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각, 탈이 자배기로 난 것은 향원각뿐만이 아니었다.
“주모오, 여기, 여기! 막걸리 한 사발 더 주오옹!”
석가이가 몸을 건들거리며 빈 술병을 흔들어댔다.
“너무 취했다. 이제 그만 마시거라.”
월이 술병을 빼앗으려 하자 석가이가 팽 성질을 냈다.
“하나도 안 취했거든요? 저 진짜 말짱해요. 이리 잘생긴 악공과 함께 마시니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가 않는구만.”
석가이가 벌쭉거리며 소쌍에게 연신 몸을 치댔다.
“악공, 악고오오옹, 제가 악공이 그리워 눈물로 지샌 밤이, 딸꾹, 얼마나 많은지, 악공께선, 딸꾹, 모르실 거예요옹.”
눈물로 지새긴.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아대며 잘만 자더구만. 월이 절레절레 도리질을 쳤다.
“제가 악공을 그리워하며 시 한 수 지어보았사와요오. 들어주시와요오.”
시라니, 석가이가 시라니. 사랑이란 진정 놀라운 힘을 가진 모양이었다. 시라면 진절머리를 치는 석가이가 시를 지었다지 않은가.
월이 차마 그 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가이는 술병을 두 손으로 소중히 쥐고 손수 지었다는 시를 꼬부라진 혀로 읊어대기 시작했다.
“오늘 밤 매일 밤, 자꾸만 그대 생각나는 이 밤. 오늘 밤 매일 밤, 자꾸 찌릿찌릿해지는 이 밤. 자꾸만 그대 생각나, 그대의 달콤한 향기.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그대에게 빠져 버렸네. 아아, 차갑게 말하신대도 이 마음, 멈출 길이 없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시인데? 당나라 명기 방과후가 지은 시 ‘이 밤’이 아닌가. 춘덕이와 춘복이한테 일러주었던 건데 어느 틈에 이걸 외우고 있었던 겐가?
사이사이 딸꾹질을 후렴구처럼 넣어가며, 남의 시를 자기 시처럼 읊은 석가이는 기어이 이마를 탁자에 뚝 떨어뜨렸다.
“정신 차려, 얼른 일어나. 눈 뜨라고 눈!”
월이 사정없이 흔들었지만 석가이는 꿈쩍도 않았다. 칠 년 만에 술을 마셨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진작에 말렸어야 했는데 낭패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종학까지 업고 갈 수도 없었다. 설사 업고 갈 수 있다 해도 이리 취한 상태로 데려갔다간 몰래 외출을 나온 것이 들통 나게 된다.
아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월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푹 꺾었다. 그런 월을 보던 소쌍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술이 깰 때까지 잠시 봉놋방에 눕혀두면 어떨지요. 한숨 푹 자고나면 취기도 한결 가라앉을 것입니다.”
소쌍의 말에 월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거 말고 별 다른 수가 없었다. 부디 취기가 빨리 가시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소쌍이 석가이를 업어 방 아랫목에다 눕혔다. 혼자 떠들어대던 석가이가 뻗고 나니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저기…….”
“저기…….”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서로 먼저 하라고 몇 번 실랑이를 하다가 소쌍이 입을 열었다.
“꽃을 보러 가시겠는지요. 술이 깰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니……. 가까운 곳에 꽃구경하기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월이 망설였다. 원래는 소쌍에게 먼저 가라고 할 참이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괜히 함께 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띌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꽃구경, 이라는 말에 월의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소쌍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 목숨을 살려주셨는데 이 정도가 어찌 민폐라 하겠습니까. 가시지요.”
월이 쓰개치마를 단단히 고쳐 쓰고 소쌍을 따라 나섰다.
* * *
“그것이 사실인가?”
중전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박 상궁을 보았다.
“어느 안전이라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중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어리고 철이 없기로서니 어찌 그런 말을,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박 상궁 자네, 이 일을 전하께 아뢰었는가?”
