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밀 듯이 밀려오는 기억의 홍수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순간이지만 자신이 천유강인지 아니면 아스인지도 헷갈릴 지경이다.
“후~”
깊은 한숨과 함께 혼란을 뱉은 후, 상황 파악에 나섰다.
“상태창 소환.”
디멘션 게임이라면 기본적인 명령어이다. 그것이 이곳에서도 통할지 알아보기 위해서 상태창을 소환했다. 그리고······.
레벨 : 50
칭호 : 초보 사냥꾼
종족 : 인간
직업 : 사냥꾼
직업 레벨 : Master
마스터 직업 수 : 1
소유 엠블럼 수 : 0
체력 5000/5000
마나 1000/1000
기력 1500/1500
체력 : 50
지혜 : 20
인내 : 30
힘 : 40
민첩 : 75
지능 : 10
매력 : 10
정신 : 15
운 : 0
명성 : 0
거짓말처럼 상태창이 나타났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게임 안이네.”
아스의 기억은 있지만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퀘스트 창이라도 떠서 목적을 알려주면 편할 텐데, 그런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선 목표를 찾아야 해.”
한 단계 내려갔지만 최상급 난이도의 균열이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불이익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선 밖으로 나가서 단서를 모으기로 했다.
밖에는 여전히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사방을 수색하고 있었다. 여기서 고개를 숙이면 더 이상하게 보인다. 병사들이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을 선에서 얼굴을 보여주었다.
천천히 걸어 다니다 보니 조금이지만 단서를 모을 수 있었다.
우선 병사들이 찾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 증거로 병사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살펴보고 집 안의 물건도 사람이 숨을 만한 곳만 뒤지고 작은 상자 같은 곳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두 번째는 그들이 찾는 것은 성인 남성이다. 여성과 아이들은 검색하지 않고 남자들만 검문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들이 찾는 사람은 매우 위험한 인물이다. 그들은 항상 셋 이상 뭉쳐 다녔으며 수상한 자가 있으면 한 명은 멀찍이 물러서 여차하며 신호탄을 발사할 준비를 했다.
‘위험한 현상수배범이 도망친 건가?’
그러기에는 병력 구성이 어마어마했다. 마을 사람보다 많은 수의 병사가 동원된 일이다. 그것도 후작의 병력이다. 후작 정도 되는 사람이 병사를 쓸데없이 움직일 리 없다.
천유강의 수색이 길어지고 그런 움직임을 병사들이 슬슬 의식하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지나친 어느 곳에서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건!’
그건 아스의 기억 속에 있는 표식이었다.
‘저건 테드의 것인데?’
희미했지만 분명 테드와 아스의 비밀 문양이었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그들만의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던 둘이서 장난삼아 만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저 표식을 알 리가 없다.
하지만 테드는 멀리 수도에 있어야 한다. 이곳에 나타나 그것도 은밀하게 표식을 만들었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설마, 이들이 찾는 게 테드인가?’
만약 그들이 찾는 사람이 테드라면 병사들의 조심스러운 행동이 이해가 갔다. 테드는 궁중 마법사가 인정한 마법의 천재다.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그의 마법이면 이런 병사를 날려버리는 건 누워서 떡 먹기일 거다.
흔들리는 눈망울을 감추고 천유강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병사들이 천유강이 집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했을 때 다시 비밀 구멍으로 병사의 눈을 피해 몰래 빠져나갔다.
‘어릴 때 만든 개구멍이 이렇게 쓰이네.’
아직 천유강은 기억이 혼동된 상태다. 지금은 오히려 아스의 기억이 더 우세했고 천유강은 그것을 억지로 막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그의 기억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감성도 천유강이 아니고 아스의 것을 따른다는 것이다. 평소 무심한 천유강이라면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뛸 리가 없다. 천유강은 절정의 무술을 익힌 감성적인 아스가 되었다.
스윽
몰래 빠져나와 향한 곳은 어렸을 때 아지트로 지정한 어느 동굴이었다. 작고 아늑한 이 동굴은 곰이 버린 동굴이라서 사람이 숨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그곳에서 테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헤헤~ 왔구나.”
“테드!”
반가운 얼굴이지만 테드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사실을 최악이었다. 손으로 감싼 옆구리에서는 아직도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고 얼굴색은 백지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기다려봐. 내가 상처약을 가져올게.”
당황한 천유강은 급히 몸을 돌리려 했으나 테드의 손이 그것을 막았다.
“아니야. 이미 나는 늦었어.”
“하지만······!”
“출혈이 문제가 아니야. 나는 독에 중독된 상태야. 이미 내장이 모두 녹았을 거야.”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테드는 살아날 방도가 없다. 그건 지금 당장 손에 상처약이 있어도 다르지 않을 거다.
