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웃는 얼굴로 자리로 와, 억지로 나에게서
시선을 피한 채 이모님 옆에 앉았다.
“어서 와요, 여기, 우리 조카야. 서로 인사들 나누지.”
“처음 뵙겠습니다. 임희정입니다.”
“예, 정준수라고 합니다.”
서로의 어색한 인사가 끝날 때 중국식 코스요리가 나왔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이모님의 수다가 이어졌다.
“중동에서 오래 있다가 돌아온걸, 내가 오는 맡에 교회로 데리고 나왔지.
차목사님이 보자마자 집사안수를 주시고 교회 일을 맡기신 거야.
애가 고집이 좀 세서 그렇지 제 한몫은 하는 애지.”
“예, 그러세요?”
식사를 마친 이모님은 성경책이든 가방을 들고 일어나셨다.
“나 먼저 일어난다. 이제 둘이서 얘기를 나누렴. 젊은 사람들끼리니 오죽 할 얘기가 많겠니?
계산은 내가하고 가마.”
우리는 함께 일어서서 이모님을 보내고 어색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길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난 안되겠다 싶어 말문을 열었다.
“임희정씨라고 하셨지요? 저희 이모님 성화에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
“네, 저도 반갑습니다.”
“전 얼마 후에 다시 해외 현장으로 나갑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같은 교우로서 자주 뵐 수 있겠지요.
인연이 닫는다면 또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분위기를 눈치 챈 여자가 말했다.
“예, 그러지요. 제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겠네요.”
여자는 핸드백을 들고 일어나며 눈인사를 했다.
호텔 로비에서 여자를 보내고 대광교회로 갔다.
차목사는 당회장실에서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마 밤을 새웠을 것이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서 오게, 수고 많았어.”
난 오만원권 뭉치를 그의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그분들은 업무 중에 대접을 받을 수 없다며 극구 사양했습니다.
무리하는 것도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 같아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래요? 그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걱정 마십시오. 접대와 관계없이, 보고서는 잘 쓰겠다고 했습니다.”
“음, 아무튼 수고했어요, 정집사. 곧 연락이 오겠지.”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난 차목사의 긴급 호출을 받고 대광교회로 갔다.
사무실엔 최장로도 함께 앉아 있었다.
“앉게. 마드리드에서 연락이 왔어. 오늘 현재 공정이 몇 프로인가?”
“예, 어제까지 12프로 입니다.”
차목사가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본부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졌네. 이달 말까지 15프로를 맞추라는 거야.
15프로가 초과 되는 즉시 2차 예산 2천억을 지급한다는 거야. 그래서 자네를 불렀네.”
“이달 말까지 15프로는 무리입니다.”
“자네가 어떻게 좀 해보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산을 타내야해. 이제 교회 자금도 바닥났어.
이번만 넘기면 2천억이 들어와. 이보게, 정집사......”
“공정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현장에 예산을 어떻게 투입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현장인원을 2배로 늘리고, 자재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금이 들어가야지요.”
최장로가 덧붙였다.
“그건 정집사 말이 맞아요. 자금이 문제입니다.”
차목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얼마나 있으면 되겠나?”
“15프로를 맞추려면 최소한 600억은 즉시 투입 돼야 합니다.”
“큰일이네. 교회자금도 바닥난 상태에서 갑자기 600억이라......”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차목사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해야지. 내가 해보겠네. 사채라도 끌어 봐야지. 이대로 가만있을 수 만은 없지 않겠나.”
“저는 일단 현장에 조치를 취해 놓겠습니다. 24시간 비상체제에 들어가야지요.”
교회를 나온 나는 최장로와 청화궁 시공사인 청암건설의 임계식 사장을 만났다.
임계식 사장은 난색을 표했다.
“이달 안에 15프로를 맞추라니요? 불가능합니다.”
난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해야 합니다. 성화궁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오늘부터 24시간 3교대 비상체제에 들어가시고요, 현장 인원도 두 배로 늘려 주십시오.
더불어 충분한 자재를 미리 확보하셔야합니다. 제가 현장을 직접 지휘하겠습니다.”
"하지만 정해진 예산한도 내에서 무슨 수로 비상체제에 들어갑니까? “
최장로가 말을 받았다.
