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오후 8시에 연락을 받고 모인 성화궁 건축팀의 첫 번째 회의가 있었다.
처음 같이한 사람들끼리의 상견례가 있었고, 난 그들에게 각자 당당해야 할 직분을 정해 주었다.
이렇게 성화궁 건축관리팀이 만들어졌고, 난 팀의 관리자가 되었다.
팀장: 정준수.
행정업무: 송선화.
공정관리: 김요한.
예산정책: 이인철.
기술관리: 심철호.
이중 두 명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업무시간을 매일 오후 7시에서 11시까지로 정했다.
난 선화에게 비서실로 가 설계도면과 내역서, 시방서등 관련 서류를 받아 오라고 지시했고
당회장인 차 목사와 대면 보고를 가졌다.
보고를 마치고 나올 때, 차범석 목사는 나에게 봉투 한 개를 건넸다.
“일 끝나면 팀원들하고 회식이나 하게. 생각보다 팀이 잘 꾸려진 거 같아.
주일에 성화궁 건축 사업에 관련한 장로 회의가 있으니 자네도 팀장 이름으로 참석해야 할 거야.
관련 자료들을 잘 정리해서 장로님들께 보고해야 하네.”
차 목사와의 대면보고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 왔을 땐 팀원들이
선화가 받아온 설계도를 앞에 놓고 검토하고 있었다.
설계도의 표지엔 ‘성화궁-하나님의 성전 건축공사 마스터 플랜’이라고 쓰여 있었다.
표지를 넘기자 지적도가 있었고, 다음 장을 넘기자 Site Plan(단지 계획도)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난 호흡을 멈춰야 했다.
140여만 평의 부지는 정 중앙 입구를 따라 6차선 도로가 이어지고,
단지의 중심에 도달했을 때 도로는 십자로 갈라진다.
십자 차로를 지나면서 도로는 타원을 그리며 중앙에 광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앙크였다.
그리고 앙크의 머리 부분에 거대한 교회가 자리 잡고 도로를 따라 수없이 늘어선
부속 건물들을 품에 안고 있는 형상이었다.
악마의 궁전은 여기서 정점을 찍고 있었다.
수많은 신도를 이곳에 가두고 그들의 머리에 군림하여 뱀 같은 혀고 그들을 부린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으면 그들의 장기를 꺼내 또 다른 궁전을 지어 세력을 확장하고 영위해 갈 것이다.
이 거대한 악마의 음모 안에, 난, 홀로 서 있다.
그렇게 성화궁 일이 시작되었다.
난, 다음날도 차 목사와 대면 보고를 했다.
그만큼 이 일은 차 목사에게 중요한 사업이었다.
“오늘 오전에 용인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설계도와 공정도 검토가 끝났습니다.”
“그래? 벌써 현장엘 다녀오고 검토가 끝났다니, 자네 적극성과 순발력이 대단하군.
그래, 검토해보니 자네 의견은 어떻던가?”
“예, 다른 건 큰 문제가 없는데, 공정이 너무 빡빡하게 잡혀 있더군요.”
“잘 봤어. 공정이 문제야. 올 초에 시작한 공사가 4개월이 넘도록 이렇다 할 진척이 없으니
큰일 아닌가?”
“그렇습니다. 공정은 자금투입과 맞물려있습니다.
자금을 얼마만큼 적시에 투입하느냐가 관건이지요. 공정 관리는 자금계획과 연관 되어야 합니다.”
“흠, 자네 말이 맞아. 건축팀 담당인 최일권 장로와 상의해서 자금계획을 자네와 상의하라고 하겠네.”
난 보고를 마치고 일어서며, 목사의 책상에 놓여있는 앙크 십자가를 보았다.
일요일.
주일 예배가 끝나고 성화궁 건축과 관련한 장로 회의가 있었다.
난 집사의 신분이었지만 건축팀장의 자격으로 장로회의에 참석하여 업무 브리핑을 할 수 있었다.
내 브리핑이 끝나고도 2시간 가까이 회의는 지속됐다.
지루한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난 간간이 장로들로부터 L.O.P.재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L.O.P.재단의 자금지원이 처음에 얘기 됐던 것보다 많이 늦습니다.”
차 목사가 대답했다.
“”제가 재단 본부에 독촉해 보지요.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의 건축헌금 목표가 달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강하게 얘기할 수 있지요.“
그때 한 장로가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가능한 권, 집사들과 지역장들을 총동원해서 쥐어 짜야 합니다.”
회의는 두 시간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우리 건축팀의 담당 장로인 최일권 장로는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 사장이었다.
그는 회의가 끝난 후 우리 사무실로 와 팀원들을 격려했다.
그와는 두바이 현장에 있을 때 잠시 안면이 있었던 터였다.
"자네 같은 인재가 우리 교회의 건축팀을 맡게 돼서 마음이 놓이네.
성화궁 프로젝트는 내가 사실상 담당이지만 워낙 회사일로 바쁘다 보니
전념할 수가 없어. 자네 책임이 커.“
난 서서히 그들의 신뢰를 쌓아가고 있었다.
