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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작성일 : 17-06-30 15:07     조회 : 252     추천 : 0     분량 : 9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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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민씨가 입궐했다는 소식에 월이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끌어안고는 한참을 눈물바람을 했다.

 

  “어머니, 어찌 이제야 오셨습니까.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어머니 아버지께서 절 까맣게 잊으신 줄 알았답니다.”

 

  월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잊다니요. 어찌 한 시라도 빈궁 마노라를 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안 된다 고집하는 봉여를 설득하느라 이제야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수척해진 딸의 모습을 보니 하루라도 더 빨리 입궐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헌데 어찌 이리 마르셨습니까? 주름은 어찌 더 깊어지셨고요?”

 

  “나이가 든 게지요. 세월 앞에 장사가 있겠습니까.”

 

  민씨가 계면쩍게 웃었지만 월의 가슴은 살을 에이는 듯 시렸다. 이 못난 딸을 걱정하시느라 그런 게지. 월은 민씨의 얼굴을 안타까이 어루만졌다.

 

  “권승휘가 회임을 했다지요.”

 

  처소에 마주 앉은 민씨가 망설이며 말문을 열었다.

 

  “예. 내년 중춘이 산달이라 합니다.”

 

  “마노라께선 태후는 없으십니까.”

 

  월이 어미 볼 낯이 없어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저는 자식과의 연이 없나 봅니다.”

 

  민씨가 큰일 날 소리 말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아직 마노라께선 한창 나이신 것을요. 포기하시면 아니 됩니다. 마음이 닫히면 몸도 닫히는 법이에요.”

 

  “…….”

 

  민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자와의 사이가 소원하다는 것이야 소문을 들어 짐작하고 있었지만 월의 무거운 얼굴을 보니 상황이 예상보다 훨씬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대답을 않으십니까.”

 

  “알겠습니다. 어머니 말씀 꼭 명심하겠습니다.”

 

  민씨의 굳어진 얼굴을 본 월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우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미소에 민씨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리 웃으며 혼자 견뎌온 시간이 얼마나 오래인지, 그 시간의 마음앓이가 어느 정도였을지 차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민씨가 월의 얼굴을 살피며 입을 뗐다.

 

  “불공을 한번 드려보면 어떨지요.”

 

  월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불공이라니요. 갑자기 무슨 불공을 드리자는 것입니까?”

 

  “인간의 생사는 하늘에 달렸다지 않습니까. 왕자아기씨를 점지해달라고 부처님께 빌어보면 어떨지…….”

 

  월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흔들었다.

 

  “운명이면 아니 빌어도 될 것이고, 운명이 아니라면 아무리 빌어도 아니 되겠지요. 불공을 드린다한들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나라에서 불교를 금하고 있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머니.”

 

  조선은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혹세무민하는 허황된 잡학이라 탄압하고 있었다. 성리학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이유를 댔지만 실은 고려의 뼈대나 다름없던 불교를 무너뜨림으로써 고려의 색을 지워버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라에서 불교를 금하고 있는데 세자빈이 불공을 드린다는 것은 당치않은 일이었다.

 

  “허나 마노라, 나라에서 금한다 하나 왕족이나 사대부들조차 집안에서 불경을 읽고 시주를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말로는 불교를 탄압하고 배격한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았다.

 

  당장 궁궐만 보더라도 왕후가 죽으면 궁 안에 능침사를 짓고, 왕이 죽고 나면 후궁들은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갔다. 편전에서 석씨의 무리들을 일소해야 한다 소리 높이던 신료들도 집안에 흉사가 생기면 중을 불러 경문부터 외웠다.

 

  민씨가 내처 월을 설득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왕실의 후계를 잇는 일 아닙니까. 그저 사사로운 이득을 바라는 것이라면 에미가 이런 말씀을 드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아비의 병환이 깊다는 핑계로 입궐을 하였으니 문병차 본가로 나가겠다 청해보십시오. 일단 나오기만 하시면 절에 가는 거야 무어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어찌하겠습니까.”