“3일 안에 600억을 추가집행 할겁니다.”
순간, 600억이란 말에 임계식 사장은 태도를 바꿨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해볼 수 있지요.”
난 그에게 쐐기를 박았다.
“내일까지 15프로에 맞춰 새로 공정표 제출 하시구요, 인원 장비 확보하십시오.
그리고 최장로님께 한 가지 부탁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장님 건설회사에서 인원과 장비를 지원해 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알았네, 그렇게 하지.”
우리는 비상대책회의를 마치고 나와 점심을 함께했다.
그 시간,
차범석 목사는 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중년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아, 송여사? 나, 차회장이요.”
“아니 어쩐 일이세요? 차회장님께서 직접 전화를 다 주시고.”
“음, 지금 나 좀 따로 볼 수 있을까?”
“예, 물론이지요.”
잠시 후 차범석은 잠원동 타워 팰리스 안가에서 송여사와 마주 앉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이렇게 저를 따로 만나자고 하시고.”
“자네 혹시 급전 돌릴 데 아나?”
“급전이면······. 사채 말씀하시나요? 얼마나요?”
“600억 정도. 그것도 3일 안에.”
“600억이요?”
송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송여사가 워낙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마당발이니, 내 긴히 하는 얘기야.”
한참을 생각하던 송여사가 입을 열었다.
“담보가 있어도 3일안에 600억을 돌릴 수 있는데 는 없어요,
회장님. 하지만 한군데 있기는 한데......”
“그래, 주선해 주게.”
“김태식이라고 아세요?”
“김태식?”
“예, 키마 엔터테인먼트라고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는데, 연예계 큰 손이예요.
듣기로는 마약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악명 높은 사람이지요. “
“흠, 이 상황에 찬밥 더운밥 가릴 수 있나, 일단 만나보겠네.”
“그럼, 급하신 것 같은데, 말나온 김에 오늘 만나시지요.”
송여사는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한 시간 후, 차목사는 충무로 예성빌딩에서 김태식을 만났다.
“야, 이거, TV에서나 보던 차목사님께서 저를 다 찾아주시고, 이거 영광입니다.”
김태식은 40 중반에, 건장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
차목사는 자신이 이런 사체업자에게까지 찾아와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데 자괴감이 들었지만
물경 2조가 걸린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길게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3일안에 현찰 600억이 필요합니다.
담보는 교회 건물과, 제 집입니다. 한 달 안에 갚을 수 있습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뱀 같은 눈으로 차범석을 쳐다보던 김태식이 말을 받았다.
“하,하······. 이틀 안에 600억이라. 이거, 우리나라 최대의 대형교회 당회장 목사님께서
급해도 무지 급했나 봅니다. 교회건물 잡히고 사채를 쓰시겠다니.”
그는 야비한 눈으로 비아냥거리고 있었고, 끈적끈적한 그의 말투에서 차목사는 무너지는
자존심에 입술을 깨물어야했다.
김태식이 말을 이었다.
“해 드리지요. 두달안에 만 갚으시면 됩니다. 다만, 담보만 가지고는 안되고요, 보증인이 한명 필요합니다.”
“보증인이라니?”
“오시기전 송여사 전화를 받고 알아 봤지요.
대광교회 건물도 1,2차 채권 설정이 2천 2백억이나 잡혀 있더군요.
시가가 2천억인데, 채권이 2천 2백억이라. 재주도 좋으십니다.
우리 같은 3차 채권자가 어디 들어갈 데라도 있겠습니까?”
“그거야 사업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보증인을 요구하는 겁니다. 목사님 외동따님 시댁이 짱짱하던데······.
사돈어른께서 보증서에 도장 한 개만 찍어 주시면 내일 600억 마련해 드리지요. “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노?”
“하,하······. 이 바닥에서 굴러먹으려면 그 정도 정보야 10분 안에 들어오지요.”
똥씹은 얼굴로 앉아있던 차목사는 결심한 듯 일어서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오늘 중으로 연락드리지요.”
예성빌딩을 나온 차범석은 그의 딸 차민정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의 시댁으로 가, 사돈을 만났다.
일흔을 바라보는 차범석은 이를 악물고 머리를 숙이며 사정 얘기를 밤늦도록 해야만 했다.
