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크러쉬 대회 본선의 막이 열렸다.
"와~~~~와~~~~~"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드디어 크러쉬의 본선 경기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계를 맡게 된 아나운서 이상진입니다. 그리고 옆에는 해설자 박종훈 씨가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박종훈입니다."
"1년 만에 드디어 크러쉬 경기가 열리게 되는데요. 아직 잘 모르는 시청자분들을 위해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네. 크러쉬는 2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니고 있는 대회인데요. 1회 때 우승자였던 일신 천무호 선수를 배출해 낸 후 많은 선수들의 등용문의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다른 대회와 차별화되는 특징은 역시 한 가지 룰이죠.”
“그렇죠. 오직 신인 선수들에게만 참가 자격이 주어지죠?”
“네, 모든 정식 대회에 3회 이하로 출전했던 선수들만 지원할 수 있어 이곳에서의 우승은 다른 대회로 따지자면, 신인상 정도가 되겠습니다. 많은 우승자들이 다 각국에서 훌륭한 성적을 내고 있다는 것이 좋은 예가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올해는 특히나 다른 때보다 더 이슈가 되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오왕 중의 한 명인 반왕의 출전 때문입니다. 반왕 선수는 특이하게 대회 같은 것에는 한 번도 출전도 안 하고도 오왕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이번이 그에게는 무투대회에 처녀 출전인 셈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집중되고 있습니다. 반왕에 대해서도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네 반왕 같은 경우는 제가 따로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다들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태국 국왕 군의 맞서서 싸우는 필리핀 반군의 총지휘자이죠. 무술의 한 종류인 칼리의 현존하는 최고수이고 그의 주 무기는 짧은 두 개의 단봉입니다. 태국 국왕 암살 미수 사건에서 국왕 친위대들을 살해하고 도주한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죠."
"그러고 보면 이번 참관인으로는 태국 국왕이 직접 참석하지 않습니까? 그 점이 이번 반왕의 출전과 관계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반왕이 대회에 참석하게 된 원인은 아무래도 태국 국왕이 참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데요. 진짜 속사정은 본인만 알고 있겠죠.”
“크러쉬는 32강을 A조 B조로 나누어서 경기가 치러지는 데요. 오늘은 A조의 경기 16명의 선수들이 나와 총 8경기를 하게 됩니다. 오늘 A조에는 쟁쟁한 선수들이 많죠?"
"이번에는 반왕뿐만이 아니라 많은 훌륭한 선수들이 출전하였습니다. 제가 한번 살펴볼까요? 중국 점창파 출신 왕장호 선수 출전했고요 마법사의 탑에서 5클레스의 마법사 레미 선수가 나왔습니다. 에스퍼 계열의 선수도 한 명 출전했습니다. 바로 인도네시아에 위도르 선수. 그리고 독일의 펜싱 기대주이죠, 그린 슈마허 선수. 같은 독일의 출신의 듀크 선수, 샤로스 신전의 성기사인 미론. 인도의 기인 라심, 그 밖에도 일본에서 검으로 위명한 키레이 가문의 하야토, 유유 남매도 동반 출전하여 본선까지 올랐군요. 그리고 프랑스의 특수부대인 검은 단검 출신의 이디오스. 몽골 출신의 전쟁 영웅 퉁투. 그리고 싸울아비의 후예를 자처하는 관후 선수와 한국의 전사 천유강 선수입니다."
"그렇군요. 시청자 여러분들은 지금 전 세계 TV 채널로 생중계되는 크러쉬 대회를 보고 계십니다. 자 그럼 첫 경기의 선수를 보죠. 첫 번째 경기는 중국 점창파의 기대주인 왕장호 선수와 키레이 가문의 장남이자 검의 귀재인 키레이 하야토 선수입니다. 처음부터 기대되는 싸움입니다. 역시 본선 경기답죠?"
