차이였지만 잠시 동안 흔들렸다.
"형... 어디가!!!"
태온의 행동으로 그를 잡는 사람은 다온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곤 병실을 뛰쳐나와 한참 동안 걷고 또 걷고 도착한 곳은 병원 15층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공원에 도착해 한참 동안 자리에 서 있다가 한숨을 쉬며 작은 벤치에 앉는 태온이다.
그런 태온의 눈동자에서는 맺힌 눈망울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결국은 처음부터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을까?
태온은 그렇게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병원 공원에 한참을 머물렀다.
***
다음 날 오전 SBN 방송국 거리.
방송국에 출근 하는 사람으로 북적이는 거리.
그 사이에서 가방을 여미고 출근하고 있는 한윤의 모습도 보인다.
방송국 거리에 여기저기 붙어있던 태온의 전광판 광고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그 빈자리에는 요즘 뜨고 있는 신인 배우 공현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포슬포슬 가루처럼 내리는 빗방울들 사이에 투명 우산을 쓰고 전광판을 바라보는 한윤.
멀리서 보이는 한 남자가 비를 맞으며 높은 건물 아래에서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저 남자는 비가 오는 데 왜 저러고 있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발걸음은 점점 그 남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슬픈 눈동자로 멀뚱히 전광판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
얇은 가디건 하나 걸치고 환자복을 입고 있었던 태온이다.
태온의 모습을 본 한윤은 놀라면서 소리를 지르곤 그대로 뒷걸음질을 했다.
태온은 한윤의 소리로 뒤를 돌아보곤 눈물을 보였다.
너무 말라버린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눈물을 보이는 태온을 말없이 안아주는 한윤.
그런 한윤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는 태온이었고 그런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며 지나가는 방송국 직원들이다.
'뭐야? 가루비 태온 아니야?'
'저기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지?'
옆에서 누가 뭐라 하든 지금 상황에선 신경 쓰지 않았다.
무너져 내리기 직전인 앞에 있는 남자를 위로해주는 게 먼저였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한윤의 어깨에 기대어 울던 태온이었다.
그저 그런 태온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를 해주는 한윤이었고 너무 오랫동안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렸던 태온은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갑자기 쓰러진 태온으로 당황을 한 한윤이었고 경비원의 도움을 통해 겨우 119를 부르고 병원으로 향한다.
-
레인병원 입구.
"VIP 환자입니다. 죄송하지만 비켜주세요!"
구급차에서 내려 급하게 병원으로 들어갔다.
출근하지 않고 태온을 따라 병원까지 와버렸다.
제발... 부디 아무런 일도 없기를.
"형...!!"
쓰러진 상태로 실려 온 태온의 모습을 보며 결국 눈물을 흘려 버리는 다온이다.
갑자기 사라진 태온이었고 다시 나타났을 땐 쓰러져 있는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왔다.
그렇게 무너져 내려버린 다온을 그저 바라볼 뿐인 한윤이다.
"작... 가님..."
"......."
"흐흑..."
한윤을 발견하고 다온도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흘린다.
그저 그런 다온을 위로해주는 것밖에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원래 병원에 있어야 할 태온이 왜 오늘 아침 환자복 상태로 우리 방송국 앞에 있었는지.
그에 대해 다온에게 묻고는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작가님... 우리 형 어떡해요...?"
"........"
"우리 형 불쌍해서... 어떡해요...!!"
다온은 그렇게 한참을 병실 밖 벤치에서 한윤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