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의 역사 아래, 나라의 주인은 셀 수도 없이 많이 바뀌었지만, 왕도가 바뀐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왕도는 이 나라의 상징이자 수호신과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강대한 적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이 왕도만큼은 절대 침략당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멸망은 하루아침에 찾아왔다. 길쭉한 모양의 무언가가 하늘을 가르고 날아오더니 왕성의 중앙에 떨어졌다. 곧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오랜 시간 축적해온 장엄한 건축물들과 화려한 문화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다.
그 안에 사는 생명은 작은 개미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비명 지를 사이도 없이 잿더미로 변했기 때문이다.
역겨운 살이 타는 냄새가 풍겨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했지만 타버린 왕성을 지켜보던 한 사람은 유쾌하게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꼭 이 왕성을 불태우고 싶었지. 어때, 멋지지 않나?”
레르헨 공작은 옆에서 묵묵히 자신을 수행하던 기사, 베르다에게 물었지만 그는 고개만 숙였을 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불경이었지만 레르헨 공작은 그것을 책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수행하던 다른 병력의 얼굴 또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무고한 목숨이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공작에게는 그런 하찮은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와하하! 뭐가 그리 침울한 표정이야? 오늘로 역사는 새로 써지는 거야. 물론 내 이름으로. 오늘부터 나는 레르헨 국왕 1세다.”
자신의 영지 안에 있던 유적을 발견한 건 역시나 신의 한 수였다. 그것으로 눈엣가시 같았던 왕가를 모조리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다른 귀족들의 동향은 어때?”
그 말에 옆에 있던 연락 담당 마법사가 잽싸게 튀어와 입을 열었다.
“다들 자신의 영지에서 꼼짝도 하고 있지 않지만, 모두 공작님의, 아니 폐하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것입니다.”
“클클~ 그렇지.”
순식간에 왕성이 날아간 것을 확인했다. 자신의 성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 정문에 백기를 단 영지도 있다.
물론 유적은 이제는 작동하지 않아 다른 영지를 박살 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지만 그런 사정을 다른 영지가 알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수석 마법사 안리토스는 어떻게 되었지?”
공작의 물음에 베르다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안리토스의 상태를 살펴본 것이 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그 늙은 몸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쯧! 감히 나를 막은 어리석음의 대가이지. 회유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리토스는 왕가에 충성심이 대단한 자입니다. 살아있었더라도 회유는 힘들었을 겁니다.”
“모르는 소리.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본래 탐욕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야. 확실한 보상만 쥐여주면 옛 왕실 따위는 잊고 나를 따를 거야.”
레르헨 공작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하자 베르다도 침묵했다. 안리토스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마법사들은 공작의 말처럼 적당한 보상만 주면 금방 그를 섬길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미네르바 왕녀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왕족 중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음? 왕족이 남아 있어? 빠져나간 자가 있나?”
“빠져나간 것이 아닙니다. 미네르바라는 왕녀가 마법사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사로잡혔습니다.”
“아~ 기억나는군. 왕가의 핏줄에 마법사가 나와서 한참 떠들썩했었지.”
“어찌할까요?
베르다의 말에 턱을 잡고 곰곰이 생각하던 레르헨 공작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전 왕가의 씨앗은 언제나 불화만 가져오지만 여자라면 다르지. 아직 결혼도 안 한 미혼이니까 내 첩실 정도는 가능할 거야. 살아남은 왕족을 잘만 이용하면 아직 왕실에 충실한 가문을 끌어들이는 데 유용할 거야. 흐흐~”
자신이 생각해도 명석한 해답이었다는 듯이 레르헨 공작은 흡족하게 웃었고 그 옆에서 베르다가 고개 숙여 대답했다.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옛 왕도의 터에서 공작의 병력이 승리의 잔을 올렸다.
***
“신이시여. 우릴 구원하소서.”
모니카가 성호를 그으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지만 보이는 것은 주변을 까맣게 메꾼 악마들뿐이다.
