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들어선 로사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제껏 박물관을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기에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세이지도 마찬가지였는지 세이지가 로사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도둑 일이지도 몰랐다.
로사는 긴장 어린 세이지의 표정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인기척은 더욱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 사근사근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
세이지가 로사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더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박물관 안쪽에 있었다.
앞서가던 세이지가 구석에 있던 오래된 빗자루를 검 대신 잡았다.
그리고 한 발, 두 발. 살그머니 사람들의 쪽으로 다가가던 세이지가 멈칫거렸다.
갑자기 멈춘 세이지를 본 로사가 무슨 일이냐는 듯 세이지를 바라봤다.
세이지가 로사를 돌아보더니 괜찮다는 듯 씩 웃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세이지가 말했다.
갑작스러운 세이지의 등장에 사람들은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세이지에게 답했다.
“안녕하세요.”
뒤에 있던 로사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그 상황을 지켜봤다.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황갈색 머리에 키가 크고 허리에 검을 찬 남자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생김새로 봐선 얼굴이 날렵하게 생긴 게 쉐이른 서쪽의 사람들과 흡사했다.
꽤 오랫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는지 어깨에 두르고 있는 망토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누렇게 변한 망토의 본래 색은 흰색이었을지도 몰랐다.
다른 한 남자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황갈색 남자와 똑같이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망토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은 못 봤지만, 역시 허리에 찬 검과 오랫동안 빨지 않은 옷, 마른 진흙이 잔뜩 묻은 신발이 인상적이었다.
‘신발이…….’
남자를 훑던 로사가 남자들의 신발에 시선을 줬다.
잘 보지 못한 모양의 신발이었다.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높이에 신발의 앞코가 뾰족하게 솟아있었다.
저런 비슷한 걸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는데, 잘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을 해보려 머리를 굴렸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도리어 머리만 지끈거렸다.
“로사.”
혼자 생각하던 로사를 세이지가 불렀다.
세이지가 로사를 향해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세이지의 목소리에 두 남자들의 시선이 로사를 향했고, 로사는 갑자기 주목받자 약간 쑥스러웠다.
로사가 그들 곁으로 다가가자 세이지가 로사에게 속삭였다.
조금 들뜬 세이지의 목소리가 로사의 귀를 간질였다.
“손님이야! 난 최근 전시에 대해 잘 모르니까 로사가 설명을 해 드려. 난 휴게실에 가서 다과를 준비할게.”
“제가요?”
갑작스러운 세이지의 말에 로사는 놀라 눈을 껌벅였다.
손님이 왔다는 것도 놀라운데 설명을 하라니.
세이지는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그동안 배웠던 걸 떠올리면서 찬찬히 설명해 드려. 찻물 올려놓고 금방 도와주러 올게.”
다시 온다는 세이지의 말에 용기를 얻은 로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사의 긍정적인 반응을 본 세이지가 로사의 손을 잡고 손님들 앞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이쪽은 이 박물관에서 같이 일하는 로사 티보치나입니다. 여러분의 관람을 좀 더 쉽게 도와줄 겁니다.”
이미 통성명을 끝냈는지 세이지가 그들에게 로사를 소개했다.
로사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손님들에게 미소 지었다.
“로사 티보치나입니다. 이곳 박물관에 잘 오셨습니다.”
“티보치나? 그 티보치나인가?”
손님 중 얼굴이 보이지 않게 모자를 뒤집어쓴 남자가 황갈색 머리의 남자에게 물었다.
황갈색의 남자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모자 쓴 남자에게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따님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 둘째 딸?”
손님들은 그들만이 아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리송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로사와 세이지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눈빛만 주고받았다.
한동안 손님들은 둘이서 대화를 주고받다가 모자를 뒤집어쓴 남자가 앞으로 한 발 걸어 나와 로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티보치나 백작님의 따님 됩니까?”
