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은 제이미가 부산떨며 나가고 나서 말없이 커피를 한잔 더 준비했다.
'부산떨다' 정말 그에게 어울리는 ... 그야 말로 어울리는 말이다.
까망이 녀석에게 느껴지는 옅은 배신감이 마음에 씨앗마냥 걸려 불편했다- 내 손만 좋아하는줄
알았으나- 그 녀석은 순순히 제이미에게 부르면 부르는 대로 작은 발로 도도도 달려갔다-
동물은 인간보다 직감이나 본능적인 눈치가 빠른 줄 알았는데- 그런것도 아닌가 보군- 뒤에 무슨 꿍꿍이를 숨겼는지 알수가 없는
놈을 선뜻 따라갈 줄이야-
지혁은 괜히 신경질이 나 까망이가 가지고 노는 조그만한 쥐 모양 인형을 잡아 집어 던졌다-
제이미의 짐은 거대한 송아지 사이즈 정도는 되었다- 소파 뒤에 내려 앉은 큰 짐- 휠체어로 툭툭 밀어봤지만
달라질 일은 아니다- 장 하임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혼자 오해하는 걸... 그래 가만 둘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싫었다- 그러기가, 싫었다- 누구에게나 노코멘트로 일관하며 살아왔는데- 왜 그녀는 그대로 둘수가 없는걸까-
그녀가 오해하는게 싫다- 그녀가 내게서 도망가는게 싫다-
지혁은 스스로의 감정을 선뜻 이해할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게 먼저였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가지런하고 작은- 똑똑똑 소리-
"들어와-"
자신의 목소리가 한 템포 높아지는 것 처럼 들려왔다- 민망하게도-
고개를 내미는 장하임이 보였다- 눈 밑의 전엔 본적 없던 약간의 그늘- 그리고 여전히
말간- 어린애같은 얼굴- 한번도 본 적 없는 베이지에 가까운 , 노란 원피스 차림-
"안녕하세요?"
장 하임이 필요보다 말의 끝을 높여 내게 물어보며 천천히 들어섰다-
나는 그녀를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단 걸 눈치채고 고갤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안녕하진 못하지만- 안녕하다고 해야겠지-"
장하임은 낮게 덧 붙인 그 말에 살짝 셀쭉거린다 낮게 쳇 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입은 여전하네요-"
천천히 탁자로 향하자- 장하임의 눈이 따라붙다가 그녀가 먼저 의자를 빼서 치워준다-
이것 참 모양 빠지는 일이다- 나는 "고마.. 흠" 이라고 고맙단 인살 얼버무렸다.
장하임은 그걸 콕 짚고 넘어간다-
"고맙단 말을 하는거면 똑바로 하지- 뭐라는 거에요-"
하나하나 걸고 넘어지는 이 여자가- 미워야 정상인데- 내 맘이 왠지 흐뭇하기까지 한 내 자신을 이해할수 없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만다- 엄격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는데 말이다.
"알아들었으면 그냥 좀 넘어가면 안되나?"
장하임은 씩 웃는다- 상큼하다고 해도 좋을 얼굴로- 얼굴빛은 전혀 아니면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내민다- 그동안 몇번 빠지다 보니 그림이 많이 모인 모양이다-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언제나 그렇게 느끼지만 보기와는 달리 이 여자는 굉장히
착실하다- 실력도 좋지만, 착실하기도 하다
"커피 한잔 줘?"
진지한 대화를 앞두고 나는 다소 긴장해서 물었다-
그녀가 물어올것은 뻔했다 , 그녀는..... 궁금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 있으니까
"...커피는 안 마실래요, 영 머리가 아파서요- "
"왜 머리가 아프지?"
스쳐 지나가듯이 물었다. 그렇게 들리기를 바라면서-
"잠을, 잘 못 자서요"
....
나는 말 없이 냉장고로 향했다- 비타민 음료 하나를 꺼내 건냈다-
"고마워요- 그렇게 수고 스럽게 안 가져다 줘도 되는데요-"
...
