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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여배우 월화의 생애
작가 : 한계령
작품등록일 : 2016.9.18

조선 최초 스크린의 여배우인 이월화의 일생 입니다.
척박한 조선 연극계와 영화계을 거치며 질곡의 삶을 산 그녀의 비극적인 생을 조감 합니다.

 
제3장 여배우의 길 (19)재회
작성일 : 16-09-28 07:41     조회 : 563     추천 : 0     분량 : 9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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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장 여배우의 길 (19) 재회

 

 언니! 그분이 오셨데?”

 

 쿵쾅 쿵쾅- 하숙집 이층 계단을 뛰어 오르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며 채전이 숨이 찬 소리로 외쳐댄다.

 

 “그 분이라니?”

 

 월화는 주인집에서 손재봉틀을 빌려와 작년 가을에 산 분홍색 블라우스의 소매를 짤라 여름용으로 만들고 있었다.

 

 “아이... 언니가 학수고대 오매불망 기다리던 백남 선생님 말이야. 방금 전에 경손 씨를 만났는데 그 분이 부산에 오셨데.”

 

  순간, 월화는 백남 선생이란 말에 콱 숨이 막혀 왔다.

 

  “백남 선생에 오셨다니?”

 

 믿어지지 않는 예상이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내가 정말로 선생을 이곳 부산에서 뵙기를 바랐는데 그게 사실이 되다니..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어디 있담?”

 

  월화는 정말로 신기한 듯 미소를 짓는다.

 “조선 키네마 사 두 번째 작품으로 백남 선생께서 감독을 맡으셨대...제목이 운영전이라나 뭐라나?”

 

 “뭐? 감독까지...그게 정말이야?”

 

 “언니는 맨날 속아만 사셨수?”

 

 눈을 흘리며 말하는 채전은 월화의 심정을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다.

 

 “백남 선생님이 부산에 오셨다!”

 

 이 틀림없는 사실 하나만으로 월화는 마치 하늘을 두 둥실 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감독 까지 맡으셨다니...월화는 너무도 좋아 휠휠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윤백남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연출 작 <운영전>은 이조시대 안평대군의 총희(寵姬) 운영의 비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운영은 안평대군의 애첩으로 우연히 김진사라는 선비와 만나 남몰래 정을 통하다가 안평대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함께 탈출을 하려 하지만 결국 잡혀 감옥에서 자살하고 김진사도 따라 죽어 저승에서 사랑을 맺는다는 내용이다. 이미 백남이 오래 전 써 논 시나리오이었다.

 

 더욱이 나데와 왕필렬 앞에 유창한 일본어로 영화의 내용을 실감나게 소개한 덕분에 곧 촬영 준비로 사무실은 분주해 졌다.

 

 스태프 들은 촬영기사만 미야시다(官下)로 바뀌고 대부분 그대로 기용 되었다. 특히 조감독 이경손의 성실함과 학구적인 태도가 백남은 맘에 든다. 이제 배역선정만 남았다. 백남은 감독실로 종화를 불러

 

 “이왕 자네도 이제 활동사진 배우로 나섰으니 이번 김진사 역은 자네가 하게”

 

 “아...아닙니다. 저번 작품이야 장난삼아 한번 해본 것 이지만 어찌 선생님 작품에 제가 출연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실력 있는 배우를 찾아보시지요?”

 

 “저번 작품을 장난삼아 출연 했다고 했나?”

 

 “네에?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이번 작품도 장난삼아 출연하게나..됐지?”

 

 한마디로 종화의 입을 막는다. 사실 종화도 어부지리 영화배우에서 진짜로 인정받는 대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런데 감히 백남 선생님 앞에서 연기라니? 그거야 말로 수족이 떨리는 일이지만 시켜만 준다면 못 할리도 없지 않는가. 그런 종화의 맘을 백남은 다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게 남주인공 김진사 역에는 종화가 결정 되었다.

 

 이제 문제는 여주인공인 운영의 역이다. 사실, 며칠 전부터 월화는 백남 선생이 부르기를 학수고대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백남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다. 분명 조선키네마 사의 전속 여배우로 다음 작품의 출연료 까지 받고 이 곳 부산에 묵고 있다는 월화의 소식을 백남이 모를 리도 없건 만 왜 선생에게서 연락이 없는 걸까? 그렇다고 무작정 백남을 찾아 갈수도 없다. 채전이 영화사를 들렸다 오며 갖고 온 소식은 불길한 것이었다.

