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빠져나와 길잡이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여정을 떠났다. 마구잡이로 사냥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분명히 있는 거다.
아무리 중앙 대륙의 몬스터들이 고레벨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사냥만으로 얻는 경험치는 그리 높지 않다. 대량의 경험치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퀘스트 클리어가 중요한데 길드원들이 하나의 퀘스트를 얻으면 다른 길드원들과 공유해서 클리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도 그렇다. 필시 한영 길드의 한 길드원이 중앙 대륙에서 활동하다가 특정한 퀘스트를 얻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얻은 퀘스트를 길드 수뇌부들이 분석해서 질 좋은 것은 이렇게 핵심 인사가 대동한 여정에 사용하는 거다.
물론 퀘스트를 발견한 길드원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았을 거다.
“12시에 적 출현!”
목적지에 가는 도중에도 당연히 몬스터들이 습격해왔다. 중앙 대륙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모두 레벨 500이 넘는 강력한 몬스터지만 이 원정에 참여한 헌터들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해서 빠르게 정리되었다.
평상시라면 죽은 몬스터들을 선별해서 도축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자잘한 것은 필요 없다는 듯이 그냥 지나쳤다. 시장에 팔면 족히 돈 백은 받을 수 있는 좋은 사체들이라서 송진우가 입맛을 다셨지만 이들에게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짐꾼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쓰러진 몬스터가 떨어트린 아이템을 주워서 보따리에 담는 것이 전부였다.
‘나야 편하고 좋지.’
어차피 집어봤자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냥 무게만 나갈 뿐이니 이런 여정이 훨씬 편했다.
‘확실히 힘이 덜 드네.’
고기분쇄기라는 엠블럼 획득으로 힘과 체력 스탯이 늘어나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사실 송진우는 같은 짐꾼 중에서도 스탯이 낮은 편이라서 보따리를 짊어지고 걷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적이 많았다. 하지만 힘들다는 것을 내색하면 다음 사냥에 제외될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다녔는데 스탯이 증가하니 그 어느 때보다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최강현은 노골적이네.’
처음에는 같이 사냥을 가는 최강현이 늘 그랬듯이 자신이나 힘없는 짐꾼들을 괴롭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번만큼은 짐꾼들에게 아무런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그건 중요한 여정이라서가 아니라 수작을 부리는 상대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시원한 물 있습니다. 목마르실 텐데 한 모금 하십시오.”
최강현은 한수정에 곁에서 최대한 알랑방귀를 뀌면서 그녀의 맘에 들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송진우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식적인 미소와 느끼한 멘트까지 하면서 그녀에게 점수를 따려 했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훤칠한 키에다가 잘생긴 외모를 지닌 최강현이었지만 그것이 한수정에게는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는 눈치였다.
“다들 고생하는데 저만 편의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건 최 대원이나 드세요.”
“아, 알겠습니다.”
냉냉한 한수정의 말에 최강현은 미소를 구기면서 초라하게 퇴장해야 했다.
‘설마 저놈······ 한수정을 노리나?’
한수정은 재벌 가문에다가 미모와 지성을 갖춘 팔방미인이다. 당연히 모든 남성의 흠모의 대상이 될 만한 여성이지만 오르지 못할 높은 나무이기 때문에 주변의 남자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무리 최강현이 훈남에 높은 레벨을 지닌 헌터라도 한수정의 스펙 앞에서는 우스울 뿐이다. 그보다는 길드 내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잘 보이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많이 당해봐서 안다. 뭔가 이상한 수작을 부렸을 때의 눈빛이다.
‘그래봤자 한수정한테는 안 될 텐데.’
일행은 그 후로도 약 1시간 정도를 이동했다. 게임 속이 아니라 중앙 대륙이고 V·I·P까지 대동한 사냥이니 당연히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부지런히 움직여서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대의 잊힌 사원》
일행을 맞이하는 것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사원이었다.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장식을 생각하면 예전에는 화려한 모습이었겠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부서져서 그 형태만 간신히 남은 상태였다.