그 수고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 듣는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수고로울꺼 없어, 익숙하다고 했잖아-....."
그녀는 휠체어를 흘깃 응시한다- 나에게는 더 없이 익숙한데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제이미도 장하임도 익숙해 지진 않은 모양이다 - 하긴 그게 자연스러운
내가 이상한거겠지-
그림을 훑어 본다- 점점 꼼꼼해지는 묘사들이 맘에 든다- 책을 한장씩 가져가는 족족 4-5장을 그려내니-
이 속도라면 이번 해가 끝날 즈음엔 무난히 끝날것 같다-
이 여자가 서두르고 있지 않길 바라는 건, 책이 끝나지 않길 바라는건
이번이 처음이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하는 말이겠지만 - 확신이 없으니 말할 자신도 없다-
내가 지고 있는것들을 버리고 달려가서 쟁취해야만 하겠다는 어떠한 확신
내가 쓰레기 같은 놈이 되더라도- 저질러 놓은 것들도 피해서 도망치고
입 밖으로 내었을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을수 있다는 어떠한 확신............
나에게는 어떤 확신도 없다. 손에 쥐고 있는 확실한 사실은... 아직도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오전의 빛이 드는 따스한 , 우리만의 시간-
우린 아무 말 없이 내용을 체크하고 내가 집은 것을 장하임은 살핀 뒤 컬러링 할 것을 셀렉한다
그러다 장하임이 툭 물어왔다-
"발 다친건... 좀 어때요?"
그녀는 걱정스럽다기 보다는 이젠 이런 질문이 지겹다는 듯이 물어왔다.
"쉽게 나아질 것이 아니야- 베였으니까..."
그녀는 내 얼굴의 상처를 보면서 살짝 찡그렸다. 장하임의 저런 점이 좋다-
나를 쉽게 딱해하지 않는 것 - 동정하지 않는것-
안타까이 여겨주고 동감은 하지만 동정은 하지 않는 점-
어린아이 혼내듯 오히려 칠칠맞게 다치고 다니냐는 식으로 말 해 주는것-
나의 패이고 깊은 상처들이 마치- 놀이터에서 놀다 넘어진 상처쯤인 것 처럼
별거 아닌 일 처럼...
그렇게 가벼이 만들어 주는 점....
"못 씻겠군요 그렇게 씻는걸 좋아하는데 -"
살짝 놀리는 듯한 말투다-
"그러게 말야-"
그 말에 머리가 다시 가려워 지는것만 같다-
그 말 뒤에 그녀는 문득- 물어왔다..
"그 얘기 .. 해 줄건가요?"
.........
결국 끝내 그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내 입매는 딱딱하게 굳었을 것이다-
"알고 싶어요-... 뭐......... 그렇다고 당신을 그렇게 긴장시키고 싶진 않거든요-"
못된말투
"못되게 말 하지마-"
-
작약은 머리에 떠오른 말을 그냥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조금 뾰족하게 내뱉자
작약은 살짝 한숨을 끼고는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굉장히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하고 싶진 않은 ... 혼내는 듯한 오빠같은 태도-
내가 이걸 좋아하는걸 눈치챈다면 날 변태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귀여운건 사실이다- 다른 면에선 멈춰있는 사람이 어른인 척 , 다 자란 척 하니
왠지 귀여워 지니까....
"못되게 말 한거 아닌데.... 그냥 힘들게 말 하지 말았으면 해서요-"
작약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궁금한게 뭐야.."
"어제 테라스에서 마주친 외국인이... 누군지...?"
"........"
"대충 예상은 해요-"
그는 내 말에 - 말을 천천히 꺼냈다..
"그래.. 그렇다면 예상 대로야- 하민이 친구야-... 하민이는 어릴 때 외국에서 줄곧 자랐어- 가족같은 친구야-
하민이 어머님이 내게 부탁... 하셨었어- 받아들이기가 쉽질 않아서- ... 그동안 좀 서로 힘들었지-
그런데 어제 찾아왔어- 요령있게 설득했고-... 잠시 여기서 지내게 했어- "
작약은 몹시 못마땅 하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물론 후회하지만-..... 어쩔수 없으니까-..... 내가 뱉은 말이니.. 책임은 져야지-"
나는 당연한 점을 지적했다.