전화기가 울렸다. 사니였다.
“나야, 잘 지내니? 난 죽다 살아났어.
결론부터 말하면, 네가 말한 은행 서류, 방금 DHL로 부쳤다.
그거 구하느라고 애 먹었어. “
“그래? 어떻게 구했니?”
“말도 마라. 미인계를 썼지.”
“미인계를 써?”
“그래, 미인계는 이럴 때 쓰는 거야.
너, 기억 나냐? 네가 처음 세부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갔던 클럽 말이야.
거기 내 파트너였던 애, 걔를 찾아가 꼬셨지. 사정을 둘러 대느라 애먹었어.
걔가 은행 담당자들과 이틀 밤을 잤어. 돈도 수월찮게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거야. 원래 은행 애들은 여자에 약해.
돈과 여자는 원래 따라다니는 거 아니냐? “
난 어이가 없었다. 사니는 내가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일을 해결해 냈다.
“아무튼 수고했다.”
“자식, 말로만 때우지 말고, 만나면 거하게 한잔 사야 해. 알겠냐?”
“그래, 물론이지. 여부가 있겠니.”
“참, 김 이사한테서 연락 받았다. 난 다음주, 사우디 제다로 가게 됐어. 다 네덕이야.”
“그래 그거 잘 됐구나! 떠나는 날 연락 한번 해라.”
팀원들은 일을 깔끔하게 해주었고, 특히 선화는 열심이었다.
어느새 시공사와 현장에 라인을 구축해 놨고. 시행 사인 교회 측과 관련된 행정 서류들을
모아 꼼꼼히 정리해 놓았다.
그날 아일린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제 일을 마치고, 제 고향 안탈리아로 돌아왔습니다.
어제까지 앙카라에 있었어요.
강림원에서 어렵게 구한 정보들을 파일로 첨부했습니다
장기 기증자와 수혜자 명단 이예요. 기증 날짜와 기증자 이름, 연락처······.
그리고 수혜자들의 상세 기록 들이예요. 대부분 기증자들은 이라크와 시리아 난민들이었고
수혜자는 아랍 부호들입니다.
왜, 신은 그리움이란 감정을 사람에게 주었을까요?
그건 실제가 아니고 허공에만 있는 건데······.
그것이 견디기 힘들만큼 사무칠 때, 난 이스탄불의 피오나를 생각해요.
만난 지 얼마 안됐지만, 난 그녀가 친동생처럼 느껴져요.
이제 그녀도 없고, 전 엄마와 함께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아일린-
난 교회 일에 집중했다.
이제 성화궁 공사의 공정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나갔다.
현재 공정률 12프로.
예산만 적시에 투입되면 공기 안에 완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건축팀 회의가 끝났을 때 최일권 장로가 사무실로 왔다.
이제 그와는 많이 친해져,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날 신뢰하고 있었다.
“나하고 잠시 얘기 좀 나눌까?”
나는 그와 함께, 주차장에 세워 놓은 그의 차안에 나란히 앉았다.
“중요한 얘기라, 여기서 하는 게 좋겠어. “
그는 어렵게 말문을 열고 있었다.
“예, 말씀 하시지요.”
“자네, 이 일에 본격적으로 관여해 보고 싶지 않나?”
“이 일이라니요? 성화궁 프로젝트라면 이미 관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네를 믿기에 하는 말인데······.
자네는 아직 몰라. 이 사업은 규모가 2조원이 넘어. 그것도 완공까지 만이야.
공사가 완공되면 그때 가서 성와궁 사업이 정식으로 시작되는 거야.
그땐 사업 규모가 천문학적이 돼.
앞으로 성화궁이 몇 개가 더 생길지 아무도 몰라. 이건 시작에 불과 한거야. “
그는 말을 이었고, 난 듣고만 있었다.
“사업자금의 대부분이, 스페인 마드리드의 L.O.P. 재단에서 들어온다.
교회 신도들의 헌금만으론 어림도 없지.
누군가 다음 주에 마드리드, L.O.P. 재단으로 가서 그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
자금을 받아 내야 한다. 난 자네가 적임 이라고 생각해. “
난 최일권 장로에게 물었다.
“왜 그게 저라고 생각하십니까? “
“일단 영어가 능숙하고 건축적 지식이 풍부하니까 그들과의 대화를 풀어 나가는데
막힘이 없을 거야.
그리고 더 중요 한건 신뢰야. 당회장 목사님도 자네를 신뢰하고 계시고······.
자네만 오케이 하면 다음 주 마드리드로 가야 하네.”
“L.O.P.재단은 어떤 곳입니까?”
“그건 아직까지 말해 줄 수 없지만, 마드리드로 가기 전 터키 이스탄불에 들려,
그곳 강림 교회 신경식 목사를 만나면 자세한 얘기를 해줄 거야.
우리에게 들어오는 L.O.P. 재단의 자금은 그를 통해 들어온다. 돈세탁을 위한 방편이지.
