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확실히 대아 빌딩 옆쪽에 있는 게 맞소? 한 오 분 내로 사람이 도착할 거니, 진득이 좀 있어 보오.”
조만호 회장이 직통 전화기를 요란하게 내려놓는 소리에 놀란 정아는 하마터면 갖고 들어오던 녹차 잔을 쏟을 뻔했다.
“선거 때가 돌아오니 바쁘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해외에나 나가 있을걸. 정권이 바뀌면 좀 나아지려나 했더니…….”
정아는 그제야 요즘 자신의 늦은 야근이 곧 코앞에 닥쳐온 총선과 관련이 있음을 알았다.
그간 회장은 꼭 할 일도 없는 데도 퇴근도 않고 우두커니 사무실에 앉아 있어 무슨 일인지 궁금했었다. 그러다 이따금 어디로 전화를 하거나, 아니면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서둘러 퇴근했다.
정아가 찻잔을 내려놓고 나가려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궁금한 터라 모른 척 정아가 얼른 받았다.
“회장님, 자금부 최종호 이사입니다.”
조만호는 정아에게서 전화를 건네받았다.
“응. 그래. 수고했어. 들어올 것 없어. 전화론 얘기하지 마……. 자세한 건 내일 아침에 직접 들어와 보고 해.”
조만호는 시계를 보았다. 열 시 반이 지났다. 빨리 한 번하고 가면 열두 시까지는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만호는 요 근래 들어 이상하게 아내의 히스테리가 더 심해졌다고 생각했다. 나
이 들었어도 가끔 한 번씩은 해줘야 한다고 마음은 먹고 있는데도 집에서는 그게 잘 되지가 않았다. 그것은 주위에 젊은 애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아야!”
“예…….”
“이리 와 어깨 좀 주물러라.”
정아는 조만호가 앉아있는 뒤로 가 그의 양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으나 피곤해서 인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네가 오늘은 어찌 힘이 없는 것 같구나. 그만하고 이리 온.”
정아는 조만호가 시키는 대로 그의 무릎에 걸터앉았다. 조만호가 정아의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자 정아의 분홍색 브래지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만호는 브래지어를 위로 들어 올려 정아의 가슴에 입을 갖다가 댔다.
“여긴 싫어요. 안으로 들어가요.”
정아가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늦은 시간이긴 해도 문득 창가에 설치해둔 도청기에 신경이 쓰였다. 조만호는 일어나 침대가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
조만호가 옷을 벗기기 전에 정아는 스스로 먼저 벗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 시트를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이어 조만호가 옷 벗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랫배가 축 처져 늘어졌다.
이윽고 옷을 다 벗은 조만호가 시트를 제치고 들어오자 정아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입에 조만호의 수염이 꺼칠하게 와닿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정아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조만호와 몸을 섞게 된 것은 모두 창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은 회장에게서 의도적으로 요리조리 몸을 피해왔지만, 창배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만호의 내부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은 오늘 같은 경우도 회장이 자금부의 최 이사를 시켜 누구에겐가 돈을 보내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에 얻어낸 것이라고 자위했다.
“내려오세요.”
정아는 빨리 끝내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조만호를 눕히고 그의 배 위로 올라갔다. ‘
“으윽…….”
조만호는 신음을 내뱉으며 금세 죽은 듯 무너져 내렸다.
***
창배가 잡지 청맥의 고문인 심병수 의원 집의 벨을 누른 시간은 토요일 저녁 아홉 시경이었다. 미리 방문 약속이 되어서인지 벨을 누르자 방문객을 확인도 않고 곧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일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심병수의 부인일 거란 예상을 뒤 업고 앞에 선 사람은 뜻밖에도 젊은 여성이었다. 젊은 여성은 가볍게 목례를 하곤 곧 심병수가 있는 서재로 창배를 안내했다.
“응. 자네 왔나?”
심병수는 붓글씨를 쓰다가 창배에게 고개를 돌려 아는 체를 했다.
“이리 좀 앉지.”
심병수는 방석을 집어 창배 앞으로 밀었다.
“급히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아. 당연히 급한 일이니 왔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집에까지 왔겠나. 그래,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 보게.”
창배는 갑자기 얘기를 꺼내려니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실은…….”
일주일 전 외부에 있던 창배는 조만호 회장실로 지금 빨리 들어오라는 조영기 사장으로부터 급한 호출을 받았다.