"싫으면 왜 여기 있게 했어요?"
.........
작약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눈을 우아하게 늘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하민이 어머니 , 부탁이었으니까-"
나는 더 말할수 없었다. 작약과의 대화는 늘 이렇다 위험한 전선이 가득한 폭탄 속에 있는
부품을 하나하나 핀셋으로 꺼내는 듯한 기분이 들고 만다-
뭔가 잘못 건드리면 폭발해 버릴까봐 난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고 만다.
안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 사람의 기억은 너무나도... 위험이 가득하다.
이 사람이 편하게 숨 쉬었으면 좋겠다- 햇살아래 반짝반짝-... 사실 다 놓아버리고
나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이 나로 만족할수만 있다면....
내가 그렇게 해 줄수만 있다면........
혼자 우울한 망상에 잠겨있자 , 그는 몹시 건조한 목소리로 덧 붙였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항변하는 것 보다는 간단한 팩트를 전하는 것 처럼 만 보여졌다-
"난 다른사람 말은 거절할수 있어-.... 하지만 세상에서 단 두사람 말은 거절 못해-...
아니... 세사람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두 사람의 말은 거절하지 않으려고 애써.... 온 힘을 다해 매달려-"
두사람과..... 세사람이라고?
"어머니와 , 하민이 어머니.... 그 두분의 말은 들어드리고 싶어-아니, 들어드리려 애쓰지"
나는 마른 입술을 그가 가져다 준 음료수로 살짝 축였다. 말을 하고 있는건 작약인데 왜 내 입술이 바짝 바짝 타는지
"........ 두분은 내가 한 일로 끊임없이 고통 받고 계시니까..."
그 말을 하는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끊임없이 제 입술을 잘근잘근 이유 없이 깨물어댔다
그건 괴로워서인지 복잡해서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그러했다.
"이상한 일이지- 어느날 찾아온 여자친구의 친구라니-...한국말을 잘해- ... 나 같은 사람에게 며칠 묵게 해 달라고
억지를 쓸 만큼-.. 변죽이 좋기도 해-.. 그런 점들이 말하자면 좀 불쾌하기도- 싫기도 한데"
그는 그 대목에서 살짝 웃었다. 자세히 안 봤다면 못 믿을만큼 살짝,
그리곤 잠시 망설였다. 이 얘길 해야 하나 싶은 표정으로
"그런 감정보다도- 처음엔 질투가 먼저였던거 같아- 우습게도.... 참으로 유치하지- 하민인 한국에 돌아와선
친구라 말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곳에선 혼자였어- 그것때문에 외로웠을 텐데- 스스로 등진 나도
가끔은 굉장히 외로웠는데.... 그앤 어땠겠어.... 그런데 내가 모르는 시간을 내가 느껴본 적 없는 그 아이의
어린아이 시절을 이 남자는 다 알더라구-... 그리고 무엇보다 당당했어...."
나는 그저 그 말에 담긴 진심에 다치고 만다. 이 부러울것 없어 보이는 투명한 얼굴의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질투라는 단어에... 그 단어에 나는 그만 또 질투하고 만다.
잠들었으면서도 이렇게 힘 있게 이 쉽지 않은 남자를 휘두르는 장하민 씨를
또 질투하고 만다.
"당당하게 말하더군- 자신이 하민이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고-.. 그러니 나를 도와주고 싶다고-
처음엔 그게 경기를 일으키게 싫었어- 그래.. 어쩌면 저 남자가 하민이를 더 잘 알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내가 이꼴이 되어 살고 있으니 돕고 싶어하는구나 싶어서.....
그래.... 자격지심이지... 예전엔 이렇게 발끈하는건 열등감의 표시라고 생각해서라도 , 절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는데-
많은걸 잃고 나니까 발끈하는것도 순식간이야-"
그는 나를 보면서 다시 씩 웃었다 이번엔 내가 무의식 중에 볼을 붏힐만큼 매력적으로
"믿기 어렵지-"
"........."