 

  “아비의 병을 낫게 하려는 마음에서 불공을 드린 거라 둘러대면 됩니다. 아비를 위한 일이었다 하면 대놓고 흠잡진 못할 것입니다.”

 

  계속된 설득에도 월은 여전히 머뭇거렸다. 불공을 드리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기에 선뜻 긍정적인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종학에 나갔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본가로 나가겠다 하면 전하께서 언짢아하실 것입니다.”

 

  왕의 눈치를 보는 월을 보니 민씨의 가슴이 또 한 번 무너졌다.

 

  “전하께서도 참으로 야박하십니다. 일곱 해 동안 마노라께서 본방엔 한 번도 들지 못했는데 어찌 언짢아하신단 말입니까. 부모와 자식의 애끓는 심정을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오라……,”

 

  “전하께서 마노라를 눈엣가시 보듯 미워하신다더니 소문이 진실인 게지요.”

 

  민씨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지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만도 설운데 시아버지에게까지 미움을 받는다니, 안 그래도 힘든 궁궐 생활이 얼마나 가시밭길일까 생각하니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쏟아져 내렸다.

 

  세자빈이 되고 중전이 되면 무얼 하나. 딸 얼굴 한 번, 목소리 한 번 듣기도 이리 어려운데. 할 수만 있다면 혼인을 물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노라가 무어 잘못한 것이 있다고 그리 미워하신단 말씀입니까.”

 

  “어머니,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하도, 중전마마도 모두 저를 아끼고 예뻐해주십니다.”

 

  “규방에 있어도 들을 것은 다 듣습니다! 제가 걱정할까 거짓말을 하시는 것 아닙니까.”

 

  월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니께서 헛소문을 들으신 겝니다. 제가 전하의 귀염을 받으니 시샘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뜬소문일 뿐입니다.”

 

  “정말입니까.”

 

  민씨가 눈에 물기를 달고 물었다. 월이 과장되게 환히 웃어보였다.

 

  “그럼요. 얼마 전엔 특별히 보약도 내려주신 것을요. 전의감의 판사가 직접 와 진맥을 하였습니다.”

 

  민씨가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월을 보았다. 월이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청을 올려보겠습니다, 어머니. 그러니 울지 마시어요.”

 

  민씨가 그제야 딸 앞에서 울음을 운 것이 민망한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닦았다.

 

  “꼭 청을 올리셔야 합니다.”

 

  단단히 다짐을 받고 돌아서는 민씨의 뒷모습을 월이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우와, 저것 좀 봐!”

 

  난앵과 춘섬이 분 파는 내분전을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갔다. 둘의 뒤를 슬렁슬렁 쫓아가던 소쌍의 시선이 주피전을 향했다. 갖가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신발 사시려오?”

 

  소쌍이 흘끔거리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여리꾼이 다가왔다.

 

  “아니, 뭐 구경이나 할까 하고…….”

 

  “좋아하는 여인에게 선물하려는 것이지요?”

 

  “그, 그런 것은 아니고……,”

 

  소쌍의 얼굴이 빨개졌다.

 

  “으이그, 귀신을 속이슈.”

 

  여리꾼이 소쌍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좌판 앞으로 잡아끌었다.

 

  “자, 천천히 보슈. 당혜, 태사혜, 온혜, 수혜 없는 게 없으니까. 문양도 국화문, 매화문, 여의두문, 번개문, 빗금문, 종류별로 다 있고……,”

 

  여리꾼의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졌지만 소쌍은 뭐가 뭔지 하나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당최 이런 걸 사봤어야지. 그렇다고 난앵이나 춘섬이에게 물어보기도 뭣했다. 보나마나 누군지 캐물을 텐데 무어라 답을 하겠는가 말이다.

 

  제 흥에 취해 설명을 읊어대던 여리꾼이 말을 멈추고 소쌍을 빤히 보았다.

 

  “왜 그러시오?”

 

  “지금 내가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죠?”

 

  “어허, 내가 기루 밥만 아홉 해를 먹었소.”

 

  “내 소문 안 낼 테니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보시오.”

 

  소쌍이 얼굴이 발그레해져선 딴 데를 보았다.