하나, 하나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 중급 악마들, 여기 보이는 악마들만 해도 모두 잡으려면 신전의 기사단이 모두 투입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 숫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눈에 띄게 불어나고 있었다.
에디아의 계책에 속아 토스카를 헬 게이트로 만드는 일에 동참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이렇듯 절망적이었다.
“이런! 한발 늦었어.”
강력한 힘을 지닌 드리티니 신부도 이런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무리 베어도 헬게이트에서 악마가 끊임없이 나왔다.
“에디아! 무슨 짓을 벌이는 거요!”
드미트리가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지만 이미 붉은 눈을 한 에디아는 얇게 미소 지었다.
“인간의 멸종입니다, 드미트리 신부님.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유일한 일입니다.”
에디아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저 파괴적인 악마들은 자신을 도왔다고 에디아를 그냥 놔둘 리 없다. 아마 산채로 먹히거나 그보다 더 심한 짓을 당하다가 버려질 것이 뻔하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에디아는 두 팔을 벌려 그들을 환영했다.
“에디아! 미친 거요?! 제발 정신 차리시오.”
지금이라도 헬 게이트를 닫으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디아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에디아는 그런 드미트리의 외침에도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전 이미, 오래전부터 미쳐있었습니다. 오늘에서야 저는 안식을 얻게 되겠죠.”
말을 마친 에디아는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막 지상계로 나와 굶주려있는 악마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콰직!
악마들이 에디아의 사지를 잡더니 망설이지 않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산채로 뜯어먹고 있는 거다.
“케에에엑!!”
오랜만에 인간의 야들야들한 고기 맛을 본 악마들이 흥분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악마에게 인간은 지저 세계의 마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미를 지닌 고기다.
그런 고기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아아악! 살려줘!”
악마들이 집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애, 어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먹어치우는 악마들 탓에 인간은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악마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안 돼!”
모니카는 그것을 막아보려 했지만 성서에 의지해 자신의 몸만 간신히 지키는 것이 전부였다. 성서의 성력이 중급 악마의 접근을 막아내고 있으나 그것도 시간문제다. 헬 게이트가 완성되어 고위 악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저들과 같은 운명이 될 거다.
“이익!”
드미트리 신부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성력을 쏟아내고 있지만 쓰러지는 악마의 수보다 충원되는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아무리 드미트리라고 해도 결국 힘이 바닥나면 쓰러지고 말 거다.
“제발 저에게 힘을 주세요.”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건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 사악한 악마의 음성이었다.
“애쓰고 있군.”
“피케르!!”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피케르였다. 토스카를 완전히 헬 게이트로 만든 그가 유유히 이곳까지 나타난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인간의 멸망은 예견되어 있던 일이다. 단지, 그 시기가 조금 당겨진 것뿐이지.”
피케르는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냐. 곧, 이 대지는 우리 악마들의 놀이동산이 될 거야.”
불행히도 피케르는 인간들을 그냥 집어삼킬 생각이 아니었다. 악마의 노리개가 된 후에 더 비참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그럼 나는 바빠서 너희와 놀아줄 시간이 없군. 선약이 밀렸거든, 하하하하!!!”
피케르는 복장을 점검하고 유유히 걸어갔다. 정말로 산책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모니카와 드미트리는 달랐다.
“안 돼!!”
둘의 절박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둘을 포위하는 악마들을 수는 점점 많아졌다. 아무리 성력이 충만한 둘이라도 물밀 듯이 밀려오는 악마를 막을 수 없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이 주인 없는 성서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
이곳은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속이었다. 날아가는 새도 험해서 머물지 못한다는 이곳에 뜻밖에 커다란 건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로 정부에서 세운 비밀 공장이다. 오늘은 다른 나라가 모르게 세워서 비밀리에 개발한 무기가 첫 건을 보이는 날이다.
“어떻게 되고 있지?”
예전 부통령에서 이제는 대통령이 된 트럼펫이 역시 부국장에서 국장이 된 칼에게 물었다. 칼은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들이 개발한 것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미 프로토타입의 개발은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늦어도 반년 후면 양산할 수 있을 겁니다.”
“성능은?”
