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타이브는 꽃을 사 들고 빈민가의 깊숙한 곳으로 갔다. 이곳은 타이브와 몇몇 사람만 아는 높은 공간이다. 이곳에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장관이 볼 수 있다.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어머니가 직접 자신을 묻어달라던 곳이기도 했다.
힘들게 찾아간 곳에는 이미 선객이 와 있었다. 어머니와 아이들의 비밀 공간인 이곳에 다른 사람이 꽃까지 들고 찾아와 있었다.
바로 하메르 영주였다.
묵묵히 디나의 무덤을 보던 영주는 뒤도 돌지 않고 입을 열었다.
“왜, 무덤을 이곳으로 했지?”
“······이곳을 좋아했습니다.”
“······그렇군.”
이곳에서는 영주의 성이 한눈에 보인다. 타이브도 왜 어머니가 이곳을 좋아했는지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쫓겨난 후에도 여전히 영주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디나······, 나를 용서해 주시오.”
타이브는 하메르 영주가 의식을 끝낼 때까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비석을 쓰다듬은 영주는 아직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기적 따위는 믿지 않는다. 네가 태어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디나의 의지 때문이겠지.”
「영주님 저는 영주님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귓가에 대고 수없이 속삭였던 목소리가 아직도 지척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때는 그냥 흘려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언령과도 같았다.
그녀의 의지가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타이브를 잉태시킨 것이다.
하메르 영주는 몸을 돌려 타이브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제 그의 눈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현명하고 착한 여자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신념도 지니고 있었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 도둑질과 같은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했던 디나다. 그건 영주의 피가 흐르고 있는 타이브를 절대 영주에 누가 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이기도 했고 어쩌면 이날이 올 것을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거두었던 아이들은 내가 거두었다. 이제는 네 진짜 동생이 되는 셈이지.”
바바가 데려갔던 아이들은 이미 성의 구석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제 영주가 정식으로 입양하기로 했으니 한순간에 신분이 수직 상승한 셈이다.
“······.”
하지만 타이브는 그 모든 말을 듣고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그는 영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정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는 영주는 차분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다. 그 말은 이곳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앞으로 너의 판단에 달렸다는 것을 뜻하지.”
영주가 손을 뻗어 온 마을을 가리켰다. 멀리서 보니 사람들이 좁쌀 크기로 바글거렸다. 수만의 사람들의 자신이 명령에 좌지우지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 어깨가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의 보내 디나의 무덤은 성안으로 옮길 거다. 너도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라.”
내려가는 영주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하지만 떨리는 어깨를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아직 너에게 가르칠 것이 많구나, 내 아들아.”
《균열을 클리어했습니다.》
《퍼펙트 클리어에 성공했습니다.》
***
천유강이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자신의 방에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또 여기지?”
어떤 때는 균열이 있던 곳에서 정신이 드는데, 또 어떤 때에는 집에서 눈을 뜬다. 그 기준을 알 수 없다.
그에 대해 대답을 하듯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플레이어님의 편의를 위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신비로운 모습의 세레나자드가 앞에 있었다.
“오랜만이네, 세레나자드.”
“축하드립니다. 이번에도 퍼펙트 클리어에 성공하셨군요. 튜토리얼 던전까지 합하면 벌써 네 번 연속 퍼펙트 클리어네요.”
“이번은 중급이라서 아주 어렵지는 않았어.”
「예전에도 이 균열을 클리어한 사람이 있었지만 성인식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해서 아쉽게 보통 클리어에 그쳤습니다. 혹독한 성인식에 참가하시다니 정말 용기 있으시네요.」
“그것도 퍼펙트 클리어 조건에 포함되는 거였어?”
단지, 영주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싫어서 택한 성인식이었다. 비록 난관이 존재했지만 자신이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는데, 그게 퍼펙트 클리어와 관련 있을 줄은 몰랐다.
「정식 후계자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니까요.」
“허~ 뭐, 어쨌든 결과가 나쁘지 않아 다행이네.”
「그럼 보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세레나자르가 손을 휘두르자 전처럼 균열의 보상에 관한 내용이 투명창으로 떴다.
《재능 - 섬세한 조각사》
조건 - 균열 클리어
능력 - 더 섬세한 움직임을 할 수 있다.
《능력 - 사막의 전사》
조건 - 탈랄과의 대결에서 승리한다.
능력 - 사막 지형에서 능숙하게 이동할 수 있다.
《아이템 - 투카린》
조건 - 하메르 영주에게 검을 받는다.
효과 - 유니크 등급 아이템, 쿠가린(각인)을 얻는다.