 

 “언니! 서울에서 여배우가 왔데... 아마 그 여배우가 운영 역을 맡는다나봐”

 

 “뭐? 그 그럴 리가?”

 

 “윤 감독님이 추천을 해서 온 모양이야. 이름이 김우연이래?”

 

 “김우연? 그 여배우가 누구지?”

 

 월화는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곧 그 소문은 틀림없는 사실로 다가 왔다. 백남은 서울에서 내려 온 김우연이라는 여배우를 운영으로 밀고 있었다. 그런 사실에 먼저 당황한 것은 종화 이다. 당연히 백남은 월화를 운영 역에 지목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백남은 가까이 있는 월화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선생님! 월화 양을 한번 만나 보시죠.”

 

 종화의 귀띔에도 백남은 모른 척 할 뿐이다. 제작자 나데나 이제는 기획전반의 일을 맡은 왕필렬도

 

 “언제 한번 월화 씨와 함께 식사라도 하시지요. 저희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런 제언에도 어물쩍 넘어간다. 모두들 월화와의 주선을 도모하려 하나 이제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신다. 분명 촬영기사 오오따의 사건은 시간이 일 년이나 지났음에도 선생의 노기를 풀지 못하고 짙은 앙금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선생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시다. 하지만 곧 풀어지시겠지?”

 

 그런데 서울에서 김우연이란 배우가 왔다. 그녀에게 운영 역을 주신단다. 그럼 월화는 어떻게 되는 건가? 이제 여자 배역으로는 안평대군이 거느린 열 궁녀 중 한 명인 소옥 역으로 운영과 라이벌을 이루는 역할이 남았지만 그 역은 주연인 운영 역에 비해 몇 장면 나오지 않는 확연한 조연의 역할이다. 그럼 그 소옥 역을 월화에게 주겠다는 건가? 자존심이 강한 월화가 그 역을 맡을 리도 없다. 그러나 그 소옥 역도 채전에게로 돌아갔다. 월화는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격이다. 거액의 출연료까지 선불로 받은 그녀가 말이다. 아직 촬영은 시작한 것이 아니니 기회는 있다.

 

 나데 사장도 왕감독도 전작의 흥행의 공을 인정하여 강력하게 월화를 추천하고 있다. 조감독 경손도 채전의 간곡한 부탁으로 월화를 밀고 있다 이런 상황은 백남에게는 무척이나 불리하다. 그런 백남은 결국 폭탄선언을 하고 만다.

 

 “꼭 이월화를 출연 시키겠다면 내가 감독을 포기하는 수밖에..”

 

 이런 백남의 고집은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커다란 산이며 바위이었다.

 

 이제 월화의 출연 문제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입을 닫고 만다. 사실 월화는 백남의 태도에 의구심을 갖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백남에 대한 맹목적의 믿음 때문이다. 여자의 한 번의 실수를 이해 못해 주는 선생이 아니라고 월화는 굳게 믿고 있었다. 종화가 찾아 와 어려운 입을 연다.

 

 “월화가 선생님을 한번 찾아뵙도록 해... 먼저 월화가 인사를 안 오니 화가 나셨을 지도 몰라.”

 

 그런 권유가 아니더라도 월화는 백남이 보고 싶다. 종화가 가르쳐 준 동래 온천장의 한옥 여관으로 찾아 갔다.

 

 일본인 촬영기사와의 추문이 있은 후, 백남은 월화를 의식적으로 피 했다. 어쩌다 우연히 극단에서 마주치면 백남은 불쾌한 듯 외면부터 먼저 했다. 그때마다 월화는 죄책감과 함께 수치심으로 고개를 푹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선생님께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때도 월화는 용기를 내어 백남의 처소로 찾아 간 적이 있다. 물론 종화의 권유도 한몫했다.

 

 “선생님께서 무척이나 화가 나신 것 같더군. 그러니 찾아뵙고 용서를 빌도록해.”

 

 “선생님이 날 용서하실까? 타락녀라고 혼을 내실지도 몰라”

 

 “그날 밤 일은 너무도 술에 취해 벌어진 일이었어. 물론 내 불찰이 많았지만..혼이야 좀 나겠지만 선생님도 용서를 해 주실 거야.”

 

 “그래 선생님께 용서를 빌어야 한다. 용서를 안 해주시면 빌고 또 빌자.”

