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기회의 신으로 제우스의 막내아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인지도는 높지 않아서 그리스 신화를 잘 알지 못하면 생소한 신이기도 했다. 송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그의 힘이군.]
카이로스는 송진우에게 힘을 준 정체불명의 신에 대해서 잘 아는 눈치였다. 다시 송진우를 샅 샅이 들여다보더니 감탄하며 소리쳤다.
[갈기갈기 찢긴 신체를 언데드에게 붙여 힘을 계승한다라…… 획기적인 발상이군. 하지만 그답지 않은 생각이기도 해. 그만큼 절실하다는 증거겠지.]
카이로스는 시선을 송진우에게서 거뒀다. 이미 필요한 건 모두 알아낸 후다.
[힘을 계승한 아이야. 이곳으로 온 이유가 뭐냐?]
또 만난 신이다. 송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분이 여기서 힘을 얻으라 했습니다.”
[역시 그렇군. 복수를 위해서 내 힘도 필요하다는 거겠지.]
“……복수요?”
이건 송진우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자신에게 힘을 준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복수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나는 모르겠군. 어쩌면 그는 봤을 수도 있지.]
혼자 중얼거린 신은 다시 송진우에게 말했다.
[이 세계의 법칙을 알고 있느냐?]
“법칙이요?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이 세계는 거짓으로 만들어진 진실한 세계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실제이기도 하지. 대부분의 법칙은 너희의 것을 따랐고 힘의 우위조차 너희의 관념을 통해 완성되었지.]
이건 송진우도 알고 있는 디멘션 월드의 법칙이다. 몇 년 전에 이 사실이 전 세계에 공개되어 큰 파장을 가져오기도 했다.
완벽한 가상현실인 디멘션 월드는 모종의 이유로 멸망한 미래에서 온 10서클 마법사가 과학과 마법을 조합하여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바로 10서클 마법인 ‘세계 창조’로 말이다.
그가 디멘션 월드를 만든 목적은 멸망한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완벽한 훈련소를 짓기 위함이었다. 디멘션 월드에서 싸우는 방법과 실질적인 힘을 얻어 자신도 지키지 못한 미래를 현대인들 스스로 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몇 년 전에 영웅들의 활약으로 위기를 몇 차례나 넘긴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위협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재미있는 것은 가상현실 세계를 만들 때, 10서클인 마법사도 별처럼 많은 모든 법칙을 알거나 구현할 수 없어서 현실의 법칙을 빌려왔는데 여기서 그도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생겼다.
본래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NPC가 모든 법칙을 뛰어넘어 실제 사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건 위대한 마법사도 알 수 없었던 영혼이라는 것이 NPC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그중에서도 신급 존재들은 현실에도 힘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송진우에게 힘을 준 정체불명의 신처럼 말이다.
[나는 딱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의 권능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10서클의 마도사라도 모든 세세한 사항을 다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디멘션 월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디멘션 월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판타지와 무림, 괴담과 각종 신화와 괴담들이 형상화되어서 만들어진 세계다. 그러니 사람들이 강하다고 믿어지는 신화 속 인물과 드래곤 같은 이야기 속의 괴물들은 정말로 그만큼 강하게 형상화되었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슬라임이나 고블린 같은 잡몹들도 그만큼 약하게 만들어졌다.
모든 신화 속에 나오는 신들도 같은 힘을 가지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신화와 신이 더 강하졌고 잊힌 신화의 신은 약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신화를 담고 있는 신성 대륙에서 ‘헤븐’ ‘올림푸스’ ‘아스가르드’ 순으로 영토가 넓고 유명하지 않은 신화의 지역은 작거나 없는 것이 그 예다.
[나는 점점 잊히고 있다. 점점 약해져서 결국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겠지.]
그리스 신화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편이지만 엄청나게 많은 신들과 반신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유명하지 않은 신들은 점점 몰락해갔다.
[그것을 알고 그가 너를 내게 보낸 것이겠지. 어쩌면 이게 내 마지막 기회이겠군.]
아이러니하게도 기회의 신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그게 송진우다.
[그의 힘과 나의 힘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힘이 ‘시간’이라면 나의 힘은 ‘시각’이지. 둘의 힘이 정말로 하나가 된다면 어쩌면 복수도 꿈이 아닐 테지.]
그것이 정체불명의 신이 바란 것이다. 너무나 강력했기에 둘로 나뉘어져야 했던 힘이 하나가 된다면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가져올 거다.
