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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70화
작성일 : 19-11-04 22:39     조회 : 9     추천 : 0     분량 : 8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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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동이 트기 시작하자 어둠이 갉아먹은 초라한 건물의 뼈대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이곳저곳 금이 간 땅바닥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푹푹 빠졌다. 텅 빈 거리에는 산성비에 썩어 문드러진 죽은 고양이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곳곳마다 걸린 낡은 재킷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도 생명체는 없었다. 생기도 없었다. 온 세계는 이미 죽어 있었다.

 

  봄이는 손에 쥐고 있던 헐렁한 손목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상훈이 마지막으로 건네준 것이었다. 온 숫자가 로마자로 씌인 싸구려 가죽 시계였지만 천안에 도착한 이후로 시간감각을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에 시계는 꽤 도움이 되었다. 그가 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는지 시계는 초침까지 정확했다. 사실 봄이가 진짜 시각을 모르고 있기는 했다.

 

  봄이는 홀로 쓸쓸히 재미없는 길을 걸었다. 더 이상 봄이의 등을 봐 줄 사람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봄이는 자그마한 소리에도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쥐 떼가 지나가는 소리, 하수도에 넘쳐흐른 물길이 흐르는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은 누군가의 기침 소리..... 봄이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가 안도하는 걸 수도 없이 반복했다.

 

  30분쯤 걷자 얼어붙은 사거리 주변에 파묻힌 자동차 한 대가 보였다. 그 자동차는 봄이가 여기까지 타고 온 승용차와는 조금 달랐다. 차체가 양 옆으로 굉장히 기다랗고 크기도 제법 컸다. 버스였다. 차체 옆면에는 몇 년 전 개봉했던 영화 포스터가 그려진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거의 다 망가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봄이가 본 적이 있었던 영화였다.

 

  자세히 보니 버스 차체 여기저기에 총탄 자국이 가득했다. 앞 타이어는 이미 바람이 다 빠져 찌그러져 있었다. 문짝은 이미 걸레짝이 되어 있었고, 배터리나 기름은 벌써 누군가가 모두 빼돌린 뒤였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두 다리가 멀쩡할 때 어서 이곳을 떠나라.’

 

  눈 없는 노숙자의 말이 떠올랐다. 눈앞에 섬뜩하리만치 선명하게 새겨진 총탄 자국을 보자 봄이의 의지가 한순간 흔들렸다. 처음 여정을 시작했을 때부터 방금 전까지 이어지던 굳은 결심이 마치 벌레 먹은 기둥처럼 삐걱이는 것이 느껴졌다. 작은 집에서의 악몽같았던 새벽이 다시금 봄이의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뇌를 헤집어 놓으려고 했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머리 위로 쏟아지던 유리 조각들.....절대로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정말로 여기 오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봄이는 아무런 목적지도 없는 길을 걸었다. 그저 새벽녘 태양이 가리키는 앙상한 건물의 그림자만을 따라갔다. 만약 이 지구가 사람의 몸이고 봄이가 밟고 선 이 세계가 허파였다면 지구는 전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세계의 숨통을 틀어막았나? 도대체 누가 이 세계에 남은 마지막 숨결을 칼로 찌르고 심장을 검게 썩도록 내버려두었던 걸까?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했지만 결국 답은 나오지 않았다.

 

  40분을 더 걸으니 다리가 저려왔다. 봄이는 근처 폐가로 들어가 잠깐 한숨 돌리기로 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시자 기운이 났다. 작은 집에서 허락을 받고 조금이나마 챙겨온 식량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가방 부피는 갈수록 줄어만 갔다. 더 이상 정처없는 발걸음만을 옮겨서는 안 되었다. 계획이 필요했다.

 

  “바보 같기는.”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가슴 속 어딘가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녹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거대한 응어리만이 잠식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였다. 얼어붙은 도로에 비춰지는 그림자는 한 개뿐이었다. 죽은 세계를 홀로 걷는 소녀의 그림자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지금껏 늘 봄이와 함께 나란히 걸었던 그림자는 이제 없었다.

