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창배야! 나는 잘 모르지만 윤수가 너한테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게 있냐? 쟤가 네 구명운동에 아예 식음을 전폐하고 뛰어다니더라. 아마, 친형제라도 난 그렇게 못한다.”
혁주의 말에 창배는 아무 말 없이 앞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창배야, 정말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네가 빨리 나오게 돼서 정말 다행이다. 네가 거기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정말 잠을 못 잤어. 그나마 정말 다행이야. 나도 나지만 생각지 않게 네가 데리고 있던 나영호 부장이라는 사람 있지? 그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섰어. 너는 단지 바지사장이었고 회사 운영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이건 사실이잖아?”
“그래 창배야, 윤수 말대로 잠깐 네 인생에 한 번 좋은 경험 했다고 쳐라. 벌금 내고 손해 본 거 야, 창창한 네 인생에 앞으로 벌면 되는 게 아니겠냐.”
“뭐라고? 새끼들아 내가 지금 술 한 잔 먹고 속이 좀 풀어져 그렇지, 내가 그 안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참, 창배 이놈 정말 웃기는 놈이네. 야, 새꺄! 우리가 너 거기 들어가라고 등 떼민 놈 있었냐? 별 싱거운 놈 다 보네. 어서 술이나 마셔, 인마. 그리고 형님이 오늘 너 오입 한번 시켜 줄 게. 플레이보이인, 네놈 고생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사실 뭐, 그거 때문이 아니겠냐? 그리고 너 화성그룹 있을 때 반반했던 애들 다 건드렸다며?”
“뭐? 누가 그따위 쓸데없는 소릴 해?”
“다 알아, 인마.”
창배의 머릿속엔 순간 박두식 전무의 비서인 김윤희의 소담스러운 젖가슴과 자신의 약점을 빌미 삼아 돈과 섹스를 요구했던 홍보실 여직원이었던 색골 최미정의 얼굴이 스쳐 지났다.
“윤수, 너 잠깐 나 좀 봐.”
“왜 그래? 나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게 아니고, 인마! 잠깐 좀 나와 봐. 얘들아 미안하다. 잠깐 윤수한테 할 얘기가 있어 그래.”
창배는 윤수를 데리고 비어있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너, 정아 어떻게 된 건지, 자세하게 말해 봐.”
“그게, 저…….”
“빨리 말해 봐, 새꺄! 도대체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 내가 너 면회 갔을 때 얘기했잖아. 정아 씨와는 연락이 두절됐다고. 그러니까 네가 정아 씨에게 주라고 부탁했던 종이가방, 그걸 내가 네 부탁대로 창식이 형네 일산 가게에서 찾아다 전해 줬거든. 그리고 그게 끝이야.”
“그러니까 그걸 받고는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단 말이지?”
“그래. 화성그룹 비서실로 전화를 했는데 그만뒀다고 하고 핸드폰도 번호가 바뀌었는지 엉뚱한 사람이 받더라니 깐.”
“……이런, 쌍년……!”
“뭐, 쌍년? 너 정아 씨와는 무슨 일 있는 거냐?”
“그래, 새까! 아주 미칠 일이다.”
“야, 창배야!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종이 가방을 건네주기 전까진 네가 마치 지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곰살궂게 굴며 변호사 수임료까지 자기가 지불하겠다고 했었거든. 그래서 속으로야, 창배 이놈이 단단히 묶어놨구나, 생각했지. 그런데 종이 가방을 받아가지고 가서 그때부터는 연락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아, 결국 네가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그 안에 절교장을 써넣은 모양이구나 하고 내 나름대로 추측했어. 그런데 그 가방 안엔 뭐가 있었던 거냐?”
“그건, 네가 몰라도 돼.”
“인마. 그러면서 정아 씨, 어떻게 된 건 왜 물어보냐?”
“뭐라고!”
“아, 아냐. 그래 그저 너한테 죄지은 내가 죽일 놈이다.”
“들어가. 애들 기다리겠다. 가서 술이나 마시자.”
“야, 창배, 윤수, 너희 둘은 그전부터 뭔, 비밀이 그리 많은 거야?”
“비밀은 인마, 무슨 비밀…….”
“자, 어쨌든 창배의 생의 귀환을 거국적으로 기념하는 뜻에서, 다시 한번 건배!”
“위하여!!”
창배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달래기 위해 친구들이 권하는 술을 마다않고 의도적으로 마시려 했다. 그러나 채 몇 잔 마시지도 않아 몹시 취기가 올랐다.
“창배, 술 그만 줘라. 안 먹다 마셔 몹시 취하는 것 같다.”