"네~ 특히나 이번 크러쉬 대회에는 반왕뿐만이 아니라 명성이 높은 곳에서 많은 선수들이 등록을 하였습니다. 첫 경기부터 기대주들이 싸우게 되는데요. 아무래도 이름은 명문 점창파가 높지만 키레이 가문은 잠재력이 높은 가문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이번 싸움의 결과는 쉽사리 예측할 수가 없겠군요."
"그렇군요. 그럼 크러쉬를 지원해 주신 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말이 필요 없는 분이죠. 태국을 다스리고 계신 샤이오드 국왕입니다."
해설자의 말에 VIP 관람석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일어나서 다른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옆에는 8명의 그 이름도 유명한 국왕 친위대가 지키고 있었다. 비록 디멘션 상이라서 어떠한 수를 쓰더라도 국왕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는 없지만 혹시라도 무례한 자가 다가오지 못하게 그들도 같이 나온 것이다.
"그 옆에는 세황 기업 4개의 계열사를 경영하고 있는 신영철 님이십니다."
해설자의 말에 차가운 인상의 중년의 남자가 일어났다. 이 사람이 바로 신지후의 큰아버지이자 숙적인 신영철이었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 밖에 몇 명의 후원자를 말하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경기장부터 세팅에 들어가겠습니다."
"경기장은 총 200여 개의 준비된 경기장 중 하나에서 무작위로 결정이 되게 됩니다. 고전적인 경기장부터 온갖 함정이 있는 이집트 피라미드까지 많으니 시청자 여러분은 모두 그 점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지금 막 경기장이 결정되었습니다. 경기장은 오아시스군요."
해설자의 말처럼 경기장은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로 바뀌었다.
"이 오아시스 경기장은 사막의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를 그대로 구현하였습니다. 높은 온도와 낮은 습도 때문에 더위에 약한 선수가 불리하고 또 발목까지 잠기는 모래 때문에 움직임이 제안이 많이 되는 경기장입니다. 둘 다 검을 쓰는 선수이기 때문에 한 선수에게만 유리한 경기장이라고는 할 수가 없겠네요."
"하지만 자료에 의하면 하야토 선수가 추운 북부 지방에서 살아왔다고 나오는데요. 더위에 약할 수도 있겠군요. 경기를 시작해야지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럼 크러쉬의 첫 경기가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로그~~~~~~인!!!"
해설자의 말에 각 선수인 왕장호와 키레이 하야토가 경기장에 소환되었다.
"와와와와~~~~~~~~"
경기장이 소환되면 관객들은 선수들을 볼 수가 있지만 선수들은 관객들을 볼 수도 그들의 함성을 들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집중하며 싸울 수 있었다.
"경기 시작되었습니다. 넓은 패검을 들고 있는 선수가 점창의 왕장호이고 긴 왜도를 들고 있는 선수가 키레이 하야토 선수입니다."
왕장호는 짧은 머리와 부리부리한 눈과 주먹코 그리고 한일자로 다문 굳게 보이는 입술을 가진 한눈에도 뚝심이 있어 보이는 선수였다. 점창파의 문장이 수놓아진 청색을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직계 제자만 가질 수 있다는 수실도 그의 검에 달려 있었다.
키레이 하야토는 헐렁한 검은색 무사복을 입고 머리를 대충 묶은 듯 여기저기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뻗어 있었다. 허리춤에는 고풍스러워 보이는 긴 왜도가 걸려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었다면 뽑기도 힘들어 보일 정도의 길이었다.
검을 먼저 뽑은 것은 왕장호였다. 폭이 넓은 패검을 자신의 눈높이까지 올려 들고 다리를 살짝 구부려 무게 중심을 낮춘 후에 천천히 키레이 하야토에게 다가갔다.
모래가 발목까지 꺼지는 사막이었지만 왕장호는 그곳을 물 위를 걷듯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고도로 단련된 보법이었다.