중전은 세자와 빈궁에 관한 일은 왕보다 자신에게 먼저 이르도록 따로 부탁했었다. 왕의 어명을 받드는 대령상궁이지만 중전의 덕과 현명함에 감복하여 마음 깊이 중전을 공경하고 따르고 있는 박 상궁이었다.
“아직 아뢰지 않았사옵니다.”
“이 일은 고하지 마시게.”
“예?”
박 상궁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건 세자와 빈궁에 관한 일을 먼저 보고해달라는 부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보고 순서를 앞세우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아예 보고를 하지 말라는 것은 왕의 어명을 거스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자빈의 몸이 좋지 않아 당분간 열녀전 공부를 쉬게 해 달라 청할 것이네.”
“소인을 불러 하문하실 텐데요.”
“내 말대로 대답해주게.”
“거짓을 고하란 말씀이시옵니까?”
“그리 해주게.”
박 상궁이 차마 대답을 못 하고 이마를 바닥에 가져다 댔다. 박 상궁의 곤란함을 잘 알면서도 중전이 거듭 청했다.
“내 자네의 충직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허나 이 일이 전하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정말 평지풍파가 일고 말 것이야.”
“허나 훗날에라도 탈이 생긴다면…….”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은 모두 내가 책임질 것이야. 그러니 그대는 아무 말 말고 내 말대로 해주게.”
박 상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이 이리 하시는 이유가 있으시겠지. 박 상궁은 더 묻지 않고 물러났다.
“이 아이를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혼자 남은 중전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드리워졌다.
* * *
삼짇날이라 화류놀이를 나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성큼성큼 사람들을 제치고 나아가는 소쌍과 달리, 월은 자꾸만 뒤처졌다. 그런 월을 보던 소쌍이 등에 멘 장검을 풀르더니 자루 쪽을 월에게 내밀었다. 월이 의아한 눈빛으로 보자, 소쌍이 씨익 웃었다.
“아씨를 잃어버리면 아니 되지 않습니까? 제가 길을 터드릴 테니 자루만 단단히 쥐고 따라오십시오.”
월과 소쌍이 검의 양 끝을 쥐고 앞뒤로 나아갔다. 과연 검을 잡고 쫓아가니 한결 수월했다. 소쌍은 월의 보폭에 맞추어 속도를 늦추고, 틈틈이 월이 잘 따라오는지 돌아보았다.
삼짇날이면 젊은이는 젊은이들끼리, 노인은 노인들끼리, 부인은 부인들끼리 무리를 지어 꽃놀이에 나섰다. 조금 떨어져 남인 듯, 동행인 듯 걷는 월과 소쌍은 무리 중에서도 눈에 띄었다.
더 큰 문제는 두 사람의 외모였다. 소쌍을 본 여인네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쓰개치마로 얼굴을 덮어쓰다시피 했지만 언뜻언뜻 비치는 월의 미색은 사내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저건 빈궁 마노라가 아니신가?”
형제들과 꽃놀이를 나온 유가 말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뒤따라오던 임영대군 구가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아는 이라도 만나셨습니까?”
“아, 아니다. 잘못 본 듯하구나.”
구가 싱겁다는 듯 웃었다. 태연한 척 지나치던 유가 잠시 후 수하인 홍도를 불러 귓속말을 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던 소쌍이 모롱이를 돌아 소로로 접어들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길인 줄도 모르고 지나칠 만큼 작은 길이었다.
소로로 들어서자 간간이 보이던 꽃놀이 무리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길이다 보니 바닥이 험했다. 자루를 쥐고서도 월이 자꾸만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오랜만에 산을 오르다 보니 숨도 턱턱 막혔다.
“잡으시지요.”
소쌍이 제 팔을 내밀었다.
“되었다.”
월이 몸을 외로 틀고 거절했다.
“길이 험합니다.”
“되었대도 그러네.”
“저는 아씨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겠습니다. 제 팔을 칼자루라 생각하고 쥐십시오. 이 길을 지날 때까지만입니다.”
소쌍이 내민 팔과 눈을 번갈아 보던 월이 남은 길을 가늠해보고는 마지못해 소쌍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소쌍은 월이 마음 쓰이지 않도록 팔을 몸에서 최대한 떨어뜨렸다.