 

 백남은 신문연재 소설을 준비 중으로 신문사 근처의 여관에 묵고 있었다. 여관방에 들어선 순간 월화는 문가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월화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백남은 울고 있는 월화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그러더니 월화 앞에 신문 한 장을 던져 보인다. 바로 조선일보에 실린 월화에 관한 질책의 기사이다.

 

 이미. 월화도 읽어본 기사 였다. 분명 누군가의 제보로 이루어진 듯 “소문이 이러하더라.” 라며 한 발 물러난 듯 한 기사가 분명하지만 따끔한 충고의 글이 분명했다.

 

  ‘요즘 연극배우에서 활동사진 배우로 변신하여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타 모 양의 근황을 볼 것 같으면 그녀의 행동거지가 실로 타락의 극치를 오고 가는 것 같다. 스타란 만인의 자산이요 만인의 연인이다. 그러기에 스타란 그만큼 외롭 고 힘든 길을 가는 십자가를 진 고통의 직업인지도 모른다. 그런 외롭고 힘든 길에서 멀어져 갈 땐 대중은 그런 스타를 가차 없이 버려 버린다.”

 

 이런 신문기사를 보여주는 선생의 의도는 뭔가? 그만큼 기대와 실망이 컸던 것인가. 월화는 그저 용서를 빌 수밖에 없다.

 

 “용서 해 주세요. 제가 잘못 했어요. 흑흑”

 

 월화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더욱 운다. 백남은 굳게 굳어 있던 입은 연다.

 

 “내가 너에게 무대 위에서나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잘 하는 배우가 되라고 가르치기만 했지 무대에서 내려오거나 카메라 앞을 떠났을 때 배우로써 처신 해야 할 덕목은 가르치지 못했구나. 그게 나의 불찰이구나...나의 잘못이 크다.”

 

 그 말에 월화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엉엉 운다.

 

 “여배우란 귀하디귀한 존재처럼 보이나 속되고 속 된 것이 또한 여배우니라. 여왕처럼 군림하면서도 돌아서면 천것만 못한 것이 또한 여배우니라. 그러나 귀 한 것도 속 된 것도 그것은 다 본인 하기 나름인 것이다.”

 

 “잘못 했습니다. 다신 그런 일이 없도록 처신에 온 정성을 다 하겠습니다. 흑 흑..”

 

 백남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흰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준다.

 

 “자! 울음을 그치고 오늘은 그만 돌아가 보거라.”

 

 그 말과 함께 선생님은 만년필을 집어 들어 원고를 쓰기 시작하셨다.

 

 그 건네받은 흰 손수건으로 월화는 용서 받았다고 생각하고 여방방을 나섰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꼬었다. 극단에서 월화가 백남의 여관방으로 찾아 간 것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다. 여배우들은 또 입방아를 찧는다.

 

 “월화 고것이 야심한 밤 윤 선생님의 여관방에 뛰어 들어 선생님을 귀찮게 하였 다더구나.”

 

 표현에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에는 이 귀찮게 라는 표현은 한마디로 여자가 남자의 유혹하기 위해 노골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로 밖에 볼 수밖에 없다.

 

 “개 버릇 남 못준다더니 일본 놈한테 굴리던 몸을 어디 감히 백남선생님 한데 내 둘린 담 말이냐?”

 

 이 낭설에 월화는 너무도 분해 몸을 부르르 떤다.

 

 “이 악의적인 허문(虛門)을 퍼트린 자는 누굴까?”

 

 선생님을 찾아가기를 간곡하게 말한 종화가 그럴 리는 절대로 없다,

 

 더욱이 이런 소문이 자신의 귀에 까지 들려온다는 것은 그 날 선생님과 나만의 둘만 아는 비밀. 그렇다면 백남 선생님이 이 치욕적이고 모략적인 소문을 퍼트려 나를 창녀만도 못한 매소부로 만들었담 말인가? 절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금 월화는 백남이 묶고 있는 온천장 여관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다. 지금 손에는 그때 서울의 여관방에서 눈물을 닦으라고 건네받은 흰 손수건을 지금까지 간직한 채 월화의 손에 꼬옥 쥐어 있다. 그러나 들어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다. 월화는 용기를 내어 여관의 출입구인 한옥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별로 크지 않은 마당에 화분들이 즐비하고 물확에도 망초 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마당엔 종업원인 듯 한 여자가 흰 호창 빨래를 줄에 널다가 들어서는 월화를 보고는

 

 “어떻게 오셨십니꺼?”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묻는다.

 

 “저..이 여관에 백남 선생님이라고?”

