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피스텔에서 사이먼 재단의 도체티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세 번 울리자 여자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한국의 Mr. 정. 제이콥 제거는 어떻게 되가나? “
“진행하고 있는데, 접근이 쉽지 않아.”
“이봐, 도체티. 넌 지난번 전화 통화에서 18일까지 제거 한다고 약속했어. 그게 내일이야.
병원에 새 사람이 왔어. 이달에도 장기 700여개가 실려 나갔다. 제이콥이 있는 한 빼낼 수가 없어.
앉아서 돈을 잃고 있다고!
약속을 지켜줘야지!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모든 게 허사가 돼. “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12월 20일 전에 일이 끝나지 못하면 모든 게 끝나.
그러면 너는 영원히 알뮬라재단의 시다바리나 하면서 개 노릇이나 하게 될 거야. “
난 거칠게 말하고 있었다.
“잘 들어둬, 도체티. 이번이 기회야.
12월 20일까지 끝내. 그러면 너희 사이먼 재단이 알뮬라를 누르고 이 업계의 1인자가 된다. “
“......”
난 전화를 끊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2월 18일 오후 4시.
차범석은 이틀 밤을 새운 채 집으로 돌아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고개를 숙인 채 계단을 걸어 올랐다.
초인종을 누르자 파출부 아줌마가 문을 연다.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야. 집사람은?”
“민정 아가씨 전화 받고 나가셨어요.”
그는 말없이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여행 가방을 꺼내 옷가지를 챙겨 넣고, 금고를 열어 감춰 놓았던
지폐뭉치를 가방 밑에 쑤셔 넣었다.
‘대책이 없어. 이렇게 까지 꼬일 줄이야. 얼마동안 사라져서 사태를 관망하는 수밖에! “
여행 가방을 들고 나서는 차목사를 보고 파출부가 물었다.
“어디 가세요?”
“응, 어디 급하게 다녀올 데가 있네. 집사람 들어오면 전화한다고 해.”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차범석은, 다리가 풀려 지하 주차장까지의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차의 뒷문을 열고 가방을 넣었을 때 한 남자의 억센 손이 그의 뒷덜미를 잡았고,
남자의 완력에 그의 몸이 가방과 함께 뒷좌석에 처박혔다.
“여어! 목사님 어디 여행 가십니까?”
남자들은 셋이었다.
차범석의 심장박동이 두 배쯤 빨라졌다.
“누, 누구요?”
“그건 알거 없고, 태식이 형님께서 기다리고 있으니 같이 좀 가봐야겠수다.”
그를 잡고 있는 남자가 옆에 올라타고, 나머지 두 명이 운전석과 조수석에 올랐다.
운전석에 탄자가 손을 내밀어 차키를 요구했다.
그제야 사태를 짐작한 차범석은 차키를 건네주고 눈을 감았다.
송여사의 말이 떠올랐다.
“김태식이 조심 하세요. 그에게 병신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래요!”
은빛의 벤츠 S500L 은 초겨울의 바람을 가르면 올림픽 대로를 달렸다. 차
는 미사리 조정 경기장을 지나, 산업공단 낡은 건물 앞에서 멈췄다.
그는 남자들에게 이끌려 건물 지하실로 들어섰고, 그가 들어서자 지하실 철문이 닫혔다.
“앉아!”
그를 잡고 있던 남자가 그를 밀어,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철제의자에 앉혔다.
잠시 후 한 남자가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태식 이었다.
“아이고! 이거 목사님 여행 가신다면서요?”
이미 기세에 제압당한 차범석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김태식은 천천히 걸어, 차범석 앞으로 다가섰다.
“짝!”
순간 차범석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김태식의 힘이 들어간 따귀 한방에 차범석의 머리가 반쯤 돌아갔다.
“야! 이 씨발 새끼야! 니가 내 돈 떼먹고 토끼려고 해?
이 새끼 날 뭘로 보는 거야! “
평생 동안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차범석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랐다.
”저, 김사장! 내가 잘못했네. 조금만 더 기회를 주게.
곧 돈이 들어 올 거야. 며칠만 더 참아주게. 제발, 제발......“
“내가 말했지? 18일 4시 넘기면 통보 없이 작업 들어간다고. 근데, 토끼려고 해?
그래. 좋아.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마지막이야. 일주일 더 주겠어. 만일 또 한 번 약속 어기면, 그땐 발꿈치를 잘라버린다. “
은빛 벤츠는 올림픽 대로로 접어들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려 차가 기우뚱 거린다.
