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여배우의 꿈(5) 운명
“콰앙!”
극장 안엔 가득 징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무대 위에 막이 오른다. 무대 위는 오색 조명으로 금분을 뿌려 놓은 듯 신세계가 펼쳐져 있다. 세상의 모든 풍경들이 이런 연극무대처럼 아름답다면 세상은 얼마나 낙원일까? 그러나 자세히 보면 무대 위는 종이상자로 얼기설기 만든 미술장치로 어설프기 짝이 없다. 역시 그림으로 그려 놓은 커다란 벽시계는 오후 6시를 가르치고 정면 커다란 원형 창은 유리도 끼지 않은 채 뻥 둘려 건물 외벽으로 서투른 영문 간판이 보이며 이곳이 이역 홀놀루루 시의 한 교외의 한 가옥임을 알린다.
왼쪽으로는 간단한 취사도구가 마련되어 있고 오른쪽은 과일상자로 엉성하게 모아 만든 침대도 곧 무너질 듯 불안하기만 하다. 무대 중앙에 칠이 벗겨진 사각 테이블과 그 주위로 삼각의 낡은 의자가 서너 개 놓여 있다.
이런 무대를 배경으로 흰 상의에 검은 양장 치마를 입은 여배우가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음식을 만드는 척 하고 있다. 멀리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려오며 무대는 붉은 황혼의 조명으로 물든다. 아직까지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던 여배우가 에이프런을 적신 손을 닦는 척하며 무대 중앙으로 서너 발자국 나와 대사를 시작한다. 여주인공 메리로 분한 정숙의 모습이다.
“어머! 벌써 6시 종을 치네.”
짧은 대사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다. 대사를 하며 그녀는 테이블 앞에 놓인 삼각의자에 다가와 앉는다. 그 삼각의자가 놓여 있는 무대 바로 앞의 객석이 보이고 그 객석 이층 앞 중앙의 맨 앞은 바로 백남과 종화가 앉아 연극을 감상하는 자리이다.
이제 정숙과 백남은 서로를 마주보는 시야로 바로 연결되어 있다. 종화는 그런 정숙의 미모에 반 한 듯 연신 싱글벙글하며 백남에게 귓속말을 한다.
“저 여배우 정말 예쁘네요?”
종화의 너스레에 대꾸도 없이 백남은 무대를 주시한다.
돌연 예고도 없이 백남이 극장 국제관에 나타나자 극장 안은 비상에 걸린 듯 긴장의 순간을 맞는다. 입구의 수표원으로 부터 연락을 받은 진행요원은 무대 위에 조명장치를 점검하던 연출자에게 달려가 이 연극의 원작자인 백남 선생이 극장에 오신 걸 황급히 알린다. 순간, 연출자는 놀라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역하다.
“조선 연극계의 거두! 백남 선생님께서 우리 같은 초라한 무명극단을 찾아 주시다니..이건 분명 우리 극단으로써 영광이며 대단한 명예가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연출자는 불편한 다리를 절며 황급히 극장 로비로 달려가 백남과 종화를 정중하게 반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며 교회당에서 성극을 하다가 연극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소아마비로 천형의 불구인 절름발이가 그래도 대우 받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이다. 그러나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적자투성이의 무명극단을 이끈다는 건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잘하면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다. 본격 기성극단의 상임연출자가 될지도 모르는 행운의 순간이다.
연출자의 정중한 안내로 백남과 종화는 극장 2층 맨 앞 특별석으로 모셔진다. 당시의 극장은 일본의 가부키 좌의 극장시설을 그대로 옮겨와 모든 좌석에 다다미가 깔려 있고 또 한, 전통적 유교사상이 아직도 잔재하여 남녀유별이라 남자와 여자석이 구분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부나 연인이 구경을 왔더라도 표를 사가지고는 양측으로 갈라져 영화나 연극 등을 감상해야 했다. 그러나 이층 좌석의 맨 앞자리에는 칸으로 막고 두툼한 방석에다 오차도 준비하여 남녀를 한 자리에 앉게 하는 특별석이라는 걸 만들어 서너 배의 비싼 입장료를 받았다. 이 특별석에 두 사람이 앉기도 전에 백남이 연극을 보려 왔다는 소식은 금방 극장 전체로 퍼진다.
“와!”
여배우들은 환성을 지르고 역시 이런 호기의 기회에 백남의 눈에 들어 전문극단으로의 수직이동을 꿈꾼다. 정숙도 백남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차, 내심 이번 무대는 연기를 잘 해야지 하는 각오에 들뜬다. 그리고 한번도 보지 못한 백남의 생김새를 추측해 본다.
‘백남 선생님은 어떡케 생기셨을까? 조선연극의 거두라는 명칭처럼 무서우실까? 아니야! 이런 로맨틱한 희곡을 쓰신 작가이시니 인자하신 성품의 소유자 이 실거야. 혹시 대가이시니 위엄을 차리느라 콧수염은 안 기르셨을까?’
정숙은 시선을 위로 올려 이층 특별석에 앉은 백남의 얼굴을 보고 싶지만 좀처럼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긴장해서가 아니라 자칫 자신의 연기흐름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어, 무대는 남녀 배역을 맡은 여배우들의 등장하고 수염도 달지 앉고 마치 흑연가루로 거칠게 구레나룻을 그린 티가 역역한 중년사내 역을 맡은 여배우가 굵은 가성의 목소리를 써가며 대사를 외운다.