 

  “이 형님, 보기와 다르게 영 쑥맥이시구만.”

 

  “쑥맥이라니. 내가 어딜 봐서 쑥맥……,”

 

  여리꾼이 소쌍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나와 마주친 걸 천운으로 아슈. 안 그랬음 살쾡이 같은 놈들한테 끌려가 바가지나 옴팡 썼을 테니까.”

 

  소쌍이 살쾡이에 물려온 토끼처럼 입을 앙다물었다.

 

  “자, 내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슈. 우선 여인을 떠올려보시오. 여인의 외모라든가, 분위기라든가, 성격이라든가.”

 

  월을 떠올리던 소쌍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베어 물었다. 여리꾼이 안 됐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형님이 더 많이 좋아하는 게로구만요?”

 

  소쌍이 아니라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월이 자신을 좋아할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좋아하긴커녕 벌써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쁘오?”

 

  여리꾼이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 소쌍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여리꾼이 정말 안 됐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이 형님, 초장부터 확 잡혀버리셨구만. 한번 판세가 결정되면 뒤집기가 어려운데.”

 

  “그런 것이오?”

 

  소쌍의 진지한 물음에 여리꾼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 형님 진짜 암 것도 모르시는구만. 설마, 연애가 첨이오?”

 

  소쌍이 대답을 못 하자 여리꾼이 또 배를 잡고 웃었다. 한참을 웃어대던 여리꾼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털어내며 말했다.

 

  “뭐 첨이면 어떻고 스무 번째면 어떻소. 진심을 다해 노력하면 되는 거지. 아니 그렇수?”

 

  뭔가 놀림을 받은 기분에 소쌍이 뚱한 표정을 짓자 여리꾼이 달래듯 소쌍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자자, 여인의 마음을 확 잡아끌 수 있게 신발 하나 잘 골라봅시다. 여인들이 의외로 이런 것에 약하답니다.”

 

  여리꾼이 눈을 찡긋하며 질문을 던졌다.

 

  “여인이 귀여운 편이오, 아니면 요염한 편이오?”

 

  “얼굴이 동그랗고 콧방울이 둥실한 것을 보면 귀여운 편이랄 수 있지만 또 눈망울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에헤이, 이 형님 참 갑갑하시네. 둘 중에 하나만 고르는 거요.”

 

  “꼭 하나만 골라야 하오?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면 어찌 하오.”

 

  “둘 중에 보다 가까운 쪽을 답해야지요.”

 

  “사람이라는 것이 어찌 딱 잘라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

 

  “쓰읍!”

 

  여리꾼이 철부지 동생 혼내듯 눈을 부릅떴다. 소쌍이 불퉁하게 입을 내밀고 대답했다.

 

  “둘 다 해당이 되지만, 굳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귀여운 편이오.”

 

  “귀여운 편이라!”

 

  여리꾼이 신발 몇 개를 눈으로 훑으며 질문을 이었다.

 

  “살결이 하얗소, 가무잡잡하오? 아님 누르께하오?”

 

  이건 쉽다.

 

  “하얗소! 백설처럼 하얗소!”

 

  “화려한 걸 좋아하오, 아니면 소박한 편이오?”

 

  “글쎄……, 이건 잘 모르겠는데…….”

 

  “목이며 손에 장신구를 걸치고 다니오? 목걸이나 반지 같은 거 말이오.”

 

  월의 하얀 목과 손을 떠올렸다. 노리개 말고는 눈에 띄는 장신구를 본 기억은 없었다. 소쌍이 고개를 젓자 여리꾼이 신발 하나를 척 내밀었다.

 

  “그렇다면 이것이오!”

 

  여리꾼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꽃분홍색 온혜였다. 앞부리와 뒤꿈치에 고급스러운 은실로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색은 아무나 신을 수 없소. 얼굴이 백설처럼 하얗고 사랑스러운 여인만이 소화할 수가 있지요. 소박한 성격이니 다른 꾸밈이 잡다하게 많은 것보다는 요렇게 깔끔한 것이 좋을 것이오. 어떻소, 크기는 이만하면 되겠소?”

