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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58화
작성일 : 19-11-04 20:26     조회 : 10     추천 : 0     분량 : 8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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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윽고 그들은 가득 채워진 상자를 대문 위로 끌어올려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봄이는 상민이 지시하는 대로 묵묵히 따랐다. 상민은 봄이가 잘 해내고 있음에도 왠지 모르게 자꾸만 봄이에게 신경질을 냈다. 그러나 봄이는 그가 토해내는 불만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봄이가 작업을 끝내고 문득 현관을 돌아보니 상훈과 중년 여성이 보였다. 상훈은 현관문 앞에 앉은 채로 양 손에 공구를 들고 있었고, 중년 여성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뭐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봄이는 묶다 만 밧줄을 움켜쥔 채 한동안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봄이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 중 하나인 경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봄이 자신도 그들을 경계해야만 하는 마땅한 당위성 같은 건 찾지 못했다.

 

  “뭘 그렇게 멍하니 넋놓고 있어? 거기 밧줄 조심해. 잘못 건드리면 풀릴 지도 몰라. 만약 풀려 버리면 너더러 전부 다시 주워담으라고 할 거야.”

 

  상민이 그녀를 다그치자 그제서야 봄이는 정신을 차렸다. 봄이는 잠깐 동안 자신을 부른 상민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곧 그의 등 뒤에 세워진 아스팔트 담벼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신경쓰였던 건데, 저건 도대체 뭐야?”

 

  봄이가 그렇게 말하며 담벼락에 마구 칠해진 붉은 자국을 가리켰다. 상민이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거 말이야? 일종의 경고야. 사람이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색이 붉은색이라고들 하잖아. 처음에는 겁을 줘서 놈들을 쫓아낼 목적으로 칠해 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의미는 없었던 것 같아. 오히려 너무 눈에 잘 띄어서 저걸 보고 여길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지우려고 노력도 해 봤는데 도통 지워지지도 않아. 나름 쓸모가 있을 줄 알고 스프레이를 잔뜩 챙겨 왔는데 먼지만 쌓이고 있어.”

 

  그 말을 들은 봄이는 그와 처음 마주친 지하실에 쌓여 있던 빈 스프레이 통들을 떠올렸다. 봄이는 아직도 그가 어떻게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실 안에서 살고 있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궁금해진 봄이는 상민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지하실에서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상민은 갑작스런 그녀의 질문에 눈썹을 으쓱이고는 대답했다.

 

  “난 그때 형을 찾으러 나온 것이긴 하지만 쓸만한 것들을 구해오기 위해서이기도 했어.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봐. 먹을 것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버려진 식료품 매장이나 노점으로 제일 먼저 가. 물론 가장 구할 확률이 높은 곳이기는 하지만 모두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야. 그 때문에 막상 그 곳으로 가보면 늘 허탕만 치고 돌아와. 뒤늦게 가 봤자 벌써 발 빠른 녀석들이 보관하기 쉽고 잘 상하지 않는 음식들만 골라서 모조리 빼돌리고 난 뒤였으니까.”

 

  상민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바꿔서 생각해 봤어. 녀석들은 버려진 가게로 몰려가서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을 생각밖에 하지 못해. 누가 이런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음침한 지하실로 들어오겠어? 분명히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하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소리와 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자마자 기겁하면서 도망칠 거야.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던 지하실에 두 명이나 들어와서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건 어쩌면 운이 나빠서일 거야.”

 

  “그래서 거기서 뭐 건진 건 있어?”

 

  “아니, 없어.”

 

  봄이가 멍청한 눈으로 쳐다보자 상민이 눈을 껌뻑거렸다.

 

  “사실 지하실에는 그저께 처음 왔어.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들이 전부 다 신문지로 가려져 있었어. 안 그래도 회중전등에 남은 배터리도 거의 다 떨어져 가는데 지하실에서 도통 빛이 나오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렇게 조심스럽게 지하실을 다니다가 뭔갈 밟았어. 뭐랄까 물컹거리고 재수없는 감촉이었어.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건 죽은 쥐 시체였어. 벌써 상당히 부패가 진행되고 난 다음인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어. 뼈가 완전히 산산조각난 채 다 찢어지고 너덜너덜한 가죽 사이에서 내장이........”

 

  봄이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근처에 굴러다니던 스프레이 통 하나를 집어들어 상민의 얼굴에 겨눴다.