그 광경을 보던 한수정이 입을 열었다.
“어떤 것 같나요?”
“건축 양식으로 봐서는 그리스 신화 쪽인 것 같습니다.”
“역시 올림푸스인가요??”
중앙 대륙에는 모든 대륙의 유닛과 던전이 혼재되어 있는데 이 앞에 보이는 던전은 그중에서도 신성 대륙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올림푸스의 양식으로 보였다.
올림푸스는 신성 대륙에서 헤븐 다음으로 큰, 아스가르드와 함께 두 번째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이곳의 종족을 선택한 플레이어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많은데 유명한 종족으로는 데미갓과 사티로스, 켈타우로스, 님프, 세이렌 등이 있다.
종족은 플레이어 레벨이 100을 넘으면 ‘환생 퀘스트’라는 특수 퀘스트를 통해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데 직업 승급을 위해서는 그에 맞는 종족이 필수라서 신중히 골라야 한다.
물론 아직 레벨이 100도 안 되는 송진우는 종족이 없는 상태인데 그런 플레이어를 ‘노비스’라고 불렀다. 종족을 얻음으로써 획득하는 여러 특성을 생각하면 종족을 얻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사람들이 신전을 구경하고 있을 때 이 일행의 리더인 한수정은 옆에 있는 그녀의 보좌관과 진중한 대화를 나눴다.
“김 실장님, 이곳의 적정 레벨이 550이라고 했나요?”
“네, 아가씨. 보스가 나온다면 650까지 나올 수 있죠.”
“크게 위험한 곳은 아니네요.”
중앙 대륙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최저 레벨이 500이니 550레벨의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던전은 최소한 중앙 대륙에서는 크게 어려운 곳은 아니다. 그 때문에 송진우를 비롯한 짐꾼들은 위험이 줄어 좋아했지만 한수정은 오히려 그것이 못마땅한 듯했다.
위험이 올라가는 만큼 보상도 좋아지는 것이 일반적이니 이곳에서 얻는 보상을 크게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곳만 다니면 다른 오빠, 언니들을 따라잡지 못해요.”
“그, 그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 실장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분명 길드 내의 누가 수작을 부린 거겠죠.”
한수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려서부터 재녀로 불린 한수정이었기에 한영 기업의 후계자 싸움에서도 많은 견제를 받고 있었다. 만약 그녀의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 이런 견제를 미리 차단할 수도 있었겠지만 첫째 오빠가 벌써 35살이 넘었고 다른 이들도 나이가 한수정에 비해 많아서 이미 기반을 견고하게 다진 후다.
상대적으로 기반을 닦을 시간이 없었던 한수정은 이렇게 늘 좋지 못한 퀘스트만 받아야 했다.
“내 사람을 따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헌터들을 육성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자금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미 많이 늦었어요. 더 지체하면 기회조차 날아갈 겁니다.”
한수정의 단호한 말에 김 실장이라고 불린 남자고 한숨을 쉬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쪽으로 일을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실장님.”
재벌 가문으로 태어났으면 후계자 경쟁은 좋든 싫든 필수다. 경쟁에서 이긴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평범한 삶을 살아야 하는 가문의 철칙 때문에 한영 그룹의 남매들은 어려서부터 혹독한 경쟁에 시달려야 했다.
다시 전열을 정비한 다음에 본격적인 던전 탐험이 시작되었다.
흔히 나오는 올림푸스의 던전이니 나오는 몬스터의 종류도 훤히 알고 있고 함정 패턴도 익히 알려져 있다. 아는 만큼 위험이 줄어드니 일행은 큰 걱정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1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들어왔지만 신전의 크기가 워낙 넓어서 공간은 넉넉했다.
“너무 어두운데?”