 

  소쌍이 온혜를 손 뼘으로 가늠해보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 정도면 맞을 듯한데, 이걸 정말 좋아하겠소?”

 

  “내 손모가지와 전 재산을 걸겠소. 싫다 하거들랑 오슈. 내 손모가지 잘라 내줄 터이니.”

 

  소쌍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여리꾼이 침을 발라 기름종이를 꺼냈다.

 

  “아직 손도 못 잡아봤지요? 웬만하면 이거 주면서 손 한번 잡으슈. 제 마음을 박력 있게 표현하는 사내만큼 멋있는 게 없소. 형님 정도면 션하게 고백만 한다면야 싫다는 여인은 없을 것이니 용기를 가지시고.”

 

  시원하게 고백을 하려 해도 만나야 고백을 할 것 아닌가. 이걸 어찌 전해준다고 덜컥 사버렸을까. 기름종이로 싼 온혜를 받아드는 소쌍의 얼굴이 우울했다.

 

  “언니!”

 

  난앵과 춘섬이 팔짝거리며 뛰어왔다. 내분전의 분이란 분은 다 발라보았는지 얼굴이 온통 허옜다. 소쌍이 얼른 신발을 다른 짐 속으로 숨겼다.

 

  “언니, 신발 샀어요?”

 

  난앵이 짐더미를 흘끔거리며 물었다.

 

  “아니. 심심해서 그냥 구경한 거야. 얼른 가야겠다. 천향이한테 한소리 듣겠어.”

 

  소쌍이 난앵과 춘섬의 팔짱을 끼고 빠르게 걸었다.

 

 

  * * *

 

 

  그 시각 향원각에서는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강수찬이 하인들을 대동하고 기루를 뒤집고 있었다. 육손을 찾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천향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강수찬은 눈 하나 꿈쩍 않고 천향을 밀쳐버렸다.

 

  “구석구석 샅샅이 뒤지거라!”

 

  강수찬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옥금의 방으로 들어섰다. 반닫이가 엎어지고 화초함이 부서졌다. 그 안에 들어있던 서찰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그 중 하나를 집어든 강수찬의 눈이 노기로 희뜩거렸다. 서찰은 모두 자신이 옥금에게 보낸 것들이었다. 강수찬이 서신 뭉치를 턱으로 가리키며 싸늘하게 말했다.

 

  “저것들을 모조리 태워버리거라.”

 

  하인이 서찰들을 모두어 가지고 나갔다.

 

  “찾았습니다!”

 

  강수찬이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고방에 숨어있다 끌려나온 옥금이 육손을 꼭 끌어안은 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어, 어찌 이러십니까.”

 

  옥금이 눈물범벅인 얼굴로 물었다.

 

  “자네야말로 어찌 고집을 부리는 겐가. 아이가 놀라지 않았는가. 어서 아이를 내놓으시게.”

 

  “아이를 데려가시려거든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옥금이 매서운 눈빛으로 강수찬을 노려보았다.

 

  “이년이, 무엄하게 누굴 노려보는 게야!”

 

  옆에 섰던 하인이 옥금의 뺨을 쳤다. 옥금이 육손을 안은 채 엎어졌다. 육손이 경기하듯 울음을 터뜨렸다.

 

  “허허, 강씨 집안 3대 독자의 친모다. 어찌 함부로 더러운 손을 대는 게야!”

 

  강수찬이 하인을 꾸짖자 하인이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강수찬의 하녀가 육손에게서 옥금을 빼앗으려 다가섰다가 비명을 꽥 지르며 물러났다. 옥금이 하녀의 팔을 물어버린 것이었다.

 

  “저의 아이입니다. 태어나 지금까지 한 시도 제 품에서 떨어뜨려 본 적이 없는, 제 아이란 말입니다!”

 

  옥금이 어금니를 꽉 문 채 소리쳤다.

 

  “나의 핏줄이기도 하지.”

