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천수검 일행은 궁모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소궁주를 데리고 외부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울며 보채다 실신한 소궁주를 품에 안은 환요는 눈앞에 흐르는 수로를 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먼저 들어갑니다.”
궁모가 마음에 걸려 잠시 망설이다가 저들이 궁모를 차마 해하지는 못할 거라 애써 자위하며 수로 속으로 뛰어 들었다.
환요가 뛰어들자 천수검을 비롯한 나머지들도 수로 속으로 연이어 뛰어 들었다.
풍덩, 풍덩.
물은 턱 밑, 높이까지 차올랐다. 움직임이 쉽지 않았으나, 하나같이 고수들답게 물속에서도 경공을 펼치며 물살을 따라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수로가 끝나는 부분에 도착을 했다. 암흑처럼 그 속을 알길 없는 절벽 속으로 물이 빨려들 듯 흐르고 있었다.
천수검은 환요를 쳐다보았다.
“괜찮겠소?”
천수검의 염려에 환요는 소궁주를 자신의 몸에 단단히 꼭 묶으며 답했다.
“예. 괜찮아요. 저는 걱정 마세요.”
천수검은 뒤로 돌아 손으로 신호를 하고서 환요와 함께 물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모두들 조심해서 따르라.”
천수검과 한요가 물속으로 사라지자 진 부장의 명령에 수하들은 두려움도 없이, 한차례 깊게 숨을 쉰 뒤 따라서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얼마 후에 소궁주 일행을 뒤쫓던 갈배상 장로 일행들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뭐야! 이런 곳에 궁을 빠져 나갈 수 있는 수로가 있었다니, 빌어먹을. 크아아악!”
서걱.
촤아악.
설마하니, 이런 곳으로 도망을 가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한 갈배상은 홧김에 똑바로 감시 못한 수하의 목을 처 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대며 눈앞에 놓인 바위를 도로 내리치고는 화를 달랬다.
콰가각.
수로를 앞에 두고 불같이 화를 내던 갈장로는 수하들에게 곧바로 추격하라고 말하려다 가까스로 진정하며 그만두었다.
잘못 쫒다가는 수로 속에서 오히려 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빨리, 수공이 가능한 자를 차출해라!”
“예. 장로님.”
기본적이지만, 수공을 익힌 밀궁의 검수 사십여 명이 선발되었다.
“놈들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두 척살하라!”
“예, 장로님.”
첨벙, 첨벙.
갈장로의 서슬 퍼런 도를 앞에 둔 무사들은 주저 없이 모두 물속으로 도망치듯 뛰어들었다.
소궁주 일행은 알길 없는 암흑의 수로 속을 통과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내공이 약한 몇 명의 무사들은 힘겨웠으나, 죽기를 각오한지라 낙오되지는 않았다.
환요의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쯤, 다행히도 잠시 쉴 수 있는 작은 동공이 나타났다.
먼저 도착한 천수검이 재빨리 손을 잡고 끌어 당겨주었다.
“여기 내 손을 잡으시오.”
“네. 후우우.”
나머지들도 속속 하나 둘 도착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숨을 골랐다.
인원을 점검한 진가철 부장은 소궁주가 보고를 받을 상황이 못 되는지라 대신 천수검에게 보고를 올렸다.
“천수검님. 전원 이상 없습니다.”
“수고했네. 진부장도 잠시 쉬게나.”
환요는 소궁주가 몸에 이상 없는지 확인한 다음, 화령과 적표를 살펴보았다.
이 둘은 궁주에게 종속 되어있는 강시로 주군인 궁주의 명령으로 소궁주를 보호하기 위해 따르는 중이었다.
‘궁주님은 괜찮으시군.’
이 둘의 행동이 평소와 크게 다름이 없자 일단, 궁주의 무사함에 환요는 안심했다.
천수검은 충분히 쉴 틈을 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담은 얼굴로 환요에게 당부를 했다.
“온 만큼만 더 가면 수로를 벗어 날거요. 하류에서 만납시다. 몸조심하시오.”
“예, 천수검님도 조심하세요.”
“모두 기운을 내게. 지금은 소궁주를 모시고 무사히 멀리 나가는 것이 밀궁과 궁주님을 위한 것이네.”
“예, 천수검님. 목숨을 다해 소궁주님을 모시겠습니다.”
천수검은 강 하류에서 만나기로 다짐하고서 모두의 무사함을 바라며 환요와 함께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화령도 적표와 함께 소궁주를 안고 물속을 유영하는 환요를 놓치지 않고 잘 따라 붙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환요를 잘 따라가던 화령은 갑자기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아윽! 머리가 너, 너무 아프다······.’
그렇게 머리가 터질듯 한 고통에 온몸을 비틀며 몸부림치던 화령은 얼마 못가서 그만, 혼절해버렸다.