“부탁이··· 있어.”
테드는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로 말을 힘들게 이어나갔다. 지금 테드는 말하는 것도 지옥을 걷는 것 같은 고통일 거다. 그런 고통을 견디며 하는 친구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
“······말 해.”
“이것을··· 황실로······, 황실로 가져가야 해.”
테드의 손에 있는 건 그의 피로 얼룩진 어떤 구슬 모양의 것이었다. 이 작은 물건을 주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 것이다.
“미안······, 이곳···밖엔······, 너 밖에는 생각나지 않았어.”
“테드! 테드!”
그의 눈에 생기가 급속하게 꺼져갔다. 이제 불과 몇 초 후면 그가 죽을 것이다. 잠시 후면 이들의 짧은 만남도 이렇게 끝날 거다.
그때 테드가 마지막 힘을 내서 천유강의 팔을 덥석 잡았다.
“내··· 마지막 힘을······.”
갑자기 천유강의 가슴에 빛이 생기더니 기이한 문양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양이 완성되었을 때 테드가 팔을 떨어트렸다.
“테드!”
촉망받던 왕국의 인재가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엠블럼 획득》
테드의 힘
(랭크 S)
조건 : 테드의 힘을 물려받은 자.
능력 : 지혜 +100
지능 +100
테드의 마법 사용 가능
???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지며 마법 수식들이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그 고통이 끝났을 때, 자신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테드······.”
그의 모든 것이 담긴 힘이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다.
추모도 잠시, 천유강은 테드가 목숨 걸고 건넨 물건을 집었다.
(???)
아무런 표시도 없고 물음표만 적힌 물건이다. 용도를 알 수 없지만, 테드가 목숨 걸고 건네주었고 병사들이 저렇게 기를 쓰며 찾는 물건이니 범상한 물건은 아닐 거다.
그걸 주머니에 넣고 테드의 시신을 보았다.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곧 이곳이 발각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이 마을은 테드가 갈 곳이라고 생각한 후보지 중 하나일 거다. 이곳에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병사들이 저렇게 소극적으로 움직일 리 없다. 못해도 모든 주민들을 잡아다가 고문이라도 했을 거다.
아예 못 찾으면 모르지만, 시체는 있는데 구슬이 없다는 것이 알려지면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거다. 시체를 숨겨야 한다.
“미안하다.”
사냥꾼의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아니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곳에다가 테드의 시체를 숨겼다. 묻을 시간이 없어서 테드의 시체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짐승이 올 수 없는 곳이지만 벌레가 징그럽게 꼬일 거다.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시간을 허비하다가 일을 망치는 건 테드가 바라는 일이 아닐 거다.
테드의 시체를 처리한 천유강은 다시 조심스럽게 산속에 있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여기서 왕도는 너무 멀리 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테드가 준 금화가 필요하다.
찰랑거리는 금화 주머니를 들고 조심스럽게 마을을 빠져나왔다. 자신은 사냥꾼이니 집에 머물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다. 또 산에서 짐승들을 사냥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할 거다. 그게 길어지면 병사들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가 될 거다.
천유강은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말을 구하기 위해서다. 몇 시간이나 걸려서 다른 마을로 들어선 순간,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도 병력들이 잔뜩 있었다. 이번에는 달튼 백작의 병력이었다.
‘곤란한데?’
자기는 궁핍한 사냥꾼이다. 값비싼 말을 사면 분명 의심받을 거다.
그때 천유강을 의심스럽게 본 누군가가 다가왔다.
“넌 뭐냐!”
그건 말을 타고 있는 달튼 백작 본인이었다. 놀랍게도 백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마을로 와 테드를 찾고 있는 거다. 새삼, 이 일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못 보던 얼굴인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백작의 말에 주변에 있는 병사까지 몰려들었다.
“아, 아스라고 합니다. 옆 마을에서 사는 사냥꾼입니다.”
천유강은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여기서 들키면 끝장이다.
“사냥꾼? 옆 마을에 사냥꾼이 이곳에 무슨 볼일이냐?”
백작은 천유강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들고 있는 종이를 펼쳐서 얼굴을 대조했다. 그 그림 속에는 테드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천유강의 얼굴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신경질적으로 그림을 접었다.
“화, 활이 부서져서 새로 사러 왔습니다.”
“그래?”
백작은 얼굴을 찡그리다가 이내 관심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이런 사냥꾼 나부랭이를 잡으려고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기웃거리지 말고 볼일을 끝내고 빨리 꺼져라.”
“네, 알겠습니다.”
