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10.종착점
작성일 : 19-11-04 20:54     조회 : 9     추천 : 0     분량 : 7982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10. 종착점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사람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목과 허리가 부러질 듯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더 답답했다. 웅크린 채 뜬눈으로 몇 시간을 세운 봄이는 이제 슬그머니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당장이라도 가방을 열어젖히고 싶었지만 잘 열리지 않았다. 가방 위에 무거운 물건을 잔뜩 쌓아둔 모양이었다. 봄이가 힘껏 버둥대자 쌓여 있던 물건들이 요란하게 무너졌다. 드디어 봄이는 바깥 공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방이 열리자마자 몸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급속도로 올라왔다. 봄이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로 땅바닥에 엎드려 정신없이 토했다. 어느 정도 게워내고 난 후 주위를 둘러보자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잠이 덜 깬 눈으로 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봄이는 또 토했다.

 

  몸 속을 텅 비우고 나니 구역질이 멎었다. 봄이가 입을 떡 벌리고 황당해하는 남자에게로 비틀거리며 다가가자 남자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달아났다.

 

  분명히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온통 어둠뿐이었다. 날이 완전히 저물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봄이는 온통 쑤시는 목과 허리를 부여잡고 가방을 뒤져 회중전등을 꺼냈다.

 

  봄이는 몇 달 동안이나 번데기를 거쳐야만 성충으로 잉태하는 나방 유충이 떠올랐다. 그리고 짧은 순간이나마 그 과정을 몸소 느낀 기분이 들었다. 24시간조차 채 버티지 못했는데 몇 개월 동안 번데기 속에 있으면 무슨 느낌일까? 봄이는 자신이 나방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회중전등을 켜자 주위가 환하게 드러났다. 철제 격자가 늘어선 화물 컨테이너 벨트에 주인 없는 물건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가방 몇 개는 열린 채로 마구 널브러져 있었다. 아까 전 봄이를 보고 달아났던 남자가 훔치다 만 물건들이 틀림없었다. 봄이도 가져갈 만한 물건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그다지 쓸만한 건 없었다.

 

  아직도 정신이 어질어질한 봄이는 힘겹게 벽을 짚어가며 화물 창고를 나갈 방법을 찾았다. 화물 창고는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이걸 보자 봄이는 방금 전 그 남자가 도대체 어떻게 달아난 건지 아이러니했다. 어쩌면 그 남자는 봄이의 망상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이 아니었을까?

 

  ......인 줄 알았는데 녹슨 자물쇠는 부서져 있었다. 덕분에 봄이는 물건을 챙기고 화물 창고를 나갈 수 있었다.

 

  실내라 하늘이 보이지 않아서 온통 암흑뿐이었다. 봄이에게는 제일 먼저 자신이 올바른 목적지로 온 게 맞는지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회중전등으로 벽을 훑어보았지만 불이 꺼진 매점이나 물건을 옮기는 트롤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 밟고 선 이 땅이 어디인지 알 방법이 없자 봄이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곳이 봄이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확실할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천안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곳이라면? 그렇다면 이제 어떡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봄이의 발에 무언가가 밟혔다. 물컹한 감촉이었다. 그러나 그 물체는 봄이에게 밟히자마자 엄청난 괴성을 질렀다. 놀라 휘청거리던 봄이는 그 물체가 재빠르게 일어서는 모습을 보자 비로소 자신이 밟았던 것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소리쳤다.

 

  “이 개 같은 새끼야, 똑바로 보고 다녀야 할 것 아니야!”

 

  봄이는 얼떨결에 그에게 회중전등을 비췄다. 지저분한 재킷을 한 장 걸친 노숙자였다. 그러나 봄이는 그에게 사과를 하기보다는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앞섰다.

 

  “저기, 실례합니다.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뜻밖의 목소리 톤에 노숙자는 잠시 당황해했지만 곧 다시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느냐고?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사람을 밟아놓고 사과는 못할망정 뻔뻔한 녀석이군.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썩 꺼져.”

 

  “여기가 어딘지 알고 계시잖아요. 대답해 주세요.”

 

  “꼬맹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제 발로 기어들어왔단 말이야? 나보고 지금 그걸 믿으라고? 죽기 싫으면 지금 바로 여길 떠나.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거야.”

 

  아무래도 노숙자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봄이가 체념하고 돌아서려는데 노숙자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 묻고 싶은 게 있어. 넌 사지가 멀쩡해?”

 

  “예, 멀쩡해요.”