점창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그의 실력은 이미 후기지수의 경지를 뛰어넘었다. 당당한 일류의 고수였다.
그와는 달리 키레이 하야토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왕장호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왕장호가 자신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시선도 왕장호가 아닌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
그의 태평한 모습에 왕장호가 분기탱천하여 달려들었다. 수십 년 동안 달련된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점창파의 절기를 뽑아내었다. 바로 직계 제자에게만 전해진다는 유운 검법이었다.
"아! 유운검법입니다. 점창파의 유운 검법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유운검법은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운 일종의 환검이었다. 중국의 구파일방 중에서 화산파의 매화검법과 더불어 가장 변화가 심하다는 바로 그 검법이었다.
우우우웅!
거대한 패검에서 마치 악귀가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폭이 넓은 검으로 펼치는 검법이라 저런 소리가 나는 것이다.
변화에 변화가 더해져서 검로가 지나가는 자리에 잔상이 남았다. 그 잔상들이 모이니 왕장호의 주위는 정말 구름이 나타난 것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유운 검법의 무서움이었다. 허초가 실초가 되고 실초가 허초로 바뀐다.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때였다, 키레이 하야토가 움직인 것은.
번쩍!
마치 구름에서 번개가 일어나는 것처럼 섬광과 같은 무언가가 왕장호의 유운 검법을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검법을 멈추고 다시 평소의 상태로 돌아간 왕장호가 묵묵히 서 있었다. 그것은 키레이 하야토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둘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처음 로그인되었던 그 상태로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 있어 난 것일까요. 두 선수 다 움직임이 없습니다. 분명히 한차례의 격동이 있어 났는데요."
해설자도 그 순간의 격돌을 자세히 보지 못하였는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키레이 가문의 발도술인가?"
그의 물음에 키레이 하야토가 아까와 같은 표정과 눈빛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 과연 대단한 검술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운 검법이 약한 것이 아니다. 내가 미숙해서다. 다음번에는 이번처럼 당하지는 않을 거……, 큭!"
말을 마친 왕장호가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심장을 뚫고 지나간 깊은 상처를 내공으로 막는 것에 한계가 온 것이다.
그리고 이내 희미하게 사라져버렸다.
"왕장호 선수 로그아웃!!!! 순식간에 승부가 났습니다. 많은 전문가의 예상을 깨고 크러쉬 본선 대회 첫 승자는 키레이 가문의 장남 하야토로 결정이 났습니다. 워낙에 빠른 승부여서 느린 화면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실제의 전투는 이렇게 한 번의 격돌로 끝나는 것이 많았다.
디멘션에서의 게임은 체력 에너지라는 개념과 공격력 방어력이 있어서 한 번에 죽기는 힘들지만, 현실에서는 어린아이가 들고 있는 과도라도 급소에 맞으면 한 번에 절명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런 경기는 5분을 넘기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첫 번째 경기처럼 두 번째 경기와 세 번째 경기도 금방 끝났다.
두 번째 경기는 마법사의 탑에서 나온 레미가 프랑스에서 온 이디오스를 파이어 볼로 가볍게 물리쳤다.
이디오스는 처음에 품속에 숨겼던 단검을 던져서 레미의 주문을 방해하고 검으로 단숨에 찌를 생각이었지만 레미는 이디오스를 날아오는 단검과 함께 태워버렸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빠르기였다.
그리고 세 번째 경기는 반왕과 몽골의 전쟁 영웅이라고 불리는 퉁투의 대결이었다. 반왕은 예선전과 다르게 태국의 전통 무술 의상을 입고 나왔다.
여러 가지 화려한 색깔로 치장된 그 의상은 한눈에도 상대의 전의를 떨어뜨리기 충분해 보였는데 특이한 것은 가면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가면에는 태국의 전쟁의 신이 그려져 있었는데 반왕은 그 가면은 들고나와서 여러 사람에게 인사를 먼저 했다.