 

 그러자 여자는 월화의 말을 자르며

 

 “아... 활동사진 박는다는 감독 선생님 말입니꺼?”

 

 “네 어느 방에 묶고 게신지?”

 

 “저 끝방 입니더.”

 

 하며 물끼 젖은 손으로 기역자 조선집의 한곳을 가리킨다.

 

 월화가 그 쪽으로 가려하자 여자는 다시 난처한 듯 입을 연다.

 

 “지금은 손님이 게신데에.”

 

 “손님?”

 

 그 방 댓돌에는 남자의 흰 백구두 한 컬래와 검은 색 단화인 숙녀화가 사이좋게 놓여 있다. 월화는 왠지 불길한 마음이 엄습한다. 그때 그 여관방의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방에서 나오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낮 익은 모습이다. 그 여자는 숙녀화를 신더니 정면으로 돌아서 월화를 발견하고 뚝 멈춰 선다.

 

 “아니?”

 

 월화는 너무도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녀 김설희 이다.

 

 “설..설..희야! ”

 

 월화는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설희도 처음엔 놀라는 눈치더니 금방 안색이 변하며

 

 “누군가 했더니 정숙이 너 였구나?”

 

 설희는 처음부터 월화라는 이름을 인정하지 않았다. 늘 정숙이라도 불렸다. 그러나 부르는 이름 따위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설희가 왜 선생님 방에 함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또 이름을 거론한다.

 

 “그래! 나도 이제 널 월화라 불러 줄게...그러니 내 이름도 우연이라 불러줘!

 

 비우 자, 제비 연, .물론 백남 선생님께서 직접 작명해 주셨지.”

 

 “그럼 네가 운영 역에 결정 되었다는 그 김우연?”

 

 “응...내가 김우연이야.”

 

 “아...!”

 

 월화는 갑자기 오한이라도 걸린 듯 부르르 몸이 떨러 온다. 그녀가 김우연이고 운영 역을 맡은 여배우 일 줄이야. <영겁의 처>에서도 <월화의 맹서>에서도 나에게 주역에서 밀려 난 그녀가 아니던가?

 

 “아니야...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백남 선생님이 절대 그녀를 불러 이름을 우연이라 작명하고 운영 역을 줄 리가 없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더욱이 그녀는 선생님이 묶고 게신 여관방에서 방금 나오지 않았던가? 온갖 이상한 상상이 월화의 머리를 눌러 온다.

 

 “아!... 세상에 나란 여자는 도대체 뭐람 말인가?”

 

 월화는 휘청 쓰러질 것만 같다. 마당에 널려진 흰 무명호창 사이로 내 초라한 모습을 감추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싶다. 동시에 빙하보다도 더 큰 질투심에 몸이 오싹 줄어드는 느낌이다.

 

 순간, 월화는 높고 높은 절벽 위를 안간힘을 쓰며 오르고 있었다. 그 절벽 위에 오르자 누군가가 월화를 수십 길 절벽 아래로 무참히 밀어 던져 버린다. 잔혹한 추락이다. 그래 이건 분명 추락이고 나를 죽이려는 것이다. 나를 저 음모의 퇴락 속에 빠트려 영원히 암매장 하려는 수작이다. 그 음모를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모 해 온 백남 선생님이 하고 있다. 서울에서 그녀 김설희를 불러와 나대신 배역을 주고 나를 능멸하며 나를 비웃고 있다. 이건 잔혹한 배신이다.

 

 내가 선생을 얼마나 사모하고 존경해 왔는데..

 

 “백남 선생님 만나 뵈러 온 모양인데... 선생님은 지금 촬영대본을 수정 중으로 무척 바쁘셔서 그 누구도 면회가 안 돼...나 말고는..?”

 

 설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생글 생글 웃어댄다. 그러나 가슴엔 예리한 미수를 품은 것이 분명하다

 

 “너도 나처럼 당해 봐.. 밀려 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그녀는 싹 장난기 어린 웃음이 사라지고 이젠 노골적으로 차디찬 경멸의 시선을 보내온다. 이런 소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남은 방안에서 꼼짝을 하지 않는다. 월화는 백남의 굳게 닫친 방문을 쏘아 보듯 노려본다. 그 굳게 닫친 방문이 설희 아니.. 이제 우연으로 불려 질 그녀의 통쾌한 듯 싸늘한 눈빛보다 더 차갑게 보인다. 월화는 그 시선을 피하며 돌아섰다. 여관 대문을 빠져 나가는 월화의 뒷모습을 우연은 잔인할 정도로 고소한 얼굴로 바라본다.