어때? 해보겠나?”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단호히 말했다.
“장로님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이 일은 자네와 나, 그리고 당회장이신 차범석 목사님만 알고 있는 기밀 사항이야.
표면상의 L.O.P. 재단에 관해서는 대부분 장로들도 알고 있지만 그들과의 내부 거래는
아무도 몰라. 나머지 다섯 개 교회들도 우리가 관리하고 있지.
알아들었으리라 믿네.”
이틀 후, 난 이스탄불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비행시간 11시간 반. 19시 30분, 아타튀르크 공항 도착.
‘비밀을 꼭 이렇게까지 하면서 풀어야 하는 걸까?’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미, 내친김에 하는 수 없는 일이란 식의 강도를 훨씬 넘어 서 있었다.
난 어느새, 거대한 조직을 상대로 목숨을 건 게임을 하고 있었고,
상대는 수천, 수만의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난, 혼자다.
그리고 내 눈앞에 사니와 선화, 아일린과 피오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은 나에게 대가도 묻지 않은 채 내가 만들어 놓은 가련한 게임 속으로 들어와 내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비행시간을 채웠을 때 시계는 오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30분 후면 이스탄불에 도착한다.
미리 전화를 해 두었으니 아일린이 공항에 나와 있을 것이다.
아일린은 내 전화를 받고 안탈리아에서 1,000킬로가 떨어진 이스탄불까지 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육중한 항공기의 동체가 활주로 바닥을 두어 번 튕기며 하늘로부터 땅에 안착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보세구역을 빠져 나왔을 때,
난 청바지에 파란 재킷을 걸친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그저 미소만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반쯤 가린 그녀의 깁고 푸른 눈동자는,
닫쳐져 있던 문이 열리고 걸어 나오는 한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달려가 안지도 않았고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 남자가 자기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모습을 음미하고 있었다.
남자가 그 여인의 앞에 섰다. 두 남녀는 한동안 서로를 마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남자의 가슴에 묻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고 남자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힘껏 당겼다.
아일린은 몸을 떼며 그녀 옆에 서 있던 한 여자를 나에게 소개시켰다.
“피오나예요. 당신을 만나보고 싶어 했지요.”
그녀는 손을 내밀며,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아, 피오나, 저도 말로만 들었는데 이제 보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우리는 시내로 들어와 저녁 식사를 했다.
아일린이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어쩐 일이세요? 갑자기 터키로 돌아오시고.”
“네가 보고 싶어 왔지.”
그녀 옆에 앉아 있던 피오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일린 앞에 엄지를 세워 보였다.
피오나는 아일린과 같은 쿠르드족 혈통 이었고,
가늘고 작은 몸을 갖고 있었지만 어딘지 당차 보였다.
난 아일린에게 이곳, 이스탄불로 오게 된 동기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옆에 앉은 피오나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일 강림 교회 신경식 목사를 만나면 L.O.P. 재단의 내막을 알게 될 거야.”
그들은 지금 한국에서 그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난 그들 속에 들어가 그들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다음날 스페인 마드리드로 건너가, L.O.P. 재단의 수장과 만나기로 되어 있어.
나는, 이 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사탄의 우두머리와 마주 앉게 되는 거지. “
난 피오나에게 말했다.
“피오나, 내일 내가 강림 교회 사무실을 방문하면, 절대 나를 아는 척해서는 안 돼.”
“그 정도는 저도 잘 알아요. 아일린 언니와 만나는 것도 그들은 모르고 있어요.
제 가족들 에게도 아일린 언니와의 관계는 비밀로 했어요.
그래서 오늘 이 식당도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잡은 거예요.”
아일린이 거들었다.
“걱정 마세요. 피오나는 사려 깊은 여자예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피오나와 헤어진 우리는 강림 교회가 있는 알렘다르 거리에 호텔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몸을 옆으로 세운 채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고만 있었다.
난 그녀의 깊고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눈동자를 보고 있는 나의 눈동자를 보고 있었다.
아일린은 말했다.
“전 요즈음, 가끔씩 당신 꿈을 꿔요.
꿈속의 당신은 언제나 안탈리아의 야부스 언덕에 홀로 서서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지요.
난 그에게 다가서기가 겸연쩍어 언덕 주변의 들꽃을 따서 그에게 내밀어요.
하얗고 예쁜 꽃이 예요. 이름은 모르겠어요.
그가 고개를 돌려 내가 준 꽃을 받고 달콤한 미소를 지어요.
그는 한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다시 지중해를 바라보지요.
그리고 저도 그와 합께 지중해를 바라봐요.
시간을 잡아 놓을 수만 있다면, 참 아름다운 꿈이지요? “
난 그녀의 속삭임 속에서, 들려오는 슈벨트의 밤과 꿈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았다.
난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내 머릿결을 파고들었고,
난 그녀의 거칠어지는 호흡 속에서 샤프론의 향기를 맡았다.
이스탄불의 밤은 그렇게 찾아오고 그렇게 흘러갔다.
(계속)