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정말 괜찮다는 말이지?"
하염없이 민호의 눈동자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런 민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는 시현이다.
"지금.. 협박하시는 거예요?"
민호의 말에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는 마지막 말을 남기곤 회의실에서 나가는 시현.
그런 시현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고 고민에 빠진 민호의 모습이다.
회의실을 빠져나온 시현은 다시 회사를 나와 호재의 차에 탄다.
차에서 신문을 보며 기다리던 호재는 차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란다.
"당신 왜 이렇게 놀라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한 건 아니지?"
"쓸데없는 소리라뇨. 아마 걔도 우리 편에 서게 될 거에요."
"내가 이래서 당신을 좋아한다니까?"
시현의 손에 가벼운 입맞춤하는 호재다.
부끄럽다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시현.
결국, 이 게임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었던 게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민호다.
시현의 마지막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민호는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그리고 이내 슬픈 눈빛으로 변하고는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는다.
한참을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고민하던 민호는 벌떡 일어나 터덜터덜 걸으며 회사를 빠져나온다.
이미 회사를 나왔을 땐 호재와 시현은 퇴근했는지 호재의 외제차는 보이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도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던 민호.
어디라도 가서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 조금은 기분이 풀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 소리를 지르면 미친놈이라고 하겠지.. 싶어 생각을 멈추는 민호다.
"나 지금 뭐 하는 거냐..."
-
현재 시각 새벽 1시 42분.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침대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뒤집었다가 이내 벌떡 일어나는 태온.
늦은 시간으로 이미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지 병실에는 침대 이불 소리로만 가득하다.
"...... 보고 싶다."
태온은 침대에서 일어나 병실 창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밤하늘 위에 반짝반짝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짝이는 별들이 꼭 마치 그녀가 자신을 보고 웃어주는 모습 같았다.
한참 동안 별을 바라보던 태온이었고 탁- 병실 문 닫히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이 시간에 누가 올 사람이 없는데...
처음엔 매니저인 줄 알고 어디 갔다 오냐며 말하는 태온이었지만 긴 생머리에 손에는 과일주스가 들어있는 박스를 들고 들어오는 한 여자였다.
주황색 원피스에 약 7cm 정도 되어 보이는 검은색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여자.
태온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굴에 미소를 가득 채우고는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얼굴을 확인하고는 태온은 경악을 머금지 못했다.
짓고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점점 굳어져만 가는 얼굴이다.
그와 반대로 해맑게 웃고 있는 한 여자, 바로 민영이다.
도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너..."
"왜, 좀 감동했어?"
감동은 개뿔.
기대만 했다 똥 밟은 기분이었다.
과일주스가 여러 개 든 박스가 무거웠는지 짜증을 내는 민영이다.
"아, 이거 왜 이렇게 무거워? 내 가녀린 손목..."
약한 척하는 민영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기 바쁜 태온이다.
그 눈빛을 눈치를 챘는지 이내 병실 책상 위에 과일주스 박스를 탁 내려놓는다.
그리곤 소파에 가방와 하이힐을 던지며 앉아버리는 민영.
민영의 모습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창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태온이다.
"너 여기 왜 왔냐?"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거든?"
"나 이런 꼴 돼서 놀리려고 온 거냐?"
"..... 그래!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욱하는 성격으로 태온의 말에 대응했지만 슬픈 건 숨길 수 없었던 민영.
씩씩대며 태온을 바라보지만 결국 눈물을 흘려 버린다.
그런 민영의 눈물로 당황한 태온이고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야... 왜 울어?"
"흐흑... 너..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결국은 이렇게 되려고 그런 거냐?"
민영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농담하는 태온이다.
그런 태온의 행동에 미친 놈이라고 말하지만, 태온은 여전히 예쁘게 웃고 있다.
농담하며 애써 미소를 짓고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누구보다도 더 힘든 태온이다.
주변 사람들을 위해 괜히 아프고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이 티를 내면 낼수록 주변 사람들이 더 괴로울 테니까.
"오랜만에 푹 쉬고 좋지 뭐."
"너 진자 미친놈이네.. 이 와중에 그런 말이 나오냐?"
"이제 나 어떤지 알았으니까 그만 돌아가. 너무 늦었어."
"네가 그렇게 가라고 말 안해도 갈거거든?"
"그래, 가라. 잘 지내고."
마지막 말에 어째 이 만남이 정말 마지막인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전달 받았다.
아마 지금의 모습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
다음 날 시각 오전 8시 30분.
'문이 닫힙니다.'
"잠시만요..!"
급하게 계단을 두 개씩 내려오지만 이미 문은 닫히고 출발하는 SBN 방송국행 지하철이다.
망해도 이건 제대로 망했다.
공모전에 당선이 되고 1년 동안 의무로 인턴 작가로 일을 해야 한다.
오늘은 첫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망했다..."
다음 지하철까지 1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여기까지 택시를 타도 20분은 걸리는데 출근 시간이라 차가 엄청나게 막힌다.
첫날부터 뛰어야 하는 인생인가?