부지런히 차를 타고 들어가면서도 조영기 사장이 찾는데 왜 조만호 회장실로 오라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회사에 도착해 회장실에 들어가자 조영기가 한쪽에 앉으라고 슬며시 눈짓했다. 안에는 조영기를 비롯해 계열사 사장 몇과 박두식 전무가 모여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창배는 사장들 틈에 끼이게 되자 잠시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조만호 회장이 하는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대책들 좀 있으면 얘기들 해 봐. 진산이나 일성, 대호 같은데 서는 이걸 먹으려고 계열사 사장들이 눈이 벌게져 인맥을 찾고 난린데, 우리는 대체 뭐들하고 있는 거야. 어디 힘쓸 만한데, 아는 곳들 없어?
조만호 회장의 목소리엔 사장들의 무능함에 대해 노여움이 배어있었다.
창배가 대충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국토해양부와 해군이 주축이 되어 서해안인 태안 쪽에 남북통일에 대비해 대규모의 항만을 건설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화성이나 진산, 일성, 대호 등 항만건설 실적이 있는 회사들 중의 하나를 결정해 곧 대통령의 재가를 받을 예정인데 그 선택이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이 공사가 완공되면 군산 등 몇 개가 더 추가로 건설될 예정이라, 각 그룹에서는 그룹의 사활을 걸고 총력적으로 모든 기관의 인맥을 동원하고 있었다.
창배는 그 순간 박두호가 데리고 왔던 잡지 청맥의 심선봉의 작은아버지인 심병수 의원이 떠올랐다.
그의 형인 심병학이 대통령과 정치 이념을 같이 해온 정신적 후원자가 아니었던가. 심병수 같으면 능히 형인 심병학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배는 그때 이미 심병수를 한 두어 번인가 잡지를 핑계로 만나 알게 되면서 적지 않은 돈을 줘 왔었다. 조영기가 이것 때문에 겨우 차장인 자기를 불렀고 이 일에 답할 수 있게 되자 창배는 갑자기 가슴이 확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 알 만한 곳들이 없어?
제가 알아보죠.
모두가 묵묵부답인 가운데 박두식 전무가 일어나 말했다.
제 고등학교 동창 놈 중의 하나가 해병대 사령관을 하는 놈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토해양부에도 대학 때 친한 친구가 한 두어 명쯤 있습니다. 제가 이 삼 일내로 한번 해결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박두식의 말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이미 다른 업체에서도 그만한 인맥, 이상을 동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창배는 자기가 한번 알아보겠다고 하고 오늘 심병수의 집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깐, 자네는 내가 형님을 찾아가 대통령에게 한번 부탁을 하도록 하라는 얘기 아닌가.”
“그렇습니다. 사실 로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비슷한 조건에서 결정되는 거라면 한 번쯤 부탁을 드려도 별문제 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창배에게 문을 열어 준 여자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내 딸, 정미네. 와이프는 친구들이랑 놀러 갔어. 내일 저녁이나 올 거야. 난 딸만 둘이거든 얘 언니는 미국에 가 살고.”
창배는 찻잔을 내려놓는 심병수 딸의 모습을 슬쩍 훔쳐보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곧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의 아버지 때문인가. 이제까지 봐 온 다른 여자들과는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미색의 원피스에 단정하게 빗어 내린 생머리는 마치 한 떨기 백합을 보는 것 같았다.
“글쎄, 그거 참. 어려운 일일세. 내 부탁이라면 형님이 마다하기가 어렵긴 한데. 자칫 형님이 평생을 깨끗이 살아온 도덕성에 흠집을 낼까 그게 두렵네. 게다가 형님은 워낙 대쪽이라서…….”
“한 번 만 도와주십시오. 후에라도 탈락한 나머지 다른 회사들이 문제 삼지 않습니다. 암암리에 서로 그런 것은 전부 이해가 되어있습니다.”
“허, 그거 참……!”
심병수는 아주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한번 부탁을 해 보겠네. 내가 자네한테 졌구먼. 자네가 청맥에 광고를 주고 나를 찾아올 때부터 내가 자네를 눈 여겨봤었네. 자네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하면 잘 할 걸세. 세상에 기사를 자기가 써서 내달라고 들고 오는 놈이 어디 있나. 하하하.”
“고맙습니다. 조만간에 사모님하고 가족분을 모시고 저녁 대접을 한번 하겠습니다.”
“그래. 그 일은 걱정 말고 그만 가보게. 이크, 벌써 먹물이 다 말라 가는군.”
“차에 싣고 온 박스는 아예 안에 옮겨 놓고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