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가녀린 몸이 쓰러져 있는 바닥은 이미 몸이 뱉어낸 혈액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사무실을 나와 정문에 앉아 있는 가드에게 로 갔다.
가드는 그를 보자 벌떡 일어섰다.
“늦은 밤까지 수고가 많네. 내 심부름을 하나 해줘야겠어.
올두에 있는 우리 집에 가서 와이프에게 내 성경책을 받아와.”
그는 지갑에서 50리라 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가드에게 주었다.
돈을 받은 가드는 바로 옆에 세워 놓았던 자전거를 타고 올두로 갔다.
잠시 후 검은색 밴이 소리 없이 교회 정문 앞에 멈춰서고, 오렌지색 작업복을 입은 4명의 남자가 내렸다.
그들은 지체 없이 기다리고 있던 신경식과 함께 교회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고, 10분도 걸리지 않아 살인 현장이 깨끗이 치워졌다.
그들 중 리더인 듯 보이는 한 남자가 신경식에게 물었다.
“누구입니까?”
“이곳 여직원이야. 피오나. 이년이 재단의 서류를 빼내려다 나한테 들켰지.
발악을 하길래 보내 버렸어. 다행히 서류는 유출되지 않았다.
바티칸 내부 조직 인거 같은데 아직은 모르겠어.
내가 조직에 보고를 할 테니 서둘러 시체를 처리해라.”
오렌지색 작업복의 남자들이 시체가 든 검은색 지퍼 백을 들고 도구를 챙겨 사무실을 나갔다.
시체를 실은 검은색 밴이 소리 없이 교회를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고 있던 신경식은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사무실은 언제 피의 광란이 있었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신경식은 교회로 출근했다.
사무실로 들어온 신경식은 전화기를 들었다.
“이스탄불의 신경식입니다. 제이콥 박사님 부탁합니다.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잠시 후 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가” 갑자기. “
“예, 제이콥 박사님. 어제 교회에서 불미스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데리고 있던 여직원이 재단의 서류를 빼내려는 걸 제가 발견했습니다. 서류는 안전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제가 직접 처리했습니다. 바티칸 소행 인거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바티칸에서 온자가 재단의 사업을 조사하고 다닌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알겠네. 보안에 철저히 신경 쓰게.”
신경식은 전화를 끊고 사무실 직원을 불러 태연히 물었다.
“피오나는 왜 아직 출근을 안 하나? 알아봐!”
아일린과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피오나가 보낸 메일이 이미 도착해 있었으나 아침이 되도록 그녀의 연락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이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만일 일이 잘못되었다면 그녀의 전화기는 그들 손에 있을 것이다.
“우려하던 일이 터진 거예요.”
아일린의 눈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아침에 교회에 가 봐야겠어.”
아침 열시가 다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밤새 눈물을 흘리면서 피오나의 전화를 기다리던 아일린에게 말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려. 다녀올게.”
그녀는 얼굴을 감싼 채 침대에 걸터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난 감색 정장을 갈아입고 교회로 향했다.
교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해 보였다.
난 사무실로 들어서며 혹시나 하는 바람으로 피오나를 찾았으나, 그녀의 책상은 비어 있었다.
업무를 보고 있던 신경식은,
“어, 일찍 왔네요. 앉으세요.”
“예, 혹시 공항까지 차가 막힐지도 몰라 예정보다 일찍 왔습니다.”
“아, 두시 비행기라고 했지요? 확인서를 만들고 있으니 잠시 앉아 기다리세요.”
난 그의 책상 앞 소파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신경식의 눈을 피해,
오른손을 뒤로 돌려 소파 틈새에 있을 녹음기를 찾았다.
역시 피오나는 내가 말한 장소에 녹음기를 감춰 놓았다.
난 녹음기를 살며시 집어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한참 자판을 두드리던 신경식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 됐습니다. 마드리드에 가시면 이걸 비서에게 보여주세요. 그러면 비서가 이사장님을 만나게 해줄 겁니다.”