“저녁들은 드셨소.”
동네 아낙1이 대사를 한다.
“아직 식전이 랍니다.”
이번엔 메리의 대사이다.
“그럼 오늘은 모두 함께 모여 식사를 하도록 해요.”
“허...이거 맨날 얻어먹어 미안해 어쩌지요?”
“일부러 식사시간에 찾아오시니 그럴 수밖에요”
“허긴 요즘은 남의 집 식사시간에 마쳐 찾아가는 걸 낙으로 삼니다. 허 허..”
중년 사내로 분한 여배우가 너스레를 떨자 다른 배역들도 따라 웃으며 허허... 호호... 재잘 재잘... 두런 두런...이러니 저러니... 대사를 주고받으며 연극은 계속 된다. 이 연극은 당시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남자와 사진결혼을 해서 그곳에 도착한 메리라는 여자의 삶을 통해 사진결혼에 대한 현실적 모순과 신여성에 대한 이중적 시선, 그리고 사랑의 확인과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극적구성으로 하고 있다.
무대 위에 소녀들은 마치 자신의 배역에 몰입하나 그 수준은 재롱잔치를 하듯 유치한 연기이다. 그런 책임은 모두 연출자의 실력부족과 무능력으로 돌아간다. 백남은 메리로 분한 정숙의 연기를 보며 그런 대로 원작의 배역을 잘 소화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대사는 많이 서툴고 손 처리며 동작도 아직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잘 다듬으면 분명 좋은 배우가 될 소지를 충분히 감지한다.
차츰 무대는 그런 대로 조화를 이루며 거의 1막이 끝나가려는데 그만 무대가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린다. 종이상자로 엉성하게 지은 무대장치가 그만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순간, 여배우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대사가 중단되고 무대는 엉망이 되었다. 미술부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망치를 들고 등장하며 다시 세트를 고정 시킨다. 쾅 쾅 망치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한 여배우가 대사를 하려는데 도무지 엄두가 안 나는 듯 멍하니 관객을 바라본다.
분위기는 더욱 조악해지며 여배우들 모두 어색한 표정들로 관객들과 마주선다. 그러나 미술부원 마저 당황을 했는지 겨우 세워 논 세트는 다시 무너지고 세워 논 시계그림 까지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처음엔 이것도 연극의 일부인가 보다 하고 재미있어 하던 관객들도 차츰 사태를 파악하고 어처구니가 없다.
“야! 이 문둥이 가시나 들아! 이걸 연극이라고 하는기가?”
마구 불만을 토하는 관객들도 있다. 결국 공연은 중단되고 이런 최악의 분위기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난처한 경우가 되었다. 무대감독은 극장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연출자도 울상이 되어 막 뒤에서 머리를 쥐어짠다.
“백남 선생님이 오신 오늘 따라 이럴 수가...”
이 위기를 어떻게 만회해야 한담 말인가? 정말로 난감하고 고역스런 시간에 직면하는 아찔한 순간이다.
이때, 돌연 무대 한곳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그리그의 ‘솔베이그의 노래’이다. 노래를 부르는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청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노래 소리가 극장 안에 퍼져 나간다. 정숙은 그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막 뒤에서 누군가가 숨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정숙은 분명한 확신에 가득 찬다. 아! 저 목소리는 유리 그녀이다. 유리에게 저런 노래실력이 있었다니... 이제 배우도 관객도 모두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우리며 그 노래의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해 한다.
“아! 그러나 그님은 내 님일세 내 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 하노라.
고대 하노라-”
무대 막 뒤에 숨어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이 나타난다. 아름다운 등장이다. 역시 유리가 틀림없다. 저런 재치와 용기, 과연 대단하다. 그녀는 차츰 무대 중앙으로 나오며 노래를 계속 한다.
“오! 우리 하나님 늘 보호하면서
보호하면서
쓸쓸하게 홀로 늘 고대함
그 몇 해던가-”
극장 안은 유리의 노래 속에 침전되듯 고요 속에 젖는다. 백남도 종화도 유리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있다. 이제 유리는 백남 앞을 향해 선채 당당하게 노래를 부른다.
“아 나는 그리워라.
널 찾아 가노라.
널 찾아 가노라-”
천상의 노래는 그렇게 끝났다. 극장 안은 요란한 환호와 박수가 쏟아진다. 연출자도, 무대 감독도, 더욱이 굴욕을 당했던 뚱녀도, 모든 여배우들도..이 위기의 순간으로부터 극단을 구해낸 그녀를 향해 박수를 보낸다.
노래를 끝낸 유리는 마치 프리마돈나의 포즈로 관객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언제 저런 도도하고 세련된 인사법을 배웠던가? 또 한 저 갈채의 박수는 언제 끝나려나? 관객들은 이제 모두 기립하여 열광적인 박수를 쳐 댄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사이, 무너진 무대장치는 다시 단단히 고정 되었다. 이제 중단됐던 연극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백남은 유리를 향해 중얼거린다.
“물건이 또 하나 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