시야도 어두웠고, 모두가 궁을 벗어나는데 전력을 다하느라 경황이 없기에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화령은 물살에 이리저리 몸을 맡긴 채 흘러 가다가 중간에 작은 동공이 있는 곳으로 슥 쓸려 들어가 버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안.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인 이곳에 묘령의 여인이 물에 젖은 채 꼼작 않고 누워 있었다.
아마도 가슴 부위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양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안쪽 벽에 박힌 천연 야광주에서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동굴안 분위기를 오묘하고, 괴기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야광주의 빛이 점점 밝아지더니, 살아 있는 것처럼 여인 쪽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것이 아닌가?
스르르륵, 스르르륵.
무언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내며 정체불명의 발광체가 쓰러져 있는 여인 쪽으로 움직였다.
여인의 머리맡에 멈춘 그것은 놀랍게도 거대한 구렁이 같기도 하고, 지네 같기도 한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뱀의 몸에 단단해 보이는 지네의 껍질을 한 이것은 다름 아닌 전설로 내려오는 독중지왕인 흑갑사왕이었다.
옛 문헌에 따르면 흑갑사왕은 천하의 영물 중에서 제일 윗줄에 놓이며 이무기와 함께 전설상의 용이 되지못한 영물이라고 기록되어 전해졌다.
그런 무시무시한 흑갑사왕이 이런 곳에 똬리를 틀고 있으리라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키르르르르.
흑갑사왕은 쓰러져 있는 사람이 썩 맘에 드는 먹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낮게 깔린 괴기스런 소리를 내며 여인의 몸 여기저기를 긴 혀를 날름거리며 살폈다.
한참을 검은 혀를 날름거리더니 머리를 곧추 세우며 만족한 듯 울어댔고, 머리 중앙에 옥처럼 돌기가 난 곳에서는 푸른빛이 더 진하게 뿜어 나왔다.
카르르르륵.
의식을 잃고 죽은 듯이 누워있는 여인은 소궁주의 호위를 위해 밀궁을 빠져 나온 기세훈 궁주의 호위대 자혼 강시인 화령이었다.
아마도 궁주의 신변 이상으로 대법이 깨져 혼절한 것이리라.
대법이 깨진 강시는 자아를 상실한 채 피아를 구분 못하고 미쳐 날뛰다가 결국, 폭주해 사망하기에 이른다. 화령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이때는 강시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마병기로 변하는지 몸소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폭주는커녕 반대로 세상모르고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런 화령에게 때 아닌,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흑갑사왕은 화령의 배 위쪽으로 꼬리부분을 바짝 세웠다. 잠시 뜸을 들이다 꼬리가 배 부분을 노리고 엄청난 속도로 내리 꽂혔다.
움찔.
파앙.
날카롭고 단단해 보이는 꼬리로 화령의 단전 부근을 뚫으려 했으나 실패 했다.
강시의 특성상 단단한 신체를 지녔기도 했고, 무의식중에도 몸이 위험을 감지해서 방어 했기에 뚫지 못하고 약간의 상처만 남기고 튕겨 버렸다.
키이이이익.
흥분한 흑갑사왕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괴성을 지르며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드드드.
동굴 벽이 흑갑사왕의 몸부림으로 부서질 듯 진동했다.
흑갑사왕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한 번 시도를 위해 화령의 배 위로 꼬리를 세웠다.
이번에는 혼신의 힘을 다하려는지 몸 전체가 한동안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세워진 꼬리 끝에서 검은색의 진한 액이 물방울처럼 맺히더니, 똑 하고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이.
떨어진 건 다름 아닌 흑갑사왕 독의 정수인 흑정이었다. 흑정이 떨어진 부위가 이내 벌겋게 변했다.
푸우욱.
꼬리 부분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단전 부근을 파고들자 화령의 몸이 반응하며 움찔거렸다.
흑갑사왕의 배로 짐작되는 부분이 요동을 치더니 무언가 불룩 솟아오르며 꼬리 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꼬리를 통해서 화령의 몸으로 들어간 것은 흑갑사왕의 알이었다. 흑갑사왕의 알은 천고의 둘도 없는 보물로 알려졌으며, 그 자체가 내단 이기도 하면서 알이기도 했다.
기운이 다 빠졌는지 꼬리를 그대로 둔 채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부르르르.
한참 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흑갑사왕은 서서히 화령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고, 몸 크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조금씩 줄어 들어갔다.
이유는 화령의 가슴부터 아랫배까지 칭칭 감은 흑갑사왕이 일체 움직이지 않고, 오랫동안 몸에 축적된 영력을 알의 숙주로 여긴 화령의 몸에 남김없이 주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흘이 넘도록 이어지며 영력을 전이한 흑갑사왕은 단단한 비늘 같은 가죽만이 남기게 되었다.
키이이이이.
오천년을 넘게 살아온 천고의 영물인 흑갑사왕은 마지막으로 구슬피 울며 한? 많은 생을 이렇게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