백작의 마음이 바뀌지 전에 천유강은 뛰어서 상점가로 향했다. 만일 백작이 몸수색이라도 하면 큰일이다.
무사히 상점가로 왔지만 여기도 병사들이 쫙 깔렸다. 이런 상황에서 말을 살 수는 없다.
“그냥 걸어가야 하나?”
아무 이동수단 없이 가면 족히 한 달은 넘게 가야 할 거다. 말을 이용하면 일주일로 줄일 수 있다.
그때 천유강의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다.
“빨리 실어!”
그건 소규모로 짐을 꾸리고 있는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파는데, 마차로 이동하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했다.
그걸 본 천유강은 그들에게 향했다.
“저, 저기.”
“응? 꼬마야, 여긴 네가 장난칠 곳이 아니다. 놀 거라면 나가서 놀아라.”
허름해 보이는 천유강이다. 그런 그를 반길 곳은 어느 곳에도 없다. 특히 값비싼 물건을 실어 나르는 상인들이면 더 그렇다. 이곳이 사람이 많은 마을이 아니었으면 경을 쳤을 거다.
하지만 천유강은 포기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요?”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짐을 나르는 상인은 인상을 팍 쓰며 짜증을 냈다. 힘들어 죽겠는데 웬 놈이 말을 붙이니 좋아할 리 없었다.
“혹시 왕도에 가지 않나요?”
“응?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운 좋게도 이들의 목적지는 왕도가 맞았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뭐?”
그 상인은 천유강을 몰골을 보고는 핏 하고 웃었다.
“가출이라도 한 게냐? 우리는 너 같은 비실이는 필요 없다.”
사냥으로 단련된 몸이지만 체구는 그리 크지 않기에 상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체구가 컸어도 처음 보는 천유강을 받아들일 리는 없을 거다.
그래서 천유강이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다. 그의 가까이 가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사실 저는 마법사예요.”
“뭐?”
그 말에 상인은 깜짝 놀랐다. 마법사면 웬만한 귀족보다도 우대받는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웃기지 마. 누가 그 말을 믿을 줄 알아?”
마법사는 왕실에서 나오는 지원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어 천유강처럼 다 떨어져 가는 옷을 입을 리가 없다. 당연히 남자는 천유강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천유강이 마법을 쓰기 전까지.
“아이스.”
천유강이 주문을 외우자 작은 얼음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위력은 없어 보이지만 마법은 마법이다.
그것을 본 상인이 뒤로 넘어갈 뻔했다.
“어······, 마법사가 무슨 볼일이신가요?”
이제 형세는 역전되었다. 천유강이 마법사인 걸 안 이상 잘못 보이면 큰일이 날 수 있다. 특히 일반 사람들은 마법사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소나 돼지로 만든다고 믿는다.
“쉿! 조용하세요. 저는 지금 스승님의 명에 따라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요.”
“어······, 네.”
상인의 안색은 파래지더니 주변을 곁눈질했다.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누가 봐도 어색한 연기다.
이러다가는 진짜 큰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한 천유강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왕도로 가야 해요. 저 좀 태워주실 수 있나요? 대가는 충분히 드릴게요.”
“아이구! 대가는 무슨 대가입니까? 마법사님이 같이 가주신다면 우리가 더 좋죠.”
마법사가 함께 있으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같다. 최소한 도적 떼들은 걱정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마법사가 함께한다면 좋은 건 오히려 상인들이다.
“잘됐네요. 대신 제가 마법사인 건 누구한테도 들키면 안 돼요. 아시겠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일을 빠르게 진행되었다. 원래라면 한숨 돌리고 출발할 생각이었던 상인들이었지만, 천유강의 재촉에 짐을 실자마자 바로 출발해야 했다.
“출발!”
걱정했지만 병사들이 나가는 상인들의 짐을 뒤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무사히 마을을 빠져나가 왕도로 향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다음 마을에서 말을 사서 혼자 가려고 했지만, 처음 가는 왕도니 혼자 가는 것보다 길을 잘 아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그건 올바른 판단이었다.
“정지!”
왕도로 가는 좁은 길목에서 병사들이 빽빽이 둘러싸고 길을 막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지나갈 수 없다.”
“네? 그게 무슨······.”
상인들이 항변하자 병사는 날카로운 검을 뽑아서 상인을 위협했다.
“이곳에는 아무도 지나갈 수 없어.”
천유강은 직감적으로 저것이 자신이 지닌 구슬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가 이 구슬이 왕도로 가는 것을 막으려 한다. 그것도 높은 직책을 가진 귀족이 여럿이 연루된 일이다.
‘저길 통과해야 해.’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