“헌데 돌은 어찌 모두어 두시는 것입니까?”
소로에 접어들면서 월은 간간이 돌을 한쪽으로 모두어 두고 있었다. 월이 수줍게 웃었다.
“낯선 길을 걸을 때 버릇이다.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이지. 이리 해두면 나중에 돌아 나올 때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느니라.”
“호오, 정말 좋은 방법인 듯합니다.”
소로를 지나니 선분홍 꽃무더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나라 선녀들이 분홍빛 날개옷을 펼쳐놓은 듯 진달래꽃과 산철쭉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린 시절 해마다 꽃구경을 다니면서도 보지 못했던 절경이었다. 월이 홀린 듯 꽃무더기 속으로 들어섰다. 그리도 그리워하던 봄꽃이 눈앞에 가득했다. 사이사이 동그란 잎을 단정하게 두른 노루귀꽃과 보랏빛 꽃잎을 청초하게 늘어뜨린 각시붓꽃도 섞여 있었다.
월은 꽃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연신 꽃잎을 쓸어보고 향기를 맡았다. 쓰개치마는 진작에 던져버렸다. 꽃과 꽃 사이를 오가던 월이 떨어진 진달래꽃을 제 귓등에 꽂았다. 소쌍은 월의 쓰개치마를 주워들고 저만치 떨어져 서 있었다. 월이 편히 꽃구경을 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였다.
그런데 소쌍의 시선이 자꾸만 월 쪽으로 향했다. 꽃을 보려 했지만 꽃보다 더 아름답고, 하늘을 보려 했지만 하늘보다 더 청아한 탓이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자꾸 입이 벌어졌다.
“여기 와서 이것 좀 보거라.”
월이 갑자기 돌아보는 통에 소쌍이 흠칫 놀라 딴전을 피웠다.
“이리로 와보래도.”
발개진 얼굴을 숙이고 다가가니 청보라빛 꽃을 앞에 두고 있었다.
“얼레지꽃이다. 높은 산에만 피는 줄 알았는데 이런 동산에도 다 피는구나.”
“그래서 잘 자라지 못한 모양입니다. 꽃들이 하나같이 모가지를 떨구고 있네요.”
월이 웃었다.
“원래 이리 생긴 꽃이다.”
“꽃잎이 뒤로 말려 피는 꽃도 다 있습니까?”
“꼭 치맛자락 휘날리며 땅으로 내려오는 선녀 같지 않으냐?”
그리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치만 선녀가 무엇 하러 인간의 땅에 내려오겠습니까? 하늘세상에선 부족한 것 하나 없을 텐데.”
소쌍이 짓궂게 어깃장을 놓았다.
“하늘세상이 부족한 게 없다는 것도 땅에 사는 사람들 보기에나 그런 게지. 아무리 멋지고 화려하다 해도 마음이 족하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목소리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소쌍은 모르는 척 말머리를 돌렸다.
“아씨께선 꽃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신 듯합니다.”
“이래봬도 어린 시절 날다람쥐처럼 산을 타며 놀았느니라.”
“양갓집 규수께서 산을 타고 노셨단 말입니까?”
“우리 양친께선 여자는 꽃처럼 얌전히 있어야 한다 여기는, 꽉 막힌 분이 아니셨거든. 무인이었던 아비를 따라 여기저기 구경도 많이 다녔느니라. 지금은 그럴 수 없다만…….”
소쌍의 시선이 월의 쪽진 머리를 향했다. 순간 가슴팍에서 날카로운 동통이 느껴졌다. 소쌍이 통증을 눙치려는 듯 서둘러 말했다.
“좋으신 부모님을 두셨습니다.”
그 말을 하는데 이번에는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크고 무거운 통증이 가슴팍을 덮쳤다. 부모님을 떠올린 탓이었다.
“헌데 너는 이런 곳을 어찌 아느냐?”
“이런 곳을 어찌, 아는가 하면……,”
개성에서 천향을 만나기 전까지 소쌍은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부모가 그리울 때면 아무 산이나 올라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어느 자락에선가 볼 수 있기를, 터무니없는 바람을 가지고 미친 듯이 산을 오르고 내렸다.