"당신에게는 다 털어놓게 되는군 - 바보처럼 말이야-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까지도
술술 털어놓고 말아-"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 후회하나요?"
....
그는 내 말에 살짝 놀란듯 했지만 대답했다.
"가끔은, 나 때문에 안 받아도 될 상처를 받는다던지- 당신의 눈이 지나치게 안타까운 빛을 띄면-
괜한 짓 했다 싶기도 해-"
나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곤 그는 되 물었다.
"당신도 후회하나? 이런 이야길 듣게 된 것을?"
....
"어떨때는 좋기도- 어떨때는 그저.. 당신을 괴롭히며 이런 얘기를 억지로 끌어내야 하나 싶어서
미안하기도 해요-"
나는 비교적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이- 또 그가 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남의 상처는... 그저 남의 상처로 두란 말.. 전에도 했었던거 같은데....... 안 그럼 당신도 다친다고 했었지 않았나.."
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곤 뜬금없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머리 숙이고 감으면 되지 않을까요? 찝찝하면.."
그는 대답을 피하는 군 이란 표정을 굳이 뱉지 않아도 선명하게 알 만큼 지었다.
"아 지금은 서서는 못 감겠네요-... "
"실밥 금방 뽑을텐데... 안되면 샵에 가서 감으면 되 , 신경 쓰지 마-"
"그럼 그 사람은.. 지금은 어디갔어요?"
그는 그 말에 놀란 듯 잠시 멈췄다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이런 얘기 - ... 어떻게 당신에겐 하겠는데... 그 사람 앞에선 할 자신이 없어서-.....
왠만하면 나가 있었음 해서 잠시 나가달라고 했어- "
"그 사람하고 내가 만나는게- 불편해서는 아니구요?"
그렇게 말할 의도는 없었는데 말이 조금 뾰족하게 나가고 만다. 그 목소리를 알아챈 작약은
눈빛이 짙어진다. 어떤 순간부터- 작약은 내 눈을 피하지 않는다- 내 눈을 바라본다-
깊이를 알수 없는 그 눈으로 나를 진득하게 바라본다- 나는 그 눈빛앞에 오히려 맘이 아파온다.
그 순간이 행복한데- 좋은데.. 내가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닐까, 나에게 그 여자의 빈자리를 투영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저속한 의심을 해야하는 내가 싫다. 그런 의심을 하면서도 결국 그 눈에 깊이 빠져드는 멍청한 나도 싫다.
"그래 그런것도 있어- "
작약은 의외로 순순히 인정한다. 왜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가 먼저 말했다.
"당신과 하민이 문제는 나에게 완전 다른 문제였으면 해- 그래서 그랬어 "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다.
사실 그 답지 않은 말이었다. 작가로써 언제나 조리있게 얘기하던 그였는데.. 이 문제만은 단어의 선택이
이상했다. 한번엔 알아 듣지 못할 문제처럼-
"분야가 다른 문제야.... 복잡하게 느껴지겠지만 나에겐.. 적어도 그래-기분 나빴나? 그래서?"
완전히 다른 문제였으면 한다-... 그 말은 순간의 질투심을 종식 시켰다.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내가 웃자 그는 어이없고 허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내가 문제인가요 당신한테?"
나는 실실 웃으며 묻고 말았다 그것이 어떤 뜻인지도 확실치 않으면서-
그는 슬쩍 웃더니 대답했다.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야-"
우습게도 우리 사이의 시간은 그 말 한마디로 솜사탕처럼 폭신폭신 부드러워졌다-
-
제이미는 까망이에게 어깨 끈을 걸고 안고 있었다. 날이 좋았다- 까망이는 떨어질 염려는 없어 보였다.
