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걸을래?”
식당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그 순간만큼 둘은 고요한 정적을 느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민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둘은 바닷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노을 질 무렵 맨발로 바닷가를 걷고 있는 둘은 손만 잡지 않았지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이었다.
그렇지만 누구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고 어색함에 현민은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노래를 틀었다.
남자 가수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노래가 흘러나왔다. 고요함에 부드러움이 가미되자 야릇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어, 이거 내가 좋아하는 노랜데. 제목이 뭐였더라?”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선율에 미주가 곧바로 반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그것도 남들은 잘 모르는 가수의 노래를 선곡했다고 생각하자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이 노래 아는 사람 처음 봤어. ‘me and mrs. jones’ 웬지 바닷가하고 어울릴 것 같아서.”
그루비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를 따라 둘은 잠시 가사를 곱씹고 있었다.
하늘엔 희미한 달무리가 보였고 음악 덕분에 가까워진 둘 사이로 밤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서서히 느껴지는 온기에 미주는 하마터면 손을 잡을 뻔했다.
허락만 한다면 왈칵 고개를 돌려 키스를 하고 싶을 정도로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건 현민도 마찬가지였는데 걸을 때 슬며시 스치는 손끝의 떨림 때문에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현민이 넌 참 좋은 사람인데 왜 여태 몰랐을까?”
피아노 간주가 시작될 무렵 미주가 겸연쩍게 웃으며 슬며시 말했다.
지금 할 수 있는 말 중엔 그게 최선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당장에 현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자꾸만 차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백의 말.
하지만 그 말은 결코 해서도, 바라서도 안되는 말이었다.
달이 차오르고 있었고 밤의 기운은 설렘을 전하기도 하지만 때론 냉정함을 되찾게 하는 힘도 있었다.
“나도 널 좋아해.”
“뭐?”
그때였다. 현민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주는 순간 속마음을 들킨건지,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왔던 건지 헷갈려했다.
그저 너무 놀란 마음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별안간 튀어나온 한 마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작 현민은 뭘 그리 놀라느냐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도 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아쉬워. 왜 너 같은 여자를 이제야 만났는지.”
“아……”
문맥을 파악한 미주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짧게 주고받은 대화지만 미주의 감정은 현민의 한 마디 한 마디 때문에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알다시피 우리 잘 통하잖아. 그런 의미에서 고백 하나만 하려고 하는데…… 이제부터 조금 오글거릴 수도 있어.”
요동치는 미주의 마음을 모르는지 현민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또 한 번 미주는 긴장해야했다. 고백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왼쪽 가슴이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의도된 연출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민은 자꾸만 헷갈리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면 미주가 드디어 정신이 혼미해 그렇게 들은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안했어.”
“응? 뭐가?”
“그동안 오해했던 거. 그것도 10년씩이나. 되게 차가운 애인 줄 알았어. 혼자 오해하고 거리 뒀나 봐. 미안해 정말.”
현민은 담담하게 그렇지만 진심을 담아서 미주에게 사과했다.
“뭐야. 난 또 뭐라고.”
하지만 진심과는 별개로 미주는 다시 실망과 재회해야만 했다.
한 발자국 다가온 줄 알았던 현민의 의도는 실상 그게 아닌 걸로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현민은 그저 가던 길로 가던 것뿐이고 혼자 오해한 미주는 모르는 사람에게 아는 척한 행인처럼 멋쩍어졌다.
허탈함과 민망함은 온전히 미주의 몫이었다. 서로 주고받은 줄 알았던 감정의 교류는 순전히 착각이었나 의심했고 관계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자꾸만 차오르는 감정을 욱여 넣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왜? 다른 말 기대라도 했어?”
그런데 현민도 그쯤 했으면 됐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진심인 듯 농담인 듯 상대방을 헷갈리게 하는 말은 한두 번으로 족했다.
지속적으로 떠보는 말에 미주는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고백의 말은 입안에 맴돌았고 듣고 싶은 대답은 서로의 눈에 쓰여있었지만 누구 하나 쉽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상황이 답답하게 흘러갔고 미주는 지쳐가고 있었다. 더 나아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현민이 못 미덥기까지 했다.