"와!!!!!!!!!!!"
그 순간 반왕의 눈과 태국의 국왕의 눈이 맞았다.
씨익
반왕의 얼굴에서는 비웃음과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러자 태국 국왕의 의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특히 옆에 서 있었던 국왕 친위대장의 눈빛은 마치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둘은 과거 국왕 암살 미수 사건에서 격돌한 적이 있었는데 결과는 친위대의 참패였다.
비록 암살은 미수에 그쳤지만, 태국 최고의 무인들이라는 친위대들을 네 명씩이나 잃었다는 것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런 그들에게 시선을 돌린 반왕이 앞에 서 있는 퉁투에게 눈을 돌렸다.
퉁투는 키가 2미터가 넘고 전신에 살이 붙어 있어 매우 거대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길이가 1미터가 넘어 보이는 쇠몽둥이를 들고 있으니 정말 사자도 단숨에 거꾸러트릴 기세였다.
"이제 시작합니다. 로그~~~~~~인!!!!!!!"
경기장은 초원이었다. 나무도 거의 없는 드넓은 초원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퉁투가 살던 초원지대와 비슷한 지형이었기 때문에 이 경기장은 그에게는 가장 유리한 지형이었다. 하지만
퍽!!!!
경기는 너무나 싱겁게 끝났다. 반왕이 들고 있던 단봉을 휘두르니 퉁투가 재빨리 몽둥이로 막았다. 하지만 단봉에 담겨있는 거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퉁투의 머리는 몽둥이와 함께 박살이 나고 말았다.
퉁투도 힘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장사이었지만 반왕의 힘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 것이다.
"퉁투 로그아웃!!!!! 승리자는 반왕 쿠아칸입니다!!!!"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준 반왕은 태국 국왕을 보며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대기실로 사라졌다. 물론 태국 국왕의 노여움은 더욱 커졌다.
그렇게 3번째 경기까지 끝이 났다.
천유강은 대기실에서 눈을 감고 대기하고 있었다.
"다음 선수 나오세요. 이제 경기가 시작합니다."
안내자의 말에 천유강은 서서히 일어나 경기장으로 향했다.
"언니! 언니! 드디어 유강 오빠의 차례에요."
"으, 응? 그래."
배연아의 말에 수화진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항상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던 수화진에게는 이 세계는 너무나 낯선 세계였다.
경기장 속에 사람들은 비록 가상이었지만 피를 흘리고 목숨을 걸고 싸우고 사람들은 그것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 지르고 있다.
패자는 기권하지 않으면 처참하게 죽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 더욱 열광한다.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응원 오겠다고 천유강에게 약속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경기에 천유강이 선다니 새삼 천유강이 무인이라는 것을 느끼는 수화진이었다.
그리고 이 앞에 남매도…….
"크하하하!!!! 오늘 경기 무지 재미있네. 아까 반왕의 경기는 정말 소름이 끼쳤지."
어디서 났는지 자신의 팔뚝만 한 팝콘 통을 가지고 온 배대강이 여기저기로 입에 든 팝콘을 튀겨가며 말했다.
"그러게 재미있네. 근데 언니는 괜찮아요? 안색이 나빠 보이는데?"
"응? 아니야.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
"하하하! 화진 씨. 이런 경기에 익숙하지 않은 여자들은 다 같은 반응입니다. 부끄러워하실 것 없어요. 그래도 경기를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지고 재미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 그럴까요?"
"물론이죠."
그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지만, 조금의 위안을 느낀 수화진은 천유강이 경기를 할 경기장을 보았다. 하지만 천유강이 아까의 선수처럼 쓰러질 모습이 자꾸 상상되어 경기장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것이……, 유강 씨가 사는 세계구나.'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살아남는다. 이 경기에서 WIN-WIN 전략이란 없었다. 오직 승리 아니면 패배이다.