 

  “조금만 더 그딴 더러운 이야기 계속하면 평생 더러운 걸 입에 묻히고 살게 될 거야.”

 

  상민이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봄이는 그의 침묵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현관을 돌아보았다. 중년 여성과 상훈이 일을 모두 끝마쳤는지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중년 여성이 대문 위에 매달린 종이 상자를 힐끗 쳐다보더니 봄이에게 말했다.

 

  “다 끝난 것 같구나. 처음 해 보니 어땠어?”

 

  봄이가 그럭저럭 대답하자 중년 여성이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 앞으로 우리랑 같이 살면 이것저것 많이 해야 할 거야. 며칠 전에는 추위 때문에 창틀이 다 상해버려서 우리가 직접 보수했어. 보수라고 해도 널빤지에 못질하는 정도였지만 말이야. 그래서 뭔가 부족하다 싶어서 커튼을 뜯어내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틈새를 꽁꽁 묶어두기도 했어.”

 

  봄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올려다보이는 작은 집을 바라보았다. 2층 높이의 창틀에서 너덜너덜한 커튼 조각이 스산한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역시나 거의 모든 창들은 널빤지로 꽉 막혀있었다. 조잡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불안정해 보이지는 않았다. 위태롭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봄이는 방금 전 그녀가 말했던 ‘보수’ 가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막내 아가씨에게까지 거친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가 없구나. 우리는 식구가 늘 부족했어. 저번에 그 일이 일어난 이후부터 더더욱 부족해졌어. 네가 우연히 상훈이를 만나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나는 너무나도 기쁘게 생각한단다. 이렇게 곱고 여린 손바닥을 가진 여자애에게 일을 시키는 건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

 

  중년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봄이의 손바닥을 잡아챘다. 아직 아물지 않은 봄이의 손바닥 한복판은 흉하게 찢어져 있었다. 상처 사이에서 흘러나온 핏자국도 대부분 눌러붙어 있었다. 봄이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푸르스름하게 얼룩져 있었고, 자르지 못한 손톱은 거의 다 부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중년 여성은 말하던 입을 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들은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몇 초간이나 정지해 있었다. 봄이가 손목을 까딱이자 중년 여성은 그녀의 손바닥을 놔주었다. 당황한 그녀가 재빨리 말을 고쳤다.

 

  “......여자애에게 일을 시키는 건 마음이 아프니까.”

 

  봄이가 멍하니 서 있자 중년 여성은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상훈이 바닥에 있던 공구 상자를 집어들고는 상민에게 손짓했다.

 

  “잠깐 따라와. 네가 할 일이 있어. 봄이는 잠깐 거기서 기다려.”

 

  상민이 불공평하다는 눈으로 봄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집 안으로 그들을 따라갔다. 이제 집 밖에는 봄이 혼자만 남게 되었다.

 

  봄이는 발 밑에 걸리는 돌멩이를 발로 찼다. 모두가 들어가 버린 작은 집 대문은 찬바람이 불어와 냉랭했다. 코끝이 시렸던 봄이가 지저분한 재킷 소매로 코를 닦아냈다. 해가 아직도 떠 있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하늘이 어둡다고 느껴졌다. 봄이는 그 이유가 허공을 가득 꿰찬 안개가 하늘의 빛을 전부 빨아들여서일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봄이는 서툰 솜씨로 휘파람을 불며 아까 전 상민을 위협했던 스프레이 통을 집어들었다. 통에 붙은 상표 한가운데가 찢겨져 있어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스프레이를 보자 갑자기 장난을 치고 싶어진 봄이는 담벼락 표면에 스프레이를 조심스럽게 뿌렸다.

 

  빨간 유성 액체가 분무기처럼 담벼락에 뿌려졌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이 뿌려지는 바람에 약간 놀라긴 했지만 이내 재미가 붙은 봄이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담벼락에 마구 뿌려댔다. 독한 냄새가 풍겼지만 의외로 꽤나 재미있었다.

 

  한참을 뿌려대는 도중 봄이는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상훈이 현관문을 연 채로 봄이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상훈은 봄이를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봄이는 스프레이를 뿌리던 손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렸다. 봄이는 겨우겨우 그의 시선을 피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어, 그냥 있었는데요.”

