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우기가 끝나고 찾아온 청년
"제 이름은 하인델버그 글레이셔라고 합니다. 세르파의 1군단장이지요."
솔론의 앞에 선 하늘색 머리 청년이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다.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하인델버그는 아직 서른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젊은이였으나, 눈빛과 여유로운 태도에서 나오는 아우라는 웬만한 유니온 리더를 상회하는 그것이었다.
우기가 지나고 찾아온 구원군의 등장에 솔론의 표정이 활짝 핀다.
"오오, 자네가 바로 아이젠 황제의 직속 부대인 세르파의 1군단장이로구만! 반갑네!"
그가 두 손으로 하인델버그의 손을 잡아 환영의 뜻을 전하려 한다.
그런데 하인델버그는 쌀쌀맞은 태도로 핏기 없는 오른손을 뒤로 '샥' 빼버린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결벽증이 있어서."
무시와 오만함이 섞인 태도.
무안해진 솔론이 한쪽 뺨을 긁적인다.
"그, 그랬구먼 미처 몰랐다네."
두 사람은 왕궁의 접견실로 이동해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하늘머리 청년이 다리를 무례하게 탁자 위로 올리고는 먼저 입을 뗀다.
"반란 때문에 고생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그렇다네. 내 조카 카이와 스콜피온이라는 부하 놈들 때문에 남부가 요새 엉망진창이라네. 덕분에 나도 밤에 잠을 못 이루고 있고..."
솔론이 눈 밑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가리켜 보인다.
하인델버그는 영감탱이의 수면장애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물이나 한 모금 마신 뒤 질문한다.
"지금까지 몇 개의 대도시를 빼앗겼나요?"
"골드번, 로드레스, 용암, 램파이어... 네 개 도시라네."
"흐음... 오늘쯤 하나 더 털릴 테니 총 5개 도시가 놈들 손에 들어가겠군."
하인델버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솔론이 깜짝 놀라 외친다.
"오늘 도시 하나가 더 털릴 거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아아, 우기 동안 잔뜩 벼르고 있었을 놈들이, 우기가 끝난 시점에서 도시를 공격하는 건 뻔한 수순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대도시들이 반수도 넘게 빼앗길 동안 솔론님은 대체 뭘 하셨던 겁니까? 아이젠 황제께 도움도 이제야 요청하셨고, 직접 군사들을 끌고 스콜피온의 예상 진격 루트를 급습했다거나 하지도 않으셨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쳐 당하고만 계셨나요?"
질책하는 하인델버그의 말투에 솔론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그는 어린 청년이 연장자인 자신에게 사용하는 말투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옳은 말이었으므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다.
하인델버그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에휴~ 뭐 지나간 일은 됐습니다. 이젠 제가 왔으니 걱정하실 필요도 없구요. 올해 안에 카이와 그 일당들을 소탕한 뒤 남부 전역을 다시 솔론님께 돌려드리죠."
"그, 그게 정말인가? 그런데... 의심해서 미안하지만, 자네는 부하들을 하나도 데려오지 않은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수로 빼앗긴 도시들을 수복하겠다는 건가?"
"푸하하하하핫!"
솔론의 말을 듣고 하인델버그가 폭소한다.
"하하하하! 솔론님, 정말 멍청하시군요. 저한테 부하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현대전에서 중요한 건 머릿수가 아니라 '강자의 존재 유무'라는 걸 모르시나요? 카이가 아무리 대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딴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마법 몇 방이면 깡그리 궤멸시킬 수 있으니까요. 아마 이번 싸움의 분수령은 저와 카이의 일기토(1:1) 대결이 될 것입니다. 하하. 제가 그런 애송이한테 질 리는 없으니 결과는 안 봐도 뻔하죠."
"그, 그래도 만약 카이가 일기토를 피하면서 게릴라 작전을 펼친다면 어쩌나...?"
"소용없습니다. 녀석이 일기토를 피할 수 없도록 무조건 끌어내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하인델버그는 잔에 남은 물을 마저 다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솔론에게 걱정 말고 잠이나 푹 자라고 얘기한 뒤 어디론가 걸음을 옮긴다.
<쿵>
거대한 갑주형 기계가 황금빛 불꽃에 둘러싸인 채 뒤로 넘어간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갑주에서 피투성이가 된 노인이 기어 나온다.
듬직한 체구를 가진 노인의 정체는 '문바이'. 퍼플 시티의 유니온 리더였다.
"크으... 엄청난 위력이구나. 나의 오리할콘 강화 기갑이 단 몇 방 만에 파괴됐단 말인가?"
문바이가 바닥을 기며 중얼거린다.
그의 눈앞에 회색의 망토 자락이 나타난다.
"카이 왕자..."
"리더 문바이."
오른쪽 뺨에 긴 흉터 자국이 있는 빳빳한 금발의 청년이 문바이를 내려다본다.
카이 엠베르트.
그가 사형 집행관을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한다.
"당신은 아주 잘 싸웠소. 문바이, 이제 내가 선택지를 내려주겠소."
"크흐흐. 잘 싸웠긴... 완패했구만. 그냥 날 죽이시오. 왕자."
문바이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길게 숨을 내쉰다.
카이는 그의 요청을 무시한다.
"문바이, 당신은 나의 부하가 되거나, 스콜피온의 간부로 일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오."
"?!"
"당신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단 것은 알고 있소. 스콜피온에 합류하시오."
"카이 왕자..."
문바이가 놀란 눈으로 카이를 올려다본다.
잠시 생각해보던 그는 곧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한다.
"안돼. 난 스콜피온과 함께할 수 없어."
"어째서?"
"아이젠의 강함을 아니까... 난 10년 전 남부 왕국의 일원으로 황제 아이젠과 맞섰소. 그는 전략, 전술에 능통한 천재. 잘 훈련된 기마부대는 남부의 육로를 모조리 휩쓸었지.
그리고 직속 부하 통칭 세르파라 불리는 자들의 실력은 이미 인간의 수준을 한참 벗어난 거의 재난에 가까운 것이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서웠던 건 아이젠 그 자체!"
카이는 과거를 회상하는 문바이의 눈동자가 공포로 흔들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금강석과도 같이 단련된 신체는 그 어떤 공격으로도 상처 입힐 수 없었고, 질풍과도 같은 검격은 대지와 바다를 갈라놓았지. 난 아이젠을 보았던 그 날 '무적'이란 단어의 의미를 깨달았네. 이미 나는 황제 아이젠의 공포에 사로잡힌 한낱 겁쟁이 늙은이일 뿐이야. 카이 왕자, 자네에겐 도움이 전혀 되지 않겠지.그만 날 보내주게."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카이가 문바이를 향해 오른손을 겨눈다.
문바이의 얼굴에 느긋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고맙네 카이 왕자. 마지막이 절친의 아들 손에 장식되는 것도 나쁘진 않구먼... 젊고 강인한 그대라면 아이젠과 대적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겠지. 힘내게!"
"부디 안녕히 가십쇼... 문바이."
<화륵>
황금빛 화염이 문바이의 온몸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흩날리는 검은 재와 함께 사라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