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혁? 혁 오빠?"
정확히 12년 전 우리는 처음 만났다.
12년 전 우리는 어려도 너무 어렸고
아무것도 모르던 순수한 나이였다.
하지만 10년 전 그가 떠나며 그렇게 헤어졌다.
2년간의 추억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2년간 서로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된 날이었기에.
"저를 아세요?"
"오빠 저 기억 안 나요? 한윤. 윤이잖아요! 12년 전에 옆집 동생이었던...!"
"엄... 글쎄요? 전 어렸을 때부터 해외에서 살아서..."
김혁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다 동명이인이겠지 하며 사과를 하는 한윤.
그 모습을 본 후 일시적으로 표정이 굳어지는 태온과 김혁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 했나 봐요."
"아니에요."
드디어 늘 찾던 옆집 오빠를 찾았나 싶었지만, 동명이인이라는 생각에 울상인 한윤이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김혁.
하지만 끝까지 혁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윤.
김혁은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딴 곳을 응시한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듯 표정은 매우 불안해 보인다.
"그럼 인사는 끝났으니까 태온이 빼고 나머지는 가서 연습해."
그렇게 시현의 말에 겨우 회의실에서 빠져나온 김혁.
얼굴엔 온통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눈동자는 하염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식은땀을 닦아주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연습실로 향한다.
"형 맞지?"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김혁이다.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는 태온이 말했다.
"형이잖아."
태온의 한마디에 다시 한번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김혁은 말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한윤이 찾는 옆집 오빠."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길 수는 없었다.
늘 태온에게는 어떤 일이든 숨길 수 없었던 혁.
거짓말을 하면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부터 딱 티가 났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눈동자가 흔들리는데도 끝까지 발뺌하는 김혁이다.
"왜 거짓말했어?"
"거짓말이라니..? 난 진짜 모른다니까?"
"그래? 그럼 내가 한윤 가져도 돼?"
"....... 뭐?"
갑작스러운 말로 당황한 건 혁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무언가 아는 듯한 눈치이지만 선을 긋는 태온이다.
"형은 모르는 사람이라며? 그럼 나 한윤 탐나는데 내가 가져도 되겠냐고."
"......."
태온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혁.
이내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태온이다.
방금 말이 거슬렸는지 미간이 좁혀지다 이내 풀렸고
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가 없었으며 김혁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곤 혼잣말로 김혁은 말했다.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는구나..."
회의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태온.
의미심장한 미소로 회의실 안에 들어가면 사인이 되어있지 않은 빈 계약서만 덩그러니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고 어디에도 한윤은 보이지 않았다.
타악.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응은 해보았지만 애타게 찾는 한윤은 온데간데없었고
한숨을 푹 쉬며 시현이 들어온다.
"하..."
"작가님은요?"
"보시다시피?"
빈 계약서를 가리키며 시현이 말한다.
"태온이 네 말 듣고 마음먹고 자리 마련한 건데 단호하게 거절하니까 뭐 별수 있겠어?"
"안돼요."
"뭐라고?"
"안된다고요!"
갑자기 버럭대는 소리에 태온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시현.
이성을 잃은 듯 그의 입에서는 한윤이라는 이름이 계속 맴돌았다.
"태온아 너 이런 애 아니잖아. 왜 이렇게 그 작가님한테 집착을 해?"
"한윤 아니면 안 된다고요..."
회의실 문밖에서 모든 상황을 엿듣고 있는 한윤.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하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옮긴다.
재빠르게 회사를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지만 태온의 말이 계속 신경이 쓰인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생각이 복잡해지는 한윤이다.
계속해서 발걸음은 회사와 정류장으로 왔다 갔다 옮겨지고 있다.
결국, 궁금한 걸 참지 못한 한윤은 운동화 끈을 꽉 여매고 회사로 달렸다.
회사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가루비의 밴은 없어진 후였다.
거친 숨을 고르고 허탈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한윤이고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재빠르게 뒤로 돌아보면 애타게 찾던 그가 서 있었다.
놀란 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순간 반가움에 한윤을 꽉 안아버린다.
