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게 썬 차아바타 빵에 판체타 베이컨은 잘 어울리는 메뉴다.
여기에 레드 와인을 한 병 곁들이면 분위기를 잡는 덴 충분 하겠지.
형식적인 겉치레가 끝나고 대화가 이어졌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남녀가 와인 잔을 앞에 놓고 앉으면, 둘의 대화는 빠르게 진행되기 마련이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난 중동에 나가 있었어. 오랜만에 돌아오니 세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지. 대부분 친구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고······. 그나저나 결혼은 했어?”
“하아, 화려한 싱글로 살려고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요. 홀어머니 밑에서 억지로 대학 나와 은행에 취직은 했는데, 이제 어머님도 병들어 누우시고 동생들 학비에······.
오 마이 갓! 힘드네요. “
“여자는 히스테리가 조금 엿보였지만 밝고 쾌활했다.
“참. 명함에 보니까 대광 교회에 다니시는 것 같던데, 교회 다닌지 오래 되셨어요?”
“오래되긴, 우리 이모님 성화에 나가게 됐는데, 신앙 같은 건 없어. 그냥 쉬는 맡에 나가는 거야. 교회 감사일을 맡고 있어.”
“저희 지점 고객 중에 대광교회 사람들이 많아요.”
와인 한 병을 비웠을 때, 난 기다리고 있던 말을 꺼냈다.
“대부 계에 있으면 가끔 기업체 같은데서 청탁도 들어오고 그러지 않아?”
“가끔요. 대부분 대출관계 청탁 이예요. 사람 봐서 안 되는 일 풀어주면 대출금중 일부를 사례로 받기도 했지요. 하지만 요즘은 은행규정이 까다로워져 그것도 만만치 않아요.”
여자의 말은 이미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고 있었다.
“흠. 뭐 다 그런 거지. 나도 청탁하나 할까?”
“하, 하. 대출관계 일이라면 정중히 사절합니다.”
“대출관계 아니야.”
난 정색을 하고 준비해간 봉투를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
“오백이야. 이 계좌의 입출금 내역을 하나 복사해줘. 우리교회 자금담당 장로의 계좌인데, 교회 감사에 필요해서 그래.”
“고객 정보 유출은 불법인데요?”
하지만 여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걱정 마, 참고로만 할 거야. 외부로 누출 안 시킨다.”
여자는 앞의 봉투를 집어 핸드백 안에 넣었다.
“내일 퇴근 시간에 주차장으로 오세요.”
난 그녀를 보내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벽에 붙여놓은 아일린과 피오나의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제 앙크 지도도 완성됐다. L.O.P. 재단과 성화궁 사업의 자료와 증거들도 정리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실행만 남았다.’
난 펜을 들어 수첩에 3명의 이름을 적었다.
(1) 신경식.
(2) 차범석.
(3) 제이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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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날, 용인 현장을 둘러보고 은행으로 가, 여직원으로부터 은행계좌 내역을 넘겨받았다.
어제 날짜로 5백만 불이 이스탄불의 신경식 계좌로 입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난 그것을 마드리드로 보냈다.
2003년 11월 2일.
마드리드, 그란비아 거리, L.O.P. 재단 본부.
현장 상황 보고를 대면으로 받은 제이콥 박사는 흡족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자네는 그동안 나에게 신뢰를 보여 주었네. 이제 한발 더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내일 아침 나하고 산책이나 하지 않겠나?”
“그러지요, 박사님. 아침 7시에 고야 동상 앞에서 뵙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7시.
난 고야동상 옆의 벤치에 앉아 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만치서 노인은 갈색 푸들 한 마리를 끌고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늘은 동행이 있으십니다. 박사님.”
“하, 하. 내 여자 친구지. 이름이 르윈스키야. 처녀지. 아직 한 번도 임신을 못해봤네. 그래서 모성애를 몰라.”
“푸들은 노인 옆에 붙어 앉아 산책으로 더러워진 발을 핥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스탄불에 들려, 신경식을 처리해.”