손을 맞잡으려던 로사가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말하는 손님에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자 아래로 손님의 입이 호선을 그리는 게 보였다.
“어떻게 제 아버님을 아십니까?”
“아, 트라까지 함께 왔습니다.”
“여기요? 이곳에 아버님이 계십니까?”
제 아버지가 지금 트라에 있다는 걸 들은 로사가 놀라며 손님들에게 다가갔다.
아이가 부모를 찾으며 기꺼워하는 모습을 보자 괜히 기분이 좋아진 손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로사에게 말했다.
“학교 총장을 만나고 이쪽으로 오시기로 했으니 조금 있으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로사는 기뻤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너무 좋아 로사의 얼굴이 실룩실룩 움직였다.
연락도 없이 동국으로 떠났다 언니가 그랬는데, 이렇게 또 기별도 없이 트라에 방문하시다니.
“……!”
로사의 웃던 얼굴이 굳었다.
다시 모자를 덮어쓴 남자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앞코가 뾰족한 특이한 신발. 어디서 많이 본 신발.
생각났다.
얼마 전 수업시간에 교과서에서 본 동국인의 신발이었다.
로사가 본능적으로 한발 뒤로 물러났다.
눈앞의 사람이 왜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어야만 하는지 이제야 이해했다.
저 때 묻은 모자를 벗겨보고 싶었다.
정말 저안에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가 있는 걸까. 검은 눈일까.
멀리서 노예로 사는 동방인들 만 보다가 실제 동쪽에서 온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라 로사는 소름이 돋았다.
온몸의 털이 솟구쳤다.
“아, 미안합니다. 제 소개는 아버님을 만나면 제대로 하는 거로 하고 먼저 박물관 구경을 시켜 주시겠습니까?”
모자를 덮어쓴 손님이 정중한 쉐이른 어로 말했다.
굉장히 유창해 유심히 듣지 않으면 외국인인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저 사람은 서쪽의 언어를 저렇게 잘하는데 로사는 자기가 동쪽의 언어를 한 마디도 못 한 다는 걸 깨닫고 새삼 부끄러워졌다.
세이지가 얼른 찻물을 올려놓고 오겠다고 말하며 휴게실로 떠났다.
로사는 두 손님을 이끌고 박물관을 찬찬히 돌기 시작했다.
전시실은 크게 고고관, 회화관, 도자관, 건축관 그리고 특별관이 있었다.
고고관은 동방의 고대 왕국 시절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현재는 쓰지 않는 무기나 흙으로 빚은 토기, 철이 아닌 청동 물품들이 많았다.
기술이 덜 정교했는지 지금보다는 투박한 느낌이었다.
동방의 손님은 요새는 잘 볼 수 없는 것들이라고 했다.
회화관에선 동방의 종교 그림과 일반 문예가들이 그린 그림이 함께 전시되어있었다.
동방에서는 자연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하늘에도 신이 있고, 산에도 신이 있으며, 산 중 왕인 호랑이를 신성하게 생각한다고 배웠다.
로사가 그렇게 설명을 하자, 손님이 슬쩍 덧붙여 말했다.
“호랑이가 신성하게 여겨지는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림에서지, 실제로 만났다간 도망가기 바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전시실에 있던 모두가 웃었다.
문예가가 그린 그림을 보던 중 손님이 한곳을 가리키며 황갈색 머리의 다른 손님에게 말했다.
“이, 이거 운영의 그림 아닌가!”
모자를 뒤집어쓴 손님이 전시장 앞에 딱 달라붙어 그림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황갈색의 손님이 맞는 것 같다고 동조하자 모자를 쓴 손님이 잔뜩 들뜬 듯 말을 뱉었다.
“세상에! 이게 말로만 듣던 운영의 무릉도원이란 말인가? 사라진지 오래라더니 여기에 있었구나!”