난 그가 내미는 흰 봉투를 받아 슈트 안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일어서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신경식이 말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레오파드가 나와 있을 겁니다.”
난 신경식과 악수를 나누고 교회를 빠져나와 뛰다시피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아일린은 머리를 감싼 채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피오나 보셨어요?”
“피오나는 교회 사무실에 없었어. 하지만 녹음기를 찾았어.”
난 서둘러 소형 녹음기를 꺼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난 즉시 녹음기의 음성 파일을 노트북에 다운받고, 플레이어를 열어 시작 버튼을 눌렀다.
지난밤의 긴박했던 상황들이 스피커를 통해 소리의 모습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극도로 긴장한 채,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들이 소리를 듣고 있는 두 귀로 집중됐다.
피오나의 구두 소리,
그녀의 움직임,
종이를 펼치는 소리,
그리고 얼마간 적막이 흐른다.
그리고 낮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해낸 거야!’
그녀의 속삭이는 듯한 독백 속에 비장함이 서려 있다.
이어지는 부산한 움직임, 캐비닛을 여는 소리······.
그리고 적막을 깨는 남자의 외침이 스피커를 찢는다.
“너, 뭐하는 거야? 여기서!”
신경식의 목소리다.
남자의 다그침이 이어진다.
호흡을 멈춘 채 스피커의 소리를 듣고 있는 아일린의 얼굴은 이미 흙빛이 되어 있었다.
피오나의 마지막 절규,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숨이 멈추는 소리······.
이어지는 신경식의 전화 통화······.
모니터를 들여다 보고 있는 아일린은 눈물을 비 오듯 쏟아 내고 있었다.
난 그녀의 어깨를 돌려 안았다.
“아아······. 피오나가 죽었어요! 어떻게 해요? 아아......”
내 옷은 이미 그녀의 눈물로 젖어 있었고,
몸을 돌린 그녀는 침대에 무너지며 처절한 슬픔에 몸부림쳤다.
난 그녀에게 아무 말도 던질 수 없었다.
쿠르드족의 여전사는 임무를 마치고, 증거를 남긴 채, 그렇게 죽었다.
스피커는 계속 소리를 쏟아 내고 있었다.
난 끝까지 피오나의 마지막을 소리로 들었다.
그리고 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제 분노를 넘은 증오가 밑바닥부터 내 몸을 휘감았다.
내 눈은 충혈 되어 있었고 주먹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신명식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피오나의 해맑은 미소와 함께 오버랩 된다.
“기다려라! 조금만 기다려라. 처절한 대가를 가져다줄게. “
시계가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난 침대에 걸터앉아 흐릿해진 눈으로 벽만 쳐다보고 있는 아일린을 일으켜 세웠다.
“난 지금 마드리드로 간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내가 할 거야. 공항에 나오지 말고, 바로 안탈리아로 가.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일을 멀리서 지켜봐.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아일린은 몸을 돌려 날 힘주어 안으며 오래 흐느꼈다.
“몸조심 하세요.”
우리는 오랫동안 입술을 포갠 채 서로의 가슴으로 작별을 나눴다.
이스탄불에서 터키 항공편으로 3시간 30분을 날아 마드리드의 바라하스 공항에 도착했다.
난 감색 슈트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보세구역을 빠져 나오자 L.O.P. 재단에서 보낸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50대 중반의 머리가 희끗한 남자는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레오파드’라고 쓰인 피켓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오신, 미스터 정입니까?”
“예, 레오파드씨 맞으시죠?”
“따라오시지요. 제이콥 박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항 청사를 나오자 검은색 BMW가 대기하고 있었다.
시내까지 들어오는 동안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L.O.P. 재단 본부는 솔 광장 근처의 그란비아 거리에 6층 규모의 사옥을 갖고 있었다.
거대한 조직의 본부 건물이라기엔 믿기지 않는 초라한 모습의 빌딩이었다.