 

  “제 살을 떼어내고, 제 젖과 눈물을 먹여가며 키운 아이입니다! 나리께선 지금껏 무얼 하셨습니까. 아이 낳을 때도 기별 한 번 없더니 이제 와 아비라 칭하며 아이를 데려가신다니요. 어찌 이리 몰염치하실 수가 있습니까!”

 

  옥금이 눈을 뒤집으며 악을 썼다. 육손의 목에서도 쇳소리가 났다. 강수찬이 무릎을 구부리고 옥금의 흐트러진 머릿결을 넘겼다.

 

  “그간 기별 한 번 없었던 것이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구나. 허나 그것은 내 공부에 매진하여 하루라도 빨리 자네와 아이 앞에 번듯한 아비로 서기 위함이었네. 장부의 깊은 뜻을 오해하지 말게나.”

 

  “아니오. 저는 속 좁은 계집입니다. 장부의 깊은 뜻 따위는 헤아릴 수 없사오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쯧쯧, 그간 기루에서 아이를 홀로 기르느라 마음앓이가 얼마나 심했으면 순하디 순하던 자네가 이리도 독해졌는가. 내 그것은 섭섭지 않게 보상을 할 것이니……,”

 

  “삼 년을 하루같이 수찬 나리를 그리워하며 울었습니다! 아이가 쑥쑥 자라는데도 아비에게 보일 수 없어 가슴이 찢어질 듯하였습니다! 그래도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미가 되어야 하기에 이를 악물고 견뎠습니다!

 

  그 눈물을, 그 밤들을, 그 다짐들을 수찬 나리가 어찌 다 보상하신단 말입니까!”

 

  옥금이 뜻을 굽히지 않자 강수찬이 작전을 바꾸었다.

 

  “이보게, 옥금이, 이리 흥분하지만 말고 육손이를 생각하시게. 이리 잘나고 명석한 아이가 천한 기생 어미 아래서 무얼 배우겠는가. 사내아이가 분 냄새 진동하는 기방에서 자라 장부 노릇이나 제대로 하겠는가 말이야. 설마 육손이가 자라 기둥서방이나 오입쟁이가 되길 바라는 것은 아닐 테지?”

 

  육손이를 생각하라는 말에 단단하던 옥금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수찬이 옳다구나 하고 더욱 밀어붙였다.

 

  “우리 육손이가 나처럼 과거 급제도 하고, 조정에 나아가 나랏일도 하길 옥금이 자네도 바라지 않는가. 내가 그리 만들어줄 수 있네. 자네는 못하지만 나는 얼마든지 해줄 수가 있어.

 

  어떤가. 이래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육손이를 빼앗으러 왔다 여기는가.”

 

  육손을 안은 옥금의 팔이 느슨해졌다. 강수찬이 눈짓을 하자 하녀가 육손이를 낚아챘다. 옥금이 맥없는 눈으로 하녀의 품에 안긴 육손을 올려다보았다. 하녀가 육손이를 데리고 나가자 강수찬이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옥금이 강수찬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그럼 저도, 저도 데려가십시오!”

 

  “나도 마음 같아선 자네도 데려가고 싶네. 내가 어린 시절 자네를 얼마나 아끼고 은애했는지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허나 어쩌겠는가. 이미 첩이 둘이나 있는 것을. 게다가 조정에 몸담은 이로서 어찌 천기를 첩으로 들이겠는가.”

 

  “첩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허드렛일 하는 안잠자기라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어미임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육손이 자라는 것만 보게, 먼발치에서라도 보게 해주십시오.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옥금이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손을 비볐다.

 

  “제가 이리 무릎 꿇고 빌겠나이다. 나리, 제발 저도 함께 데리고 가주십시오. 예? 나리!”

 

  “자네의 지독지정을 내 충분히 알겠네. 그 마음만큼 더욱 잘 키울 것이니 걱정 말게.”

 

  “나리, 제가 없으면 육손이가 잠을 자지 못합니다. 오늘 밤에도 분명 저를 찾으며 울 것입니다.”

 

  “아이가 우는 것이 무에 그리 큰일이라고! 너무 싸고돌아도 아이에게 좋지 않은 법이다.”

 

  “나리, 나리, 제발……!”