 

  봄이는 아무렇게나 혼잣말을 했다. 자신이 말하면서도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길 바랬다. 하지만 봄이의 목소리는 세상의 끝자락에 닿기도 전에 바스라지고 희미해졌다. 분명히 봄이에게는 익숙했을 텐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봄이는 난간을 붙잡고 도로 아래로 단숨에 뛰어내렸다. 텅 빈 도심가와는 다르게 도로 아래는 온갖 고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소각장이었다. 타이어가 빠지고 다 찌그러진 차량 잔해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타다 만 땔감들이 굴러다녔고 불을 피운 흔적이 있었다. 더욱 깊숙이 들어갈수록 타는 냄새와 함께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소각장 한가운데에는 온 세상을 전부 빨아들이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무슨 구멍일까?

 

  바로 그 때 봄이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빛을 비췄다. 놀란 봄이는 어설프게 권총을 꺼내려다 하마터면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 밑바닥으로 총을 떨어뜨릴 뻔했다. 고철덩어리 잔해 뒤에서 누군가가 봄이에게 소리쳤다.

 

  “멈춰.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쏘겠다.”

 

  “누구야?”

 

  봄이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무작정 권총을 겨눴다. 잔해 때문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쏘겠다’ 라고 외친 걸 보니 저 쪽도 나름 무장을 한 모양이었다. 총에 맞지 않으려면 재빨리 몸을 던져야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저쪽이 움직이면 쏜다고 했지 않았던가.

 

  고철더미 사이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몇 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차례대로 하나둘씩 잔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아서 식별은 불가능했다.

 

  “그 총 땅에 내려놓고 손 머리 위로 올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봄이는 왠지 그 목소리가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간절한 부탁처럼 들렸다.

 

  봄이가 천천히 권총을 땅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저항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림자가 봄이의 무장을 해제시켰다고 생각해서 사정거리 내로 다가오기만 하면 등 뒤에 숨겨둔 전기 충격기를 목에 쑤셔박아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자는 예상대로 봄이에게 접근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중에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멈춰섰다. 봄이의 앳된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잔해 속에서 나온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 네 명이었다. 그 중 둘은 키가 아주 작았다. 키가 작은 녀석들은 모두 어른들 뒤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젊은 남성이 봄이에게 겨눈 권총과 회중전등을 내리고 사과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잠깐 예방조치를 취했을 뿐이야. 우린 널 해칠 생각은 없어.”

 

  그렇게 말하며 젊은 남성은 되돌아갔다. 그 뒤를 지저분한 꼬마들이 졸졸 따르고 있었다.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어디에서 왔죠?”

 

  그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봄이를 돌아보았다.

 

  “당신들은 어디로 가려는 거죠? 이 앞에는 뭐가 있나요?”

 

  “얘야, 밖은 위험하단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남자가 그렇게 둘러대려는데 옆에 있던 젊은 여성이 끼어들었다.

 

  “그러지 말고 저 아이도 데려가요. 많이 초췌해 보이는데 우리가 좀 도와줘요.”

 

  남자가 다시 등을 돌려 봄이를 쳐다봤다. 세 사람의 시선이 묘하게 엇갈렸다.

 

  “잠깐, 먹을 게 남았나......”

 

  남자가 가방을 뒤적여 검은 봉투 한 봉지를 봄이에게 건넸다.

 

  “받아. 먹을 거야. 얼마 되지는 않지만.”

 

  “당신들은 어디에서 오는 거죠? 어디서 오는 길인가요? 말해 줄 수 없다면 이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라도 알려줘요. 그것도 싫다면 최근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라도요.”

 

  의외의 질문에 남자가 눈을 껌뻑거렸다.

 

  “길은 무슨 길을 말하는 거야? 이 앞에 길 같은 건 없어.”

 

  “왜 그렇게 애한테 쌀쌀맞게 구는 거예요?”

 

  젊은 여성이 남자에게 쏘아붙이고는 봄이에게 따뜻한 말투로 말했다.

 

  “얘야, 배고프지 않니?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우리가 도와줄게.”

 

  여자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지만 봄이는 당장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못한 봄이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가요?”

 

  이윽고 정적이 감돌았다. 젊은 여성은 어떻게 해서든 이 정적을 깨버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들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지저분한 아이들을 가리켰다.