보티치노 대리석이 깔린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의 표시 창이 6자를 표시할 때까지도 남자는 내 뒤에 부동자세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멈추고, 남자는 앞장서서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마호가니 문 앞에 멈췄다.
육중한 문 앞엔 양쪽에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레오파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비서에게 말했다.
“한국 성화 재단에서 오신 미스터 정입니다.”
금테 안경을 쓰고 있는 중년 여인이 물었다.
“확인서 가져오셨나요?”
난 신경식이 준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봉투를 열어 확인서를 살펴본 비서는 인터폰을 들었다.
“도착 했습니다. 확인 했습니다.”
절차가 끝나고, 비서는 날 이사장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난 악마의 수장과 마주 앉았다.
이 거대한 조직의 수장인 제이콥 박사는 예상밖의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그저 하얀 백발에 체크 남방을 입고 있는 초라한 촌로 같았다.
작고 마른 체구에 깊게 패인 얼굴의 주름살.
만일 그가 이 웅장한 사무실의 화려한 책상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가 L.O.P. 재단의 이사장이란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말없이 의자를 돌려 앉으며 한손을 들어 책상 앞의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이름이 정준수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직접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난 정중히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성화궁 건축 공정이 얼마나 됐나?”
노인의 목소리는 낮고 작았지만 상대에게 위압감을 준다.
“현재 12 프로입니다. 지난주에 기초공사가 끝났습니다.”
“건축 헌금은 얼마나 걷혔나?”
“현재 60 프로가 넘었습니다. 올해 안에 목표액을 채울 거라고 판단됩니다.”
“대충은 터키의 신경식을 통해 보고를 받고 있네. 다만 직접 본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
노인은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제이콥 박사가 입을 다시 열었다.
“자네는 차범석 목사를 어떻게 생각하나?”
난 의외의 질문에 당황했다.
하지만 노인의 질문엔, 뭔가 한국, 성화 재단 담당자들에 대한 불신을 내포하고 있었다.
난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차범석 목사님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길지 않은 시간에 전 그를 가까이서 보았지요. 차 목사님은 나이가 많으십니다.
성화궁 프로젝트가 당신의 생애 마지막 사업으로 생각하고 계시지요. 그는 사리에 밝은 분입니다.
그리고 저를 신뢰하고 계시지요.
저는 그분의 개인적인 모습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이일에 끼어든 것도, L.O.P. 재단이라는 세계적인 조직 안에서 거대한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싶은
욕심에서였습니다. 저는 맡은바 임무에만 충실할 뿐입니다. “
난 거침없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고 아부하지도 않고 있었다.
노인은 쓰고 있던 안경 너머로 눈을 치켜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는 길에 신경식을 만났지?”
“예, 만났습니다.”
“자네는 한국인이야. 신경식도 그렇지.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네는 신경식이 어떤 사람이라고 보았나?”
“짧은 만남이었습니다. 신경식 목사는 한국의 차범석 목사님과 같은 신학교를 나왔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선후배 사이의 우정은 남다르지요.”
난 제이콥 박사가 던지는 짧은 질문들 속에서 그의 의도를 읽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네. 자네는 이곳에 성화궁 사업 자금을 요구하고 받아 내는 임무를 띠고 왔겠지?”
“그렇습니다.”
“만일, 내가 약속했던 사업 자금 지원을 취소한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난 이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전 칼을 뽑아 이사장님을 죽일 겁니다. 전 한국에서 임무를 받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곳에 왔습니다.
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제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이대로 빈손으로는 못 돌아갑니다.”
“하, 하, 하, 하......”
노인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기개가 대단한 젊은이로군! 차 목사는 훌륭한 직원을 두었어!
돌아가게. 성화궁 프로젝트는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네. “
난 일어서며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말이 지나쳤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가당찮은 제 말의 속내를 이해해 주시는 박사님의 식견에 존경을 표합니다.
다시 뵈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
일어나 사무실을 걸어 나오는 내 모습을, 노인은 회색 눈동자를 들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난, 동시에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