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햇살이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뚫고 들어와
방안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 9시다.
임화경은 메모를 남긴 채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어요.
어젯밤 일은 잊어버리세요. “
난 서둘러 임화경의 집을 나와 대광교회로 갔다.
“11월 공정 보고서와 자금 요청서 입니다.”
“아, 그래요? 수고 했어요. 그래, 현장은 어떤가?”
“현장은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자금투입만 적시에 이루어진다면, 연말 전에 25프로를 넘어섭니다.”
차범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3차 예산만 들어오면 한시름 놓겠는데······.
혹, 별문제는 없겠지?”
차범석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쪽에서 할 일은 다했으니,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래야 할 텐데.”
차범석은 성화궁 사업에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총 예산 2조 공사에, 대광교회 측에서 20프로인 4천억을 초기 투자하면,
L.O.P. 재단에서 80프로인 1조 6천억을 투자하기로 재단과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초기 투자금 4천억은, 애초부터 30프로 높게 책정되어진 예산 계획에 따라,
공사가 끝날 즈음이면 자동으로 회수 되고도 남을 것이다.
처음 이 사업을 시작할 때, 학교 후배였던 신경식이 그를 찾아 왔었다.
“교회에서 4천억만 마련하면 나머지는 L.O.P. 재단에서 투자합니다. 내가 보증 하지요.”
그리고 공사가 시작되자, 반신반의하던 신경식의 말이 현실이되어 돌아왔다.
L.O.P. 재단에서 1차 예산 2천억이 입금된 것이다.
물론 재단에서 제시한 계약 조건, 양쪽에서 20대 80 투자하고 지분은 40대60에 동의한 후였다.
초기 투자금 20프로가 부담스러웠으나 이보다 더 좋은 계약 조건이 있으랴!
1차 예산이 들어오고, 탄력을 받은 차범석은 초기 투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교회 건물을 저당 잡히고, 자신의 집과 땅, 그리고 급기야는 사돈댁 명의까지 밀어 넣었다.
“3차 예산, 3천억만 들어오면 끝나. 3천억, 3천억......”
차범석은 눈을 감으며 의자를 뒤로 젖혔다.
난 교회를 나와 도향 병원으로 갔다.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자, 임화경은 인사 대신 미소를 지어 보인다.
잠시 후, 커피 잔을 들고 들어온 그녀는 결재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분 어떠세요?
난 커피 잔을 입에 대며 말했다.
“오랜만에 깊은 휴식을 취했어.”
그녀는 사인을 마친 결재 서류를 들고 나가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난 병원을 둘러보고 오피스텔로 돌아와, 도향병원의 장기 밀매와 관련된 자료와 사진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수첩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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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경식-(X)
(2) 차범석-( )
(3) 제이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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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신경식의 이름 옆엔 (X) 표시가 되어있었다.
두 번째가 차범석이다. 준비는 끝났고 상황만 지켜보면 된다.
“앙크는 모두 찾았어. 이제부턴 그 악마의 문양을 하나씩 없애 가야해.”
12월 3일 저녁 8시.
난 임화경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천 호수공원을 걷고 있었다.
초겨울의 찬기에 공원은 한적했고,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 커플들과 롤러스케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만이 공원을 지키고 있었다.
호수 옆, 벤치에 잠시 앉았을 때 내가 말했다.
“조직을 사랑하나?”
“사랑하다니요?”
"그래, 넌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 채 조직을 위해 네 젊음을 소비하고 있어.
그건 조직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대답은 원장님이 먼저 해야 하는 대답 아닌가요?”
“그래, 내가 먼저 대답해야 할 질문이겠지.
난, 조직을 증오해. 조직원으로 내 인생을 마감할 수는 없어. “
“그건 불가능해요.”
“알아. 하지만 난, 내 정체성을 찾고 싶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러기엔 상대가 너무 강해요.”
“난 혼자이지만, 강한 조직 안에 있는 강한 자야.
난 조직을 알고 있고, 조직은 나를 몰라. “
그녀는 호수를 쳐다보던 눈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위험한 생각을 하시는군요.”
“그래, 이제 네 차례야. 조직을 사랑하나?”
잠시의 침묵 뒤에 그녀가 말했다.