“처리하라니요? “
“그는 조직 사람이야. 차목사와는 다르지. 사욕에 눈이 멀어 조직을 배신했어. 성화궁 사업을 관리하고, 한국에서 들어오는 장기를 넘겨받아 앙카라의 강림원으로 보내는 중요한 요직을 맡고 있었어. 조직 내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자야. 그를 제거하게. 다음 터기 관리자로 람세스가 갈 거야. 자네, 살인 해봤나?”
“아직 이요. 하지만 할 겁니다. 제 손으로 하겠습니다.”
“자네의 속내를 보여주는 일이야. 실수 없도록 하게. 데몬이 함께 갈 거야. 마지막은 그가 한다. 자네는 아직 손에 피를 묻히기엔 일러. 하지만 그가 죽는 모습을 자네 눈으로 지켜봐야해. 마지막 관문이라고 생각하게.”
노인은 파란색 봉투 한 개를 내게 건네주고, 말없이 일어서, 오던 길을 걸어갔다.
그날 저녁, 마드리드를 출발한 항공기는 알바니아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데몬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파라오께서는 군 경험이 있으십니까?”
“한국 남자들은 모두 군에 가지요. 2년간 병역의무를 집니다.”
“전 이십년간 군 생활을 했습니다. 수많은 아프리카 전투에 참여 했지요. 제대 후 제이콥 박사를 만나 지금까지 그와 함께했습니다. 지금 하는 일도 전투의 일종이지요.”
그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자기 인생을 회상하고 있었다.
저녁 9시 15분.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을 빠져나온 우리는 지시서에 따라 케네디 로드 근처의 하기나 이리니 박물관 옆의 물류 창고로 갔다.
늦은 시각, 한적한 장소의 폐쇄된 창고는 어둠속에 문을 연채 기다리고 있었다.
난 핸드폰을 열어 신경식의 번호를 눌렀다.
“아니 이거, 정집사가 어쩐 일입니까? 연락도 없이.”
“예, 안녕 하셨습니까, 신목사님. 어제 마드리드에서 이사장님께 대면 보고를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떠날 때 차목사님께서 국내 수표 다섯 장을 주셨습니다. 지난번 계좌 입금이 한도를 초과해서, 오는 길에 신목사님께 직접 드리라고 하시더군요.”
“아! 그래요? 지금 어디입니까?”
“예, 여기 케네디 로드 근처의 하기나 이리니 박물관 옆에 있는 물류창고입니다. 차목사님께서 당부하시길, 은밀한 곳에서 남의 눈에 띠지 않게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20분 안에 가겠습니다.”
그는 예기치 않았던 돈 얘기에 흥분해, 서두르고 있었다.
난 데몬을 창고 안에서 기다리게 한 후 밖에 나와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검은색 BMW가 창고 옆에 소리 없이 멈췄다. 신경식은 차의 시동을 켜놓은 채 차에서 내려, 나를 보고 달려왔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남의 눈에 띠면 안 좋습니다.”
신경식은 들떠 있었고 의심의 긴장을 풀고 있었다.
신경식은 나를 따라 창고에 들어섰고, 난 천천히 창고 문을 닫았다.
신경식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 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교회 사무실로 와도 되는데 뭐 이런데 까지. 가만있어 봐요. 차목사님께 고맙다는 전화라도 한통 해야 안 되겠습니까.”
그는 긴장하며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순간 뒤에서 커다란 손이 신경식의 핸드폰을 낚아챈다.
“뭐야? 뭐하는 거야?”
그제야 사태를 직감한 신경식은 나에게 외치며, 그의 핸드폰을 낚아챈 커다란 손의 주인을 돌아다 봤다.
데몬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데몬은 조직의 집행자였다.
난 침착하게 신경식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국어로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나?”
그의 몸은 굳어 있었고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어둠에 싸인 적막한 창고 속에 서있는 내 귀에 들리고 있었다.
“내 암호명 파라오다. 레벨 2, 넌 얼마 전 차범석으로부터 500만 불을 입금 받았어. 그리고 지금 이곳에 다시 5백만 불을 받으려고 와 있다. 그건 조직의 돈이야, 신경식.”