보통 신성 대륙의 던전이면 밝은 분위기고 나오는 적들도 성스러운 기운을 업고 나오지만 이곳은 폐허가 된 곳이라서 그런지 금방이라도 괴물이 튀어나올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혹시 명계의 지역인가?”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한 지역은 신성 대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계 대륙에도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은 하데스가 지배하는 지역으로 명계라고 불렸다.
신전의 모습을 유심히 보던 한 길드원이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런 신화 같은 것은 빠삭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특별히 이 원정에 참여했다.
“비슷하지만 올림푸스와 명계의 건축 양식과는 조금씩 다릅니다. 그보다 더 고대의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의 말에 한수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신화보다 더 고대라고요? 그런 게 있습니까?”
“모든 신화에는 기원이 존재하죠. 이건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가장 근원에 근접한 어떤 사원 같습니다.”
“그럼······ 그게 좋은 건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그리스 신화를 생각하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더 주의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흠······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죠.”
한수정이 말하지 않아도 옆에 있던 김 실장이 알아서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이런 지역에 익숙하다가 방심하지 말고 처음 보는 것처럼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했다.
경고처럼 몇 걸음을 채 못 가서 끔찍한 모습의 괴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타락한 고르곤
(LV 550)
고르곤이라는 괴물은 흔히 메두사라고 불리는 신화 속 괴물의 원형이다. 뱀으로 된 머리카락과 멧돼지의 몸체를 하고 있는데 하체는 암말의 것이었다.
멀리서 석화 마법을 사용하는 고르곤은 플레이어들이 극히 꺼리는 몬스터다. 그런 고르곤이 갑자기 수십 마리씩 나오기 시작했다.
“케에에엑!”
“고르곤이다! 모두 눈을 마주치지 마!”
일반적으로 몬스터에 수식어가 붙어있으면 더 강하거나, 특별한 기술을 사용한다. 타락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고르곤이라서 일반 고르곤보다 더 끔찍한 모습이었고 손에는 거대한 강궁까지 들려 있었다.
휙! 휙! 휙!
갑자기 나온 몬스터에 당황했지만 전방에 자리를 잡은 탱커들이 재빨리 방패를 들어 올렸다.
탱커들이 든 방패는 특이하게도 방패의 면이 없고 손잡이만 있었는데 스위치 같은 것을 누르니 붉은색의 무언가가 뿜어져 나와 거대한 막을 형성했다.
위잉~
과학 대륙의 인간 종족만 사용할 수 있다는 고출력 플라즈마 방패다. 일정한 데미지를 받으면 방패가 깨지고 다시 충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방어 범위가 넓고 폭발 공격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퍽! 퍽! 퍽!
과연 고르곤의 화살은 플라즈마 방패에 닿자 맥없이 튕겨 나갔다.
“반격하라!”
두! 두! 두! 두!
각 팀장의 구호에 맞춰서 이쪽의 사수들이 반격에 나섰다. 과학 대륙의 유닛은 개개인은 약하지만 뭉치면 뭉칠수록 강해져서 대규모 단위로 싸우는 전쟁에 특히 강력하다.
100명이나 병력이 모이니 시너지 효과가 엄청났다.
타락한 고르곤들은 융단폭격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공격에 땡볕에 아이스크림 녹듯이 사그라졌다.
“좋아 이렇게만 하자!”
던전에 특징상, 초반에는 약한 몬스터들이 출현하고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더 강력한 몬스터가 나온다. 하지만 이처럼 쉽게 잡았으면 더 가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한바탕 전투가 끝나면 짐꾼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서 떨어진 아이템을 수거했다. 이런 긴급한 전투에서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다가는 발길질에 채일 각오를 해야 한다.
“긴장해!”
신전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넓어졌다. 원거리 유닛이 많은 일행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는데 넓은 곳에서 싸우면 근거리 유닛들이 쉽게 달라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려대로 다음에 나온 몬스터는 근육 빵빵한 소머리 몬스터와 염소 수인이었다. 두 종족을 합쳐서 거의 50마리 정도 되는 숫자가 나왔다.
