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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채운몽
작가 : 채헌
작품등록일 : 2017.6.19

조선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된 세종의 두 번째 며느리 세자빈 월, 기루 무사 소쌍을 만나 운명인 듯 우연인 듯 사랑에 빠진다. 아니라 해도, 아니 된다 해도 돌아설 수 없었던 그녀들의, 무지개빛 로맨스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작성일 : 17-07-02 05:01     조회 : 253     추천 : 0     분량 : 8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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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하, 원공목용을 완성하여 가지고 왔사옵니다.”

 

  수레를 대동한 장호군 장영실이 동궁전 마당으로 들어섰다. 수레에는 둥근 구멍을 뚫은 나무통이 가득 실려 있었다. 향이 나무통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명하신 대로 나무기둥의 길이는 칠촌 오분, 너비와 두께는 각각 일촌 팔분으로 하였사옵고, 일촌 오분의 구멍을 두었사옵니다.”

 

  “총 몇 개나 만들었는가?”

 

  “명하신 백여 개에 여분으로 오십 개를 더 만들었사옵니다.”

 

  “여기에다 신기전을 조준하고 불을 붙이면, 파바방!”

 

  구가 나무 구멍을 들고 화살 날리는 시늉을 했다.

 

  “형님, 우리 얼른 완성해서 북방의 오랑캐 놈들을 싹 쓸어버립시다. 그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백성들을 괴롭힌다지 않습니까. 쥐새끼 같은 놈들, 기다려라! 이 임영이 매운 맛을 제대로 보여주마.”

 

  향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장영실을 보았다.

 

  “전하께서 명하신 일만으로도 다망할 터인데 나까지 일을 더하니 미안하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소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옵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 명만 내려주시옵소서. 소신 성심을 바쳐 돕겠사옵니다.”

 

  향이 장영실의 굵고 거친 손마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자네의 충심을 잊지 않겠네. 이만 가보게.”

 

  장영실이 물러나고 안평대군 용이 들어섰다.

 

  “저하, 날이 더운데 이리 나와 계십니까.”

 

  용이 마당을 가득 채운 수레 모형과 나무 조각들을 보며 땀을 닦았다. 활달한 성정으로 화포나 무기 제작에 관심이 많은 구와는 달리, 용은 조용히 앉아 책 읽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쌍둥이라 생김이 같은데도 한 사람은 늘상 낯빛이 새카맣고, 한 사람은 허여멀건 하여 둘을 헷갈릴 일은 전혀 없었다.

 

  “권승휘가 회임을 했다지요. 감축 드리옵니다.”

 

  용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저도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 화차에 정신이 팔려 깜박하였습니다. 저도 감축 드리옵니다, 형님 저하.”

 

  구가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향이 동생들의 인사에 수줍어하며 얼굴을 붉혔다.

 

  “고맙네.”

 

  “헌데 빈궁 마노라께선 아직 소식이 없으십니까.”

 

  용이 조심스럽게 향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향이 나무통을 살피는 척하며 즉답을 피했다.

 

  “어마마마께서 심려가 크십니다.”

 

  “알고 있네.”

 

  “빈궁 마노라께는 영 마음이 가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나무통을 수레에 얹던 구도 끼어들었다.

 

  “저도 그것이 늘 궁금하였습니다. 빈궁 마노라께서 그리 어여쁘신데……,”

 

  “구야, 어찌 마노라의 체모를 함부로 입에 올리느냐.”

 

  용의 질책에 구가 헤헤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끼린데 뭐 어떻습니까. 솔직히 빈궁 마노라만큼 고운 여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하의 가례 날 빈궁 마노라를 첨으로 뵙는데, 우와,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줄 알았다니까요.”

 

  “어허, 그래도!”

 

  “에이, 안평 형님도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용과 구의 입씨름을 흘려들으며 향은 월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 * *

 

 

  가늘게 쪼갠 대나무에 옥을 꿴 주렴을 두른 침소에는 ‘이성지합 만록지원’이라 적힌 채문석이 펼쳐졌고, 한쪽엔 술과 안주가 차려진 호족반이 놓였다. 그 옆으로는 흰 비단 깔개를 겹으로 깐 금침과 원앙베개가 정갈하게 깔려 있었다.