“저기 작은 총 보이십니까?”
칼이 가리킨 것은 마치 장난감 총처럼 보이는 손바닥 크기의 작은 총이었다. 그 모습을 본 트럼펫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저것도 무기라고?”
“보이는 것은 볼품없어 보이지만 저것이면 탱크도 단숨에 고철로 만들 수 있습니다. 명중률도 지금 나와 있는 최신 총보다 훨씬 뛰어나고요.”
“호오~ 저것도 그 정도라면 저것들은?”
트럼펫이 가리킨 것은 크기가 훨씬 더 큰 소총이었다. 크기는 일반적인 소총과 같았지만 역시 디자인이 특이하게 생겼다. 우선 앞에 총구가 없이 막혀 있었다.
“저것이면 아무리 두꺼운 벙커라도 단숨에 뚫을 수 있습니다. 무려 2km 밖에서도 90% 이상의 명중률을 자랑합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설명을 듣고서 트럼펫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일개 총도 이 정도인데 개발되고 있는 전투 로봇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개발되고 있는 전투 로봇 한기만 떠도 적국의 공중 병력을 모두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바다는 어떤가?”
“수륙양용입니다.”
“호오~ 대단하군.”
옆방에는 신식 무기 사용법을 익히고 있는 군대가 있었다. 모두 대통령 직속 부대다. 저들만으로도 이미 한 나라를 점령하기 충분한 무력이 있었다.
하지만 트럼펫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나는 세계를 얻을 거야. 지금이 유사 이래, 떨어져 있던 세계가 하나로 통합할 좋은 기회지.”
“물론입니다, 대통령 각하.”
“이번 일에는 자네의 공이 컸어. 원하는 나라를 말해보게. 원한다면 한 나라를 다스릴 권한을 주겠네.”
트럼펫의 말에 칼이 허리를 90도로 굽혀서 크게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각하. 성심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허허~ 2년 뒤에 거사를 일으킬 거야.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마쳐주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트럼펫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구석에 볼품없어 보이는 로봇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로봇과는 달리 여기저기 망가지고 그을음까지 묻어 있었다.
“저것 뭐지?”
“저것이 플루토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무기는 저기에 들어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저게 플루토라고?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건가?”
“아쉽게도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간신히 자료만 빼낸 상태입니다.”
“흠, 그렇군. 그런데 내 공장에 저것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군. 흉물스러우니 쓸모 없으면 폐기처분하게.”
“알겠습니다, 대통령 각하.”
***
「이상입니다.」
이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원과 차원의 경계에 세워진 장소였다. 아무런 법칙도 없고 생명이 존재할 수도 없는 공간에 한 노인이 한가롭게 둥둥 떠 있었다.
“이것들이 결정적인 사건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마스터. 여기 있는 사건이 시발점이 되어서 작게는 대륙이, 크게는 차원 전체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수고했어.”
주변에 홀로그램처럼 떠 있는 것은 못해도 수천억 개가 넘었다. 이것들이 모두 세계 멸망의 불씨였다. 차원과 시공간을 넘어 모으고 모은 상황들이다.
「멸망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는 분기를 퍼펙트 클리어라고 칭하겠습니다.」
“나머지는 그들에게 맡겨야겠군. 퍼펙트 클리어가 되지 않으면?”
「상황이 저장되지 않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균열을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좋아. 나머지 준비는 모두 끝났나?”
「몇 가지 돌발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지?”
「뛰어난 힘을 지닌 개체들이 속박을 풀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에 노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처음으로 보이는 감정 표현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움직일 정도는 아닐 텐데?”
「그 때문에 대리자를 구한 것 같습니다, 마스터. 어떻게 할까요? 강제로 억압할까요?」
“아니, 그럴 이유는 없지. 그들의 움직임도 계획의 일부분이야.”
「알겠습니다, 마스터.」
“좋아. 그러면 시작하게, 세레나자드.”
「알겠습니다.」
세레나자드가 말하자 목소리가 시공을 뚫고 모든 차원에 울려 퍼졌다.
「이제부터 베타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