짜증남을 온몸으로 지하철역에서 표현하는 한윤.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피식- 웃으며 지나간다.
그 모습에 쪽팔림이 강림하셨는지 얼굴을 손으로 가리곤 지하철역을 빠져나온다.
"아 진짜 어떡하지..."
"작가님?"
갑자기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본다.
손을 흔들며 오토바이 위에 올라가 있는 가루비 막내 다온이다.
"어..? 당신은..."
"어디 가세요?"
출근 시간이라 차는 계속해서 막혔다.
그리곤 그사이에 서 있는 다온이 타고 있는 건 오토바이였다.
이내 씨익- 웃으며 다온에게 발걸음을 옮기고는 다짜고짜 뒤에 타곤 출발을 외친다.
영문을 몰랐던 다온은 헬멧을 쓰고는 급하게 출발을 한다.
막혀있는 차들 사이로 요리조리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다온.
"근데 작가님 어디 가는 거예요?"
"일단 SBN 방송국으로 좀 가주세요. 빨리요!"
"ㄴ... 네..!"
그리곤 오토바이는 한참을 달려 SBN 방송국 입구 앞에 도착했다.
시계를 바라보면 8시 52분에 분침이 멈춰 있었다.
허겁지겁 오토바이에서 내려 인턴실로 냅다 달렸다.
고맙다는 인사도 하기 전에 말이다.
그런 한윤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다온은 피식- 웃어 보인다.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저어주고는 다시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몰고 방송국을 나간다.
허겁지겁 달려 겨우 인턴실에 도착했고 시간은 8시 59분.
"앗싸, 세이프..!"
"거기 조용히 하고 얼른 앉으세요."
"넵...!"
이미 모두 10분 전에 와 있는 이번 공모전에 함께 당선된 인턴 작가들이었다.
한윤의 말에 여기저기서 피식- 하며 비웃기 시작했다.
민망했는지 조용히 자신의 이름표가 있는 자리에 앉는다.
"드라마 각본 공모전에 당선된 여러분들 축하드립니다. 오늘부터 1년간 의무적으로 우리 방송국에서 인턴 작가로 일해주셔야 합니다. 불이행 시 공모전 당선은 즉시 취소되며…."
'휴... 한윤 잘하자!'
"거기 한윤씨?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데 누구랑 이야기하시는 거죠?"
"아... 죄송합니다!"
"흐흠. 앞으로 한 달마다 인턴 작가분들은 1회분의 작품을 의무로 제출 해주셔야 하며 중간평가를 통해 인턴 작가에서 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해주세요."
인턴 작가로서 해야 할 일들을 안내받은 뒤 서로 악수를 하며 인턴 작가들끼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리를 배정받은 뒤 회사 노트북과 여러 가지 물품을 받고는 함께 일할 선배 작가님들과 인사를 마친 후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와 받은 물품을 정리를 하는 한윤.
옆자리에는 대본을 수정하고 있는 선배 작가가 보였다.
몰래 힐끔 쳐다보지만, 그 시선이 느껴졌는지 한윤 쪽으로 시선을 옮기는 선배 작가 현준이다.
"신기해요?"
"ㄴ... 네?"
"아니,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길래.."
"죄... 죄송합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남자지만 예쁜 눈웃음을 보이며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현준이다.
도대체 왜 웃는 거지?
"혹시 일하면서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하던 일 계속하세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마지막까지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대본 수정을 하는 현준.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서 안심되었는지 긴장이 풀리고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방송국 안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민망했는지 배를 부여잡고는 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짐 정리를 하는 한윤.
그런 한윤을 옆에서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이는 현준이다.
이놈에 배야.. 이 상황에 배가 고프냐?!!
서랍을 뒤지며 에너지바 하나를 발견하곤 한윤에게 건네는 현준.
갑자기 옆에서 보이는 에너지바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 모습에 또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현준이다.
아니,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웃기신대요..?
정말 재미있는 인턴이라며 눈물을 보이면서까지 웃는 현준이었고 그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는 한윤이다.
그 모습에 괜히 그 남자가 생각이 나기도 했다.
아니, 왜 여기서 걔가 생각이 나는데?
도대체 왜?
"그만 웃으세요... 민망하네요."
"아아.. 알았어요. 그만 웃을게ㅇ... 푸핫."
결국, 그렇게 한참 동안 배꼽을 잡으며 웃는 현준이었다.
그런 현준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윤을 째려보기 시작하는 같은 인턴 작가들이다.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려 인턴 작가들을 쳐다봤지만 이내 흥- 하며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계속 웃은 현준으로 인해 몹시 피곤했고 그 시간 동안 10년은 더 늙은 것 같다.
인턴 작가 생활...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를 별로 맘에 안 들어 하는 인턴 작가들과 나를 보면 계속 웃기 바쁜 선배 작가 현준.
"진짜... 힘든 하루네."
"힘들었구나."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대로 종이컵에 들어있던 커피는 뒤에 있는 남자의 흰 티셔츠에 쏟아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