“증오해요. 그 옛날, 내가, 내 양아버지의 가슴에 칼을 꽂으며 느꼈던 증오지요.
하지만 증오를 느끼는 순간, 저는 절망해요. 주어진 운명이니 그냥 가는 거지요.”
그녀의 눈은 어느새 젖어있었다.
난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함께 가주지 않겠어?”
“누군가 강한 사람이 제 손을 잡아준다면 저도 그 길을 따라가고 싶어요.”
“가자. 나와 함께 가자. 어차피 가야만 될 길이야.”
난 그녀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전 갈 데가 없어요. 가족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요.
그 옛날, 마드리드의 고야동상 옆 벤치에서 밤을 지새울 때 같아요.
아침이 되면 누군가 나타나서 제 손을 잡아줄 거라는 막연한 희망밖엔 없었지요.
정말 아침이 되자 한 노인이 제 손을 잡아 주었고, 전 그 노인을 따라갔지요.
그리고 전 악마가 되었어요.
이제 다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한 남자가 제 손을 잡아요. 그리고 난, 그 남자를 다시 따라갈 거예요.
설사 죽음의 길이라도 따라가고 싶어요. “
그녀는 지나온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오랫동안 오열했다.
12월 6일 오전 10시.
마드리드로부터 날아온 메일을 잃고 있는 차범석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뭐야? 이거! 개새끼들!”
“대광교회 차범석 목사님께.
보내주신 11월 공정표와 3차 예산 요청서는 잘 받아보았습니다. 먼저 공정을 맞춰주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12월 6일로 잡혀 있던 3차 예산 집행일이, 예기치 않은 재단 사정으로 12월 17일로 연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재단의 자금 라인에서 생긴 문제입니다. 이점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연기된 날짜는 12월 17일 입니다.
-L.O.P.재단 이사장, 제이콥 박사- “
난 차목사의 긴급 호출을 받고 대광교회로 달려갔다.
이미 당회장 실엔, 사색이 된 차목사와 최장로가 앉아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차목사님.”
소파에 앉아있던 차목사가 손을 들어 책상위의 모니터를 가리켰다.
“메일 한번 읽어보게.”
난 그의 책상으로가, 띠워놓은 메일을 읽었다.
“큰일이군요.”
“큰일 정도가 아니야! 난 이제 죽게 생겼어. 모든 게 탈탈 털린 상태인데.
뭐하자는 거야? 개자식들!”
최장로가 말을 받았다.
“이스탄불 신경식이 대체된 것도 그렇고, 재단에 뭔가 사정이 생긴 건 아닐까요?”
“재단에 사정이 생겨? 그럼, 난 어떻게 하라고?”
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너무 속단하지는 마십시오. 12월 17일까지는 기다려 봐야지요.”
“참, 편하게들 얘기하는군. 죽는 건 나 하나야.
안되겠군, 정집사가 내일 당장 마드리드에 가, 이사장을 만나보게.
12월 15일을 넘길 수 없다고 못을 박아. “
난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러겠습니다. 내일 출발 하지요.”
참범석은 일어나 모니터의 메일을 다시 읽었다.
“12월 17일은 안 돼! 에이! 씨발 새끼들!”
그는 책상위에 놓여있던 앙크 십자가를 집어 던졌고, 십자가는 하마터면 최장로의 머리를 때릴 뻔 했다.
난 당회장 실을 나와 오피스텔로 갔다.
캐비닛을 열고, 도향병원의 이성수 원장이 떠나며 넘겨주었던 서류들 속에서,
사이먼 재단의 스페인 지부장인 도체티 암부르그의 파일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인적 사항을 수첩에 옮겨 적고, 그의 사진을 기억에 담았다.
핸드폰을 열어 임화경에게 문자를 보냈다.
“난 내일 마드리드로 간다. 사이먼 재단의 도체티를 만날 거야. 거기서부터 우리일이 시작될 거야.”
바로 답장이 왔다.
“조심하세요. 사이먼의 도체티는 악명 높기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틀 후, 12월 8일, 오전 7시.
난 마드리드 프라하 미술관 근처, 고야동상 옆 벤치에 앉아있었다.
잠시 후, 헌팅캡을 쓴 노인이 갈색 푸들을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노인은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
“날씨가 춥군. 한국도 많이 춥다며?”