제 발로 걷고 싶지도 않은 것 같았고 - 어깨 끈은 단지 놀라서 뛰어 내릴까봐 걸어 둔 거였다-
녀석의 이름은 까망이라고 했다. 멋대가리 없는 이름이었지만 그 남자가 지었을리는 없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그 남자가 지었다고 하기엔 말도 안되게 깜찍한 이름이었으니까...
잠깐 걷다가 도착한 동물병원은 한적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일수도 혹은 원래도 오전엔 한가한지는 알수 없었으나
나는 밝게 웃으며 들어섰다.
"....하이?"
내 얼굴을 보고 간호사 인듯한 여자가 어색한 영어를 건냈다. 나는 더 웃으면서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검진? 받으러 왔어요-"
한국말로 말하자 여자의 얼굴이 티 날 정도로 안도한다-
"그러세요? 아가 이름이 뭐에요?"
"네?"
아기?.....
무슨 소린지 몰라 어색한 표정을 띄자 간호사가 빠르게 대답한다-
"아- 고양이 이름이요-"
"... 까망이에요-"
순간적으로 이런 단어들은 캐치가 안된다 아직도- 확실히 말 많이 하면 억양은 금방 금방 늘었지만 말이다-
곧이어 나를 부르고 나는 거리낌 없이 안은채로 진료실로 들어섰다.
진료실에 앉아 있는 남자는.....
바보같지만- 유치하지만-
완전 히트였던거 같다.
내 마음을 단숨에 유약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연약한 인상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
나는 순간에 살짝- 반했다- 본능적으로 웃음이 매력을 띄려고 환한 웃음을 띄었다.
그래선 안된다는 걸 알면서- 이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도-
나에 대한 인식이 어떨지도- 그런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도
다 잘 알면서도- 조금은 그랬다. 말도 안되게도...
의사는 내 눈을 보곤 어색하게 일단 씩 웃었다. 그러곤 까망이를 알아 본 듯 했다-
"어... 너- 저번엔 다른 분이랑 왔었는데.......?"
그러곤 나를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잠시 제가 대신 왔어요-"
내 목소리가 의도한것 보다도 친절하고 부드럽게 나선다.
의사는 눈에 띄게 안심한다. 그것이 간호사 처럼 한국말이기 때문인줄 알았는데
찬찬히 지켜보니 그 남자가 다녀갔을때 여간 겁이 났던 모양이다-
남들한테도 이러고 다니니... 민폐라고 밖에 말할수 없다. 멋 없는 남자. 나는 씩 웃고 만다,
"뭐 검사하러 오셨죠?"
나는 그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아... 예방주사? 필요하지 않나 해서요-"
"전에 맞을만한 건 확인하고 갔는데-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라텍스 장갑을 낀다- 살짝 홍조 띈 붉은 손-
남자의 머리가 정말 부드러워 보인다- 동양인에게 잘 없는 얼굴같이 느껴진다-
확실히-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쪽은 이런 쪽이다- 지혁처럼 차갑고 딱딱거리는 인상이 아니라-
물론 지혁은 아름다운 남자다- 뱀파이어에 비견될 만큼 희고 짙은 눈도- 그러나 그런 인상과
같이 있으면 제이미는 오히려 피곤하다고 느낄 뿐이다- 같이 있을때 행복해 보이는 인상이 좋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지혁은 안도할까 , 아니면 조금은 화를 낼까- 언제나 화를 잘 내는 그 답게.. 조금은 화를 낼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라면 신경도 안쓴다는 듯 콧방귀를 뀔 타입이다-
그러나 자신은 멍청하지 않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슬쩍 다가서거나 하지 않는다-
그런 점은 예민한 편이고 , 알려지는 것도 사실 원치 않는다- 지혁의 경우엔 어디까지나 자신을 너무나 경계하고
선을 조금만 넘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수준이니까 내 큰 비밀을 털고 가면 조금이라도 나를 편하게 생각할까 해서였다.