《능력 - 낙타의 힘》
조건 - 성인식을 무사히 마친다.
능력 - 물이 없이도 탈수 없이 5일을 버틸 수 있다.
《능력 - 함정입니다!》
조건 - 탈랄 일행을 함정으로 잡는다.
효과 - 설치한 함정의 데미지가 10% 오른다.
《능력 - 부족의 용사》
조건 - 퍼펙트 클리어
능력 - 명성 5% 증가.
역시 중급 보상이라서 눈에 띌 정도로 좋은 보상은 보이지 않았다. 퍼펙트 클리어조차 다른 스탯이 아니라 명성이 오르는 것이라 좀 아쉬웠지만 성과 유닛을 가지고 있는 만큼 명성이 퍼센트로 오르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다.
“흠~ 그나마 이게 좋겠네.”
천유강이 선택한 것은 부족의 용사와 섬세한 조각사라는 보상이다. 무기가 아닌 맨몸으로 공격하는 무공을 사용하니 다른 스탯처럼 섬세한 동작이 도움이 될 거다.
천유강이 보상을 선택하자 세레나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번에도 균열의 다음 상황이 궁금하십니까?」
이제는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다음 이야기를 말하는 세레나자르다. 천유강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특히 더 궁금해.”
비록 타이브의 몸을 통해서였지만 아버지의 정을 느낄 수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두 부자가 과연 어긋난 관계를 극복했는지도 궁금했다.
「알겠습니다, 플레이어님.」
세레나자르가 공손히 인사하자 천유강의 의식이 다시 서서히 희미해졌다.
***
타이브가 정식으로 후계자가 된 지도 벌써 8년이 흘렀다. 8년이라는 시간은 삐쩍 마른 어린아이를 어엿한 사막의 전사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후계자님이시다!”
“타이브 님!”
어렸을 때 시장에서 자란 타이브는 아무런 격식 없이 마을에 나가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영지의 후계자가 직접 마을 이곳저곳을 순찰하니 크고 작은 부정부패들이 싹 사라졌고 불량배도 함부로 설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당연히 타이브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마을 내 뛰어난 전사이기도 한 타이브를 존경하지 않는 부족민은 없었다.
“별일 없지?”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이보다 더 평온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타이브 님! 이것 좀 잡숴보세요.”
“옆 마을에서 공수한 싱싱한 과일입니다. 이것도 드셔보세요.”
타이브가 나타나자 상인들이 앞 다투어 자신의 상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진상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뇌물이 아니었다. 다들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려 했다.
“와하하~ 나는 돼지가 아니야. 이렇게 많은 건 다 먹을 수 없다고.”
타이브가 한창 마을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뾰족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에~ 마샤 아냐?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영주가 양녀로 받아들인 마샤다. 예전의 병으로 죽을 뻔했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뭇 남성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미녀로 자라났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알고 아직도 이렇게 떠들고 있는 거야?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는 거 몰라?”
“에? 벌써 이렇게 되었나?”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벌써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핫핫!”
타이브는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가야 하는 약속은 바로 타이브의 혼례에 관한 것이다. 벌써 성안에는 바바가 점찍어 놓은 양가집 규슈들이 바글바글할 터였다.
“벌써 결혼하기는 싫은데······.”
“싫으면 확실하게 싫다고 하던가. 벌써 이번이 몇 번째야? 정말 애도 아니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구박해라. 네 잔소리 때문에 밤에 악몽까지 꾼다.”
“하이구~ 그게 자랑이라고. 빨리 마차에 타!”
마샤의 구박 때문에 무거움 발걸음을 옮겨 마차에 탔다. 그 모습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어?”
“난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단 말이야. 결혼하면 그런 생활도 못할 거 아냐?”
“오빠가 그러니까 바바와 아버님이 더 결혼시키려 하지.”
“휴우~ 난감하네.”
타이브와 마샤가 탄 화려한 마차가 달그락거리며 영주의 성으로 향했다. 이 마차는 타이브의 전용 마차로 거의 모든 것이 영주의 마차와 같았지만 딱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샤가 크게 한숨 쉬며 그것을 지적했다.
“이젠 용서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응? 뭐가?”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벌써 10년도 넘게 이 생활을 했으니 저 사람들도 반성했을 거 아냐?”
“그런가? 한 번 물어보지.”
말을 끝낸 타이브가 마차의 휘장을 열어젖혔는데, 그곳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말이나 낙타가 있어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타이브의 마차는 여러 말이 끌어야 할 만큼 크고 화려했고 그만큼 무거웠다. 그걸 인력으로 끌고 있으니 끄는 사람들이 죽을 맛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힘들어? 그만두고 싶어?”