차범석은 비상등을 켜고, 차를 오른쪽에 붙여 세웠다.
그는 뛰다시피 차 문을 열고 나와, 가드레일을 붙잡고 구토를 했다.
“컥! 꺼억!”
위가 틀어져 가슴까지 올라오며, 먹었던 음식물을 모두 쏟아냈다.
그는 입안에 남아있는 신물을 뱉어내고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휴우!”
그는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랫도리가 차가웠다.
오줌을 지린 것이다.
그는 욕실로 가, 찬물로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사돈댁이었다.
“아니, 사돈양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김태식이란 자가 전화를 해서는, 내일부터 설정 작업에 들어간다는데,
아무리 사돈지간 이지만, 이거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
“예, 예. 사돈어른. 고정하십시오. 제가 처리 하겠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
“사정은 며느리에게 들어서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러면 안 되지요. 그
런 전화, 다신 안 오도록 처리해 주십시오!”
“예, 예. 알겠습니다. 사돈어른.”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벨이 울렸다.
“아버지. 저에요, 민정이. 아버지, 정말 이러실 수 있어요? 저 이제 시댁에 갈 엄두도 못 낸다고요.
시어머니께서 전화 하셔서 뭐래시는 줄 아세요? 며느리 잘 못 들이면 집안 망한데요!”
“응, 그래. 알겠다. 내가 처리 할게. 미안 하구나.”
전화를 끊자 또 벨이 울린다.
그는 전원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껐다.
그날 저녁, 8시. 소공동 중식당 ‘원가계’
난 한경일보 기자 박동훈을 만나고 있었다.
그는 나의 대학 동기였고, 지금은 진보성향의 작은 신문사 기자다.
이스탄불에서 처음 돌아왔을 때 그를 만난 이후, 동훈과는 오랜만에 함께하는 술자리였다.
동훈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그래 어떻게 지냈니? 소설은 잘 돼가고?”
“하, 하. 소설은 무슨. 넌 좀 어떠냐? 요즘.”
“하아! 나야 맨날 그렇지, 뭐. 특종 찾는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그게 맘같이 되겠니?
그냥 하루하루가 고달프다.”
“하긴 기자생활이 다 그런 거지.”
팔보채를 안주삼아 고량주 한 병을 비웠을 때, 난 그에게 말했다.
“내가 특종 하나 줄까?”
그는 비우려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종? 하, 하. 특종이 무슨 어린애 이름인줄 알아?
그거 하나를 쫒기 위해 평생을 보내는 기자들이 수두룩해.”
“너 대광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성화궁 사업 알지?”
“알지. 장기기증운동과 노인복지······. 그거 말이냐?”
난 테이블위에 서류 봉투를 올려놓았다.
“이게 뭐냐?”
“특종!”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내용을 훑어보았다.
봉투 안에는, A4 용지에 빼곡히 인쇄된 사진과 자료들이, 200장이 넘게 들어 있었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는 동훈의 눈이 긴장하고 있었다.
“너, 이거, 어떻게 입수한 거니?”
“그건 물을 거 없고. 집에 가서 잘 읽어봐.
자료와 사진, 모두 사실이고 증거야.
그거면 특종 만드는데 충분 하리라고 생각해.
가지고만 있다가 내가 전화하는 날, 터트려. 타이밍이 중요하다. “
동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위험하지 않을까?”
“난 그걸 수집하기위해 목숨을 걸었어.
특종 잡겠다며 그 정도 용기도 없나?
그 정도라면 목숨 걸만하지 않아? “
동훈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넌 언제나 가끔씩 나타나, 날 놀라게 하곤 했어.
지금도 그렇고.
해야지!
기자는 가치가 있는 사건이면 목숨을 건다.
그래. 난 이 사건에 목숨을 걸겠어! “
“고맙다. 동훈아.
하지만 서두르면 안 돼. 갖고만 있어.
그리고 내가 신호를 보낼 때 터트리는 거야.
연말 특종이 될 거다. “
그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너는 사람을 끌어드리는데 재주가 있는 놈이야.”
그날 저녁.
난 오피스텔로 돌아와 사이먼의 도체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 목소리가 전화를 받는다.
“내일 저녁 10시, 난 마드리드로 간다.
같은 장소에서 만나자. “
“무슨 일이지?”
“20일까지 너만 믿고 있을 수 없어. 내가 갈 거야.”
“기다리겠다.”
12월 19일 밤 10시.
난, 로그로뇨 애비뉴에 있는 엘 카프리쵸 공원, 작은 예배당 앞에 서 있었다.