그럴 때는 반쯤 정신 나간 상태가 되는지 넘어지고 구르면서도 아픈 줄을 몰랐다. 짚신이 달아난 발에선 피가 나고 진물이 흘렀다. 달이 떠오르면 주저앉아 길게 울음을 울었다. 달이 이울 때까지 목이 쉬도록 울부짖고 나면 한동안은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이 동산도 그리 헤매다 알게 된 곳이었다. 꼭 이 무렵이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 곳, 보아주는 이 하나 없는데도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무더기를 보는데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다. 온통 붉은 것들 사이에 둘러싸여 꽃보다 붉은 울음을 한참동안이나 쏟아냈었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소쌍이 잠겨든 목소리를 숨기려 헛기침을 했다.
“헌데 너는 무엇이냐?”
월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소쌍이 눈썹을 올렸다.
“거문고를 타는 악공이냐, 검을 쓰는 왈짜냐? 아니면 종일 낯선 여인에게 붙들려 꽃구경을 하고 있는 팔자 좋은 한량이냐?”
그제야 소쌍이 표정을 풀었다.
“거문고는 탈 줄을 모르고, 검은 쥐는 법만 겨우 알 뿐 왈짜 노릇을 할 실력은 못 됩니다. 팔자가 기구하여 한량도 되지 못하나 낯선 여인에게 붙들려 꽃구경을 나온 것은 맞습니다.”
“낯선 여인 탓에 니가 고생이 많다.”
“그 낯선 여인께서 제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어찌 고생이라 하겠습니까?”
월과 소쌍이 말없이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때, 소쌍의 손이 갑자기 월의 눈을 덮었다.
“왜, 왜 이러는 게냐?”
월이 소쌍의 팔을 밀어냈다. 하지만 소쌍의 팔은 꿈쩍도 않았다.
“잠시만, 잠시만 계십시오.”
흰 나비였다. 삼짇날 흰 나비를 보면 상복을 입게 된다는 말이 있었다. 민간의 속설 따위 담아두는 소쌍이 아니었음에도 저도 모르게 절로 손이 나갔다. 소쌍은 흰 나비가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손을 뗐다.
“무얼 한 게냐?”
월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쌍을 쏘아보았다. 소쌍은 사실대로 말할까 하다 마음을 바꾸었다. 청수에 건져낸 듯 맑고 단려한 이였다.
그 선연한 눈과 귀에 차마 불길한 것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좋은 것만, 아름답고 귀한 것만 듣고 보게 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생을 다해서라도 그리 해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속에 떠오른 문장에 당혹감이 일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하여 이런 마음이 드는지, 그저 몇 번 보았을 뿐인 여인인데 어찌하여 자꾸만 가슴 한켠이 아리고 애틋해지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진 소쌍은 자기도 모르게 월의 눈을 가린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거짓 핑계를 대었다.
“심심하여 장난을 쳐본 것입니다.”
“네가 나를 우습게 보는 게냐!”
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소쌍이 한쪽 눈썹을 실그러뜨리며 웃었다. 미안함이 가득 담긴 미소였지만 화가 난 월의 눈엔 그것이 읽히지 않았다.
“이제 보니 아주 저속한 자로구나!”
월이 발딱 일어나 소쌍에게서 쓰개치마를 확 낚아챘다.
“먼저 내려가겠다. 네 얼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 너는 한 식경이 지난 후에 내려오도록 하거라!”
월은 소쌍이 뭐라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찬바람을 내며 돌아섰다.
* * *
주막으로 내려가니 석가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술 냄새가 진동하지만 술기운은 한결 가신 듯했다.
“음마, 아씨, 아니 마노라, 어디 가셨던 거예요? 무슨 사달이라도 났을까봐 제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셔요? 헌데 소쌍 악공은 어디 가고 마노라 혼자 계셔요? 악공은요? 소쌍 악공은 어디 계신 거여요?”
석가이가 월의 등 뒤를 두리번거렸다.
“그자가 어디 있는지 내가 알 게 무어냐!”
