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동 도향병원에 도착했을 땐,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임화경은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고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곧 준비가 끝날 겁니다. 물건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이곳 도향병원의 실무 책임자로, L.O.P. 재단 멤버다.
암호명은 ‘포라’, 레벨4.
난 원장 집무실로 들어와 책상에 앉아, 오늘밤 운송할 장기 리스트를 읽었다.
장기 리스트는 영문 이니셜로 표기되어 있었다.
‘H-185 E/A, K-636 E/A, E-447······.
Total : 3,124 E/A.
아마도, H는 심장, K는 신장, 그리고 E는 안구겠지.
“어마어마한 물량의 인간의 장기가 이곳에서 추출되어 아랍으로 건너간다.
그들 속에 난 혼자 들어와 있고, 나와 그들 사이엔 지금 임화경이 있다.
일단 그녀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해. “
그녀를 집무실로 불렀다.
“임화경이라고 했지? 이곳, 도향병원에 있는 L.O.P.재단 멤버가 몇 명이나 되나?”
“저와 앰뷸런스 기사 2명, 장기 적출실의 외과의사 제롬, 그리고 간호사 2명,
총 6명입니다.”
“그들 모두가 우리 일을 알고 있나? “
“외과의사 제롬과 운전기사 2명만이 세부사항을 알고 있고,
간호사들은 장기 적출에만 관여할 뿐 운송에는 무관합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롬은 레벨3으로 터키사람입니다. 작년에 이곳으로 부임했지요.”
“음, 그는 내가 여기에 온 경위를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내일 출근하면 인사를 드릴 겁니다.”
“임화경씨는 조직에서 일한지 얼마나 됐어?”
“5년 전, 도향병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이성수 원장님과 함께
이곳으로 왔습니다.”
“흠, 그래. 알겠네. 새 원장이 올 때까지 나를 도와주길 바래.”
“알고 있습니다. 원장님.”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으니 적출 실을 둘러볼까?”
난 미리 준비해 온 볼펜형 소형 카메라와 첵크보드를 들고 그녀를 따라,
별동, 영안실 옆에 위치한 장기 적출실로 갔다.
영안실과 마주 보고 있는 장기 적출 실은 스테인리스로 된
양개도어에,
“관계자 외 출입엄금”이란 팻말이 붙어있었다.
난 볼펜형 소형 카메라를 잡고 있는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을 찍었다.
50평이 넘는 실내는 각종 의료기구와 전자 장비들로 가득했고,
입구 맞은편으로, 후면 주차장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따로 있었다.
중앙엔 무영등이 달린 수술대, 오토클레이브와 썩션기, 고압 멸균기······.
그리고 일반 수술실에서는 볼 수 없는 급속 냉각 시스템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전자장비들······.
볼펜형 카메라를 잡고 있는 내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기 축출실 점검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임화경이 들어왔다.
그녀는 벌써 입고 있던 녹색 유니폼 대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출발준비 끝났습니다.”
서둘러 그녀와 함께 영안실 뒤, 후면 주차장으로 나가자, 두 대의 앰뷸런스가 출발 준비를 끝내고 대기하고 있었다.
난 앞차에 임화경과 함께 올랐고.
두 대의 앰뷸런스는 병원 주차장을 빠져나와 경광등을 켜고,
5분 간격으로 출발했다.
서창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온 앰뷸런스는 평택시흥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경광등을 켜고 달리던 앰뷸런스는 송산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오며
경광등을 껐다.
그리고 앰뷸런스는 322번 국도를 지나 어섬 여울목, 송전탑 앞에서 멈췄다.
시계는 1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차에 앉아 시간을 보내야했다.
송전탑 너머로 보이는 밤바다는 암흑 속에 고요했고, 싱긋한 바다 냄새가 가을바람을 타고 차안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내 눈은 칠흑 같은 바다만을 응시한 채 말없이 고정되어 있었고, 옆에 앉은 임화경도 긴장한 모습으로 바다만 바라봤다.