엘더 사티로스
(LV 580)
크림슨 미노타우르스
(LV 600)
불타고 있는 듯이 시뻘건 피부의 미노타우르스가 자기 몸체보다 더 큰 양날도끼를 휘두르면 빠르게 쇄도했다. 사티로스는 뒤에서 손바닥 크기의 활을 사용해 아군을 공격했다.
“미노타우르스를 먼저 녹여!”
사티로스의 견제도 짜증 나지만 미노타우르스가 가까이 붙으면 아군이 위험하다.
두! 두! 두! 두!
사수들이 총구가 휘어지도록 총알을 갈기기 시작했고 방패병들도 눈에 불을 켜고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이 일행이 100명 넘게 모인 것은 여기 괴물과 대등한 싸움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숫자로 찍어 누르고 손쉽게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함이었는데 생각보다 출현하는 몬스터의 숫자가 많았다.
미노타우르스는 강력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체력도 높고 이동속도도 빠른 그야말로 만능 유닛이다. 때문에 미노타우르스가 던전에서 나오면 일 순위로 제거하려 하는데 이렇게 많은 숫자가 나오는 것은 경험이 많은 플레이어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노타우르스가 총알 세례를 뚫고 아군과 부딪치려 하자 한수정이 혀를 짧게 차고는 검을 꽉 붙잡았다. 그러더니 별안간 방패병을 넘어 앞으로 뛰쳐나갔다.
“아가씨!”
놀란 김 실장이 만류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한수정은 이미 방패병보다 훨씬 앞에 나가 미노타우르스와 맞부딪힌 후였다.
쾅!!!!
거대한 미노타우르스의 도끼와 한수정의 얇은 검이 맞부딪쳤지만 놀랍게도 한수정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을 비틀어 도끼를 흘린 다음에 가볍게 미노타우르스를 베었다.
팟!
가볍게 휘두른 검에 미노타우르스의 두꺼운 가죽이 너무나도 쉽게 잘려나갔다.
“우우~~~~”
고통스러워하는 미노타우르스의 목을 한수정의 검이 사납게 훑고 지나가자 피 분수가 일어나더니 미노타우르스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한 마리!”
한수정은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 다음 상대를 찾아서 현란한 검 솜씨를 뽐냈다.
그녀가 가진 검은 역시 과학 대륙 전용 아이템인 초진동 블레이드다. 과학 대륙의 아이템답게 딸린 옵션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방어력 관통력이 무려 65%나 되었다. 그러니 방어력이 높은 미노타우르스도 맥없이 쓰러지는 것이다.
물론 한수정의 강함은 단지 가진 아이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온실에서 자란 부잣집 딸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높은 검술 실력 덕분에 미노타우르스는 그 엄청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연쇄적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송진우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다.
‘엄청나다.’
짐꾼 생활을 하면서 많은 실력자들을 봤던 송진우지만 한수정처럼 시원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은 처음 봤다. 그녀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말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상상했던 것 이상의 놀라운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아름다운 나비의 날갯짓을 보는 듯했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부드럽게 타고 미끄러지듯이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는 모습이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갑자기 죄어왔다.
‘그에 비하면 난······.’
한수정이 자신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은 당연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수정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자신이 꿈꾸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소아마비를 치료하고 자유롭고 거침없이 세상을 누비는 자신을 늘 꿈꾸었다. 비록 지금은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서 잊고 있었지만 저주 같은 낡은 목발을 버리고 자유롭게 뛰어다닌 것이 어릴 적의 송진우의 꿈이었다.
지금의 한수정처럼······
‘제기랄!’
심연 속 깊은 곳으로 눌러놓았던 옛꿈이 왜 이제 와서 다시 수면 밖으로 나온 것인지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저 모든 것을 가진 한수정의 모습에 그 어떤 때보다 처절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으리라 추측할 따름이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한수정에 비하면 자신은 쓸모없는 육체에 갇힌 영원한 죄수와 같다.