[아쉽게도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군.]
“그 말은…… 제게 힘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 대가로 네게 부탁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내 신도를 찾아라. 그리고 그들에게 내 증표를 건네주어라.]
“신도……를 말입니까?”
[그렇다. 규모는 작지만 내 신도는 아직 어딘가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순간 허공에서 작은 빛 덩어리가 생성되더니 이내 하나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건 손바닥 크기의 물건이었다.
카이로스의 증표
???
[이것을 그들에게 전하고 네가 그들의 힘이 되어주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게 준 힘도 결국은 사라지게 될 거다.]
카이로스에게서 받은 힘은 영원불멸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카이로스가 정말로 사라지기라도 하면 그에게서 받은 힘도 사라지게 될 거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그럼 내 권능을 너에게 넘기겠다.]
우웅~
그리고 사방에 있던 엄청난 기운이 송진우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송진우의 눈으로 모였다.
“크윽!”
예지를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이 눈에서 느껴졌다. 뇌가 타는 듯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고통을 참는 일에는 이골이 난 송진우는 꾹 참고 기절하지 않도록 버텼다.
“커억!”
겨우 고통이 사라졌을 때는 이미 카이로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된 건가?”
혹시나 해서 왼쪽 눈의 옵션을 살펴봤는데 특별히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았다. 걱정은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능력인 미래 예지도 옵션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니 이것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그냥 넘겼다.
“곧 이 힘을 사용할 수 있겠지.”
송진우는 정신 차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카이로스와 대화하고 있는 동안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서 걱정했지만 확인한 결과 놀랍게도 시간은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다. 카이로스와 말하고 있을 때도 예지를 봤을 때처럼 시간이 멈춘 거다.
“다행이네.”
송진우는 지팡이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을 달성했지만 송진우의 시련은 이제부터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송진우가 들어간 곳을 보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거 아냐?”
“지금까지 나오지 않은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다들 송진우의 생사에 관해서는 비관적이었다. 3차 승급자도 우습게 죽이는 무시무시한 함정이 가득한 통로에 제 발로 들어갔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점점 왕세자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을 때,
스르륵~
어둠의 장막이 걷히니 통로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성공했나?”
“우와! 진짜로 해냈네?!”
어둠이 사라져도 플레이어들은 쉽게 들어가지 못 했다. 병사 한 명이 들어가서 안전을 확인한 후에야 사람들이 움직였다.
“들어간다!”
일행은 뚫린 통로를 통해서 모두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들어온 공간에서 지쳐 숨을 고르고 있는 송진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괜찮은가?”
왕세자가 직접 나서 송진우를 챙겼다. 연이은 활약 덕분에 지금 송진우에 대한 호감도는 일반인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조에 도달했다. 왕세자가 공주였다면 다음 관계로 진전할 퀘스트도 떴을 거다.
“괜찮습니다. 조금 지쳤을 뿐입니다.”
“고생했네.”
다른 사람들은 송진우가 함정을 피하느라 저렇게 지친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송진우에게 신경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앞에 있어서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게 왕가의 비보로군.”
왕세자는 지팡이 앞에 섰다. 여기에 오기 위해서 쉽지 않은 함정을 돌파했지만 결국 도달했다. 이제 의식만 치르고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의식을 준비해라!”
“네! 왕세자님!”
왕자를 따라왔던 마법사들이 의식에 관련된 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저 장치를 통해서 카이로스의 힘을 이으면 모든 의식이 종료된다. 물론 카이로스의 힘은 이미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직은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그때였다.
푹!!!
갑자기 누군가가 검을 휘둘러 여기까지 함께한 동료를 찔렀다. 비릿한 피 냄새가 삽시간에 공간에 퍼졌는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푹!
“으악!!”
“무, 무슨 짓이야!”
동시다발적으로 살육이 일어났다.
“이, 이건!”
당황한 왕세자를 그의 기사단이 보호했고 기사단장은 눈에 불을 켜고 호령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기사단장은 번개처럼 움직여 동료를 찌른 자들을 단숨에 도륙했다. 하지만 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수의 병사가 죽거나 다친 후였다.
그때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플레임 길드에 소속된 마법사였는데 이제까지 두꺼운 로브를 눌러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보이지 않던 자였다.
“해내셨군요. 형님.”
“너, 넌!!! 부르스?! 이게 무슨 짓이냐!”