당연히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지만 입으로 나온 말은 속마음과 정반대였다.
“아닙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남자들은 더 열심히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거봐. 아니라잖아.”
타이브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마샤가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거렸다.
타이브의 마차를 끌고 있는 것은 바로 예전 타이브를 못살게 괴롭혔던 무하마다 일당이었다. 그들의 뒤로 봐주던 무크린이 잔혹하게 처형된 다음에 타이브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기도 했다.
10년이 넘은 생활 동안 마차를 끌며 잠도 마구간에서 자니 예전의 그 위풍당당했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이 삐쩍 곯은 모습이었다. 혹시라도 마차를 못 끌게 되면 무크린처럼 사지를 조각내서 마물의 먹이로 준다고 하니까 죽을힘을 다해서 마차를 끄는 것이다.
“아직 애라니까.”
“네 약값만 안 뺏었어도 봐줄 수도 있었지.”
아직 무하마다 일당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주인공이 늦었지만 연회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마을의 모든 귀족 여식과 다른 마을에서 온 여자들까지 모이니 나중에는 누가 누군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여~ 타이브!”
타이브에게 아는 체를 하며 다가온 것은 알하리리였다. 원래는 가문에 수치 취급을 받던 그였지만 이제 졸지에 핫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되어 버린 후에 그의 입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 반면에 핫세는 자신의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성인식도 통과하지 못했으니 절대 자신이 영주가 되지 못함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듣기에는 술독에 빠져 산다고 했다.
핫세의 자식들이 무예가 뛰어나고 미남이었던 것은 핫세를 닮은 것이 아니라 그의 호위 무장들을 닮았기 때문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핫세와 가장 닮은 것은 알하리리였다. 단지 그것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알하리리와 타이브는 아버지들과 다르게 친하게 지냈는데 그건 정치 놀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알하리리가 지금처럼 항상 친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타이브와 그의 동생들까지 알하리리와 어울려 놀기도 했다.
“아~ 머리 아파.”
반복되는 여자들과의 인사에 질려버린 타이브가 나중에는 틈을 봐서 도망쳐 나왔다.
“휴우~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니까.”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에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타이브다. 자신이 생각해도 아직 애인 것 같은데 누군가와 결혼해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성의 뒤에 있는 뜰에 갔다. 사막의 마을이지만 오아시스에서 끌어온 물 때문에 이곳에는 푸른 식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타이브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 불청객이 있었다.
“······.”
“어머, 안녕하세요.”
그녀는 달빛을 반사하며 웃고 있었다. 눈이 부신 이유가 달빛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미소 때문인지도 가늠하기 힘든 순간이다.
“타이브 공자님이시죠? 저는 옆 마을에서 온 아르티라고 합니다.”
“에······, 타이브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왜 이런 곳에 오신 건가요?”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죄송해요, 주인이 있는 곳에 함부로 들어와서······.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서 저도 모르게 이끌려 왔나 봐요. 그럼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아르티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고 하자 타이브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아니! 그, 그게······.”
“네?”
“에······, 좀 더 있으셔도 됩니다. 저도 이야기할 사람이 있으면 좋죠.”
“어머~ 그래요?”
아르티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방긋 웃자 타이브의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달빛이 너무 밝아 자신의 얼굴색을 들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타이브는 아르티와 오랜 시간동안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다음 날
퍽!!!
“아구!”
날아오는 목검을 피하지 못한 타이브가 부풀어 오른 혹을 만지면서 주저앉았다.
“뭐 하는 거냐! 집중하지 못하겠느냐?!”
타이브와 대련을 하고 있던 영주가 타이브가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자 얼굴을 찌푸리며 고함을 쳤다. 아무리 후계자라고 해도 훈련에서 이렇게 멍청하게 굴면 안 된다.
하지만 하메르 영주의 호통에도 타이브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아버지.”
다른 때와 다른 아들의 모습에 하메르도 그제야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그래서 검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왜 그러느냐?”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었어요?”
“뭐?”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어제 연회에서 누군가를 만났음을 알 수 있었다. 짧게 코웃음을 친 영주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예전의 일을 추억했다.
“하~ 글쎄다. 첫인상부터 마음에 확 들어오는 여자는 아니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내 마음을 적셔오는 오아시스 같은 여자였지.”
영주의 말에 멍청히 고개를 끄덕인 타이브는 어젯밤 일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전······ 달의 여신을 만났어요.”