수화진은 천재라고 불려왔다. 실제로 수화진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 전술들은 항상 교수나 현직 참모들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수화진은 한 번도 진정한 전쟁이나 전투를 본 적이 없었다.
'죽은 지식……,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죽은 지식이었어. 마치 바둑판의 돌처럼 병사들을 움직인다고 생각했지 그들의 치열한 싸움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
진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전투보다 몇백 배는 치열해지고 잔인해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갑자기 수화진은 자신의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전쟁에서의 참모의 그릇된 판단은 수만의 병력들을 지옥의 불구덩이로 빠트릴 수 있다.
수화진은 천천히 경기장으로 걸어 나오는 천유강을 보며 두 손을 모았다.
"예 이번 경기는 독일의 펜싱 챔피언 그린 슈마허 선수입니다. 독일의 펜싱 대회는 저희 크러쉬 규정상 경기로 취급하지 않았기에 이번 대회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펜싱 대회에 4번의 우승 경험이 있는 매우 뛰어난 선수입니다. 실제로 작년에 열린 그레이트 워리어라는 종합 무술 대회에서 준우승까지 차지한 바 있는 선수입니다. 그리고……."
해설자는 자료를 한참 뒤지며 말을 했다.
"한국의 천유강 선수는 완전히 무명의 선수인데요. 이런 대회에 나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다른 정보는 모두 공개하지 않았네요."
"네 그럼 경기장을 선택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경기장은 무작위로 결정되게 됩니다. 이번 경기장은……."
경기장 가운데 커다란 전광판에 여러 가지 그림들이 빠르게 돌아가며 바뀌었다. 그 빠르기가 점점 느려지면서 한 가지 그림이 나오게 되었는데 거대한 건물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이번 경기장은 콜로세움입니다. 이 경기장에 관하서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콜로세움이라는 경기장은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훌륭하였던 경기장을 복원시킨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디멘션 게임상에서 도박할 수 있는 곳으로 더 유명하죠. 이 경기장은 바닥에는 단단한 흙바닥으로 이루어져 있고 원형의 단단한 경기장이 둘러싸여 있어 아무런 페널티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곳입니다."
"자, 그럼 제4경기가 지금 시작되겠습니다. 로그인!"
위이잉~
해설자의 말에 경기장은 단숨에 중세의 콜로세움 경기장으로 변하였다.
"와와와와~~~~~"
콜로세움에는 로마인의 옷을 입은 관중들로 꽉 차 있었다.
정말 고대 로마에 온 것과 같이 수천은 되어 보이는 관중들이 소리를 지르며 선수들을 보고 환호를 지르고 있었는데 물론 이들은 진짜 사람이 아니라 홀로그램과 같은 것이었다.
진짜 관중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두 명의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25살로 천유강보다 4살 많은 그린 슈머허라는 남자는 곱실거리는 갈색 머리를 눈앞까지 길게 늘어트리고 뒷머리는 단정하게 묶은 미남자였다. 키는 천유강과 비슷한 180대 중반이었으나 대신 몸이 조금 마른 편이라서 언뜻 보면 천유강보다 키가 더 커 보였다.
그린 슈머허의 왼손에는 긴 레이피어를 들었고 다른 손에는 짧은 단검이 있었다. 중거리에서는 레이피어로 찌르고 가까이에 붙는 상대는 단검으로 단숨에 숨통을 끊어놓는다.
전진과 후진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아차 하는 순간에 빠르게 파고든 레이피어에 목을 꽤 뚫리게 된다.
"그린 슈머허 선수는 뛰어난 외모 탓에 여성 팬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죠. 지금 응원하는 관객들 중에서 여자 목소리의 비율이 훨씬 많은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 인기만큼 실력이 있는 선수인데 오늘 좋은 경기를 보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반왕을 제외하면 슈머허 선수가 이번 경기에서 가장 경력이 많은 선수입니다. 그런 만큼 노련한 경기 운영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은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무기들을 꺼내 들고 대치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 다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린 슈머허는 왼쪽 다리는 앞으로 내놓고 오른 다리는 뒤로 길게 빼놓고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언제라도 돌진할 수 있게 걸어왔고 천유강은 자연스럽게 길을 걷듯 걸어왔다.