“나, 난, 그게 조직의 돈인 줄 몰랐어. 차목사가 주는 성의의 표시로만 알았을 뿐이야. 제발! 용서해 주게. 이사장님께 내가 직접 보고 할게. 제발!”
그의 목서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차가운 금속의 예리한 질감이 그의 목에 닫는 것을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그의 혀는 굳어 있었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 절규를 뱉어낸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용서해 주게.”
난 그에게 물었다.
“살고 싶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만 묻겠다. 내가 떠나기 전날 밤 교회에서 네가 죽인 여자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했나?”
“그, 그건······. 사체 처리반이 가지고가, 루케언덕 종탑 밑에 묻었다고 들었어. 그건 조직과 상관없는 일이야. 제발.”
“그래, 어떻게 죽였니?”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말해! 어떻게 죽였어?”
“칼, 칼로 목을......”
난 눈을 들어 데몬에게 사인을 보냈다. 사인과 함께 칼을 잡은 데몬의 오른손이 오른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스윽.”
“헉! 컥, 컥......”
신경식의 갈라진 목에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온다.
그의 몸 밖으로 나온 피는 그의 가슴을 적시며 바닥을 덮었다.
그는 눈을 뒤집고 무릎을 꺾으며 피에 젖은 바닥에 엎드려 경련했다.
잠시 후 검은색 밴이 창고 앞에 소리 없이 멈춰섰다.
그리고 4명의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이 밴에서 내려 창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난 사체 처리 반을 태운 검은색 밴이 물류창고를 빠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핸드폰을 열었다.
“파라오. 신경식을 제거 했습니다.”
노인의 쉰 목소리가 들린다.
“수고했네. 한국으로 가게.”
시내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데몬이 물었다.
“신경식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했습니까?”
“머지않아 나도 자기처럼 죽을 거라고 하더군.”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난 너처럼 비열하게 죽지는 않을 거라고 했어요.”
데몬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시내에서 데몬과 헤어진 나는 지난번 아일린과 함께 묵었던 알렌다르 거리의 르쌍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 한국행 비행기를 탈것이다.
난 프런트 데스크에 지난번과 같은 방을 요구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난 그대로 침대로 가, 머리를 감싸 쥐고 엎어졌다.
살인현장을 목격했다. 아니, 나는 살인에 관여했다. 내가 죽인 것이다.
사람의 갈라진 목에서 쏟아지는 피를 봤다.
죽어가는 남자의 경련하는 몸을 두 눈으로 봤다.
난 벌떡 일어나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가, 찬물로 샤워를 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발코니 창 앞에 섰다.
창문 유리에 반사된 남자의 벗은 몸이 낯설었다.
지난 일련의 사건들이 유리에 반사됀 낯선 남자의 몸을 덮으며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 지나간다.
그리고 스크린이 클로즈업 된다.
거기엔 피오나의 해맑은 얼굴의 잔영이 있었다.
‘끝은 어디일까? 그때 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 서 있을까?’
난 핸드폰을 들어 아일린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나야. 여기 이스탄불. 피오나의 복수를 했어. 내 손으로 신경식을 죽였다고! 흑. 흑......”
난 울고 있었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그녀의 가슴에 대고 외치고 있었다.
“알아요. 알아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냥 저에게 안기세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나는 한참을 흐느꼈다.
차츰 가슴이 차가워지며 눈물을 멈출 수 있었다.
아일린의 목소리가 차분히 흘러나온다.
“어디예요? 다친데 없나요?”
“괜찮아. 미안해. 흥분 했었나봐.
전에 너와 묵었던 호텔이야. 내일 한국으로 갈 거야. 마드리드에서 같이 온자가 신경식의 목을 그었어. 그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지. 살려 달라고 절규 하더군.
내일 이스탄불 경찰에 다시 전화해. 피오나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았어. 루케언덕 종탑 밑이야. 그녀의 시신을 찾으면 연락해줘. “
“고맙습니다. 지금은 그 말밖엔 할 수가 없어요. 쉬세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난 침대에 엎어져 베개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와 함께 누웠던 침대에서 향긋한 샤프론 냄새가 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