“결혼준비는 잘 돼가?”
방어기제가 발동한 미주는 괜히 말을 돌렸다.
“아까 말하지 않았어? 그 말만 천 번 넘게 들었다고. 너야말로 결혼 준비는 잘 돼가?”
진전되던 분위기가 다시 식자 현민도 겸연쩍은지 평소처럼 냉소적으로 말했다.
“아니. 잘 안돼가.”
“왜? 동식이 형하고 싸웠어?”
“아니. 오빠랑은 안 싸웠어. 대신 나랑 싸우는 중이야.”
미주의 입에서 한숨 섞인 대답이 나왔다. 짧은 대답은 현재 기분 상태가 어떤지 대변하고 있었다.
마음 깊숙이 들어와 건들면 아프기만 한 현민이라는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싸움 중이었다.
“무슨 고민 있어? 이제 곧 신부가 될 여잔데 기쁜 일만 가득해야지.”
현민은 우울한 미주의 얼굴을 동정하듯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아니. 없어. 이제 와서 있으면 또 어쩔 거고.”
자조적인 말에 현민은 무슨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말들이 입에 맴돌아 참을 수 없어 그저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왜? 혹시 남자 고민이야?”
“남자?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내 주변엔 왜 이렇게 눈치 없는 사람이 많은지.”
“동식이 형 너무 미워하지 마. 어차피 남자는 거기서 거기야. 정 아쉬우면 불장난이라도 해보든지.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기분을 풀어주려는 건지 숨은 의도가 담긴 건지 현민은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정작 미주는 그 말에 힘이 풀려버렸다.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건지 속 시원하게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었다.
“넌 가끔 보면 네 얘기를 하는 건지 남 얘기를 하는 건지 헷갈려. 어떤 사람이 진짜 너란 사람인지 모르겠어.”
시종일관 소극적인 태도에 빈정이 상한 미주가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뭐가?”
“들키지만 않아도 된다는 건 남 이야기일 때나 이야기 아냐? 가볍게 얘기 하기엔 감당하기 너무 무, 무거운 말이라고.”
흥분했는지 미주는 같은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니까 바람을 펴도 너는 안되지만 남은 바람을 피든 말든 상관 없다는 거 아니냐고. 내 불행과 남의 불행은 어차피 상관없다 이 말 아니야?”
답답함을 참지 못한 미주가 쏘아붙이다시피 현민을 압박했다.
대화의 색채는 점점 짙어지고 단어는 구체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냐. 누구나 다 그런 욕망이 있지. 나도 불장난할 수 있어. 바람피고 싶다는 게 사회 룰을 위반해서 그렇지 욕망이 아예 없다고까진 말 못 해. 그런데 영원한 비밀이란 없잖아.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러나 오기가 생긴 현민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만약 영원한 비밀이 있다면?”
의외의 반응에 미주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용기내어 다시 한 발자국을 더 내딛었다.
우겨서라도 이야기의 끝을 보고 싶었다.
“그건 불가능해. 사랑이란 건 어쩔 수 없이 기울어지게 되고 결국 엎어지거든. 사랑이 욕망이 되고 욕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질투가 되는거야. 최소한 내 경험상은 그래왔어.”
“너가 말하는 사랑은 바람피는 둘의 사랑을 말하는 거지? 그럼 어느 한쪽의 사랑이 커지면 집착을 하게 된다는 거야?”
“맞아. 언젠간 소유하려고 할 거고 상대방을 뺏으려고 할거야. 그렇다고 대놓고 약속할 수도 없잖아. 서로 일주일만 사귀고 쿨하게 헤어지자는 약속이라도 하게?”
어차피 말도 안되는 논리를 주장하고 있는 자신도 웃긴지 현민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만 미주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생각을 하느라 저절로 발이 멈췄고 이상함을 눈치챈 현민도 같이 자리에 섰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걸음을 멈춘 미주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승부수였다. 할 수만 있다면 우겨서라도 쟁취하고 싶었다.
“뭐?”
현민의 눈이 강하게 흔들렸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고 다음엔 마음을 의심했다.