놀랍게도 로브를 벗은 남자는 왕국의 이 왕자였다. 장자인 왕세자에게 순위가 밀렸지만 그의 야심은 이미 왕국에도 소문난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여기에 나타난 거다.
단숨에 무슨 상황인지 파악한 왕세자가 따라온 병력에게 호통을 쳤다.
“나를 배신한 거냐!”
플레임 길드를 비롯한 다른 대형 길드들은 이미 이 왕자 뒤에 서 있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상황이었던 거다.
왕세자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지만 반란의 주동자인 염상섭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둘째 왕자님이 주기로 한 보상이 훨씬 더 많았거든요.”
이 자리까지 참가하기 위해서 염상섭이 이끄는 플레임 길드는 많은 퀘스트를 해결하며 왕세자와의 호감을 올려야 했다. 앞으로 왕이 될 왕세자와 줄을 대면 당연히 많은 혜택을 받을 것이니 길드의 자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노력 덕분에 백자의 지위까지 오르고 중요한 의식에도 참여하게 되었지만 그때,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퀘스트가 떴다. 바로 이 왕자가 접선한 거다.
[날 도와주면 공작의 지위를 주겠다.]
왕세자의 보상도 후했지만 이 왕자가 약속한 것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른 보상도 후했지만 공작의 자리는 앞으로도 몇십 년을 더 노력해도 오를 수 있을지 미지수다.
거대한 나라에도 공작의 수는 다섯을 넘지 않는다. 이 왕국에는 지금 세 명밖에 없으니 공작에 오를 수만 있으면 플레임 길드는 날개를 달게 될 거다.
그 꿈이 지금 닿을 듯이 손짓하고 있다. 염상섭은 당당하게 외쳤다.
“이미 전세는 우리에게로 기울었다. 이미 밖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펼쳐졌을 거다.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이곳처럼 밖에도 미리 사주를 받은 병사들이 왕국군을 기습했을 거다. 물론 병력은 왕국군이 우세하나 그곳에도 이 왕자의 세작들이 있어서 맞부딪히면 이 왕자 세력이 이길 가능성이 높다.
염상섭의 말에 퀘스트를 받고 이곳에 왔던 플레이어들은 바로 항복했다. 그들은 단지 보상을 얻기 위해서 왔을 뿐이다. 왕세자를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울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들이 항복하자 이제 왕세자의 병력은 거의 남지 않았다.
“훗! 좋아, 그래야지.”
이제 왕세자와 그의 병력을 모조리 죽이고 이 왕자가 대신 의식을 거행하기만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이 왕자가 왕세자를 죽이는 것은 내란에 가까운 짓이지만 성공한다면 혁명이 된다.
“자, 그럼…….”
이 왕자가 추살 명령을 내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펑!!!!! 펑!!!!!
갑자기 폭발음이 들리면서 거대한 불꽃이 좁은 공간을 수놓았다.
“뭐, 뭐야!”
불꽃은 정확히 이 왕자의 세력이 있는 곳에만 일어났다. 왕세자의 병력과 항복하고 구석으로 몰린 플레이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그때 연기를 뚫고 송진우가 나타났다.
“지금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송진우는 구석으로 가 뭔가를 조작했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문이 열렸다.
드르륵!
새로 드러난 통로는 원래 의식을 마치고 나가야 하는 곳이다. 다행히도 그 통로는 왕세자 쪽에 있었다.
“지금 도망쳐야 합니다.”
당연히 폭발은 송진우가 만들어 낸 거다. 함정 관련 스킬이 없어서 그냥 무식하게 폭약을 잔뜩 설치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곧 먼지가 걷히고 이 왕자 쪽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콜록! 콜록! 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
폭발에 휘말려 잠시 균형감각을 잃었지만 대부분은 멀쩡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작은 틈이 왕세자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모두 도망쳐라!”
왕세자의 병력은 모두 새로 생긴 통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예지에서는 가장 주된 전력인 기사단장과 많은 병력들이 함정에 죽은 뒤였다. 그래서 왕세자 병력들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 때문에 송진우가 신경 써서 왕세자의 병력을 살린 거다.
만약 염상섭이 왕세자를 시해하고 자신의 말대로 헌터들에게는 아무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면 송진우도 그냥 염상섭을 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염상섭은 항복한 헌터들까지 잔인하게 죽였다.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려 증인을 모두 없앤 거다.
“이쪽입니다.”
이제부터는 송진우의 시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