 

  “어허, 아비의 사랑이 어미의 사랑보다 못할까. 걱정 그만하고 마음을 거두거라. 다 아이를 위해서다.”

 

  옥금이 질질 끌려가면서도 강수찬의 바짓자락을 놓지 않았다. 강수찬이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경멸어린 시선으로 옥금을 내려다보았다.

 

 “어리석은지고! 자네가 나서는 것이 자식의 앞길을 막는 것임을 어찌 모르는가! 천기의 배를 타고난 아이가 가엾지도 않은가!”

 

  “나리…….”

 

  “내 이 아이가 천기의 소생임을 숨길 것이네. 아이의 앞날을 막을 작정이 아니라면 행여라도 나타날 생각 말거라!”

 

  강수찬이 맵차게 옥금을 뿌리치고 문을 나섰다. 강수찬과 하인들이 사라지자 옥금이 핏기 없는 얼굴로 달싸닥 주저앉았다. 천향이 차마 다가서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인들에게 가로막혀 발만 동동 구르던 설매 역시 등을 돌리고 눈물을 찍어냈다.

 

  “으이그, 가엾은 것. 이 가긍한 팔자들을 어쩌면 좋누.”

 

  그때 저자에 나갔던 소쌍이 난앵, 춘섬과 함께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게 무슨……?”

 

  소쌍이 장본 것들을 내동댕이치고 뛰어 들어왔다. 설매가 설운 마음에 빽 소리를 질렀다.

 

  “향원각에 이 난리가 났는데 너는 왜 이제야 오는 게야?”

 

  “스승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설매가 대성통곡을 하며 주저앉았다.

 

  “그놈이 육손이, 육손이를 데려갔다. 우리 육손이를 빼앗겼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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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39장. 저의 마음을 여기에 두겠습니다 2017 / 7 / 10 246 0 6909   
39 38장. 그의 사랑을 지켜 나의 사랑을 2017 / 7 / 10 261 0 9344   
38 37장. 너는 나를 버릴 수 없고, 나는 너를 버릴… 2017 / 7 / 9 237 0 5709   
37 36장. 내가 아니라 너 때문에 2017 / 7 / 9 251 0 6554   
36 35장. 깊어지는 어둠 2017 / 7 / 8 263 0 6330   
35 34장. 나도 어렵고 너도 어려워라 2017 / 7 / 8 242 0 5512   
34 33장. 수십, 수백 번이라도 기꺼이 2017 / 7 / 8 229 0 6520   
33 32장. 내가 죽어 네가 살 수 있다면 2017 / 7 / 7 237 0 8483   
32 31장. 암흑의 소용돌이 2017 / 7 / 7 251 0 8165   
31 30장. 괜찮다, 무엇이든 무어라도 2017 / 7 / 6 253 0 7793   
30 29장. 이것이 마지막, 이렇게 마지막 2017 / 7 / 6 253 0 6452   
29 28장. 아니 된다 하여도 2017 / 7 / 5 250 0 7066   
28 27장. 아니라 해도 2017 / 7 / 5 247 0 7852   
27 26장. 만날 길은 꿈길밖에 2017 / 7 / 5 243 0 8017   
26 25장. 이렇게 돌아서면 2017 / 7 / 4 234 0 7564   
25 24장. 붉고 붉은 꽃송이로 피어나 2017 / 7 / 4 284 0 8756   
24 23장. 그대를 어찌 보내란 말입니까 2017 / 7 / 4 280 0 8427   
23 22장. 뜨겁고도 날카로운 첫, 2017 / 7 / 3 255 0 6587   
22 21장. 악야惡夜 2017 / 7 / 3 243 0 6638   
21 20장. 지켜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2017 / 7 / 3 256 0 5393   
20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2017 / 7 / 2 241 0 8214   
19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2017 / 7 / 2 255 0 8518   
18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2017 / 6 / 30 253 0 9153   
17 16장. 사랑이 거짓말이 날 사랑이 거짓말이 2017 / 6 / 30 232 0 6810   
16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2017 / 6 / 29 246 0 8806   
15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2017 / 6 / 29 239 0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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