자신의 생각은 맞았다. 그게 질투심에서 비롯된 거였고- 처음부터- 의도 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 말이 그런 거품을 걷어 내는데도 한 몫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눈 앞의 이 남자가 매력있는 남자인것은 맞다- 이유없이 이 병원에 자주 올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멍청하게 자신이 여고생보다 더 쉽게 사랑에 빠진단 생각을 한다-
단지 호감뿐인데도 그런 생각까지 하다니- 스스로 창피할 지경이다-
에릭과의 첫 만남이 생각나고, 에릭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마 평생이 가도 말을 못 걸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은 의외로 이런 면에선 소심하다.
거절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하자 에릭은 웃었다.
'아니면 말고 , 그러고 마는거지 왜 그렇게 긴장을 하냐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는 나라에서-'
.....
여긴 다른 곳이니까- 그는 자신의 마음에 핑계를 붙인다.
그래도 보면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챌수 있는데... 아무런 느낌도 느껴지질 않는다-
아마도 당연히- 아닐것이다- 모르는 바가 아니다-
남자는 어린애같이 작은 손으로 까망이를 훑는다. 조용히 중얼댄다.
"요놈- 성격은 여전하네-"
자신에게 향하는 제이미의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들고 제이미는 즉시 눈길을 거두며 웃는다-
그러자 의사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다-
"요 녀석 건강하네요- 관리 잘 받고 있나봐요- 주사 두대 있는데.... 목에 바르는 약으로 대체 가능하니까
제가 발라 드릴께요- "
그러더니 잠깐 난감하다는 듯 서있다가 제이미에게 부탁한다-
매력있는 눈을 두꺼운 안경 너머로 빛내면서- 제이미는 맘이 살짝 설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우습다-
다신 여기 오지 말아야겠다- 오다간 멍청한 짓을 할지도 모르겠다.
혼자 속으로만 생각한다-
자신은 누구에게나 이렇게 쉽게 다가가는 사람이 아니라는걸 알고 있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들까,
"아픈거 아닌데... 나를 되게 미워하네요.. 잠시만 요 녀석좀 잡아 주실래요-?"
까망이를 살짝 붙잡자 그는 요령좋게 살짝 약을 바른다- 아프지도 않을 텐데 까망이는
손이 닿는것도 싫다는 듯 하악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곤 끝나자 마자 제이미의 품으로 파고든다-
"자 진료는 끝났어요- 나가보셔도 됩니다-"
뭐라고 더 말을 걸어야 할까-.. 아무런 할수 있는 이야기가 없는데-
제이미는 결국 단 한마디를 덧 붙일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기억나는 한 마디는,
"반가웠어요-"
낮게 웃는다-
-
의사는 이상한 기분에 자신도 따라 웃는다- 묘한 인상의 남자다- 하나같이 저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남자들은
뭔가-.. 대단하다.. 그래도 전번 그 남자는 긴장해서 버벅 댈 정도였으니 그 남자의 눈을 보니 평소해도 심해 공포증이 심한
자신은 왠지 바닷속으로 질질 끌려 들어가는 듯 해서 그 사람에게 완전히 말렸는데-..... 이 남자는 달랐다. 생긋 생긋 웃는다-
그리고 묘한 눈색이 빛을 받을 때 마다 빛났다. 내내 자신을 면밀히 살핀다는 걸 느낄수 있었다.-
어째서 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다시 씩 웃었다. 왠지 웃음으로 뭔갈 가리는 느낌같았다.
왠지 정이가는 인상도- 그렇고-..... 자신이 주인이 아닌거 같으니 다신 볼일 없을것 같은데..
그 남자가 나가면서 한마디를 남겼다. 낮고 바른 목소리로 정확한 억양으로
"반가웠어요" 라고.....
의사는 왠지 묘한 기분에 천천히 손에 끼워져 있던 장갑을 벗었다. 진료실에 난 창으로 그 남자가
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 남자는 마치 자신이 보고 있다는 걸 아는 것 처럼
뒤로 슬쩍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자신을 봤을리가 없는데도 - 의사는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자신의 얼굴에 붙은듯한 얄궃은 기운을 털어내고 다음 환자를 볼 준비를 했다.
그가 길 너머로 사라진 창에선 아직도 따뜻한 빛이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