 

  친영례를 무사히 마친 월과 향은 동뢰연을 치르기 위해 처소에 마주 앉았다. 동뢰연은 합환주를 마시고 합궁을 하는 절차였다. 친영례가 혼인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자리라면 동뢰연은 신랑과 신부가 마음과 몸을 합하여 부부임을 약조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처소에는 묵직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월은 향을 힐끔거리며 무슨 말이라도 하고픈 눈치였지만 향은 모르는 척 술만 마셨다.

 

  첫 번째 부인을 쫓아낸 지 한 해도 되지 않아 두 번째 부인을 들인 것도 우세스러웠지만 그의 미색도 마뜩치 않았다. 가례 내내 대소신료들과 종친들, 심지어는 시중을 드는 궁인들까지도 월의 얼굴을 힐끔거리느라 정신을 놓기 일쑤였다.

 

  장차 이 나라 왕실의 안주인이 될 여인이었다. 위엄과 자애만이 필요한 자리에 쓸데없이 미색이라니. 향은 월의 아름다움이 중대한 결격 사유라도 되는 양 느껴졌다.

 

  왕은 겉이 고운 이가 속도 곱다 하셨지만 자신의 생각으로는 오히려 아름다움이 속으로 배어들지 못하여 겉에만 머무르는 듯했다.

 

  깜박 졸았는지 월의 고개가 푹 꺾였다. 월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황공하옵니다. 소첩이 처음인지라 긴장을 하였나 보옵니다.”

 

  안 그래도 곱지 않던 향의 눈빛이 뜨악해졌다. 월이 실수를 알아차리고 황망히 덧붙였다.

 

  “소첩이 그만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제 말은 그것이 아니오라……,”

 

  “틀린 말도 아닌데 무얼 그리 당황하십니까. 빈궁 말마따나 나는 두 번째라 별로 긴장되지도 않습니다.”

 

  향은 제 손으로 술을 따라 죽 들이켜고 말했다.

 

  “관상감에서 합궁일로 올린 날은 빠짐없이 별궁에 들 것입니다. 부부로서 지켜야 할 예도 마땅히 갖출 것이고요. 빈궁 역시 법도와 예의만 갖춘다면 쫓겨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인즉슨, 그 이상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법도와 예의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경고이자 자신의 사랑과 관심은 바라지 말라는 선언이었다. 첫날밤이 채 가기도 전에 선부터 긋는 지아비가 야속해 월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법도와 예의만으로 어찌 부부라 하겠습니까. 부부란 자고로 함께 웃고 울며 마음을 나누는 평생의 정인이자 지기가 아니옵니까.”

 

  “평생의 정인이자 지기라구요.”

 

  월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첩, 성심을 다해 저하의 정인이자 지기가 되고자 하옵니다.”

 

  그 미소에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을 뻔했던 향의 입에선 한층 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빈궁께서 어떻게 나의 정인이자 지기가 되겠단 말씀이시오. 폐빈처럼 압승술이라도 행하시렵니까.”

 

  폐빈, 이란 말에 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선대왕의 후궁 명빈의 조카로 궁에 들어왔던 첫 번째 세자빈은 향의 환심을 사기 위해 향이 아끼는 궁인들의 신발을 훔치고, 뱀이 교접한 정기를 닦은 수건을 지니는 등의 술법을 행하다 이태 만에 쫓겨났다. 사가로 내쫓긴 폐빈이 아비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한동안 흉흉하게 돌았더랬다.

 

  그 뒤를 이어 세자빈이 된 것이 바로 월이었다. 적잖은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궁에 들었을 월에게 첫날부터 폐빈 운운한 것은 잘못이다 싶으면서도 향은 어쩐지 사과하고 싶지가 않았다.

 

  월이 어느 새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차분히 대답했다.