 

  한동안 상훈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상훈과 뚱하니 돌아보는 봄이의 시선이 서로 묘하게 엇갈렸다. 상훈은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이제 밖에서 할 일은 끝났으니까 적당히 하고 들어와. 감기 걸린다.”

 

  그리고는 현관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봄이는 현관문이 닫히고 나서도 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봄이는 남아 있던 스프레이를 전부 비우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봄이는 남아 있던 스프레이를 전부 비우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현관을 지나 거실로 향했다. 그러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은 그림자에 가려진 드럼통에서 불씨만이 탁탁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봄이는 이들 가족들이 자기만을 놔두고 땅 밑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꺼져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를 기울이자 봄이의 머리 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봄이는 그들이 모두 2층에 올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이어지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다. 봄이는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그들이 자신을 침입자로 오인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봄이는 탁자에 놓인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있던 상민과 눈이 마주쳤다. 중년 여성은 벌레 먹은 나무 의자에 앉아 남은 총알을 세고 있었다. 상훈은 한가운데가 뻥 뚫린 총구멍에 눈을 대고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한참을 주시하던 상훈이 커튼을 쳐서 총구멍을 가리며 말했다.

 

  “이상 징후는 없어. 쉬어도 되겠어.”

 

  그가 말하고 나서야 모두들 긴장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중년 여성이 담배를 빼들고 상민을 쳐다보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성냥을 후 불어서 꺼버리는 바람에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민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작은 집 2층은 평범한 방과는 달리 침대가 없었다. 침대 뿐만 아니라 가구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어떤 특수한 목적에 의해 개조된 곳 같았다. 예전에 봄이가 즐겨보던 싸구려 전쟁영화의 작전 회의실 같기도 했고, 크기가 들쑥날쑥하고 조잡한 판자로 막아놓은 창문은 견고한 요새가 떠올랐다. 언뜻 보기에는 완전히 밀폐된 공간처럼 보였지만 방 안에 일산화탄소가 차지 않는 걸 보니 환기는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중년 여성이 탁자 위에 놓인 촛불로 담뱃불을 붙였다. 이윽고 방 안에 연기가 가득 차자 중년 여성이 코를 찔끔거리며 한마디 던졌다.

 

  “조금만 있으면 해가 질 거야.”

 

  봄이는 그녀가 총구멍을 내다보지도 않고 어떻게 바깥 세상을 알 수 있는지 궁금했다. 오랫동안 시간 관리를 엄수해온 탓에 방에 떠다니는 담배 연기만 봐도 시간을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봄이가 말했다.

 

  “원래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우나요?”

 

  중년 여성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연기를 뻐끔거렸다.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고 나서, 평소에 삶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화폐의 수요는 크게 줄어들었어. 아니, 거의 사라져 버렸어.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로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게 있어. 그게 뭔지 알아?”

 

  봄이가 고개를 가로젓자 중년 여성이 흔쾌히 대답했다.

 

  “술과 마약, 그리고 여자.”

 

  중년 여성은 그렇게 말하며 봄이를 가리켰다. 봄이는 그녀가 취한 행동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봄이가 중년 여성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아까 내가 쫓아낸 늙다리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식량과 깨끗한 물, 다른 필요한 것을 넘쳐날 정도로 줄 테니 바로 이 자리에서 한판 하자는 거야. 자길 따라온다면 많은 군중들을 통솔할 수 있는 권력까지 준다고 하더군. 그 녀석은 내가 쉽게 수긍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녀석이 떨어뜨리고 간 가방에는 콘돔이 가득했어. 말솜씨를 보니까 한두 번 거래해 본 솜씨가 아니었어. 녀석의 표정이 그때까지 의기양양한 걸 보니까 소름까지 돋을 지경이었어. 그 자리에서 녀석의 불알 두 쪽을 총으로 쏴서 으깨버리고 싶었지만 쫓아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어. 하여간 짐승 같은 새끼들이야.”