 

  “그렇다면 진지하게 충고하지. 지금 당장 여길 떠나. 두 다리가 멀쩡히 붙어있을 때 말이지.”

  봄이는 무시하고 되돌아갔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정말로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자세히 보니 노숙자는 두 눈이 없었다.

 

  봄이는 천천히 터미널 입구로 걸어갔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빈 환풍기 사이로 빛이 스며들어왔다. 도관에서 흘러나온 물기로 축축한 천장에는 곰팡이가 가득했고, 전등이 비추는 낡은 시멘트 벽면에는 온통 금이 가 있었다. 이 건물은 마지막으로 보수공사를 한 게 언제였을까?

 

  굳게 닫힌 셔터 주변에는 노숙자들이 모여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진동했지만 일어나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봄이를 보자마자 일어서서 다가왔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구역이야. 들어가려면 통행세를 내.”

 

  “여자애잖아. 처음 보는 얼굴인걸.”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두 무뢰한들이 봄이를 둘러쌌다. 그들에게선 찌든 기름 냄새 같은 악취가 물씬 풍겼다. 봄이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치마폭으로 손을 뻗었다.

 

  “김찬, 이 계집애 붙잡아.”

 

  봄이가 권총을 꺼내려는데 무뢰한들의 뒤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이봐, 그 꼬맹이는 그냥 보내 줘. 어차피 얼마 못 가서 죽을 텐데 뭘.”

 

  그러자 봄이에게 손을 대려던 두 무뢰한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곧 순순히 물러났다. 그의 목소리에 사람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마법이라도 깃든 것 같았다.

 

  “꼬맹이, 여기엔 왜 왔나?”

 

  무뢰한들의 뒤에 있던 그림자가 물었다. 그는 봄이가 원래 이곳에 머물러있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평소의 봄이였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겠지만 무뢰한들에게서 자신을 도와준 보답을 하고 싶은 마음에 기꺼이 대답해주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라.......”

 

  그림자가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꽤 재미있고 천진난만한 생각이구나. 내일까지 살아있으면 다행인 이 죽음의 땅에서 말이야. 이봐, 들었어? 사람을 찾으러 왔대.”

 

  “그냥 놔 둬. 우리가 왜 저런 코찔찔이까지 굳이 신경써야 해?”

 

  그림자가 외치자 어둠 속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솔직히 말해서 너 같은 녀석은 처음 봐. 보아하니 온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인 모양인데 몸소 느껴보기 전까지는 아무리 말해도 모르겠지. 어서 가 봐.”

 

  그대로 지나가려던 봄이는 문득 떠올라서 그림자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려 주세요.”

 

  그림자가 입을 다물었다. 봄이의 행동이 믿기지 않는다는 모양이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여긴 정확히 천안 고속버스 터미널이다. 알고 온 것 아니었나? 만약 제대로 찾아온 게 맞다면, 넌 잘못 찾아온 거야.”

 

  봄이는 그제서야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또 만나죠.”

 

  봄이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셔터를 열어젖히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사실 또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 *

 

  드디어 봄이는 그토록 원하던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봄이가 여기 온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저 어렸을 적 삼촌과 함께 지냈던 곳이 바로 천안이어서였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뿐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3년은 더 지난 예전 집을 기억해낼 방법도 없었다. 사실 예전 집을 기억해낸다고 해도 삼촌은 분명히 그곳에 없을 것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 멍청하고 무모한 행동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벌써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거나 이 지역을 떠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무작정 찾는 수밖에 없었다.

 

  굳센 각오를 다진 봄이는 지금껏 와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딛었다. 바깥 세상은 이미 저물었지만 곧 동이 틀 모양이었다. 짙은 회색 먹구름이 걸린 하늘에서 미미하긴 했지만 빗방울이 떨어졌다. 산성비 속에서 세차게 몰아치는 찬바람 때문인지 회중전등 빛은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비가 그치고 날이 밝기 전까진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그러나 다시 셔터를 젖히고 노숙자들과 무뢰한들이 드글거리는 터미널 입구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봄이는 근처에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있는지 살폈다.

 

  텅 빈 터미널을 빙빙 돌던 도중 봄이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터미널과 몇 미터가량 떨어진 옆 건물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봄이는 몸을 낮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씩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렸다. 그러나 확실히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그런 아기를 달래주려는 자장가 같기도 했다. 어스름 속 빗소리를 뚫고 울리는 구슬픈 멜로디에 봄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리의 근원지로 가깝게 다가갈수록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불규칙적으로 울려퍼지는 높고 가냘픈 사람 목소리에 봄이는 그 소리가 아기 울음소리였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외에도 또다른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와는 달리 규칙적으로 한 가지 멜로디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악기 소리, 자장가........