그렇게 악몽 같은 시간이 흐르고, 3일 후 차목사는 김태식으로부터 100억짜리 수표 6장을 받아낼 수 있었다.
난 임시로 숙소를 용인 현장으로 옮겼고 밤을 세워가며 소장과 함께 현장을 지휘했다.
선화는 흰색 헬멧을 쓰고 청사진을 들고 따라다니며 나를 도왔다.
현장에서 돈의 힘은 막강했다.
10월 말을 이틀 앞두고 공정이 15프로를 넘어서고 있었다.
난 오랜만에 대광교회로 가 차범석 목사를 만났다.
“어서 오시게 정집사. 그래 15프로를 넘겼다며?”
“예, 어제부로 이번 달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역시 자네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당장 L.O.P. 재단에 보고하겠네. 고맙네. 수고했어.”
난 오피스텔로 돌아와 마드리드에 보고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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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 파라오.
*발신지역 : Seoul.
*발신날짜 : 2003년 10월 28일.
*보고내용 : 성화궁 공정이 15프로를 초과했음.
차범석은 공정을 맞추기 위해, 블랙마켓에서 600억을 끌어들여 건축 공사에 투입한 상태임.
앞으로의 공정을 유지하려면 추가 자금 투입이 절실함.
그리고 현재까지 대광교회에서 장기 기증서에 서명한 신도 수는 9만 명 정도로 파악되었음.
-파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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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차목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했다.
“들어왔네, 돈이 들어왔어. 오늘 2천억이 입금 되었어. 교회로 빨리 오게.”
당회장실로 들어가자 차목사는 최장로와 함께 앉아 큰 목소리로 떠들며 얘기하고 있었다.
“하, 하······. 앉게. 다들 고생했어. 이제 한시름 놓았네.”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고 얼굴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예, 잘 되었군요. 이제부터 시작이지요.”
“맞아, 앞으로가 더 문제야. 재단 본부에서는 돈을 보냈으니 앞으로 한 달 내에 20프로를 맞추라는 거야.
일단 2차 예산이 들어왔으니 자네가 계속 수고해야겠네.”
“물론입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내일까지 추가예산 계획서를 작성해 주게. 참, 자네, 마드리드에 한 번 더 다녀와야겠어.
이사장님께서 대면보고를 받기를 원하신다네. 비행기 표 예약해 놨으니 이틀 후에 마드리드로 가게.”
“예, 알겠습니다.”
난 교회를 나와 외환은행 신림동 지점으로 갔다.
마감시간을 압두고 은행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부 계에 앉아있는 여직원 앞으로 갔다.
“대출 조건 좀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여직원은 옆에 있는 원탁에 자리를 권하며,
“어떤 대출을 받으시려고 하시나요?”
“아파트를 담보로 2천정도 받을까 해서요.”
“전에 담보대출 받으신 적 있나요?”
“아니요. 처음입니다.”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직원은 자기 자리로가, 몇 가지 서류를 챙겨서 자기 명함과 함께 내게 주었다.
“여기, 대출조건하고 관련 서류예요. 읽어보시고 대출서류 준비되시는 대로
신청하시면 처리해 드릴게요.”
난 그녀가 준 서류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은행에 오래 근무하셨나요?”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여자는 상냥하게 말했다.
“예, 한 십년 되었어요. 왜요?”
“아 예, 그냥 낯이 익은 거 같아서요. 혹시 어느 대학 나오셨나요?”
“홍대 나왔는데요, 경영학과요.”
“아, 그랬군요. 저도 홍대 경영학과예요. 전 90학번인데 몇 학번이세요?”
“아, 그러세요? 반갑네요. 전 92학번입니다.”
“야, 세상 참 좁네요. 여기서 학교 동창을 다 만나고. 오늘 몇 시에 퇴근하세요?”
“6시 퇴근 인데요.”
“괜찮으시면 제가 저녁 사겠습니다. 그냥 부담 없이요.”
여자는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는 뭔가 모르게 남자에게 끌리고 있었다.
“그래요. 뭐, 저녁 한 끼야 어떻겠어요. 선배님이신데.”
“은행 주차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난 그날 저녁 은행 여직원과 신림동의 한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난 마드리드로 떠나기 전, 최장로의 입출금 내역을 알아내야 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