 

  “저의 지극한 마음으로 저하의 마음을 구할 것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구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아름다우나 와 닿진 않는 말이었다.

 

  향에게 마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궁 안에선 마음이라 말해지는 것과 실제의 마음이 달랐다.

 

  충심을 노래하지만 실상은 자신들 배불리기에 눈이 벌건 신료들, 우애와 신의를 다짐하지만 뒤에선 사소한 흠결까지 끄집어내며 향의 흉을 보는 형제들, 세자를 믿고 아낀다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정작 눈빛에선 못마땅한 기색이 묻어나는 왕.

 

  자신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기조차 역겨운 신료나 형제들 앞에서도 웃었고, 왕 앞에선 공손한 낯빛을 유지했다. 그리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그리 해야 하기에 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것이 본심인지 자신조차 헷갈리곤 했다. 나면서부터 궁에서 자란 향에게 마음이란 딱 두 가지로 나뉘었다. 부분의 거짓이거나 완전한 거짓이거나.

 

  “빈궁께선 마음이 무어라 여기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도 월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빙긋이 웃었다.

 

  “마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 나라의 뼈대가 법도와 예의가 아닙니까. 한 나라를 이루는 법도와 예의가 모두 마음이 있은 연후에 가능한 것이니, 마음은 능히 한 나라를 세울 만큼 강한 것이지요.”

 

  향의 날카로운 시선이 월의 얼굴에 꽂혔다. 법도와 예의를 다할 뿐, 마음을 주지 않겠다는 자신의 말을 에둘러 꼬집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세자인 자신에게 감히 마음을 내어놓으라 말하는 겐가.

 

  향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월은 수줍은 미소를 띤 채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향은 그런 월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첫 번째 세자빈도 비슷한 말을 하였지요.”

 

  겪어보면 알게 되리라. 궁 안에서 마음이란 것은 법도와 예의라는 포장지로 둘러싼 위선의 감정일 뿐임을, 그리하여 그것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지를.

 

  “저하, 어찌 그런 말씀을…….”

 

  향의 눈빛에 어린 적개심을 본 월이 뒷말을 잇지 못했다.

 

  “가례를 치르느라 고단했을 터인데 이만 주무시지요. 나는 보아야 할 책이 남아있어서.”

 

  향은 그대로 침소를 나왔다. 작고 가냘픈 월의 그림자가 향의 발목을 붙드는 듯했지만 향은 그림자를 떨쳐내듯 걸음을 크게 옮겼다. 어둡고 낯선 침소에 홀로 남은 그림자가 가만히 떨리고 있었다.

 

 

  * * *

 

 

  “헌데 형님.”

 

  부드러운 용의 목소리에 향이 회상을 멈추었다.

 

  “근간 진양 형님을 뵈온 적이 있으십니까.”

 

  “지난번 종학에 나갔을 때 보았네만. 왜 그러는가. 유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용이 좌우를 살피고는 향을 한쪽으로 끌었다.

 

  “요즘 부쩍 진양 형님이 종실 어른들을 찾아뵙는 일이 잦다 합니다.”

 

  향이 멀뚱히 용을 보았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그리 은밀히 이야기할 것인가. 유야 워낙에 어른들한테 깍듯하지 않은가. 어른들도 유를 어여삐 여기시니 자주 찾아뵙고 문안을 올리는 게 당연한 일이지.”

 

  “최근 들어 더욱 빈번해진 것이 저는 어쩐지 마음에 걸립니다.”

 

  “허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를 어찌 미타히 여기느냐. 내 어마마마만큼이나 믿고 의지하는 이가 유임을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그러기에 더더욱 유심히 살피셔야 하옵니다, 형님 저하.”

 

  아무도 믿지 말고 아무도 기대지 말 것. 군왕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도, 현명함과 지성도 아니고 이것이었다. 두 발로 꿋꿋이 홀로 서는 것. 철저히 혼자가 되어서 이 세상과 맞서야 했다. 게으르고 탐욕스러운 신료들을 이끌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보듬어 안는 것을 모두 혼자서 해내야만 했다.