'훗! 역시 실전 경험이 없는 애송이인가?'
그린 슈머허는 상대의 기록이 없다는 것 때문에 처음에는 신경이 조금 쓰였으나 천유강의 모습을 보고 그런 마음을 지웠다.
저렇게 온몸에 빈틈투성이 채로 아무런 방비 없이 걸어오는 것은 어찌 보면 도발일 수 있으나 경험이 많은 슈머허는 조금의 감정의 변화 없이 상대를 볼 여유가 있었다.
본선까지 온 것을 보면 한수가 있는 것은 틀림없으나 자신에게는 그저 가여운 사냥감처럼 보였다. 더군다나 무기도 없이 빈손이다. 날카로움이 없는 그에게 빠름에 자신이 있는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름 없는 무관의 계승자인가 보군. 크러쉬의 본선에 오른 것으로도 기적이지만 그 행운도 여기서 끝이다.'
이미 그린 슈머허의 머릿속에는 천유강의 존재는 지워져 있었다. 단지 어떻게 하면 멋있게 이겨서 관중들에게 찬사를 받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졌을 때 그린 슈머허가 빠르게 앞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며 레이피어를 뻗었다. 한방에 목을 꽤 뚫어 경기를 끝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 순간에 천유강도 그린 슈머허와 마찬가지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탈각, 물화, 그리고 여의(如意) 처음엔 탈각, 내가 깨야 하는 벽……. 그러나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먼저 인지가 우선이다. 부셔야 할 것은 인지해야만 그것을 깰 수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 그린 슈머허의 레이피어는 멈추지 않고 천유강의 목을 향해 총알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스윽
어느새 레이피어의 뾰쪽한 끝을 피한 천유강을 마치 그린 슈머허를 보지도 못한 듯 그대로 지나쳐 걸어갔다.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을 스쳐 지나가듯 천유강은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그린 슈머허는 그런 천유강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온몸을 사시나무가 떨듯 덜덜 떨었다.
"어…어떻……?"
쫘악!
그린 슈머허는 부릅뜬 눈을 감지도 못하고 그대로 세로로 네 등분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로, 로그아웃!!!! 경기가 끝났습니다! 놀랍게도 무명의 천유강 선수가 그린 슈머허 선수를 단 한 수만에 로그아웃을 시켰습니다."
경기는 순식간에 끝이 나 버렸다. 천유강이 계속 강한 상대와 싸우다 보니 자신도 알지 못하였지만 어느새 이렇게 강해진 것이다.
"……."
뜻밖의 결과에 열심히 응원하던 관중석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에 대기석에서 관람하던 선수들은 긴장해야 했다.
천유강이 보여준 한 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본선에 오른 선수들 중에서도 많지가 않은 것이다.
"후후!"
하지만 대기실에서 홀로 웃는 사람이 있었다.
"역시 들은 대로군."
그 대기실에는 반왕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오빠가 이겼어요. 언니!"
"그, 그래."
눈을 감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 같았지만 수화진은 용기를 내어서 천유강의 경기를 모두 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경기가 빨리 끝나서 수화진의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끝을 볼 수가 있었다.
"유강이 놈, 그사이에 많이 발전했는데? 이거 나도 계속 분발을 해야겠네."
경기에 나가지 못해서 몸이 근질근질한 배대강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전왕인 아버지에게 계속 수련을 쌓은 배대강과 스승의 부재로 긴 슬럼프에 들어간 천유강과의 최근 전적은 배대강의 우세이었다.
하지만 슬럼프를 탈출한 듯 보이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의 모습에 배대강도 흥분이 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