 

  반쯤 깨진 유리 문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봄이는 그 노랫소리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다. 수십 개의 의자가 나란히 놓인 실내에 촛불이 한 가닥 피어오르고 있었다. 봄이가 전등을 비추자 요란하게 우는 아기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던 어둠 속 남성이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노랫소리도 그쳤다.

 

  “미안해요. 폐를 끼쳤나요?”

 

  어둠 속 남성이 말했다. 봄이가 비추는 전등 빛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손에 낡은 통기타를 들고 있었다. 아기는 계속 울고 있었다.

 

  예상외의 광경에 놀란 봄이가 아무 대답이 없자 남자가 말했다.

 

  “요 녀석이 도통 울음을 그치질 않아서요. 폐가 되었다면 자리를 옮겨 드리죠.”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금방 떠날 거니까.”

 

  봄이가 그렇게 말하며 남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남성은 주름투성이 얼굴로 자신을 이해해 준 봄이에게 힘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를 피하기에는 천안맞춤인 공간이었다. 남자는 곧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툰 솜씨로 튕기는 낡은 기타줄에서 고운 소리가 났다. 남자가 애써 노력하는데도 아기는 울음을 그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봄이가 입을 열었다.

 

  “그 쪽 아이세요?”

 

  남자가 기타줄을 튕기던 손을 멈췄다.

 

  “그럼요. 올 해로 두 살이에요.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세 살이 될 거예요. 이름은 아직 못 정했지만요. 아내와 나는 이 아이 이름 문제로 소소하게 언쟁을 벌였어요. 아내는 준이가 좋다고 했고, 난 혁이가 더 좋다고 했었거든요. 그렇게 다투던 우리는 아이가 태어난 다음에 이름을 짓기로 합의했어요. 만약 남자아이라면 준 아니면 혁이로, 여자아이라면 예린이 아니면 초현이로 하기로 약속했죠. 아내와 나는 늘 서로 양보하면서 살았어요. 그렇지만 애 이름만큼은 아내도 나도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었죠. 아, 봄이라는 이름도 고민했었어요.”

 

  그 말은 들은 봄이는 마시던 물을 허공에 내뿜었다.

 

  “결국 아내와 난 말일까지 이름을 두고 싸우는 바람에 끝내 이름을 정하지 못했어요. 아이가 태어나면 함께 이름을 정하자고 했던 아내는 어디론가 떠나 버렸지요. 이젠 우리 둘만 남았어요. 예전에 아내가 임신했을 때 뱃속에 있던 아이에게 가끔 이렇게 노래를 불러주고는 했는데, 지금은 뜻대로 잘 안 되네요.”

 

  봄이가 말이 없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아내는 음악가였어요. 한낱 공사장 인부였던 내게 있어서는 과분한 여자였죠. 아내는 피아노를 제일 잘 쳤는데 제일 좋아하는 악기는 기타였어요. 그래서 늘 내가 집에 돌아오면 날 위해 기타를 연주해주고는 했죠. 남는 시간에 아내에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내는 그런 내가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뻐했어요. 어쩌다가 내가 집에 꽃이라도 사 가는 날에는 날 와락 껴안고 마냥 행복해하기도 했죠.”

 

  남자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봄이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아내분은 지금 어디 있죠?”

 

  흥얼거리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품에 안긴 아기가 더 크게 울었다.

 

  “어느 날 집에 들이닥친 도둑들에게 강간당하고 자살했어요. 놈들은 난데없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날 흠씬 패고 묶어뒀어요. 원래 그들은 나와 내 아내에게는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어요. 물건들이 목적이었죠. 그러나 아내가 저항하자 놈들은 아내를 번갈아가면서 강간하기 시작했어요. 내 눈앞에서 말이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묶여있던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죠. 놈들이 돌아가고 난 뒤 아내는 힘없이 기어와서 날 풀어준 다음 화장실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어요. 말릴 틈도 없이 떠나 버렸죠.”

 

  남자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분노한다던가 눈물을 흘린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어쩌면 그 때 그냥 자살해버렸던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만약 그때문에 아기가 또 생긴다면 아내와 난 또다시 둘째 아이 이름을 짓기 위해서 다퉜을 테니까요.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오히려 다행인 건지도 몰라요.”