 

 월화는 힘없이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온천장의 풍경을 빠져 나와 한없이 걸었다. 부두에도 가보고 영도다리 난간위에도 하염없이 서 있었다. 바다 저편이 붉은 휘장을 둘러치듯 황혼이 물들고 있다. 그 바다 위에 만선 깃발을 단 배들이 들어오고 고기를 가득 잡은 어부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겠지.

 

 “그래! 나도 이제 서울로 돌아가자.”

 

 월화는 서둘러 바쁜 걸음으로 하숙집으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어느새 밤이 깊어 가고 있지만 인력거를 불러 부산역으로 향했다. 봉천행 막차 인 야간열차인 히까리(光)호가 기적을 울리며 출발을 알리고 있다. 부산역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종화와 채전이 나와 있다.

 

 “이렇게 무작정 떠나면 어떡해?”

 

 “그래요 언니 좀 더 지켜본 후에...”

 

 종화는 백남이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좀 더 버텨 보자고 재차 월화를 설득한다. 채전도 눈물을 훔치며 월화를 계속 잡는다. 월화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들 해.”

 

 월화는 담담히 말한다. 그러고 보니 처음 부산에 왔을 때 그 흰 구슬 핸드백, 그리고 작은 트렁크 뿐 그대로이다.

 

 “채전아 내 잠옷이랑 옷들 네가 입도록 해.. 남겨둔 화장품도.. 쓰도록 하고..”

 

 “언니..”

 

 채전은 말도 못하고 울먹인다.

 

 “채전아! 너무 밥 태워서.. 누른 밥 많이 먹지 마.”

 

 “언니 흑흑...”

 

  채전은 울먹임은 더욱 크다. 월화는 종화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종화 씨!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잘 가..곧 서울에서 만 날거야 곧..곧 ”

 

 종화는 어색하게 곧...이라는 말만 반복한다. 월화는 해맑게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을 해맑다고 할 것인가? 분명 카메라 앞에 섰다면 연기(演技)라고 할 것이 분명 하다. 월화는 이제 연기를 끝내고 그 카메라 앞을 떠나듯 가볍게 돌아서 기차에 오른다. 열차 출구에 올라서자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월화는 그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급히 열차의 객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애써 종화와 채전이 서 있는 차창 쪽을 외면하고 건너편 객석에 앉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밤 벚꽃 잎이 세월을 한탄하며 바람에 흩날리며 분분하고 산란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어서 빨리 말을 몰듯 기차를 재촉해 이 자리를 떠나고 싶다. 그런 월화의 마음처럼 털커덩 철마(鐵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제야 월화의 눈에 뚝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안녕 안녕.... 부산아... 안녕! 종화씨도 채전이도 왕감독님도.. 나데 사장님도..스태프.. 모두 안녕..”

 

 기차가 털커덩 게으른 출발을 보이더니 점점 빠르게 속력을 내며 달리기 시작한다.

 

 “백남 선생님도 안녕 설희..아니 이젠.. 우연아 너도 안녕.... 즐거웠던 일도 괴로웠던 순간도 이젠 다 안녕이다.”

 

 기차가 기적소리를 높게 울리며 레일을 따라 역사(驛舍)를 빠져 나간다. 그런 기차의 사라지는 후미등을 종화와 채전은 안타깝게 바라보고 서 있다.

 

 이제, 역을 빠져나가 끝없는 선로 위를 달려가는 객차 안에 월화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그대로 있다. 기차가 한 참을 달린 후에 천천히 고개를 들고 차창 밖을 본다. 이미 기차는 길고 긴 어둠의 장막 속을 달려가고 있다. 월화는 차창 밖의 검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 달이다!”

 

 차창 넘어 둥근달이 둥실 떠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그 달이 깨져 있다.

 

 “.......?”

 

 월화는 눈을 의심한다. 달이 반쪽이 나 있다니? 그러나 그것은 차창 유리창에 엇갈려 보이는 착시 현상이었다. 이제 월화의 가슴에는 영원이 깨어진 달로 부각되어 각인되어 보일 뿐이다. 내 마음처럼 깨어져 두 쪽이 난 달! 이제 백남 선생에 대한 나의 미망은 끝나려나? 다시는 달빛에 얼룩진 선생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리라 그녀는 입술을 악물며 다짐하고 다짐한다.