“나가볼까?”
시계가 1시 50분을 지나며, 난 차문을 열고나와 송전탑 밑에 섰다.
따라 나온 임화경도 내 옆에 붙어 서서 바다를 응시했다.
바로 그때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저기예요!”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탄도항 쪽 바다를 가리킨다.
연이어 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점멸하던 불빛이 멈추었을 때,
난 가지고간 회중전등을 켜고 두 번을 깜박거렸다.
이어서 저 멀리 불빛도 두 번 점멸했다.
그리고 불빛은 점점 우리가 서 있는 송전탑 쪽으로 가까워 온다.
이윽고 목선이 방파제에 닿았고, 검은 털모자를 쓴 남자 네 명이
배에서 내려 우리 앞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중 턱수염을 기른 터키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섰다.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파라오.”
“운반책, ‘람몬’ 선장입니다. 리스트를 주시지요. “
난 그에게 오늘 운송될 장기 리스트를 건네주었다.
“물량이 꽤 되는군요.”
남자는 뒤에 서있는 3명의 남자들에게 손짓을 했다.
임화경이 3명과 함께 앰뷸런스로 가, 뒷문을 열어주었고,
남자들은 신속하게 움직이며 장기가 든, 알루미늄 케이스를
배에 싣기 시작했다.
람몬 선장은 꼼꼼히, 실려지는 알루미늄 케이스와 리스트의
일련번호를 대조하며, 체크해 나갔다.
남자들의 몸놀림은 능숙하고 빨랐다. 30분 만에 두 대의 앰뷸런스에 실렸던 알루미늄 케이스들이 모두 운반선에 실렸다.
난 선장으로부터 확인서에 사인을 받았고,
인간의 장기를 실은 운반선이 서서히 해안선에서 모선으로 움직여 갔다.
난 운반선이 탄도항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굳게 입을 다문 채 서있었다.
일을 마친 두 대의 앰뷸런스가 동시에 여울목을 출발했고,
새벽 네 시가 못되어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난 앰뷸런스에서 내려 내 차로 옮겨 타며 임화경에게 말했다.
“수고했어. 들어가 쉬어.”
“수고하셨습니다. 원장님.”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땐 이미 창밖이 아침의 빛으로 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차범석은 최장로와 당회장실에 앉아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스탄불 신경식이 일주일째 연락이 안 돼.”
“저도 연락이 안돼서 강림교회로 전화를 해봤는데,
교회 직원 얘기로는, 일주일전 마드리드로 급히 간다는 문자만 있었고,
통 연락이 안 된답니다.”
“근데, 왜 전화가 안 되는 거야?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야?”
“그럴리야 있겠습니까. 그는 재단 사람이니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겠지요. 재단일이란게 원래 그런 거 아닙니까?”
차범석이 말을 받았다.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생겨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군.”
차목사는 은근히 그가 없어져 주길 바랬다. 신경식은 성화궁 사업에 L.O.P. 재단을 주선한 공로가 분명 있었지만, 동시에 지금은 가장 부담스런 존재이기도 했다.
“참, 최장로님이 오늘 김태식이를 좀 만나줘야겠어.”
“지난번 사채 때문 입니까?”
“그래요. 그가 못 박은 상환 날짜는 아직 여유가 있지만,
그래도 일단 만나서 이쪽 사정을 얘기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예, 제가 만나보지요.”
최장로가 당회장실을 나가자, 차목사는 송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세. 잠원동으로 애 하나만 보내주게.”
“송 여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나만이요?
“그래. 참한 애로 하나만. 둘은 정신 사나워 집중이 안 돼.”
"아하, 예. 회장님. 마침 새로 온 애가 하나있는데,
저녁에 잠원동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차범석은 이 사업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심지어 사돈댁 명의까지 빌려 성화궁 사업에 넣었다.