“큭! 뭐?!”
처음으로 보는 아들의 모습에 하메르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완전히 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이었다. 늘 여자에게 관심 없어 하던 타이브에게 생긴 놀라운 변화였다.
“흐음~ 그럼 이제 연회는 더 열 필요는 없겠구나.”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가 짝을 찾은 것은 영지의 축복이다. 타이브는 아직 어리고 건강하니 자신과 다르게 많은 후계자를 낳을 것이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전, 어머니만큼 좋은 사람하고 결혼할 거예요.”
그 소리에 다시 크게 웃은 하메르가 다 큰 아들의 어깨의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해봐라. 그런 사람 만나는 것이 쉬울 줄 아냐?”
***
똑똑똑
“지크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이곳의 디멘션 월드에 있는 데이브레이커의 본거지 성이다. 하루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마무리 작업을 하는 신지후의 방문을 지크가 두들겼다.
“무슨 일이야?”
“중요한 일 때문에 왔습니다.”
디멘션 월드에 접속하고 온종일 붙어 있던 지크다. 접속 시간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 중요한 일이 갑자기 생겼다고 하니 신지후도 의아하게 생각하며 관심을 보였다.
"유하연 씨가 저희 길드로 들어오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유하연? 그때 무작정 이곳으로 쳐들어왔던 그 아가씨?"
"그렇습니다. 유강 군과 같은 길드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던 그분입니다."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유강인 여자 복은 있는 것 같군. 짧은 인연만으로 우리 길드에 들어오겠다니······, 내 생각에는 큰아버지의 첩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지크의 생각은 어때?"
"결코, 첩자는 아닐 겁니다."
확신에 찬 말에 신지후는 일말의 의문이 들었지만 꼼꼼한 지크의 성격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상관없지만, 우리 길드에 넣을만한 실력이 있는 거야?”
데이브레이커 길드는 디멘션 월드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길드다. 당연히 가입 조건도 까다로운데 아무리 길드장인 신지후라도 단순한 인연으로 가입시키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지크가 긴급하게 말을 할 정도로 그녀가 대단한 고수인지가 궁금했다.
“하연 양이 우리 길드에 들어온다면 대단한 전력을 손에 넣게 될 것입니다.”
"지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끌어들이도록 해. 한 명의 고수가 절실하니 지크가 생각한 실력이라면 큰 도움이 될 터이지."
"알겠습니다. 그럼 전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지크가 문을 닫고 길드 건물의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거의 출입문에 도착했을 때, 지크가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나오시지요. 거기 계신 거 알고 있습니다."
"헤헷~ 감이 좋구나. 어떻게 알았어?"
유하연의 말에 지크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이제부터 정식으로 저의 길드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 잘됐네. 그럼 유강이와 계속 같이 다녀도 되는 거지?"
"그렇습니다. 최대한 같이 다닐 수 있도록 편성을 하겠습니다."
"고마워. 서비스가 좋은데?"
"대신에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해둘 것이 있습니다."
"뭔데?"
"유강 군을 따라 다니면서 유강 군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습니까?"
"웅~ 그러고 보니 나도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유하연의 눈이 순간 크게 떠지면서 매서운 눈동자를 들어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건가?"
쿠쿠쿠궁
순간적으로 발산되는 살기에 지크는 살갗이 베이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기가 질려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짙은 농도의 살기였지만 지크는 태연히 받아넘기며 말했다.
"어떻게 당신이 이곳에 있고, 왜 유강 군에게 관심을 가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 한 번 봤던 사람을 잊은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크는 살기를 가볍게 넘기며 이제까지 신지후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섬뜩한 표정을 지었다.
"괴물은 괴물을 알아보는 법이지요."
지크에게서도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살기가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쿠구궁!!!
유하연과 지크의 살기가 충돌하며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
"······."
그렇게 서로를 오랫동안 노려보다가 먼저 물러선 쪽은 유하연이었다.
"좋아. 지금 아쉬운 건 나니까."
유하연은 언제 무서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특유의 상큼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약속할게. 절대 해가 가는 일이 없을 거야.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간 거니까 믿어도 돼."
유하연의 말에 지크도 어느덧 원래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말하였다.
"그렇다면 저도 좋습니다. 일단은 유강 군은 며칠 동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여기에는 못 올 것입니다. 그전에 당신도 제 매뉴얼에 따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레이디"
지크가 허리 숙여 인사하자 유하연도 웃으며 따라 인사했다.
"그럼 부탁해요."
마치 그 전에 급박한 상황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둘은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