 

  “이 아이들도 너와 똑같은 아이들이야. 어린 나이에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집단에서 소외당하고, 살기 위한 생존 투쟁에 뒤처지고 만 가엾은 아이들이란다.”

 

  봄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계속 이었다.

 

  “우리는 그런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단다. 우리와 함께 가자. 그러면 네가 알고 싶어하는 모든 걸 알려줄게.”

 

  봄이에게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위험했다. 봄이는 한 걸음 물러났다.

 

  “난 당신들 안 따라가요.”

 

  조심스럽게 봄이에게 다가가던 젊은 여성이 달래듯이 말했다.

 

  “얘야,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괜찮으니까......”

 

  “가까이 오지 마.”

 

  “이런 젠장할.”

 

  봄이가 물러나며 권총을 꺼내들자 젊은 남성도 재빠르게 권총을 뽑아 겨눴다. 그들 다리에 진드기처럼 매달려 있던 아이들 중 하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한종민, 당장 총 내려!”

 

  젊은 여성이 남성에게 소리쳤지만 그는 따르지 않았다.

 

  “말은 똑바로 하시지. 저 애가 먼저 시작한 일이야.”

 

  “총 내려. 빨리!”

 

  아이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반면에 다른 아이는 그저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여자가 저렇게까지 다그치는 걸 보니 그가 가진 권총은 분명히 진짜 총이리라. 그렇게 된다면 봄이는 지금 배짱에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남성의 이마와 떨리는 팔뚝을 보자 봄이는 그가 손에 쥔 권총을 단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결국 보다 못한 여성이 끼어들었다.

 

  “그만 해. 우리가 여기서 의미없이 피를 볼 필요는 없어.”

 

  여성이 그렇게 말하고는 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얘야, 우리는 절대 널 해치지 않아. 그저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내가 어떻게 해야 우릴 믿어주겠니?”

 

  이제야 대화가 좀 잘 풀리는 듯했다.

 

  “그 총 이리로 넘기고, 가지고 있는 물건들 전부 꺼내놓으세요. 그런 다음엔 묻는 말에만 대답해주셔야 하고요.”

 

  “헛소리.”

 

  “저 아이 말대로 해 줘.”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여성에게 눈을 부라렸지만, 이내 순순히 쥐고 있던 권총을 봄이의 발 밑으로 휙 던졌다. 봄이는 권총을 주워들어 탄창을 뽑으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좋아요, 물러나요.”

 

  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의 침착함에 깜짝 놀랐다. 봄이는 그들이 천천히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물러선 다음에야 재빨리 다가가 가방을 뒤졌다. 성냥, 살충제, 헝겊, 식량과 물...... 특별히 위협이 될 만한 무기는 없었다. 봄이의 눈빛에서 경계심이 약간이나마 사라지자 그 틈을 타 여성이 말했다.

 

  “우리는 그저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단다. 네가 어디로 가는 중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널 해치려는 기미가 보인다면 그 즉시 곧바로 우릴 떠나도 좋아. 우리에겐 가족이 필요해. 서로간의 경계심을 완전히 버리고 함께 역경을 헤쳐나갈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말이야. 네 도움이 필요해.”

 

  어느샌가 그녀는 손을 내밀며 봄이를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봄이는 대답 대신 물음으로 답했다.

 

  “다시 묻죠.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그러자 여태껏 잠자코 있던 젊은 남성이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냐고? 당치도 않은 녀석이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말로 몰라? 그렇다면 전부 알려주지. 잘 들어. 몇 년 전에 여기서 큰 시위가 벌어졌었다는 건 알고 있어? 그 시기에 한창 시끄럽던 유전자 시술 때문이었지.”

 

  찬바람이 불어왔다. 이야기를 늘어놓던 남자는 봄이에게 밖은 추우니 소각장 뒤편의 트레일러에 가서 이야기를 마저 하자고 권했다. 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얼떨결에 그들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했다.

 

  커다란 구덩이 뒤에는 집채만한 트레일러 한 대가 눈더미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녹슨 트레일러는 바퀴가 죄다 얼어붙고 터져 있어서 굴러갈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트럭의 화물칸을 가리키며 자랑스러운 듯이‘우리들의 집’ 이라고 소개했다.