사업은 무리 없이 진행돼 가고 있었지만,
11월 말의 마지막 관문을 넘어야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하루가 일 년 같았고, 집에 가도 잠을 잘 수 없었다.
하루라도 여자가 없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래도 여자를 안으면 초조한 현실의 감각을 덮고 잠들 수 있었다.
충무로 예성빌딩. 사채업자 김태식의 사무실.
최장로는 김태식을 처음 본다.
“안녕하십니까? 최일권 이라고 합니다. 대광교회 차목사님 부탁으로 왔습니다.”
김태식은 책상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눈만 치켜뜨고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직 날짜도 많이 남았는데.”
“아, 예. 차목사님께서 김 사장님과의 상환 날짜가 12월 18일
이라고 하셨습니다. 날짜 안에 갚을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제야 김태식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하, 하······. 뭐, 그런 걸 가지고 여기까지 사람을 보냅니까.
전화로 해도 될 일을. 우리 차목사님께서 불안하셨나 보군요.
처음 돈을 빌리실 때, 차목사님이 제시한 상환기간은
한 달이었습니다. 그런걸, 제가 두 달로 해드렸지요.
그게 12월 18일입니다. 가서 전하십시요.
불안해하실 거 없다고.
시간도 충분히 드렸으니, 약속 날짜만 지키시면 됩니다.
이, 김태식이, 깨끗한 놈입니다.
어떤 사채업자가 채무자가 제시하는 상환기간을 두 배나,
알아서 늘려 줍니까?
말씀드리세요. 걱정 마시라고.
하지만,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12월 18일을 넘기면
나는 통보 없이 회수에 들어갑니다.
나, 현금 장사하는 놈입니다. 두 번 얘기 안합니다.
12월 18일. 두 달 이자포함 636억입니다.
아시겠지요? 그대로 전하십시오. “
예성빌딩을 나오는 최장로는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인상도 그렇고, 말투도 그랬다.
“이런 놈들하고 엮이면 뒤가 좋지 않은데......”
난 솔멧 봉우리에 혼자 올랐다 . 초겨울의 찬기가 입고 있는 점퍼 깃을 파고든다.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한 후 현장을 내려다보았다.
12월을 며칠 앞둔, 용인 현장은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내일 까지면 약속한, 20프로 공정이 넘어설 거야.
차목사는 재단 본부에 3차예산 3,000억을 요구 하겠지.
이제 차범석을 제거할 시간이 되었어.
예산 집행을 막아야 해. “
오피스텔로 돌아와 마드리드 제이콥 박사에게 직접 보고서를 썼다.
--------------------------------
-제이콥 박사님께-
*발신 : 파라오.
*발신지역 : Seoul.
*발신날짜 : 2003년 11월 28일.
*보고내용 : 성화궁 공정이 11월 말로 20프로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면 바로 차범석은 3차예산 3,000억을 요청할 것입니다.
3차예산이 집행되면, 예산의 상당부분을 개인적으로 착복할 것입니다.
애초부터 그가 계획한 일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처음부터 사업의 예산은 30프로가 넘게 오버 책정 되어있습니다.
지금 그를 제거하지 못하면, 재단은 6천억의 손실을 감당해야합니다.
3차예산 집행을 한 달만 늦춰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를 제거하겠습니다.
-파라오-
-------------------------------------------------
메일의 Send 버튼을 눌렀다.
10분도 안되어 답장이 왔다.
“성화궁 사업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조직 내에, 자네와 나, 둘 뿐이네.
그래서 임무를 지시 할 때도 아침 산책길에 공원에서 직접 만나 얘기했었지.
자네를 믿고 하는 일이야. 책임지고 차범석을 제거하게.
그러면 성화궁 사업은 자네가 맡게 될 거야.
난 신뢰로 사람을 평가 한다네.
-제이콥-
-------------------------------------------------
삭제버튼을 누른 후, 메일을 닫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