난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었고, 잠시 후 중절모를 쓴 남자가 호수 쪽 구름다리를 건너서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래, 무슨 일이야?”
“시간이 없어.
너희는 제이콥에게 접근 못해. “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접근할 수 있다.
내일 아침, 7시. 프라하 미술관 근처 고야동상 앞으로 헌팅캡을 쓴 노인이 갈색 푸들을 끌고 걸어 갈 거야.
그가 제이콥이다. 단 한 번의 기회야.
그를 납치해, 이곳 예배당 지하실로 데려와.
여기서 그를 처리해야 한다. 내 눈 앞에서. “
순간 남자의 눈이 긴장했다.
“그게 사실인가? 정말 제이콥이 그 장소에 나타날까?”
“자신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어.
실수 없도록 해. 한번이자 마지막 기회야. “
아침 7시. 난 엘 카프리쵸 공원, 작은 예배당 지하실에 혼자 서 있었다.
내목엔 흑요석이 박힌 앙크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그 시간, 헌팅캡을 눌러쓴 제이콥은 갈색 푸들을 끌고 아침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고야동상 옆 벤치에 잠시 앉아, 여느 때처럼 휴식을 취했다.
순간, 벤치 뒤에서 남자의 손이,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덮었다.
강한 클로로포름이 그의 호흡기를 타고 들어와 중추신경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그는 옆으로 천천히 쓰러진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들은 의식을 잃은 노인을 양 옆에서 부축해 끌고 가,
건너편에 세워놓은 앰뷸런스에 실었다.
지나는 몇몇 사람들이 벤치에 쓰러진 노인을 앰뷸런스에 싣고 가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남겨진 갈색 푸들만이 앉아서, 산책으로 더러워진 발을 핥고 있었다.
노인은 추위를 느끼며 서서히 눈을 떴다.
흐릿하던 사물들이 차츰 제 모습을 찾아간다.
한 남자가 그 앞에 우뚝 서있다. 그리고 그 뒤에 몇 명의 키 큰 남자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눈의 초점이 앞에선 남자의 얼굴에 잡혔다.
“헉! 너, 너는 파라오!”
“정신이 드십니까? 박사님.”
노인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여긴 어디야? 왜 네가 여기 있지?”
“박사님과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해, 한국에서 왔습니다.”
노인은 그제야 사태를 짐작했다.
“넌 누구냐? 네 정체가 뭐야?”
난 그의 눈앞에 걸고 있던, 앙크 십자가를 흔들었다.
“앙, 앙크! 흑요석이 박힌 앙크 십자가!”
“그래요. 박사님. 제레미아를 아십니까?”
“네가 어떻게 제레미아를 알지? 그건 우리 가문의 비밀이야.”
“그래요. 박사님은 돈호반 가문의 후계자이시지요.
그래서 제레미아의 비밀을 알고 계십니다.
2천 년 전 예수의 사도, 제레미아가 예언했어요.
언젠가 앙크 십자가를 찾은 사람이 나타나 비밀을 풀고,
그가 사탄의 성을 파괴할거라고요.
전 터키의 오래된 교회에서, 제레미아의 유언서가 적힌 파피루스를 찾았지요.
그리고 그 비밀을 풀었습니다.
비밀을 푼 사람의 자격으로 이 흑요석이 박힌 앙크 십자가를 얻었지요.
그리고 성화궁을 부수고 있는 겁니다. “
앙크 십자가에 박힌 흑요석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회색 눈동자가 뒤집어지며 입으로 짐승의 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한다.
“안 돼! 이천년간 지켜 내려온 비밀이야!”
노인의 눈은 점점 짐승의 눈으로 변해갔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 이었다.
난 뒤에 서있는 남자들에게 사인을 보내고 돌아섰다.
남자들은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노인에게 겨누고 있었다.
내가 지하실에서 나올 때 세발의 낮은 총성이 들렸다.
난 고개를 돌렸다.
짐승의 몸이 경련하고 있었다.
지하실에서 올라왔을 땐 차가운 아침 햇빛이 예배당을 밝히고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체티가 물었다.
“자, 이제 다음은 뭐지?”
“기다려. 연락할거야.”
여자 목소리가 말했다.
“고맙다. 넌 우리의 오랜 숙원 계획을 한 순간에 끝냈어.
제이콥 박사와 넌 어떤 관계지? “
“하, 하. 그건 알거 없잖아? 오래된 얘기야.”
난 돌아서며 말했다.
“한 가지는 알아둬. 난 약속을 지켰고, 넌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남자는 말이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