 

  표면과는 다르게 트레일러의 화물칸 내부는 따뜻하고 아늑했다. 벽돌을 철근으로 꿰어 만든 화로에서 불꽃이 날름거리고 있었고, 화로 바로 위에는 지저분한 재킷과 셔츠가 가지런히 개인 채로 놓여있었다. 나름 담요와 침낭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봄이가 예전에 노인과 잠깐 머물렀던 통제소 천막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남자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알루미늄 의자를 빼고 앉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편히 앉아. 어디까지 했더라.......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처음에는 별다른 사건 없이 잘 흘러가나 싶더니 시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들은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갔어. 급기야 시술의 부작용에 분노한 시민들과 경비대가 직접 충돌하는 경지에 이르렀지. 그때가 언제더라..... 아무튼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경비대에게 무기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던 모양이야. 아마도 국가가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시작했던 건 그때부터였을 거야. 물론 예전에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겠지. 그렇지만 그 땐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아까 전까지만 해도 울음을 터뜨리며 칭얼대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네들끼리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 누추한 화물칸이 마냥 안심되는 모양이었다.

 

  “그 이후론 모든 게 확실하지 않아. 직접 보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 그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위험했던 시위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생명줄은 그리 길지 않았거든. 사태를 통제하기 위해 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군부대가 습격을 받은 이후로 상당히 많은 양의 불법 총기들이 암암리에 유출되기 시작한 모양이야. 어쨌든 중요한 건 바로 여기 천안이 그 불법 무기들이 제일 활발하게 거래되었던 암시장이 있었던 곳이라는 거야. 물론 그 뒤로 화폐가치가 나날이 떨어지면서 지금은 아무 의미없는 짓이 되어버렸지만...... 거래 수단은 이미 바뀐 지 오래야.”

 

  “거래 수단이 바뀌었다는 게 무슨 의미죠?”

 

  “사람의 피. 사람의 피를 사고파는 것만큼 많이 남는 거래도 없지.”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의자 밑에 놓여있던 병 하나를 집어들었다.

 

  “너도 알겠지만,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그깟 종이조각 몇 장보다 사람의 목숨이 훨씬 더 가치있는 세상이 되어버려서 말이야. 예전과는 완전히 다르지. 그렇고말고.”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봄이는 지금은 필요없어진 종이화폐 때문에 사람을 여럿 죽인 연쇄살인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봄이는 그 살인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세상에서 제일 값나가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어린아이들이야. 남녀 가리지 않고 정말 비싼 값에 팔리지. 왜 그런 줄 알아? 아직 스무 살이 넘지 않은 어린아이들은 육질이 아주 부드럽다고 해. 녀석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아. 주로 식량으로 제일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써먹을 곳도 아주 많지.”

 

  남자가 병을 기울여 찌그러진 깡통을 반쯤 채웠다. 봄이가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저 아이들을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인형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봄이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깡통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쿡쿡 웃었다.

 

  “왜,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안타깝지만 우린 사람고기엔 그다지 관심 없어.”

 

  남자가 깡통을 한 개 더 가져와서 잔을 또 가득 채웠다.

 

  “우린 아까도 말했듯이 그저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며칠 전에도 죄 없는 아이들이 한 트럭째로 어딘가로 실려가는 걸 봤어. 분명히 녀석들의 소행일 거야. 이 근방에서 인육을 가장 좋아하기로 소문난 녀석들이지. 난 그 녀석들이 마음에 안 들어. 궁지에 몰린 어린아이들까지 식량으로 사고 팔다니, 야만인들이 따로 없잖아.”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죠?”

 

  “글쎄, 어쩌면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일지도 모르지. 그 식인종들과 만나기 전에 우릴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았던 거야.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남자는 또다시 잔을 쪼르르 채웠다.

 

  자기들끼리 놀던 아이들은 어느새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과 함께 있었던 젊은 여성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곯아떨어진 아이들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 남자가 했던 말들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봄이는 조용히 그에게 아까 전 빼앗았던 권총을 돌려주었다. 남자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으며 말했다.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아무튼 만나서 반갑다. 한종민이라고 해.”

 

  종민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봄이는 흔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윤 봄. 외자로.”

 
작가의 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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