 

  네 아비조차도 믿지 말거라. 그래야 네가 산다.

 

  선대왕께서 승하하시기 전, 사람들을 물리고 향에게만 남겨주신 말씀이셨다. 알고 있었다. 그러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피를 나눈 형제들마저 멀리하고 경계하는 일은 너무나도 외로웠다. 그 외로움이 너무 고달파 자꾸만 의심하게 되는 마음을 자르고 또 잘라냈다.

 

  몇몇 종친들이 유약한 향보다는 씩씩한 유가 군왕의 재목이라 여기는 것도, 유에게 옥좌를 향한 야망이 없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어쨌건 지금 세자는 자신이었고, 자신을 몰아낼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어허, 자꾸 그런 말을 하면 네가 유를 시샘하여 모함한다 여길 것이다.”

 

  향이 정색을 하자 용이 하릴없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표정에는 여전히 걱정이 서려 있었다. 향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용이 허튼 말을 할 아이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향이 무거운 마음을 억지로 털어내며 용의 어깨를 두드렸다.

 

  “용이 네가 매일 글을 읽고 쓰다 보니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조만간 말과 내관들을 보낼 터이니 가까운 곳으로 탁족이라도 다녀오거라.”

 

 

  * * *

 

 

  “그리 하거라.”

 

  “예?”

 

  월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의 마음이 하도 곡진하여 모른 척 할 수 없기에 혼날 것을 각오하고 올린 청이었다. 청을 올리면서도 가능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탓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왜, 내가 허언을 하는 성 싶으냐?”

 

  “아, 아니옵니다.”

 

  중전은 바닥에 조아린 월의 등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권승휘가 회임을 한 후로 더욱 찬밥신세가 되어버린 어린 세자빈이 중전은 볼수록 안타까웠다. 아비의 병이 핑계일 뿐임을 알면서도 허락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어리광을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자빈이 된 이상 죽어도 궐 안에서 죽고 살아도 궐 안에서 살아야 했다.

 

  “곧 자식이 생기면 바깥걸음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다녀와야 할 것이야.”

 

  월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빈궁.”

 

  평소와 달리 근엄한 목소리에 월이 고개를 들었다. 중전이 월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내 이 나이까지 궁에 살아보니 궁에선 딱 두 가지만 지키면 되더구나. 하나는 해야 할 것을 하고, 둘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 어기지 않는다면 너도 좋은 중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말뜻을 알아듣겠느냐?”

 

  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앞으로 그리 할 수 있겠느냐?”

 

  월이 목구멍까지 솟은 말을 삼켰다. 방금 중전께서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말라 하지 않으셨는가. 윗전이 말씀하실 때 자기 생각과 다르더라도 해야 할 대답은 한 가지였다.

 

  “그리……, 하겠사옵니다.”

 

  중전이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터이니 걱정 말고 다녀오거라.”

 

 

  * * *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거뭇한 인영이 날렵하게 담을 넘었다. 인영은 손에 쥐고 있던 돌을 안방 장지문을 향해 던졌다.

 

  세 번째 돌을 던졌을 때 안이 환해지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나온 것은 강수찬이었다. 곤히 자고 있었는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누가 있느냐?”

 

  강수찬이 가지고 나온 조족등으로 마당을 밝히며 주위를 살폈다.

 

  “막동이냐?”

 

  강수찬이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여전히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수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로 들어가려는데 어디선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등이 툭 떨어지면서 주위가 어두워졌다. 깜짝 놀란 강수찬이 손에 남은 등자루를 되는 대로 휘둘렀다.

 

  “웨, 웬 놈이냐,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헙!”

 

  인영에게서 느껴지는 매서운 기운에 압도된 강수찬이 등자루마저 떨어뜨렸다.

 

  “누, 누구냐?”

 

  강수찬이 바들바들 떨며 곁눈질을 했다.

 

  “오늘 네가 빼앗아간 아이를 어미만큼 아끼는 사람이다.”

 

  “옥금이 보낸 왈짜냐?”