옆에서 듣던 로사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 물으니, 손님들이 말하길 그림의 옆에 휘갈기듯 쓴 글씨를 보며 필체가 익숙했고, 낙관을 보니 운영이라 되어있어 알게 되었다 설명했다.
로사는 그들이 들떠서 보던 그림을 다시 봤다.
꼬부랑한 글씨는 읽을 수 없었고, 낙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동방의 글을 모르는 로사에겐 난이도가 높았다.
그런 일은 도자관과 건축관에서도 나타났다.
도자관에서 손님들은 유명한 도공의 작품을 발견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얀 백자 위에 날렵하게 그려진 그림이 일품이라고 했다.
건축관에선 기와의 연대로 지적을 당했다.
초기 왕조시대라고 분류해 놨었던 것이었는데, 손님에 의하면 같은 양식이 몇백 년 전, 한 번 더 유행했었다고 했다.
이 부분은 다시 알아봐야겠다고 로사는 머릿속에 메모해두었다.
“잠깐 차 한 잔 드시겠습니까?”
마지막 전시실을 남겨둔 그들에게 세이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 손님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이지가 쟁반에 찻잔을 담아와 그들에게 건넸다.
“떫군요.”
차를 한 모금 마신 모자의 손님이 말했다.
“단맛을 원하시면 꿀을 넣어드릴까요?”
세이지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손님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시선이 계속 마지막 전시실로 향하는 게 어서 들어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때? 피곤하지 않아?”
세이지가 로사에게도 한 잔 건네며 물었다. 로사가 고개를 저었다.
“가르쳐 드리려 했는데 오히려 가르침 받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로사가 빙긋 웃었다.
그리곤 손님들을 이끌고 마지막 전시실로 향했다.
무덤을 형상화해 놓은 어두운 전시실로 향하는 로사의 뒷모습을 보던 세이지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방금 웃던 얼굴이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그렇게 웃는 건 너무 예쁘잖아…….”
슬쩍 뗀 손 틈으로 보이는 세이지의 얼굴이 홍색이 되었다.
또 그렇게 웃어주면 좋겠다.
세이지가 뭐가 부끄러운지 배시시 웃으며 로사가 들어간 전시실로 따라 들어가려 움직였다.
그런데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세이지의 귀에 소음이 들렸다.
쿵쾅쿵쾅 다급하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
고요해야 할 박물관에서 누가 소음을 일으키는지, 세이지는 그저 불쾌했다.
로사가 알기 전에 불청객을 내 쫓아야겠다고 생각한 세이지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안 가서 세이지는 소음의 정체와 맞닥뜨렸다.
익숙한 얼굴이 익숙하지 않았다.
총장이 굉장히 다급하게 세이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 악력이 늙은이의 것 같지 않아 세이지는 순간 인상을 찡그렸다.
“세이지! 로사는 어디 있느냐! 여기 누가 왔었지?”
“예, 지금 로사가 마지막 전시실에서 안내를…….”
세이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장은 그를 거의 내팽개치듯이 밀치며 전시실로 향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총장의 모습에 당황한 세이지가 잠깐 멍하게 총장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 뒤에서 들리는 다른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티보치나 백작이었다.
“로사가 저 안에 있는가?”
“티보치나 백작님?”
버지니아의 아버지였다.
그들의 입학식 때 본 후, 처음이었다. 세이지가 예의 바르게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들이 백작이 박물관에 올 거라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근데 분위기가 왜 이런 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오랜만이군 세이지 군. 자작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 자넨 아는가?”
지금 그걸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도리어 백작이 자신에게 총장의 상태에 대해 질문하자 세이지는 고개만 저었다.
“모르겠습니다만, 백작님께선 아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나도 모르겠네. 대화 도중 갑자기 손님들이 동방인이라는 것을 듣더니 저리 놀라시니……. 일단 따라가 보세나.”
백작이 손짓을 하며 세이지에게 동행을 청했다.
세이지가 기꺼이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