 

  중년 여성이 말하며 손가락으로 발 밑을 툭툭 가리켰다. 그리고는 담배를 한 개비 더 뽑아 상훈에게 제안했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봄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옆에 놓인 촛불이 일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중년 여성이 씁쓸한 미소를 거두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남아 있는 사람들은 서서히 예전 세상을 잊어가고 있어. 남은 사람들은 이제 의지할 만한 게 없으면 그다지 오래 못 가. 물론 의지할 만한 것이라는 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야. 끝없는 쾌락만을 가져다 주는 술이나 마약인 사람도 있고, 자기 자신조차 제어하기 힘든 생존 본능인 사람도 있고, 친구나 남아 있는 소중한 가족인 사람도 있지. 변해 버린 세상을 직시하지 못하고 쾌락에 취해 버린 녀석들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녀석들은 끝없이 스스로 손가락을 뇌에 꽂아 정신 착란을 일으키려고만 해. 자기 자신이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로 그저 눈 앞에 다가온 쾌락만을 즐겨. 왜 그러는 것 같아? 그야 눈 앞의 잔혹하고 처참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 일시적인 안정감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아? 개같지도 않은 소리지. 그런 건 현실 도피밖에 안 돼.”

 

  중년 여성은 기분이 나빠졌는지 물고 있던 담배를 짓이겨 내팽개쳤다. 봄이는 방 안에 가득 찬 담배 연기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상훈이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양초 불빛만이 비추던 방에 바깥 세상의 빛이 스며들었다. 그러자 중년 여성의 뒤쪽에 가득 쟁여져 있는 철제 상자들이 보였다. 봄이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상자들 안에는 뭐가 들었죠?”

 

  중년 여성이 봄이가 가리킨 방향을 뒤돌아보았다.

 

  “아, 이걸 말하는 거야? 기다려. 우리들의 비장의 무기를 보여줄게.”

 

  중년 여성이 의자를 빼고 세 상자 중에서 한 상자를 봄이의 앞에 내려놓았다. 유리병이 부딪히는 명쾌한 소리와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짙은 납빛으로 빛나는 철제 상자에 정체모를 액체가 담긴 병들이 채워져 있었다. 병나발 끝에는 기름때로 물든 거즈가 묶여 있었다. 봄이도 이 물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봄이가 눈을 크게 뜬 채 병들을 내려다보고 있자 중년 여성이 자랑스레 말했다.

 

  “*몰로토프(화염병)야. 우리가 직접 만들었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도 만들기 쉬운 무기일 거야. 총 열다섯 병 있어. 모두들 불타올라서 화끈하게 가 버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그렇지만 아직 써본 적은 없어.”

 

  봄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화염병 한 개를 꺼내 이리저리 살폈다. 중년 여성이 방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장 위험한 무기...... 사람을 죽이는 무기...... 이제 봄이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이 한 가지 더 늘어난 셈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봄이는 얼른 화염병을 철제 상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걸 써야만 할 때가 올까요?”

 

  “내 생각에는 조만간 올 것 같아.”

 

  중년 여성이 엽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내려갔다 올게. 잠깐이나마 편히 쉬고들 있어. 몰로토프는 너무 갖고놀지 마. 그러고 보니 드럼통 불씨는 어쨌어?”

 

  중년 여성이 계단을 내려가자 상민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자 담배 연기 가득한 방안에는 봄이와 상훈 둘만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촛불이 흔들리는 탁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대부분 빠져나가자 상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다시 닫았다. 그 모습을 본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나 배려해 준 거예요?”

 

  상훈은 눈썹을 까딱이며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집에 오니까 어때?”

 

  봄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우리 집도 아닌데.”

 

  “네 마음이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조금만 쉬었다 가.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 눈 앞의 목표에 집중하는 건 좋지만 너무 과하면 쫓지 않느니만 못해. 사실 그 녀석 말대로 가족들이 널 받아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서 여러모로 다행이야. 느긋하게 쉬고 나서 내일 생각하자.”

 

  상훈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 어디선가 이불을 꺼내 폈다.

 

  “우리 가족은 늘 매일 번갈아가면서 깨어 있어야 돼. 교대로 집 주변을 감시해야 하거든. 널 통제소에서부터 여기까지 뜬눈으로 데리고 오느라 피곤해 죽겠는데도 곧 일어나야만 해. 네가 온 뒤로 할 일이 많아졌어. 조금 이따가 보자.”

 

  상훈이 맨바닥에 이불을 깔고 돌아누웠다. 봄이는 그러는 그가 책임감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아까 전 자동차에서 상훈에게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 푹 쉬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봄이는 몸을 돌려 그대로 방을 빠져나오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다리는......이제 좀 어때요?”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봄이는 몇 분 동안이나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이 없자 포기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작가의 말
 

 감사합닏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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