 

  “옥금이 보낸 것도, 왈짜도 아니다.”

 

  “내게 왜, 왜 이러는 게냐? 나는 그 애 애비다! 애비가 자식을 데려오는 것이 뭐, 뭐가 문제냐?”

 

  강수찬이 떨리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다잡으며 소리쳤다.

 

  “물론 문제가 아니지. 하지만 씨를 주었다 해서 절로 애비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

 

  강수찬이 침을 꿀떡 삼켰다. 인영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꽤나 많은 것들이 필요하거든. 이를테면 사랑이라든가,”

 

  인영이 팔을 한 번 휘두르자 제 소맷자락이 툭 떨어졌다.

 

  “관심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야.”

 

  두 번 휘두르자 바지가 스르륵 내려갔다. 강수찬이 얼른 바지춤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네놈은 그런 걸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잖아.”

 

  팔을 세 번째 휘두르려는데 강수찬이 사정하듯 소리쳤다.

 

  “내, 자, 잘못했네. 이제부터라도 그리 하면 되지 않는가. 어미 못지않은 사랑과 관심을 주고, 부, 부족함 없이 잘 키울 것이야!”

 

  인영이 팔을 내려놓았다.

 

  “육손의 안부를 소상히 적은 편지를 달마다 어미에게 보내거라.”

 

  “어미와는 소식을 끊을 것이라 말을 하였……,”

 

  시커먼 인영이 성큼 다가섰다. 목에 서늘한 기운이 와 닿았다.

 

  “다, 달마다는 너무 잦네. 횟수를 좀 줄여주게.”

 

  “어미에겐 그조차도 견디기 힘든 고통임을 모르는가!”

 

  서늘한 기운에 힘이 가해졌다. 금방이라도 목을 파고들 것만 같았다. 강수찬이 하얗게 질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그, 그리 하겠네. 이 칼 좀 치워주게.”

 

  “편지가 오지 않거나 하루라도 늦어지면 내가 올 것이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겨도 내가 올 것이다. 아이가 너 같은 비열한 놈으로 자라나도 내가 올 것이다. 그리고 다음번에 내가 올 때는……,”

 

  서늘한 기운이 아랫도리를 툭툭 건드렸다.

 

  “이것이 성치 못할 것이다.”

 

  강수찬이 저도 모르게 가랑이를 답싹 오므렸다. 바지가 흘러내려 앙상한 다리가 드러났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지.”

 

  서늘한 기운이 부드럽게 허공을 갈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것이 내는 빛만은 또렷이 보였다. 잠시 후 강수찬의 머리 위에서 상투가 툭 떨어졌다. 인영은 어느 결엔가 사라지고 없었다. 강수찬이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 * *

 

 

  “세자빈이 사가로 나간다 하더이다.”

 

  권승휘가 권전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로 낮게 말했다.

 

  “하늘이 내린 기회입니다. 사가로 나가있는 동안 뜻한 바를 이루어야 합니다.”

 

  “말씀하신 것은 준비해두었습니다.”

 

  “믿을 만한 자입니까?”

 

  권전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력도 출중하고, 입 또한 무거운 자입니다.”

 

  “우리가 움직였다는 것을 누구도 눈치 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승휘께선 아무 걱정 말고 태교에만 전념하십시오.”

 

  권승휘가 하뭇이 웃으며 배를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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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0장. 지켜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2017 / 7 / 3 255 0 5393   
20 19장. 어쩌면 그때에도 한번쯤 우리는 2017 / 7 / 2 240 0 8214   
19 18장. 지극한 마음으로, 마음을 2017 / 7 / 2 254 0 8518   
18 17장. 닿지 못하는 마음 2017 / 6 / 30 252 0 9153   
17 16장. 사랑이 거짓말이 날 사랑이 거짓말이 2017 / 6 / 30 232 0 6810   
16 15장. 창공에 희디흰 새 한 마리 2017 / 6 / 29 246 0 8806   
15 14장. 당신은 무엇입니까 2017 / 6 / 29 239 0 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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