 

  갑자기 섬뜩한 기분이 든 봄이는 회중전등을 이리저리 비췄다. 금이 간 실내 벽면에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새빨간 핏자국이 칠해져 있었다. 핏자국을 따라가자 피투성이가 된 누군가가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시신은 또렷했고, 핏자국은 거무튀튀하지 않고 윤기가 흘렀다. 자세히 보니 시신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녀석을 죽인 지는 세 시간도 안 됐어요. 녀석이 내게 다가오더니 ‘아이가 아파 보인다’ 고 말했죠. 그래서 죽여버렸어요. 불순한 목적으로 우리 아기에게 접근한 것이니까요. 그 누구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 아기에게 접근하지 못해요. 죽어가는 아내와 그렇게 약속했어요. 이 아이는 제 목숨과 맞바꾸는 한이 있다고 해도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말이에요. 그 누구라고 해도 우리 아기에게 멋대로 접근한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아내와 약속했어요. 아내는 분명히 아기를 지키려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거예요. 누구도 손대지 못해요. 누구도 우리 아기에게 손대지 못해요.”

 

  봄이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봄이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자 남자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이들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잘못한 건 어른들이죠. 그들은 미래를 개척하는 데 실패했어요. 더 나은 미래를 만들겠다던 어른들은 앞으로 자라나야 할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이런 결과만을 남겨놓았을 뿐이죠.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결과예요.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손대지 않아요. 물론 우리 아기에게 손을 대려고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학생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말하던 남자는 손가락으로 봄이를 가리켰다.

 

  “학생은 혼잔가요?”

 

  당장이라도 그 곳을 벗어나려던 봄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다리가 얼어붙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해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요. 상관은 없어요. 그저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싶을 뿐이었어요. 아이들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해요. 무슨 용건이 있어서 이곳에 왔는지는 묻지 않겠지만 분명히 중요한 일이겠죠. 난 아직 미성숙하고 연약한 아이들이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 채로 이 절망뿐인 세상에 유린당하는 건 절대로 바라지 않아요. 잘못한 건 우리들인데, 어째서 다음 세대의 아이들까지 이런 미래를 겪어야만 하는 걸까요? 잘못한 건 우리들인데......”

 

  고개를 젖히고 한탄하던 남자의 말은 그의 품에 안긴 아기가 다시 울기 시작하자 겨우 멈췄다.

 

  “걱정 말거라. 아빠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단다.”

 

 남자는 나지막이 아기에게 속삭이고는 다시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기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봄이는 구슬픈 기타 멜로디와 아기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조용히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비는 그쳤고, 먹구름은 걷혀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 봉우리에서부터 차츰 빛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가방을 들쳐멨다. 더 아침이 밝기 전에 이동해야만 했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봄이는 터미널 밖으로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당.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75 75화 2019 / 11 / 4 17 0 5572   
74 74화 2019 / 11 / 4 11 0 9203   
73 73화 2019 / 11 / 4 15 0 6508   
72 72화 2019 / 11 / 4 6 0 8131   
71 71화 2019 / 11 / 4 14 0 8774   
70 70화 2019 / 11 / 4 10 0 8235   
69 10.종착점 2019 / 11 / 4 10 0 7982   
68 68화 2019 / 11 / 4 10 0 5775   
67 67화 2019 / 11 / 4 6 0 4752   
66 66화 2019 / 11 / 4 5 0 8160   
65 65화 2019 / 11 / 4 10 0 8191   
64 64화 2019 / 11 / 4 9 0 7608   
63 63화 2019 / 11 / 4 7 0 7831   
62 9. 다시 만나게 된다면 2019 / 11 / 4 14 0 7571   
61 61화 2019 / 11 / 4 9 0 8371   
60 60화 2019 / 11 / 4 10 0 8307   
59 59화 2019 / 11 / 4 10 0 7692   
58 58화 2019 / 11 / 4 11 0 8543   
57 57화 2019 / 11 / 3 12 0 7480   
56 56화 2019 / 11 / 3 9 0 8992   
55 55화 2019 / 11 / 3 11 0 9658   
54 8.작은 집 전투 2019 / 11 / 3 10 0 7696   
53 53화 2019 / 11 / 3 13 0 8015   
52 52화 2019 / 11 / 3 11 0 8015   
51 51화 2019 / 11 / 3 10 0 6614   
50 50화 2019 / 11 / 3 12 0 5035   
49 49화 2019 / 11 / 3 17 0 4343   
48 48화 2019 / 11 / 3 15 0 3993   
47 7.착한 아이 2019 / 11 / 3 8 0 7320   
46 46화 2019 / 11 / 3 11 0 3906   
 1  2  3  4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