***
갈증으로 눈을 뜬 창배는 주위를 살폈다. 낯선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룸살롱에서 술을 먹은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이후부터는 필름이 끊겼는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머, 오빠 깼어?”
창배는 자신의 인기척에 옆에 누워 말을 건네는 여자를 쳐다봤다. 술집에서 자신의 옆에 앉았던 파트너였다. 여자는 알몸이었다. 창배는 그제야 대강 사태를 짐작했다.
“몇 시냐?”
“세 시 반. 밝으려면 아직 멀었어. 더 자. 그런데 오빠는 한국에 오랜만에 나온 거라며?”
“뭐, 누가 그래?”
“응. 오빠 친구들이 그랬어. 과테말라에 있다 왔다면서 여자랑 한 지 오래됐다고 잘해 주라고 했거든.”
“그래. 그런데 그중 한 개는 맞다.”
“그럼, 틀린 건 뭔데?”
“과테말라가 아니고 교도소야.”
“뭐, 교도소? 에이, 거짓말 마. 얼굴은 그렇게 안 생겼는데.”
“정말이다. 그제 나왔다.”
“아, 그래서 빨리 쌌구나. 난 한참 달아오르려는데……. 오빠, 그런데 무슨 죄를 지었어?”
“살인.”
“뭐, 살인?”
“그래, 난 사람을 열이 나 죽였어.”
“호호호. 오빠 정말 농담 잘한다. 그럼 나는 사람을 죽인 남자를 밤새 또 죽인 셈인가?”
“비켜!”
창배는 달라붙으려는 여자의 몸을 밀어내고는 일어나 소파로 갔다.
“오빠 뭐 하려고?”
“나, 간다.”
창배는 소파 위에 걸쳐진 옷을 집어 들었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손을 찔러 넣어 봉투를 꺼냈다. 십만 원짜리 수표 서른 장이 들어 있었다. 아마 혁주가 찔러 넣었으리라 생각한 창배는 세 장을 헤아려 여자에게 건넸다.
“갈 때, 해장국 먹고 가.”
“안 돼, 오빠. 잘 해 줄게, 한 번만 더 하고 가. 물건 좋던데.”
여자가 아쉬운 듯 말했다.
***
모텔 밖으로 나온 창배는 바로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신림동 갑시다.”
택시는 신림동 대현 빌라 앞에서 멈춰 섰다.
창배는 차에서 내려 빌라 앞에서 서 잠시 건물을 올려다 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밝지 않은 새벽녘이라 창배가 오 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동안 빌라는 어두운 정적 속에 휩싸였다.
‘텅 빈 집이야! 아무것도 없어’
창배는 형이 하던 말을 떠 올리곤 501호 앞에 멈춰 키를 꽂아 돌렸다. 순간 안은 어둠에 휩싸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창배는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손으로 더듬거려 옆에 붙은 전기 스위치를 눌렀다.
형이 말 한 대로 집 안은 마치 이사 나간 집처럼 휑하니 비어 있었다.
“나쁜……년!”
빈 공간을 본 창배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치 무슨 흔적이라도 찾으려는지 바닥을 살피던 창배는 돈 담은 박스를 쌓아 놓았던 벽 밑에서 글이 써진 종이를 한 장 발견했다.
개업식을 알리느라 현관 문틈으로 집어넣은 온 중국집 전단지 뒤에 급하게 흘려 쓴 편지였다. 창배는 단박에 정아가 쓴 것임을 직감했다.
최창배 볼 것
뭐, 나와 만나면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었다고. 정말 웃겨. 너 만일 네가 사장으로 있던 유진 나노테크가 안 망했으면, 네가 말한 그 의원 딸과 결혼했을 거 아니냐. 천만다행이다. 회사 망하고, 너 교도소 가서. 근데 좀 아쉽다. 그곳에서 더 썩어야 할 텐데, 일찍 나오게 돼서. 뭐, 내일 나온다고? 그래서 오늘 왔다 간다. 한없이 나를 찾아 나설 네 꼬락서니가 불쌍할 것 같아. 이제 더 이상 날 찾지 마라. 그리고 이곳에 쌓아놓은 지저분한 박스들은 너 교도소 간 다음 내가 다 고물상에 가져다줬다. 앞으로는 네 꼬락서니가 그래도 지저분한 그런 것 좀 치워 가며 살도록 해라. 나는 이런 데서 죽어도 못 산다.
-정아-
“이, 이런……!”
편지를 다 읽은 창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교도소에서 자신의 부탁으로 이곳을 다녀간 형의 이야기를 들을 때까진 그래도 무슨 연유가 있었겠지, 하는 미온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이제 그 일말의 희망이 사라져 버린 지금 창배는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