 돌연, 갑자기 자신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왜 이런 가혹한 순간에 왜 내 나이가 생각난 걸까? 그러고 보니 그 동안 그녀는 나이도 잊고 살았다.

 

 “넌 이제 몇 살이지?”

 

 마음속에 월화가 대답한다.

 

 “나...스물 한 살.”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네 뭐.”

 

 “그럼 아직 창창하지.”

 

 “자 이제 서울로 가면 무얼하지? 다시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암! 넌 아직 젊으니까 충분히 될 수 있고말고..”

 

 “아니야! 넌 이제 배우가 될 수 없어.”

 

 “된다니까.”

 

 “아니야.”

 

 ‘털커덩 덜커덩- 털커덩 털커덩-’

 

 그런 월화의 두개로 갈라진 마음 사이로 기차바퀴의 소음이 가득 차 들려온다. 월화의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 더욱 어두워져간다. 월화는 다시 차창 밖을 내다본다. 이제 달은 차창 밖 밤하늘 멀리 멀어져 가고 있다. 돌연, 그런 밤하늘에 유성 하나가 떨어지고 있다. 은하의 세계에서 수명을 다한 별의 추락이다. 그러면서도 그 유성은 길고 아름다운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고 있다.

 

 “앗! 별동별이닷!”

 

 월화는 이내 고쳐 부른다. 대기권과 성층권에서 밀려 나 어디론가 사라져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저 유성을 문성별이라 단언한다.

 

 “저건 문성별이다! 내 사주에 다섯 개가 있다는 문성별 중에 하나가 떨어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마음 한곳이 예리하게 날이 선 칼에 잘려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그러나 월화는 날카로운 칼의 아픔 같은 고통을 참고 또 참는다. 아직도 남은 문성별 네 개가 그녀의 깊고 푸른 영혼 속에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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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제5장 여배우의 한 (31) 홍소희 2017 / 1 / 25 456 0 6965   
30 제5장 여배우의 한 (30)유랑극단 2017 / 1 / 24 483 0 6971   
29 제4장 여배우의 삶 (29)스켄들 2017 / 1 / 23 422 0 5545   
28 제4장 여배우의 삶 (28)동거 2017 / 1 / 20 394 0 6263   
27 제4장 여배우의 삶 (27)채전 2017 / 1 / 19 421 0 9161   
26 제4장 여배우의 삶 (26)이화권번 2016 / 11 / 3 443 0 4986   
25 제4장 여배우의 삶 (25)인력거 2016 / 10 / 18 652 0 4938   
24 제4장 여배우의 삶 (24)구원 2016 / 10 / 16 641 0 8633   
23 제3장 여배우의 길(23)야래향 2016 / 9 / 30 564 0 7833   
22 제3장/여배우의 길(22) 치파오 2016 / 9 / 29 536 0 5251   
21 제3장/여배우의 길(21) 상하이 2016 / 9 / 29 465 0 7247   
20 제3장 여배우의 길 (20)카츄사 2016 / 9 / 28 415 0 7449   
19 제3장 여배우의 길 (19)재회 2016 / 9 / 28 564 0 9669   
18 제3장 여배우의 길 (18)해의 비곡 2016 / 9 / 27 501 0 12362   
17 제3장 여배우의 길 (17)은막 2016 / 9 / 27 416 0 3843   
16 제2장 여배우의 적 (16) 유리 2016 / 9 / 26 424 0 4716   
15 제2장 여배우의 적 (15)막는 오르고 2016 / 9 / 26 441 0 5538   
14 제2장 여배우의 적 (14)부활 2016 / 9 / 25 464 0 4786   
13 제2장 여배우의 적 (13)토월회 2016 / 9 / 25 685 0 6103   
12 제2장 여배우의 적 (12) 절벽 2016 / 9 / 24 531 0 5033   
11 제2장 여배우의 적 (11) 시사회 2016 / 9 / 24 491 0 5566   
10 제2장 여배우의 적 (10) 활동사진 2016 / 9 / 23 394 0 7157   
9 제2장 여배우의 적 (9) 스타탄생 2016 / 9 / 23 479 0 5373   
8 제2장 여배우의 적 (8) 친구 2016 / 9 / 22 597 0 3534   
7 제1장 여배우의 꿈/ (7) 문성별 2016 / 9 / 22 474 0 4977   
6 제1장 여배우의 꿈 (6) 배우수업 (2) 2016 / 9 / 21 456 2 5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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