불안 섞인 기대가 현실이 되자 막상 할 수 있는 거라곤 얼빠진 표정으로 미주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 바람에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건지 한 동안 깊고 진한 시선이 오고갔다.
어째서 인지 미주는 그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차츰 빛바래져가는 노을뿐이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미주는 마치 자신의 처지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히 푸른 빛을 내는 지평선에는 희미하지만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있었다.
강렬한 색체는 미주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야.”
그 순간 마법 같은 힘이 미주를 온통 붉게 물들였고 불길에 휩싸인 사람처럼 미주는 딴 사람이 되어 버렸다.
“현민아.”
무거운 정적을 깨고 미주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현민을 향한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또렷했다.
“응?”
“넌 나 어떻게 생각해?”
심사숙고해서 고른 질문은 고작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이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현민도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잖아. 대답이나 해줘.”
가늠조차 되지 않는 수심이었지만 무슨 용기에선지 미주는 깊은 강에 성큼 들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미주는 겁내지 않았다. 시동을 건 이상 악셀이라도 밟아봐야 했다.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모르겠어. 만약 내가 생각하는 마음이 네 마음과 같다면, 솔직히 나도 요즘 너랑 같은 마음인 것 같아.”
하지만 마지막까지 현민은 조심스러웠다. 무르익은 열매를 보고도 딸 생각은 안하고 군침만 흘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현민아. 조금 더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없어? 나도 지금 엄청 용기 내서 말하는 거야.”
이제 미주는 어조는 애원에 가까워졌고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래. 나도 지금 엄청 용기 내서 대답한 거야. 지금 네가 느끼는 그 감정 나도 느끼고 있다고.”
“지현민. 확실하게 대답해줘.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나 되게 두려워. 널 잃을까봐. 날 잃을까봐.”
“……널 향한 내 마음은 확실해. 근데 나도 두려워. 말해도 이제 와서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니까.”
“달라지진 않더라도 말 하고 싶어. 현민아. 나……”
감정에 복받쳤는지 미주의 음성이 떨리기 시작했다.
현민은 미안한 마음에 당장 가냘픈 미주의 어깨를 와락 안고 싶은 본능을 느꼈다.
그렇지만 현민은 미주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서 말해라. 어서 말해라. 끝까지 말해라.
“널 사랑하는 것 같아.”
그리고 마침내 미주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말이 나와버렸다.
목 아래서부터 감정이 울컥울컥 차올라 미주는 뒷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언제부터, 얼마나, 어떻게 현민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하고 싶은 말이 수많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해버리자 온몸에 힘이 빠지고 눈물부터 나왔다.
그런데 그때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미주의 얼굴 앞에 무엇인가 다가왔다.
그건 다름 아닌 현민의 입술이었다.
화가 난 사람처럼 미주의 얼굴과 목 사이를 거칠게 잡고선 그대로 키스해버린 것이다.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호시탐탐 사냥감을 관찰하던 맹수처럼 현민은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격정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자줏빛 별이 흐르는 하늘 아래서 두 남녀는 오랜 시간 키스를 나누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있던 두 심장은 마침내 서로를 만나 녹아내렸고 둘은 사랑이라는 원초적인 감각을 오롯이 느끼는 중이었다.
겉잡을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이 혈액을 타고 온 몸에 흐르는 것만 같았다.
긴 입맞춤이 지나자 둘 사이엔 어색함이 감돌았다.
“미안.”
마침내 눈을 뜨고 둘은 서로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눈물 범벅이 된 미주는 지금 화장이 얼마나 번진지도 모른 채 현민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현민의 얼굴에도 미주의 화장과 눈물로 얼룩져있었지만 그건 전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미주야.”
어느새 노을마저 사라져버린 해변가에서 현민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도 널 사랑해.”
현민은 그제야 생각난 듯 뒤늦게라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했다.
그 말에 미주가 배시시 웃었고 현민은 이제 더 나아갈 차례라고 생각했다.
“우리 사귀자. 딱 일주일만.”
그 말을 들은 요동치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미주는 온 몸에 전율이 돋아 그럴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는 거였다.
현민 역시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한 번 둘은 진한 입맞춤을 나누게 되었다.
밤 기운의 힘을 빌려. 꿈만 같은 시간에 위험한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