태온의 행동으로 당황해 뿌리쳐보지만
운동한 몸집이라 절대 뿌리치지 못했다.
".........."
서로 한참을 말없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시간이 점점 지나 겨우 상황 파악을 했는지 안았던 한윤을 놔주는 태온.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한윤과 태온이다.
괜히 헛기침하며 어색한 상황을 무마시키려는 듯 아무 말이나 내뱉는 한윤이다.
"하하... 오늘 날씨가 진짜 덥네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한윤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온은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잇몸까지 보이고 웃기 시작했다.
"작가님이랑 있으면 저 항상 웃고만 있네요.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아... 다행이네요."
다행 이긴 뭐가 다행이야?
생각할수록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속으로나마 메아리를 울리고 있다.
지금 이 상황들 속에서 속 시원하게 웃고 있는 태온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까 그 일에 대해서 이유를 말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조차 잡지 못하겠다.
아직도 그 말에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말할 기회가 생기겠거니 하며 오늘은 그냥 넘어갔다.
그 동시에 멀리서 다가오는 이번엔 새빨간 스포츠카다.
새빨간 스포츠카는 마치 방금 뽑은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차가 한윤과 태온 앞에 멈추면 문을 열고 나오는 가루비 매니저다.
차 열쇠를 태온에게 던지며 입을 쭉 내밀고 불평을 하는 매니저다.
딱 봐도 나이 더 많아 보이는데 하는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런 건 네가 직접하라고."
"고마워, 형."
던진 차 열쇠를 한 손으로 받고 스포츠카로 향하는 태온.
그리곤 조수석 문을 열더니 타라는 눈짓을 보낸다.
하지만 그 눈짓을 눈치 못 챈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한윤이고
이내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고는 차에 태우는 태온이다.
당황하며 억지로 차에 타버렸고 그렇게 차는 무서운 속도로 출발했다.
"아니, 저기...!"
"늦었으니까 데려다줄게요."
"이거 태온씨 차예요?"
"네. 집에 차 몇 대 더 있어요. 왜요?"
차 몇 대 더 있다는 말에 기겁하는 한윤.
내가 진짜 지금 대단한 사람과 말을 하고 있는 거구나 싶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가난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부자는 아닌 집에서 태어나
받을 사랑 다 받으며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가지며 살아왔지만
태온처럼 살아온 적은 없었다.
지금은 물론 작가도 아닌 작가 지망생이고
이 직업으로 성공을 할지 말지 정해지지도 않은 불안정한 미래.
저런 사람들은 미래가 열려있으니 고민 따위 하나도 없겠지?
지금 현재 태온이라는 사람이 그저 부러웠다.
고민 없이 하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사면서 행복을 누리고 있었으니까.
애타는 마음의 눈빛을 지으며 운전을 하고 있는 태온을 바라보는 한윤이다.
한 손은 창문에 기대고 나머지 한 손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반쯤 돌려 한윤을 쳐다봤고
눈이 딱 마주치면 놀라서 잽싸게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한윤이다.
왜 보냐며 물어보려고 했지만 옅은 미소를 띠고 다시 운전에 집중을 한다.
그저 창문을 바라보는 한윤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좁은 골모게 4층짜리 딱 봐도 오래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한윤과 태온이고
둘 사이에 어색하면서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많이 피곤했을 텐데 들어가서 쉬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갑자기 이런 자리 불러내서..."
"아니에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미리 이야기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들어가 볼게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4층짜리 건물 계단으로 올라가는 한윤.
마지막까지 한윤의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의 차에 올라타는 태온이다.
차에 타고도 한참을 출발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는 태온.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 운전대를 잡고는 허공만 바라본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고 툭 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는 말하는 태온이었고
그저 밤하늘에 비친 4층짜리 낡은 건물만 바라볼 뿐이었다.
투두둑.
얇은 빗방울들이 한 방울씩 천천히 내리다 이내 점점 굵어졌다.
비가 오는 소리에 요란한 스포츠카 소리가 섞여 울리면서 웅장한 소리로 변했다.
비를 가로질러 달려나가는 태온의 새빨간 스포츠카.
신호를 기다리며 창문쪽을 슬픈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고
태온의 눈에서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