석가이가 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제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뜯었다.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그깟 술 때문에 악공과의 하루를 허무하게 날려 보내다니. 이년아, 왜 사니, 왜 살어!”
“차라리 술 마시고 뻗는 편이 훨씬 나았느니라.”
석가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뭐하고 있느냐? 어서 따라나서지 않고!”
월은 석가이에게 괜히 역성을 부리고 주막을 나왔다.
* * *
그날 밤, 소쌍은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월의 모습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떠오르는 것은 월의 미소였다가 맑은 눈망울이었다가 보얀 목덜미였다가 팔랑거리며 꽃무더기 속으로 뛰어들던 꽃 같은 뒷모습이었다가 앵토라진 입매였다가 원망 섞인 눈빛이었다가, 다시 월의 미소였다가……,
“아오, 미치겠네!”
소쌍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소쌍이, 자냐?”
설매였다.
“아, 아니오. 아직 안 잡니다.”
“그럼 나 들어간다.”
소쌍이 이불을 한쪽 구석으로 밀었다. 설매가 술병과 술잔을 들고 멋쩍게 웃으며 들어왔다.
“봄바람이 불어 그런가, 오늘은 영 혼자 마시기가 싫으네.”
설매가 소쌍의 방을 휘 둘러보았다. 옷 두어 벌과 얇은 이불 한 채, 머리맡에 놓인 장검 한 자루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단촐한 방이었다. 방이 꼭 소쌍의 인생을 보는 듯해 설매의 속이 짠했다.
술 한 잔을 단숨에 비운 설매가 술을 가득 따라 소쌍에게 내밀었다.
“저 술 안 먹잖아요.”
“그래도 한 잔만 마셔. 혼자 먹기 심심하다니까.”
소쌍이 망설이다 술잔을 받아 한 모금 삼켰다. 독주가 넘어가자 목구멍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소쌍이 으, 소리를 내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소쌍이 너 연애하냐?”
“켈록켈록!”
방금 삼킨 독주가 도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설매가 사레들린 소쌍의 등을 손바닥으로 퉁퉁 쳐주었다. 소쌍이 기침을 해대는 와중에도 연신 두 팔을 내저었다.
“정식으로 연애를 하는 건 아니라고?”
“그, 그게 아니라요, 켈록!”
“그럼 좋아하기만 하는 단계냐? 홑사랑이야?”
“그런 것도 아니에요.”
소쌍이 설매의 시선을 피하며 애먼 바닥을 툭툭 쳤다.
“염병할, 평생 기생밥 먹은 반귀신이다, 내가. 거짓부렁 놓을 생각은 하지도 말어.”
소쌍이 더 이상 부정하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아셨어요?”
“기생들이 원래 딴 년 분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법이거든. 그래야 저도 사니까. 일종의 생존 능력이랄까. 인제는 쓸 일도 없구만 이리 나이를 먹어도 고 능력 하나는 닳아지지가 않네.”
설매가 클클거리며 소쌍이 든 술잔을 빼앗아 마저 비웠다.
“소쌍아.”
설매의 목소리가 평소 같지 않게 낮게 깔렸다.
“예, 스승님.”
“우리 같은 천것들에겐 말이다. 사랑이란 대개 자루 없는 칼 같은 거다. 사람을 다치고 아프게 하지. 예리하면 예리한 대로, 뭉툭하면 뭉툭한 대로. 그러니까……,”
설매가 술을 한 잔 더 비우고는 말을 이었다.
“함부로 쥐지 말어. 결국엔 네 손모가지를 잘라 먹을 거다.”
소쌍은 시선을 바닥에 붙박은 채 굳은 듯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소쌍이 고개를 들고 웃었다.
“스승님 말씀 깊이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웃고 있지만 눈빛은 말할 수 없이 쓸쓸했다. 소쌍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설매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하이고 졸리다. 한 잔 걸쳤으니 이제 자야지. 너도 그만 자거라.”
설매가 나간 뒤 소쌍은 설매가 두고 간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 천천히 마셨다. 쓰디쓴 독주가 아무 맛도 없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