비참한 몸뚱이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심한 모욕을 견뎌 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불편한 몸 때문에 다른 친구들과 뛰어논 적도 없고 친구조차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별명은 늘 병신 아니면 송장이었고 나중에는 그런 모욕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야 했다.
이성 친구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며 비웃지만 않아도 고마워해야 할 정도였다.
견딜 수 없는 무력감이 송진우를 서서히 죄어왔다. 이대로 어둠에 먹혀 자신조차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때, 송진우의 앙다문 어금니에서 바드득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이제 와서 웬 청승이냐! 정신 차려, 송진우!’
송진우가 자신의 얼굴을 짝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을 치니 얼얼한 통증과 함께 잠식되었던 감각이 돌아왔다.
‘멍청한 생각할 것 없어. 어차피 닿을 수 없는 세계야. 난 그저 동생, 하나만 생각하면 돼.’
이미 자신의 삶은 동생, 송하나를 위해서 모두 바쳤다. 동생이 이 암울한 세계를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자 원동력이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심장조차 뛰지 않는 진짜 송장.’
어느새 몬스터가 모두 쓰러진 전장을 보며 송진우가 다시 움직였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몬스터가 떨어트린 아이템을 줍는 거다.
송진우는 잠시 자신이 감상에 젖어서 자신답지 않은 일을 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검고 불길한 기운의 무언가가 코로 빠져나온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송진우에게서 빠져나온 그 기운은 허공에서 맴돌더니 이내 다른 사람의 코를 통해 들어갔다.
“여기서 잠시 휴식한다. 짐꾼들은 쓰러진 몬스터를 도축해라.”
헌터들이 소비된 마나와 기력을 회복하는 동안에도 짐꾼들은 쉴 수 없었다. 송진우는 그중에서도 잡념을 떨쳐내려는 듯이 미친 듯이 도축에 몰두했다.
그렇게 몇 분 후.
“이제 출발한다.”
다시 일행의 여정은 계속되었다. 위험한 싸움이 있어서 더 조심스럽게 이동했지만 다행히 미노타우로스처럼 강하고 까다로운 몬스터는 나오지 않았다. 간혹, 마법을 쓰는 몬스터를 처리하느라 다시 한수정이 활약한 것을 제외하면 나름 평탄한 진행이었다.
그렇게 계속 진행하니 결국 과거의 영광을 아직 간직한 화려하고 거대한 문에 닿을 수 있었다.
“여기가 목적지인가?”
한수정의 말에 옆에 있던 김 실장인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작은 보석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것을 문에 있는 표식과 대조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표식을 보니 여기가 확실합니다.”
문을 손으로 만지면서 뭔가를 확인하던 김 실장이 이윽고 손에 들고 있는 보석을 한 곳에 댔다.
딸깍!
김 실장이 들고 있던 보석은 마치 처음부터 문에 붙어 있었던 것처럼 쏙 들어갔다. 그리고······
드드드드!!!!
신전이 무너질 듯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그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해냈네요.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네요.”
한수정과 다른 헌터들은 앞쪽의 허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파티를 맺지 않아 퀘스트 공유가 안 된 송진우는 볼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퀘스트 알림이 투명한 창으로 허공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들어가죠.”
낮은 레벨 대라서 쉽게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던전의 난이도는 높았다. 만약 헌터들의 수가 더 적었더라면 이번 원정은 포기했을 거다.
하지만 헌터를 잃을 것도 아니고 체력도 거의 꽉 찬 상태다. 그만큼 한영 길드원들의 실력이 출중하니 가보지도 않고 괜히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이변이 나타났다.
쾅!!!!
플레이어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닫히더니 곧 비상이 걸렸다.
“이런 미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린존?! 이런 곳에 그린존이라니!!!”
별안간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바뀌면서 게임 캐릭터가 아닌 현실의 모습으로 변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