“예, 이제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 되었지요.”
옆에 앉은 갈색 푸들이 발을 핥고 있었다.
“차범석은 자네 계획대로 돼가나?”
“예, 자금이 동결되면, 그는 스스로 무너집니다. 이달 안에 일이 끝날 겁니다.”
“자네는 소리 없이 일을 처리하는군. 자네가 하는 일은 잡음이 없어서 좋아.”
난 자리에서 일어나 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녀석 이름이 ‘르위스키’라고 하셨지요?”
“그래, 조심하게. 앙칼진 데가 있는 여자야. “
“박사님께서는 매일 이곳을 산책 하십니까?”
“일요일만 빼고, 매일 아침 이 녀석을 데리고 여기 온다네. “
그날 오후 세시, 마드리드 리츠호텔.
난 핸드폰의 칩을 바꾸고, 떠나기 전 수첩에 적어 놓았던 도체티의 핸드폰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한국에서 온, ‘정’입니다.
장기 밀매와 관련해서 만나고 싶습니다.
관심 있으면 전화 말고, 문자로 주십시오. “
1분도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장기 밀매라니 무슨 말입니까?”
"저희는 매월 800개 이상의 장기를 확보합니다.
판매루트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십시오. “
다시 답장이 왔다.
“밤, 9시 정각, 엘 카프리쵸 공원, 작은 예배당으로 오십시오.”
난 답장을 보냈다.
“혼자 갈 겁니다. 그쪽도 혼자 오십시오.”
다시 답장이 왔다.
“혼자 갈 겁니다.”
밤, 9시 10분전.
난, 로그로뇨 애비뉴에 있는 엘 카프리쵸 공원, 작은 예배당 앞에 서 있었다.
난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었고, 잠시 후 중절모를 쓴 남자가 호수 쪽 구름다리를 건너서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한국에서 온 ‘정’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이먼 재단의 도체티 암부르그씨가 맞습니까?”
“그렇다고 해 두지요. 난 여러 개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남자는 중절모를 눌러쓰고 있었지만, 얼굴의 윤곽으로, 그가 사진속의 ‘도체티’ 란걸 알 수 있었다.
남자는 등치가 크고 선이 굵어 강한 이미지를 풍겼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자 같았다.
“당신이 장기밀매 문제로 나를 만났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겠나?”
“L.O.P.의 한국 조직원인 이성수를 아십니까?
순간 남자의 눈이 긴장했다.
“아는데. 당신은 누구지?”
“하, 하. 전 거래 관계로 당신을 만난 겁니다. 피차 신상문제는 거론 안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성수 원장이 한국을 떠나기 전, 저와 거래를 했지요.
도향 병원에서 수집되는 장기는 L.O.P.로 넘어갑니다.
매달 800개가 넘습니다. 그는 자기가 수집한 장기들을, 거저 L.O.P에 넘기기가 싫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만났지요. L.O.P의 제이콥만 제거하면 장기를 내게 넘기겠다고요. “
남자는 믿기지 않는지, 여자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이성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L.O.P. 재단의 조직원. 암호명이 카니발. 레벨 3입니다.”
“이성수는 떠났는데, 어떻게 장기를 확보할 수 있나?”
“제이콥만 제거 되면 우리가 도향 병원을 접수할 수 있지요.
재단에서 도향병원을 아는 자는 제이콥 한사람뿐입니다.”
“우리보고 제이콥을 제거해 달란 말이군!”
“당신이 제이콥을 제거하면 내가 병원을 접수 합니다. 그리고 거래가 시작 되지요.
제이콥 제거는 사이먼의 계획 아니었던가요? “
남자는 말이 없었다.
‘이자는 누구기에 장기밀매 구조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일까?’
“맞아. 제이콥 제거는, 오래 전부터 우리가 세운 계획 이었어.”
“그냥 OK, 하면 그뿐 아닌가요? 그쪽에선 손해 볼게 없는 것 같은데. “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뱉었다.
“좋아. 하기로 하지. 하지만 제이콥 제거 후에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하, 하······. 자신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지요.”
“한국에 돌아가서 연락드리지요.”
난 돌아서며 그에게 말했다.
“그쪽도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거래는 없을 겁니다.”
난 느린 걸음으로 공원을 빠져 나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